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어떻게 모일 것인가?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고신총회가 올해 종교개혁기념주일에 광화문 일대에서 열리는 ‘10. 27 악법저지를 위한 200만 연합예배 찬양 & 큰 기도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삼상 11:24)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집회는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등 반인륜적 반성경적 악법 제정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내세웠다.
총회에서 긴급 헌의된 이 사인을 논의하면서 주일오후에 열리는 집회에 전국 교회가 참여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우리 고신이 그렇게 강조하던 주일성수와 공예배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가정과 국가와 교회가 무너질 상황 앞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감을 느낀 총대들은 적극적인 참여를 원하였다. 이후에 한국의 여러 교단들도 앞다투어 이 집회참여를 결정하였다.
온라인상에서 이번 집회 개최와 참여 문제를 놓고 찬반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참여를 독려하는 쪽은 포스터에 적시했듯이 불참하는 것은 바알에게 이미 무릎꿇은 것이라는 압력성의 발언마저 하고, 참여를 반대하는 쪽은 한껏 조롱의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서로 영이 다르다고 하는 비난이 난무하고 있다. 어떤 분의 표현대로 이번 집회에 참여한다고 죄짓는 것이 아니고, 참여하지 않는 것이 죄짓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원칙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모든 교회회의가 사도시대 이후부터 오류를 범할 수 있었고, 실제로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 ‘교회회의를 믿음과 생활을 법칙으로 삼지 말고, 믿음과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여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 3항)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에 우리는 이 집회의 참여여부에 대해 개체교회와 성도 개개인의 신앙양심을 억눌러서는 안된다.
한국교회가 대대적으로 광장에서 모이기에 이제부터가 문제다. 복음의 기관인 교회가 시민법적인 문제에 개입하기로 공개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방식이 아닌 예배와 기도회라는 방식으로 참전하기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시민적인 사안에 대해 집회하겠다는 목적을 선명하게 내걸었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 시위와 예배가 뒤섞여 버렸다.
이 시점에서 교회회의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우리가 어떻게 모여야 하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비상시국에 겸허한 청원이나 국가 공직자의 요청을 받아 양심상 행하는 조언 외에는 국가와 연관된 시민적 사안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 4항). 총회의 결정으로 참여하지만 이번 집회는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적 사안만을 다루기 위해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겠다.
세상이 이 집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교회가 차별금지법이라는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을 내건 순간부터 이번 집회는 정치집회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가정과 나라를 걱정하면서 예배와 기도회를 위해 모였다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이번 집회를 통해 구체적인 법안과 사안에 대한 찬반을 내놓는 공론장에 뛰어든 것이다.
이런 대형집회는 아무리 통제하더라도 총회석상에서 거론했듯이 전광훈씨 등 온갖 세력이 끼어들어 난장판을 만들기 쉽다. 교회가 광장으로 나가기에 내용도 내용이지만 방식과 표현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사법은 정의로워야 할 뿐만 아니라 정의롭게 보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이번 집회에 적용해 보자면 ‘교회는 사랑스러워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랑스럽게 보여야 한다’.
우리는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열리는 이번 200만 집회를 통해 대한민국을 살리고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의 바램과 달리 집회로 모여 우리가 복음과 십자가의 길과 반대로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다. 작아지려는 것이 아닌 승리주의적인 태도, 소통하려는 것이 아닌 거친 언사,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행위로 인해 세상이 복음을 들으려는 마음조차 앗아가게 만들지 않을지 두렵다.
우리는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라는 말씀을 표어로 내세웠지만, 이 말씀에서의 ‘나라’는 세상 나라인 대한민국이 아니라 교회다. 세상 죄가 아니라 교회의 죄를 먼저 회개해야 한다. 이번 집회는 철저하게 ‘슬픔과 통곡’이어야 한다. 정죄가 아니라 긍휼을 구해야 한다. 심판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벧전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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