[사설] 작금의 국정농단사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지금 온 국민은 당혹감을 넘어 참담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의 현 정부의 행태를 보고 위태위태하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 한데 말이다. 증권가의 지라시에나 나올법한 뜬소문들이 하나하나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시점에서 앞으로 어떤 더 참담한 사실이 드러날지 두려울 따름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폐쇄적인 인간관계와 회피적인 태도가 한 나라를 어떤 큰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지를 보고 있다. 개인에게 미치는 종교의 역할도 회자되고 있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아픔에 무당종교가 개입하여 그를 위로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 기독교가 샤머니즘을 경계하고 있지만 갈대와 같이 연약한 인생은 위기를 만나고, 절망스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힐 때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기에 그런 주술적인 행태는 영영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마저 그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공인이 되었을 때 개인적인 신앙심을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 옳을까? 소위 말하는 정교분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공인은 자신의 신앙심을 공적인 영역에 투영하여 정책을 세우거나 추진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공인은 모든 종교가 활동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신앙인의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정종교를 지원하거나 옹호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공인은 자신이 가진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해 나가는 것에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개인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인 대통령이 주일에 예배하러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할 필요도 없다. 더 나아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공인은 자신의 신앙이 하나의 액세서리가 아니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총체적인 세계관에 의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작금의 사태는 이미 충분히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자기 개인 신앙에 충실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도를 넘어 국가라는 영역을 사이비 종교에 넘겨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세시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화된 사회는 왕정과도 다르고, 신정과는 더더욱 다르다. 우리는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한다. 종교가 정치를 이용해서 나라를 종교적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중세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도 조심해야 한다.
이런 비상시국에 우리는 겸손히 청원한다. 벌써부터 탄핵이니 하야니 하는 말들이 국민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정부와 정치권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만큼 전 국민들은 배신감을 넘어 거의 패닉에 빠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야를 떠나 이것을 정쟁거리로 삼지 말고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복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같이 논의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반응도 예의주시해야 한다. 대통령을 포함하여 국정을 운용하면서 사사로이 행한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밝혀내어야 하겠고, 그것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을 위해 검찰의 의지도 중요할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모든 것들을 근원에서부터 추적하고 뿌리를 뽑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누구를 옹호하고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다시 확인하면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논점을 흐리거나 물 타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공교회를 세운다고 하면서 얼마나 사적인 방식으로 수많은 문제를 접근하고 행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욕망을 제어하고 잠재운 것이 아니라 부추기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런 비상시국에 교회를 향해서도 겸손히 청원한다. 대통령과 지도자들의 죄악과 이런 사태가 있기까지 교회가 이 모든 것을 방조하고 묵인한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의 날’을 가질 것을 청원한다. 종교개혁 시기에 제네바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에서는 흑사병을 포함한 각종 재난과 전쟁의 상황에서 수요일을 기도하는 날로 삼았다. 개혁자 존 칼빈은 교회에 모인 교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면서 하루 종일 기도에 전념하기를 권고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 이런 기도의 날이 ‘공적 금식에 대하여’로 자리 잡았다. “백성에게 무슨 크고 주목할 만한 심판이 내렸거나 또는 내릴 것이 분명하거나, 혹은 어떤 비상한 범죄로 마땅히 심판 받을 것이 주지의 사실이 되면,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별한 축복을 구하여 얻기를 원할 때는, 공적 금식을 엄숙히 하는 것(하루 종일)이 하나님께서 그 민족이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개 교회적으로, 더 나아가 노회별로, 총회적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기도의 날을 정하고 금식을 선포하면서 회개하고 우리나라가 바로 세워지기를 구해야 하겠다. 이것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제대로 기념하고 맞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께 복을 구할 때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회개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얼굴빛을 거두어 가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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