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며칠 전 동기 목사의 장례가 있었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주일 저녁에 단톡방에 난데없이 부고가 올라왔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프다는 이야기는 몇 개월 전에 들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아픈 것은 아니니 괜히 걱정하지 말라며 병문안도 한사코 거절했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마친 후 동기 목사가 목회한 교회의 장로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동기들이나 교인들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또 실제로 병세가 일시적이었지만 호전되기도 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러다가 1개월을 남겨놓고 갑자기 병세가 악화하여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되고 이때부터는 장로들에게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을 알리고 가족들과 함께 소망 중에 죽음을 잘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믿음과 소망 중에 평안하게 임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고 주님을 향해 감사가 나왔다.
이 일을 계기로 죽음을 어떻게 맞고 준비하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교회와 교인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심각하게 아프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에도 알리지 않는 것만이 과연 최선일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네덜란드에서 잠시 있을 때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교회에 출석하며 잘 알고 지낸 더 헬더 부인의 죽음이 떠올랐다. 더 헬더 부인은 독신으로 지내다가 84세의 일기로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2022년 9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022년 6월 18일 네덜란드에 있는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식이 없는 더 헬더 부인은 외국에 있는 나의 아들을 자기 조카처럼 생각하고 항상 잘 챙겨 주었다. 아들의 말인즉 더 헬더 부인이 전화해서 두 주 전에 폐암 선고를 받았으며 열흘 후에 좀 더 자세한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나는 새로운 소식이 있는지를 계속 알아봐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했다. 며칠 후에 아들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폐암 말기에다 간이랑 다른 곳에도 이미 전이가 상당히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항암치료를 해도 1년, 안 하면 6개월을 살 수 있지만, 부인은 항암치료를 안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가슴이 아팠다. 네덜란드에 있을 때 신세 진 것이 너무 많았음에도 병 문안갈 수 없는 형편이 너무 안타까웠다. 더구나 코로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대신해서 아들에게 병문안을 자주 가도록 부탁했다.
그런데 몇 차례 병문안 갔다 온 아들이 내게 전해주는 소식은 놀라웠다. 자신이 처한 지금 형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죽음을 하나씩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자기 조카 한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재산이지만 교회와 여러 구호 단체 등 여러 곳에 나누어서 처리한다고 했다. 심지어 죽고 나면 에어프라이어를 같은 아파트 1층에 혼자 사는 청년을 위해 줄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에어프라이어까지.....
어느 날 아들이 전해준 소식은 더 놀라웠다. 죽은 후에 장례식 집례를 자기에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내게 조언을 구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더니, 지금 당장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라 장례 집례를 제대로 차분하게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잘 생각해서 판단하라고만 했다(결국에는 아들이 장례를 집례하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장례를 집례했다).
또 어느 날 아들은 나에게 숙모(아들은 숙모라고 불렀다)가 나에게 무엇을 준 지 아세요 라고 물었다. 그래 뭘 줬는데? 부인은 병문안 온 아들에게 자신이 앨범에 추억으로 간직한 우리 가족과 함께 찍은 모든 사진을 모아서 주었고, 심지어 우리 가족이 한국에 다녀와서 부인에게 몇 차례 선물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작은 선물을 다시 되돌려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 우리 가족이 부인 집에서 함께 재밌게 갖고 놀았던 카드와 게임 도구 몇 개를 주었다는 것이다. 자신과 우리 가족 사이에 있었던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데 이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에게 주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나도 더 헬더 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전화를 걸었다. 2022년 7월로 기억한다. 수화기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약간 목이 쉬었을 뿐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씩씩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갈수록 힘이 떨어져서 가능하면 침대에 누워서 지내고 있고, 현재 언니가 와서 자기를 돌보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어쨌든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했다. 언어의 한계로 내 마음에 있는 감정을 세심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웠지만 이 말 외에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왠지 사치스러웠다. 그렇다고 언젠가 다음에 보자고 말하거나 천국에서 만나보자고 말하는 것은 너무 경우도 없고 예의가 없어 보였다.
의학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생명이지만 새벽마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도록 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22년 9월 8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는 7일 후에 있었는데 캐나다에 있는 조카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배려한 조치였다. 장례 주례를 맡은 아들이 장례식에 초대하는 카드를 SNS로 보내주었다. 맨 위에 시편 121편과 함께 “우리의 사랑하는 동생 시누이 숙모가 믿음으로 돌아가셨습니다”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시편 121편 2절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예배가 시작할 때 목사의 입을 통해 선포되거나 혹은 온 교인이 함께 찬송하는 구절이다.
장례식이 마친 후 며칠이나 지났을까. 대한민국 창원 내가 사는 집에 네덜란드에서 보낸 카드 한 장이 왔다. 뭘까 궁금하며 겉장을 뜯어보니 부인의 가족들(가족이라 하지만 모두 조카들)이 보낸 부고장이었다. 아들을 통해 SNS로 이미 전달받아 확인한 그 부고장이었다. 부인이 임종 직전에 외국에 있는 나를 기억하고 여기 있는 나에게까지 부고장 보낼 것을 다 준비하였구나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죽음을 어떻게 맞고 준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