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도 그의 나라가 임하게 하신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집권은 우리를 낙심하게 만든다. 성경의 역대기는 우리를 무기력과 냉소의 언어로부터 구해주고 희망의 언어를 가르쳐준다.
에릭 페일스
(아펠도른 신학교 구약학)
김철규 번역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광석화 같은 권력 이양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긴급하고 절박한 구조작전이 계속되는 동안, 국제 언론에서는 절망과 낙담의 언어가 울려 퍼졌다. 20년간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이 투자된 구조/교육 임무가 수포가 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 특히 여성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은 좌절되었다. 막대한 정력과 노력, 엄청난 인명의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며칠 사이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국방부 장관 안크 바이레펠트와 국군사령관 에이헐스헤임이 국방에 종사하는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불신, 실망, 분노, 슬픔의 감정이 언급된다. 특히 퇴역 군인들, 그중에서도 전사자 가족들의 고통은 크다.
실망
사람들의 반응에 ‘실망’이라는 단어가 지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그동안 해온 모든 노력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우리가 범한 실수는 무엇인가? 폭탄이 때로는 엉뚱한 곳에 떨어지기도 했다. 정당한 전쟁이 있을 수는 있으나, 무고한 군대는 없다. 또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게 형성된 사회에 서구식 민주주의 모델을 정착시키려는 것이 너무 낙관주의적이고 거만한 생각 아니었는가? 서구는 더 조악한 환상이자 더 깊은 죄책감이다. 여기에 냉소주의와 무관심이 뒤따른다: 더는 안된다. 그들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게 하자. 실망의 주문 아래에서 심지어 어떠한 형태의 인도주의적 개입에서도 결정적으로 돌아서자는 목소리도 있다.
역대기는 기쁨에 주목한다.
성경은 실망의 정신으로부터 돌아서는 온전한 책을 가지고 있다: 바로 역대기이다. 이 책은 주전 400년경 쓰였다. 그때는 실망과 냉소가 이스라엘을 강타했던 시기였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한 세기 반이 지났을 무렵, 나라의 재건과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낙관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작고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시온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언 (사 60)은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흉작, 부패, 부도덕, 폭력과 위협이 매일의 삶을 지배했다.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역대기의 배경이다.
역대기는 현실에 대한 전망으로 재구성된 유다의 역사를 제공한다. 여기에 기쁨에 대한 강조점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사무엘서-열왕기서와 비교해 역대기의 저자는 기쁨의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저자는 때로는 이 과정에서 그가 사용하는 자료를 조금 바꾸기도 한다. 역대상 16장은 어떻게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왔는지 묘사한다. 그때 다윗은 아삽을 필두로 한 무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명했는데, 곧 우리가 시편 96편으로 알고 있는 찬양이다. 이 시편이 하나님의 성소에 있는 능력과 영광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반면 (6절), 역대상에서 인용된 본문은 “능력과 즐거움”을 노래한다 (27절). 그뿐만 아니라 역대하 6장에 기록된 시편 132편 인용구에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41절). 또한, 시선을 끄는 부분은 역대하 30장, 히스기야 왕 치하 유월절 절기에 대한 기록인데, 마지막 구절로 갈수록 기쁨이 점점 고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역대기 전체에 걸쳐 기쁨이라는 요소가 지속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역대기는 역사 전체를 희망의 빛 안에서 조명함으로써 실망에 찬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아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 비참함이 다가 아니다! 과거에 뿌려진 씨를 보라!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을 보라! 찬양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기쁨이 충만한 성전을 보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의 손으로 하신 일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설교한다.
희망의 언어
실망은 빈곤한 안내자다. 성경은 무기력의 언어와 냉소주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희망의 언어를 가르친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것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격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 심지어 십자가를 통해 -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가시는 자취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매우 특별한 관점을 가져다준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도 그의 나라가 임하게 하신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지난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의 젊은이와 여자들에게 뿌려진 씨앗은 탈레반도 쉽게 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 씨앗이 어떻게 자랄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기도를 이어간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평화의 씨앗을 싹트게 하시고 그것을 이 세상에서 주의 방식으로 사용하시기를!
※ 이 글은 Nederlands Dagblad에 실린 칼럼으로, 저자는 아펠도른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이다. 그는 이 글을 캄펀 신학대학과 아펠도른 신학대학의 공동 연구 그룹인 BEST (Biblical Exegesis and Systematic Theology)의 회원으로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