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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재수(N. H. Gootjes)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왔나?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

 

 

들어가며

 

  2023년 8월 20일 고재수는 향년 75세로 캐나다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어떤 사람은 그의 이름을 보고 한국 사람으로 알지만, 네덜란드인이다. 고려신학대학원 이근삼 교수가 그의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재수는 부산 송도 고려신학대학원에서 1980년부터 9년 동안 개혁신학을 가르친 네덜란드 출신 교수 선교사(Missionary Professor) ‘N. H. Gootjes’(1948-2023)[1]다. 그는 1989년 한국에서의 교수 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Canadi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가 있는 해밀턴(Hamilton)으로 건너가 교수로 섬겼다. 2008년 은퇴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그후 20년 가까이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고통을 그치고 하늘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

 

  필자가 1989년 3월 고려신학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고재수 교수의 마지막 학기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조직신학 서론과 신조학 수업을 들었다. 그의 강의는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서양인 교수가 한국어로 강의한 것도 신기했지만, 그 내용이 쉽고 수준이 높았다. 한 마디도 버릴 것이 없었다. 능숙한 한국어 강의였다. 강의의 매력은 신학적 현란함에 있지 않았고,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한 것이었다. 경건회 설교에서 보여 준 구속사적 성경해석은 마냥 신기하고 놀라웠다. 성경에서 보석을 캐는 듯한 시간이었다. 필자가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은 분명 고재수 교수의 지분이 크다. 아쉽게도 그를 다음 학기에 볼 수 없었다.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로 임지를 옮겼기 때문이다.

 

  필자가 2000년 5월 네덜란드에 있을 때다. 캐나다에 있는 고재수 교수로부터 한 편지를 전달받았다. 고재수 교수의 네덜란드 친구가 캐나다를 방문한다고 해서 그편으로 안부를 전했더니 가져온 안부 편지였다. 놀랍게도 고재수 교수는 필자를 기억해 냈다. 출석부를 찾아 확인한 것이다. 필자가 삭개오에 관한 질문을 한 사실이 출석부에 기록되어 있었나 보다.


 

고재수 교수 편지.jpg

 

 

  고재수 교수가 남긴 주옥같은 논문과 글들이 있다. 그는 30개의 아티클을 남겼다. 총신 차영배 교수와 성령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1989년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개혁주의신행협회)이라는 책을 남긴다. 1991년 그의 설교를 모아 묶은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기독교문서선교회),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십계명 강해』(여수룬)가 있다. 1992년에는 여러 학술지에 기고한 글을 모아 『교의신학의 이론과 실제』(디다케)가 출판된다. 2005년 『세례와 성찬』(성약), 2008년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성약), 2010년에는 『그리스도를 고백함』(성약)이 있다. 캐나다에서 영어로 출판한 책도 있다. Teaching and Preaching the Word: Studies in Dogmatics and Homiletics(Edited by C. Van Dam. Winnipeg: Premier, 2010) The Belgic Confession: Its History and Sources(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고재수 교수가 한국 교회에 남긴 업적은 무엇일까? 왜 그는 먼 이국땅 동양의 한국에 왔을까? 그것도 한국 부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사역했을까? 온 가족이 함께하며 사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에 복음을 전해 준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나는 시점에 고재수 교수는 왜 한국에 와야 했을까?

 

  고재수 교수와 함께 동역했던 박도호(J. M. Batteau, 1946-) 교수는 은퇴 목사로 네덜란드에 아직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고 계시다.

 

  이제 이 모든 역사를 정리할 때가 된 듯하다. 그의 흔적이 사라진 지도 벌써 33년이나 지나고 있다. 한 세대를 넘기고 있다. 한국의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관계 역사를 살펴볼 때가 된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교회도 많이 변했다. 한 때 캄펀(Kampen)에는 두 개의 신학교가 존재했다. 캄펀은 네덜란드의 예루살렘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전 캄펀 신학교(Oudestraat 소재)[2]가 사라지더니, 이제 다른 캄펀 신학교(Broederweg 소재)[3]도 2023년 위트레흐트(Utrect) 대학으로 병합되었다. 세월의 변화와 더불어 교회의 상황도 바뀌고 있다. 살갑던 경험과 기억을 역사로 기록할 때가 된 것 같다.

 

1. 고신교회의 해외교회와의 관계

 

  고신교회는 1952년 출범한다. 한국 장로교회로부터 축출당한 것이다. 분리가 아니라, 쫓아내고 쫓겨난다. 새롭게 시작한 고신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하나 됨을 추구한다. 그 기회가 1960년 12월 13일 고려측과 승동측의 ‘합동’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달랐던 합동은 졸속임이 확인된다. 결국 1962년 12월 17일 안타까운 ‘환원’으로 귀결된다.

  고신교회는 출범 이후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미국 개혁장로교 복음주의 총회(Th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Evangelical Synod => 후에 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PCA와 통합)와 성경장로교회(BPC) 선교사들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를 형성한다. 북미 기독개혁교회(CRCNA) 선교사들과도 교류한다. 하지만, 교회적 자매 관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이들 미국 선교사들은 합동과 환원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신교회와 애매한 관계에 처한다. 합동 이후 미국 선교사들은 합동에 그대로 남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고신교회와 관계는 지속한다. 그들은 1980년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고신교회와 합동교회 양 관계를 유지한다. 미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고, 한국 교회는 피선교국 교회였으니, 동등한 자매교회로 발전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은 측면도 있다.

  고신교회는 국제적 기독교 연합기구 가입에도 상당히 조심한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WCC(World Council of Church)가 생겨난 것에 대항해 만들어진 ICCC(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는 미국 성경장로교회가 주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1954년 고신교회에 정식으로 초청한다. 하지만, 고신교회는 참관인으로만 참여하고 가입에 적극적이지 않다.

 

2. 박윤선과 네덜란드 개혁교회

 

  고신교회가 네덜란드와 관계를 처음 시작한 것은 박윤선 교수를 통해서다. 물론 개인적 차원이지만 말이다. 박윤선 교수는 고려신학교 교수로 섬기면서 칼뱅 신학을 가르친다. 그는 미국 유학 당시 칼뱅주의를 네덜란드 신학자들에게서 배운다. 박윤선 교수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다(1934-36). 세계적 신약학자 매첸(Gresham J. Machen)에게서 성경 해석 방법을 배운다. 네덜란드 개혁신학에 매료된 박윤선은 네덜란드어를 독학하여 네덜란드어 책을 읽는다. 나중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할 때(1938-39)는 변증학자 반틸(C. Van Til)에게 근본주의를 넘어서는 균형 잡힌 개혁신학을 습득한다. 1953년 그는 마침내 바라던 네덜란드 자유대학(De Vrije Universiteit)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짧은 5개월의 유학 생활로 만족해야 한다. 그는 학업을 위해 1959년 12월 미국으로 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논문 준비를 하지만, 네덜란드 자유대학 지도교수와의 논문 주제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학업을 포기한다. 그는 1961년 5월 한국으로 귀국한다. 박윤선의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이렇게 아쉽게 끝난다.

  박윤선의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고신교회의 미래에 직접적 연결고리는 아니다. 네덜란드에 머문 시기도 아주 짧고, 실제적 역할은 없었다. 더구나 박윤선은 고려신학교로부터 해임을 당해 쫓겨나다시피 한다(1960년). 박윤선은 그 이후 고신교회와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3. 이근삼과 네덜란드 개혁교회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실질적 관계는 이근삼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근삼은 1946년 고려신학교 제1회 학생으로 입학하여 5년 후 1951년 제5회 학생으로 졸업한다. 고려신학교는 교수를 양성할 목적으로 동기생 홍반식(구약), 오병세(신약), 이근삼(조직신학)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이근삼은 1954년 1월 미국에 도착한다. 고든대학(Gorden 학사), 훼이스 신학교(Faith), 커버넌트 신학교(Covenant 석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변증학 1년)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박사학위 공부를 위해 1958년 8월 네덜란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으로 향한다. 그는 이곳에서 1962년 7월까지 유학하니, 거의 4년이 된다. 이것이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교류하는 직접적 연결고리가 된다.

 

  이근삼은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난 네덜란드 친구의 소개로 네덜란드 바우터스(D. N. Wouters, 1930-2017) 목사의 도움을 받으며 유학 생활을 이겨낸다. 이근삼과 그의 가정은 바우터스 목사의 사택에서 하숙하며 지내는 배려를 받는다. 바우터스 목사의 헌신적 도움은 이근삼의 유학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바우터스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가운데 소위 ‘총회파’(synodaal) 소속이다.

  이근삼은 교의학 교수 베르카우어(G. C. Berkouwer) 지도하에 석사를 마친다. 박사 과정은 헤르만 바빙크(H. Bavinck)의 조카 요한 바빙크(J. H. Bavinck) 아래에서 변증학을 배운다. 박사학위 논문은 일본의 신도이즘(Shintoism)에 관한 것이다.

 

  이근삼은 네덜란드 유학 생활 당시 어떤 기회를 통해 흐로닝언(Groningen)에 있는 ‘자유’(vrijgemaakt/ liberated/ art. 31) 개혁교회 장로를 알게 된다. 그를 통해 그 교회의 목사 스탐(C. Stam) 목사를 만난다. 이 만남이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의 관계로 이어지는 접점이다. 이근삼은 암스테르담 북쪽에 위치한 흐로닝언까지 초대받는다. 그는 흐로닝언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스탐 목사의 초청으로 교회와 가까이 교제한다. 이근삼은 한국 교회를 소개하며 공감대를 쌓는다. 교회 성도들은 큰 동질감을 느끼고 동양의 한국에서 온 이근삼을 좋아한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상황과 한국의 고신교회의 역사가 매우 비슷한 점이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두 교회는 더 가까워진다. 이근삼이 유학 후 한국에 돌아온 후 이 교제는 교회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첫째, 모두 총회의 전횡으로 쫓겨났다. 둘째, 쫓겨난 시점이 두 교회 모두 전쟁 중이었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1944년이고, 고신 교회는 한국전쟁 중 1952년이다. 셋째, 두 교회 모두 종교 개혁자 칼뱅의 신학을 따르고, 성경에 기초한 개혁신앙을 견지한다. 넷째, 일본 제국주의 대동아공영 전쟁의 피해자다. 다섯째, 좌로는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WCC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우로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가진 ICCC에 반대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네덜란드 교회는 개신교회로서 ‘개혁교회’라는 특징을 가지는 데 비해, 고신 교회는 ‘장로교 전통’에 있다.

 

4.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자매 관계를 맺기까지

 

  교회적 차원의 해외 교회와의 자매 관계는 한국에 선교사를 보낸 선교국보다는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이루어진다.

  한편 고신교회는 ‘졸속 합동’과 ‘급속 환원’(1959-1962)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는다. 그 상처를 해외 교회와의 자매결연으로 메워보려 한 것일까?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자매결연이 아주 적극적으로 추진된다.

 

  두 교회의 교류는 1962년 네덜란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근삼 교수의 주도로 시작된다. 그는 정통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경험하고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교회 자매 관계를 추천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이근삼 교수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흐로닝언 자유 개혁교회 지인들이 물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한국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그때 이근삼은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한국 신학생을 개혁신앙으로 교육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을 듣고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는 후원 교회들을 확보하여 한국 유학생을 입양하여 지원한다.

  첫 고신교회 파송 한국 유학생은 차영배다. 차영배는 1964년 11월 네덜란드에 입국해 공부한다. 후원 교회는 뷘스호우턴-스파컨뷔르흐(Bunschoten-Spakenburg)인데, 유학과 생활 비용을 책임진다. 그는 1968년 11월 석사과정(Doctoraal examen)을 마치고 귀국한다. 차영배가 유학할 당시 양승달과 변의남도 함께 공부한다. 그리고 허순길이 1966년 8월 입국해 1969년 6월 석사 학위를, 1972년 6월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렇게 한국 유학생들이 네덜란드 캄펀 신학교에서 유학을 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자매교회로 나아가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1965년 7월 네덜란드 흐로닝언을 중심으로 <한국 활동 위원회>(Actie comite Korea)가 결성되어 한국 고신교회를 돕는 활동이 시작된다.[4] 그리고 흐로닝언 교회의 제안으로 흐로닝언 노회(Particulier Synode van Groningen)가 자매관계를 맺으려고 고신교회의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연구하기 시작한다. 판 후르프(P. van Gurp)와 스탐(C. Stam)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연구하여 1966년 노회에 보고 한다. 연구 결과는 긍정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혁신학적 신앙고백임을 확인한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세 개의 일치 신조만 채택하고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있었다.

 

  고신교회는 1965년 제15회 총회에서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 우호친선 관계를 맺기로 하고 대표단을 구성한다. 그런데, 고신교회는 이때까지 공식적으로 신앙고백을 채택하지 않았다. 물론 인도교회가 고백한 ‘12신조’를 채택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목사는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다른 한국 장로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고신교회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 자매결연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공식적으로 채택하려 한다. 1966년 제16회 총회는 신앙고백 연구 위원회(이근삼 오병세 홍반식 박손혁 한학수 한명동 서완선)를 구성한다. 그로부터 3년 후 1969년 총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공식적 신조로 채택한다. 이는 한국 장로교회가 출발한 후 85년이 지난 때이다. 역사적 순간이다. 이제 교회다운 교회로 서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의 자매결연을 추진하면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진리, 곧 신앙고백에 기초한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실천한 것이다. 고신과 승동 측이 합동할 때 이런 고민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총회는 3년마다 열리기에 1967년 9월 총회에서 고신교회와의 친선(correspondentie) 관계를 맺는 데 문제가 없지만, 만약 고신교회가 ‘RES’(Reformed Ecumenical Synod)에 가입한 것을 중단하지 않으면, 불가능함을 알린다.[5] 고신교회는 1967년 총회에서 개혁주의 에큐메니컬 총회(RES)에 가입하기로 결정해 놓은 상황이다. 다음 해 196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대표단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는 고신교회가 이 결정을 취소할 뿐만 아니라, 다음 해 열리는 개혁주의 에큐메니컬 총회에도 참여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고신교회의 RES 참여 결정과 ICCC에 대한 관심은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 자매관계로 나아가는 데 크나큰 걸림돌이었다.

 

  그해 1967년 10월 고신 총회는 ‘RES’에 대표단을 보내지 않기로 하고, 옵서버(observer)로도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다(최종적으로 회원 탈퇴는 1971년 시행되고, ICCC와의 자매관계도 중단한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 교회적 교류(Correspondentie)로 나아가는 데 있던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다. 그 사실을 편지로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총회에 알린다. 그해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10월 총회는 교류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음을 결정하고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여 고신 총회에 알린다.

  이듬해 1968년 9월에 모인 고신 총회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요구에 동의하고 교회 교류 관계에 들어가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1969년 5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총회는 고신 총회의 결정을 받고 정식으로 교류 관계에 들어감을 선포한다.[6] 그러니,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의 자매관계는 1968년 한국에서 최종 결정되고, 1969년 네덜란드에서 최종 확인함으로 시작된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총회는 고신교회와 교류를 시작하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한 진중한 싸움을 하는 중에 하나님의 기적”[7]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총회장의 제안으로 회의 중에 시편 87편 찬송을 감격하며 부른다. 이 시편은 이방 나라들이 주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노래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시 87:5)

 

  두 교회가 교류 결정을 하는 일에 있어 중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한국 고신교회에서는 이근삼 교수다. 네덜란드에서는 판 후릅(Van Gurp) 목사와 스탐(Stam) 목사였고,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신학교 교수들이며, 네덜란드 캄펀에 유학 중이던 한국 목사들이다. 차영배, 양승달, 변의남, 허순길이다. 1969년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총회에서 차영배가 고신교회를 대표해서 인사말도 전한다.

 

  이렇게 한국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가 정식으로 자매 관계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 자매 관계는 명목상이 아니라, 아주 가깝고 뜨겁고 헌신적 사랑이다. 이후 전개되는 역사를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의 교제가 있을까!

 

5. 아름다운 자매교회의 교류, 고재수 교수 선교사!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총회는 1969년에 시작되고 해를 넘겨 1970년에도 계속된다. 참고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총회는 3년마다 열리지만, 한 번 열리면 몇 달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1970년 2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총회는 고신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논의한다(Acta GS GKN 1970, art. 381). 1969년 3월 흐로닝언 노회는 고신교회와 교류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면 고신교회를 지원하기 위한 ‘일반 기금’(een generale kas)을 조성하자고 제안한다. 이미 흐로닝언 노회를 중심으로 개별적 차원의 지원이 시작되어 자유 개혁교회 성도들이 조직한 6개 기관이 자매교회인 고신교회를 다양한 영역에서 돕고 있었다. 이제 교회적 교류를 공식적으로 시작했으니, 전 교회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외부교회 교류 위원회는 세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 도서관에 필요한 책을 공급하는 것이다. 둘째, 네덜란드 교수나 혹은 목사를 한국에 파송해 초청 강의를 하는 것을 제안하기로 한다. 셋째, 고신교회가 좋다면 교수요원을 보내는 것이다. 논의가 있은 후 고신교회와 의논하여 교회적 자매관계를 이어가는 방안을 고신교회 총회 대표와 논의하며 마련하기로 한다. 이를 위한 자금모금을 교회에 요청하기로 한다. 적극적 자세다. 일방적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자매교회의 필요를 들어보고 그것에 부응한다.

  그리고 이미 한국 교회를 돕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성도들 단체들과도 대화를 하며 한국 고신교회 내부 지원의 형평성과 균형을 맞추려 한다. 개별 교회 지원보다 교회적 차원의 지원으로 가려 한다.

 

  1971년 두커스(L. Doekes) 교수와 판 후릅(P. van Gurp) 목사가 한국 고신교회를 방문한다. 부산과 서울 신학교에서 초빙 강의를 하고, 교회와 교제하는 기회를 갖는다. 고신교회를 방문하여 두세 달 동안 신학교와 교회에서 강의하고 설교하는 방식은 이후 계속된다.

 

  1972년 한상동 목사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총회에 참석하여 부산 고려신학교 건물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고신교회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지원으로 1975년 신축 건물을 짓는 데 큰 도움을 받는다.

 

  고신교회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에 ‘교수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청원한다. 이 안건은 1973년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총회에 제출되어 1975년 총회, 1978년 총회에서 본격적 논의되고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두 명의 교수 선교사가 한국 고신교회 고려신학대학원에 와서 교수 선교사로 사역한다.

 

  1980년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는 두 젊은이 고재수(N. H. Gootjes)와 박도호(J. M. Batteau) 교수를 파송한다. 그렇게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박도호 교수는 8년, 고재수 교수는 9년 동안 사역했다.

 

 

나가며

 

  한국과 네덜란드가 역사적으로 접촉한 것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27년 일본으로 가던 네덜란드 상선이 폭풍으로 표류하다가 조선에 붙잡혀 정착한 세 명의 네덜란드인이다. 이들은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병자호란에 참여하여 2명이 죽고 1명만 살아남았는데, 그는 ‘박연’이라고 개명하고 혼인하여 자녀를 낳고 조선인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 후 1653년 또 다른 네덜란드인들이 동인도회사 상선으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좌초해 64명 중 36명이 살아 제주도를 거쳐 한양으로 온다. 그들이 바로 하멜과 그 무리다. 하멜은 박연을 만났다고 한다. 하멜 일행은 조선에서 14년 동안 붙들려 살다가 1668년 일본으로 탈출하고, 나중에 그 유명한 <하멜 표류기>를 써서 조선을 서양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은 거스 히딩크(G. Hiddink)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1980-1989년까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개혁신학을 가르친 고재수 교수의 가치는 무엇보다 크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개혁신학을 제대로 가르친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성장 일변도의 복음주의 신학으로 덮여 있을 때 종교 개혁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개혁신학을 가르쳤으니, 그 의미가 특별하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그가 전해 준 복음을 잘 보존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우리 후손에게 잘 전해 주는 것이리라.

 

 

 


[1] 고재수 교수는 1985년 <하나님의 영성> De geestelijkheid van God(Th. D. diss. Franeker: Wever, 1985)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 이 신학교는 1892년 합동(Vereniging)으로 생겨난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파(Synodaal)의 소유였다. 하지만, 이 신학교는 네덜란드 개신교회로 통합되고 얼마 후 다른 신학교와 통 폐합되어 사라졌다.

[3] 이 신학교는 1944년 자유(Vrijmaking)로 생겨난 네덜란드 개혁교회 자유 개혁교회(Vrijgemaakt Liberated, Art. 31)의 소유였다. 캄펀에는 반세기 이상 두 개의 신학교가 공존했었다.

[4] “Actie-comitè-Korea” in Ref. 40/39 1965 & Acta van de Generale Synode van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1967, art. 241, 288.

[5]  그러면 GKv는 왜 예장고신이 국제교회연합 단체 RES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RES는 1946년 미국 미시간에서 네덜란드 개혁교회 계통의 세 교단이 발기해 시작되었다. 1945년 시작된 <세계기독교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에 대한 대안으로 결성된 <국제기독교교회협의회>(ICCC: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나 <개혁교회연맹>(ARC: The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에 가입하기를 주저하던 교회들이 <개혁주의 에큐메니컬 협의회>를 발기한 것이다. 그 세 교단 가운데 주도적 교단이 바로 네덜란드 개혁교회(GKN: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이하 ‘GKN’)였다. 바로 이 GKN 총회가 GKv교회를 쫓아냈다. 이후 GKN은 ‘총회파’(synodaal)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니, GKv는 GKN이 발기한 교회연합 단체인 RES에 예장고신이 가입하면서 동시에 자신들과 자매교회를 맺으려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GKN은 여성에게 모든 직분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이미 1965년 GKN 총회는 여성에게 교회의 모든 직분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그것은 ‘REC’에서 교회의 여성에게 직분자를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었기에 그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REC’ 총회는 4년 마다 열렸는데, 1968년 암스테르담 RES 총회에서 어떤 결정이 날 것인지를 보고 최종 마무리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68년 암스테르담 RES 총회는 여성에게 목사직과 장로직을 허용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GKN은 RES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기의 길을 갔다. 1969년 GKN 총회는 여성에게 교회의 모든 직분을 허용했다. 1969년 GKN는 여성 직분 허용을 결정했고 GKv는 예장고신과 자매관계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GKN의 신학적인 급진성과 WCC에도 이중 가입하는 등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던 GKv는 예장고신이 RES에 가입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6] Acta van de Generale Synode van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1969, art. 51, 41-42.

[7] Acta GS GKN 1969, art. 50.,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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