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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0월 31일(화) 세계로교회당에서 열린 제1회 송상석 목사 기념 포럼에 발제된 글을 아래와 같이 차례로 올립니다 - 편집자 주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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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삼진 박사 (Evangelia University 교수)

(오렌지 카운티 샬롬교회 담임목사)

 

 

 

   이만열은 고려신학대학원 개교 60주년 기념 강연에서 고신교회가 한국교회 신사참배 반대 투쟁의 인맥과 한국교회 절제 운동의 인맥을 갖고 있으며, 교회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를 아주 중요시한다고 했다. 그는 나아가 절제운동의 인맥 속에서 흐르는 정신이 고신에서 자란 젊은이들을 통해서 지금 확산되어 가고 있으며,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1989)에 고신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고신교회 운동이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 절제 운동의 인맥은 총무로서 절제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송상석을 이르는 것이었고, 그 정신이 오늘날도 계승되고 있다고 보았다.

   송상석 목사(1896-1980)는 경남 마산 출신이었지만 대학 시절은 물론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후 서울과 평양에서 주로 사역하여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노회 소속으로 있었다. 그가 해방 후 경남지역으로 내려와 교회쇄신 운동에 가담했고 고신교회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고신교회를 형성, 발전시킨 인물로 신앙에 한상동, 신학에 박윤선, 행정에 송상석이라 일컬을 정도로 고신의 형성과 발전기에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 고신교회를 형성시킨 것을 이만열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순교 정신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롭게 하는 절제 운동 두 가지로 보았지만, 고신교회 형성의 네 가지 기둥은 한상동과 주남선의 순교정신, 박윤선의 개혁주의 신학, 송상석의 행정과 절제 운동, 그리고 손양원과 장기려 등 사랑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 네 기둥은 교회쇄신 운동 과정에서 고유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한국교회 안에서 독특한 고신의 영성을 주조해 내었다. 이들 네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서로 보완하고 때로 긴장하고 갈등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었고, 각 인물들은 주어진 소명을 따라 한국교회 쇄신 운동을 전개하고 고신교회 영성을 형성하는 기저와 동력이 되었다.

   이 소론은 송상석 목사 사후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초기 고신교회의 영성을 형성한 네 기둥 가운데 하나인 송상석 목사가 고신교회에 어떤 관계 가운데 사역했으며, 그의 사역은 고신교회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정리하고자 하고자 한다.

 

 

1. 송상석 목사와 초기 고려신학교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등 출옥 성도들의 교회쇄신 운동의 시작은 고려신학교 설립을 통한 개혁주의 신학운동이었다. 해방 후 출옥 성도들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였던 산정현교회에서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달 동안 기도하며 교회쇄신방안을 제시하였고, 한상동은 주기철의 후임으로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아 시무했다. 1946년 4월 그가 어머니의 소천 소식을 듣고 남하하였을 때 제1회 남부대회(훗날 32회 총회로 계승)는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허락함에 따라 옥중에서 기도하던 신학교 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은 박형룡을 교장으로 내정하고, 박윤선을 교장서리로 하여 1946년 9월 20일 개교하였다. 고려신학교 이사회에서는 한부선 등에게 박형룡 인도의 가능성을 타진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송상석이 그 위험한 일을 자청하여 3개월 만에 무사 귀환시킬 수 있었다.

   신사참배의 박해를 피해 만주 봉천에서 신학 교육을 하던 박형룡이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그를 한국으로 인도하는 일에 송상석이 자원하였는데, 이는 송상석의 박형룡과의 개인적인 관계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박형룡을 고려신학교로 인도하기 위해 1947년 5월 20일 부산을 떠나, 서울을 거쳐 6월 26일 인천에서 밀항선을 타고 출항하여 영구로, 영구에서 200km 이상 되는 봉천까지 이동해 가족들과 이삿짐을 옮겨오는 일이어서 매우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송상석은 당시 그의 마음과 상황을 “마치 블레셋 군대와 충돌하면서 사선을 넘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생수를 길러오던 용사(삼하 23:13-17)의 심정이었다”라고 회고했고, 박형룡의 아들 박아론은 송상석을 “소돔성 멸망 직전에 찾아갔던 두 천사처럼”, “‘구세주’처럼 보였다”고 했다.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와 송상석의 인도를 받아 그때 귀국하지 못했다면, 이후에는 길이 막혀 귀국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송상석이 목숨을 걸고 박형룡을 국내로 인도하였지만, 박형룡은 한 학기 만에 고려신학교를 이탈하여 고신교회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신학자가 적었던 시절에 박형룡은 상경해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고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 이후 총회신학교 신학의 기초를 세워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다.

 

 

2. 송상석 목사와 교회쇄신 운동

 

1) 교회쇄신 운동과 고신교회 변증

한상동과 주남선 등 출옥 성도들이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교회쇄신 운동을 전개하면서 경남노회에서는 이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다수였다. 그러나 총회의 지도부는 경남노회 안의 친일 교권주의자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총회 안에서 이들을 지지하고 있었다. 지방과 중앙의 친일 교권주의자들을 대항하기 위해 교회쇄신론자들은 총회 측의 행정의 부당성과 편향성을 고발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경남노회와 전국교회에 알려야 했기 때문에 송상석은 여러 노력을 했다. 경남노회에서 발행한 일반적인 문서는 노회장 이약신과 서기 박손혁이 주로 관여하였을 것이지만, 총회와의 논쟁을 위한 문서는 특별위원에 포함된 송상석이 직접 작성하였거나, 독회 등에 참여하면서 그 완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송상석이 관여, 발행한 첫째 문서가 ‘경남노회 사건 총회전권위원회 경과 상황 발표에 해답함’(1948. 6. 30)이다. 경남노회 사건 총회전권위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대, 경남노회 각 교회와 기타 전국교회 앞으로 보낸 46배판 8면 세로쓰기 2단으로 편집된 이 문서는 경남노회장 이약신, 총대 이순필, 송상석 등 3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총회전권위원회의 부당한 행정과 불법성을 구체적으로 고발했는데, 그 결과 제35회 총회에서는 김길창 등 교권주의자들과 야합하여 전횡을 일삼았던 전권위원회의 보고서가 기각되고, 새로 (특)별위원을 파송했다.

   둘째 문서는 경남노회장 이약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호소와 공약선언: 대한예수교 장노회 총회와 각 노회와 성도들에게 드리는 말씀’과 그 안에 포함된 ‘고신당국자들의 선서문’(1949. 9)이었다. 이 문서는 총회측과 연계되어 있는 반대파들이 ‘고신이 이교파를 창설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제52회 정기노회의 결의로 고신 책임자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한명동, 손양원, 송상석 등 6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문서이다. 이들은 경남노회에서 ‘이교파 수립을 계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런 야심은 전연 없음'과 함께 총회적인 오해를 여섯 개 항으로 정리해 공표하였다.

   셋째 문서는 제36회 총회를 앞두고 경남(법통)노회장 이약신, 교회 대표 박손혁, 한상동, 권성문, 김을길, 송상석 등 6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제53회 노회 임시노회의 결의로 상정하는 ‘진정서’(1950. 5)이다. 46배판 세로쓰기 2단 4면으로 편집된 이 문서는 총회특별위원회가 추진한 ‘경남노회 통일조정은 왜 결렬되었나?’를 설명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고려신학과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와 불법 분리하는 노회 소집 통지문 등 문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특)별위원 처사에 대해 항의하고, 결론적인 요구 조건 일곱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넷째 문서는 제36회 총회(1951. 5. 25-29)를 앞두고 발표된 ‘경남노회 진상 보고와 진정서’(1951. 5. 25)로, 46배판 활판 세로쓰기 인쇄로 13면에 달한다. 이 문서는 표지를 2도로 인쇄하였고, 표지와 2, 3면 외에 본문을 9면으로 구성했다. 이 문서는 작은 글씨로 인쇄되어 작은 책자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이 문서는 경남(법통)노회 통일대책위원회 이름으로 발행되었는데, 경남노회 총대권 문제 등에 대한 노회의 입장을 정리하고, 총회원들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는 이 문서에서 ‘한국기독교 해방 전후 진상도해’를 작성하여 경남노회가 왜,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잘 요약한다. 이 문서는 경남법통노회 통일 대책위원 이약신, 한상동, 박윤선, 박손혁, 이순필, 전성도, 엄주신, 심상동, 송상석 등 9인의 이름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총회 경남노회 특별위원장, 제36회 총대들에게 배포되었다. 이 문서는 총회 전권위원과 특별위원들의 불법적인 처사를 고발하며, 총대들에게 진상을 설명하고, 다른 한 편으로 고신을 지지하던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경남(법통)노회의 교회쇄신 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있다.

   이러한 문서들의 작성을 위해 함께 이름을 올렸던 위원들의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을 것이지만, 송상석의 치밀한 성격으로 보아 그 문서를 직접 작성했거나, 공동으로 집필해 함께 독회, 보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총회 측과 고신교회가 갈등하던 기간 동안 고신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에 함께 했다.

 

2) 『문제의 기독교와 용공정책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내면상 폭로』(1951)

민경배는 김양선의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를 인용하며, “쫒겨난 고려파(高紳)는 명분이 당당했다. ··· 고려파에서는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용공단체라고 하는 가공할 만한 독언을 던졌다”고 했다. 그러나 민경배는 그 문서에서 직접 논증하지 않아 사실관계 확인이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기독교와 용공정책 진상 검토 재료’ 문서에는 ‘11명의 감독’(「메소지스트 촬렌즈」지 1950년 12월호)과 ‘세계기독교연합회의 집행위원회는 소련헌법의 원칙을 시인’(「크리스챤 삐큰」지의 1951년 2월 22일자)이라는 글이 포함되어 있는데, 감리교 목사 출신 국회의원 이규갑이 총 책임자로서 이를 번역, 발표했다. 국회의원들은 1948년 조직된 세계기독교연합회에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고, 용공정책을 주장하는 세계기독교연합회(WCC)와 아세아대회에 가맹, 연결된 일과 국제선교회의 원조를 받는 것을 우려하고, 교파와 단체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요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감리교대한기독교총회, 성결교회총회, 구세군한국본영 등 네 교단과 대한기독교청년회 등에 보내어진 것으로, 국회의원 이갑성, 임영신, 황성수 등 국회의원 25인의 이름이 들어 있다. 1951년 6월 ‘기독교와 용공정책 진상검토 재료’라는 문서가 배포되자 장로교 총회측에서 이규갑과 송상석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이를 고려파가 성명한 것으로 몰아갔다.

   송상석은 그들의 지적에 대해 당시 한국교회 공산주의 논쟁의 종합보고서 『문제의 기독교와 용공정책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내면상 폭로(1)』를 발행했다. 이 문서는 1951년 9월에 발행된 46배판 크기 36면의 세로쓰기 등사본 책자이다. 이 문서는 제1편에 ‘기독교와 용공정책’ 팜플레트와 요청 전말, 제2편에 그 자료와 요청서에 대한 한국기독신문 기자 평론, 제3편에는 항의서와 통지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집에는 교회쇄신 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었던 경남기독청년면려회장 권성문, 신앙동지회장 강월남, 청년신앙운동회장 이우섭, 본 건으로 인한 피해자 송상석의 연명으로 된 성명서를 비롯, 여러 문서가 포함되었다.

   냉전 시대를 지난 이 시점에서 생각하면 한국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 중에 이러한 자료집을 배포했어야 했던가 싶기도 하지만, 송상석은 ‘기독교와 용공정책’ 문서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발행, 배포한 문서를 고신 측의 작업으로 오해하고 있던 바를 여러 증거로 논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 문서에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서울 진주 때 경기노회 인사들이 인민군 환영대회를 개최한 일, 미 북장로교회 선교회장 맥카이의 발언, 권연호 총회장이 초량교회에서 개최되었던 피난민 교역자 위안 부흥회에서 통회자복과 함께 맥카이의 용공정책을 재검토하자는 발언, 이승만 대통령의 맥카이에 대한 분노 표출 등의 의미 있는 기록을 만날 수 있다.

 

3) 고신교회 역사적 문서의 작성과 석명

송상석은 고신교회의 역사적인 문서를 몇 차례 작성했는데, 그 첫째가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가 발회 후 발표된 발회문이었다. 출옥성도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쇄신운동은 고려신학교 설립 이후 초기에는 고려신학교 문제로, 후에는 경남노회 문제로 총회에서 힘든 논쟁을 계속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제36회 총회가 고신교회를 축출함으로 6년의 지리한 논란이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고신교회는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제57회 경남(법통)노회 파회 후 이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를 발회하였다. 총로회 조직의 취지와 목적을 발표하고 임원을 선출한 후 회장 이약신과 부회장 한상동은 발회문 작성위원으로 송상석, 이학인, 장석인, 전성도, 황철도를 추천했고, 즉석에서 고려신학교 교수회원을 증원하기로 결의, 박윤선과 한부선이 포함되었다.

   다음날 총회는 “선포문 기초위원장 송상석 목사의 기초한 보고를 정정하여 채택”했다. 이 선언문은 “기초위원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약간의 첨삭이 있었겠지만, 이 문서의 구성, 전개, 대의는 송상석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국의 목사, 장로, 남녀 전도사 등이 3주간 자숙한 후, 10월 14일부터 사흘간 고려신학교에서 부흥회를 개최하고, 10월 16일 총로회 발회식에서 낭독하기로 결의, 선포하였다.

   또한 송상석은 1960년 고신측과 승동측과의 합동시 합동선언문 초안위원장으로서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사실 처음 승동측과 합동을 찬동하지 않았지만, 한상동의 뜻을 따라 합동에 가담했다. 합동원칙에 신학교 문제가 중요했는데,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단일신학교로 하고”로 보고되었으나, 그는 행정적인 예지를 가지고 “신학교는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하고”로 수정하기로 제안하여 통과되었다. 이는 합동이후에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었고, 고려신학교의 존립을 위한 법적인 장치를 만들어 둔 것이기도 했다. 초안위원들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합동선언문에서 큰 틀에서 합동 서문에 이어 전통 계승, 합동 원칙, 지도원리, 생활원리, 우리의 진로, 대외 관계, 우리의 결의와 권고 등을 일곱 분야로 나누어 정리했다. 이 선언문은 예장측 총회장 고승모 목사와 고신측 총회장 송상석 목사 및 총회원 일동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또 그는 합동총회가 1934년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으로 수정해 채택할 때, 헌법 수정위원으로도 참여, 합동총회의 헌법과 규칙을 정비했다.

   송상석은 10년 후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 때에도 1961년 11월 20일 ‘합동총회에 대한 호소: 경남(법통) 노회 결의와 해명을 공개함’이라는 문서를 발표, 고려신학교 폐교의 위기에서 승동측의 합동원칙 위반과 일방적인 행정에 저항했다. 46판 세로쓰기 25면으로 된 이 소책자는 경남노회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경남노회는 제-회 총회에서 항의서를 제출하며 총회장에서 퇴장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송상석은 문필가로서 고신을 대변하는 논설을 몇 차례 「파수군」에 기고하였다. “정시하자 한국 기독교의 앞날을”(1)(「파수군」 제8호, 1951년 8월호), “경남장로교회 진리 투쟁과 예배당 문제에 관한 관견”(「파수군」, 제11호, 1951년 12월호), “정시하자 한국 기독교의 앞날을”(2)(「파수군」 제15호, 1952년 3월호)을 발표하며 총회파의 행보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그 무렵 김린서는 한국교회 최고의 논객이자 문필가였는데, 김린서가 「신앙생활」에 연이어 고신교회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가 「신앙생활」 (통권 126호)에 ‘고신파의 성경유오설’이라는 글을 발표했을 때, 1955년 7월 「기독교보」에 “김린서씨 소론의 모순”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글을 논박하기도 했다. 이것은 김린서가 주기철 목사를 출간하면서 온갖 비난을 활자화했을 때, ‘하늘에도 그 책이 있던가요?’하며 털어버렸던 한상동 목사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그는 고신교회를 대변하는 문서를 다양하게 작성하고 논설을 발표함으로써 총회파의 불법성을 고발하고, 고신교회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단호하게 저항하였다.

 

 

3. 송상석과 법정소송 문제

1) 송상석 목사와 박윤선 교장의 법정소송 논쟁

한국장로교회는 1952년에 고신 측이 분립되고, 1953년에 기장 측이 분립되는 과정에서 교회가 어느 교파에 소속하는가에 따라 예배당 재산권 문제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기장 측과 총회 측의 분리과정에서는 처음부터 법정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많이 있었으나, 고신 측은 내부적으로 법정소송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해 어려움을 겪었다.

   제36회 총회가 고신측을 단절한 후 총회 측이 교회당의 명도를 요구하였다. 한상동은 95%의 성도들이 지지했지만, 교회 내분이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고 전도를 방해한다는 생각에 시무하던 부산의 대표교회 초량교회를 조건없이 내어 주고, 그를 따르던 신자들과 함께 삼일교회를 설립했다. 이와 달리 경남의 대표교회 문창교회를 맡고 있던 송상석은 총회파의 교회 명도 요구에 대해 응소함으로 대응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운동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던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 거창교회, 진주교회는 교회당 명도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남노회는 제55회 임시노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그 교회의 형편에 따라 처사할 것”을 결의했고, 몇 차례 이를 재확인한 바 있다.

   이 시기에 송상석은 그 논쟁과는 별도로 ‘성전파수는 진리전선에 승산있는 용사들의 투지’라는 간행물을 내었다. 연대미상의 고려출판사 이름으로 출간된 이 간행물은 46배판 8면 세로 쓰기로 편집되어 있는데, 경남노회유지재단으로부터 문창교회의 명도를 요구받고, 그 반박으로 출간한 문서였다. 이 문서는 총회측과의 재산 분규에 대해 총회 헌법과 관계 문헌을 바탕으로 교회당 재산권은 교회에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 송사 문제가 총회측과만 아니라 고신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제59회 정기노회에서는 “전노회에서 결의한 개 교회 형편에 따라 적당히 처리하기로 결의한 것을 재확인하고 차 건에 대하여 비난, 공격, 분열 선동을 엄금하기로 함”이라는 신학부, 학무부와 마산시찰부 임사부 연석회의의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고신의 신학을 대변하던 박윤선은 고린도전서 6장의 해석에 근거해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일반 관리들 앞에서 소송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입장을 가졌다.

   문창교회 법정소송이 해결되지 않고 오래 끌면서 전국교회의 이슈가 되었고, 박윤선은 총노회가 총회로 승격되던 제6회 총회에서 박윤선이 개회 후 호명에 이어 총대권 탈퇴 선언의 헤프닝이 있었고, 다음 날 고신교회가 개혁운동 10주년을 맞아 총회로 출발함에 있어서 과거 10년을 회고하면서 예배당 쟁탈 문제, 교회 질서에 대한 문제, 「기독교보」에 대한 문제, 신학교에 대한 재정 문제 등 네 가지를 고신교회 개선할 과제로 제시하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총회 발회 이후 진정한 발전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발언은 신학교 교장으로 할 수 있는 권한 밖이었고, 믿는 자들끼리의 법정소송을 반대하는 박윤선의 입장을 지지하는 경기노회의 행정보류 등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박윤선은 1957년 2월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파수군」에 ‘우리의 걸어갈 길’과 ‘나의 나아갈 길’을 발표했다.

   이 일로 이미 고신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송상석이 문창교회 문제로 신학적으로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는 양상이 되었다. 이에 대한 송상석의 대응으로 박윤선과의 법정소송 논쟁이 되어 여러 차례 논설을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박윤선은 교장직을 사면하고 서울에서 개혁신학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박윤선의 개혁신학원 운영도 여의치 않았고, 박윤선 교장이 없는 고려신학교도 신학교육에 어려움을 당하면서, 고려신학교 관계자들은 1957년 9월 13일 소송을 하지 않기로 하는 교육이념을 따라 교육한다는 결의서를 발표하고, 9월 하순에 고신 교장직에 복귀하였다.

   이러한 법정소송 문제에 대한 박윤선과 송상석의 논쟁에 대해 한상동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자신은 90%의 성도들이 지지하는 가운데서도 초량교회당을 포기하고 나왔고, 경남노회가 각 교회의 형편대로 할 일이라고 여러 차례 결의했기 때문이었다. 연구자의 개인적인 판단은 한상동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한 것은 신학논쟁이 과도하게 확대되어 박윤선의 입장을 지지한다면 송상석이 이끌고 있는 경남노회를 잃을 위험이 있었고, 송상석을 지지한다면 고신의 신학을 대표하고, 변증해왔던 박윤선을 잃을 수 있었던 매우 곤란한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상동은 이 문제를 꼭 성경적, 신학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개혁신학원과의 고려신학교의 합동으로 박윤선이 신학교에 복귀하였지만, 이 시기에 박윤선과 송상석은 물론, 박윤선과 한상동의 관계도 신뢰가 무너지고 있었다. 박윤선은 신학교에 복귀한 후 2년을 더 봉사하다가 연구의 길을 떠났다. 네덜란드 자유대학 박사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1959년 12월에 미국에서 논문을 준비해 제출했으나 지도교수와 입장의 차이가 있어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1960년 5월 29일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이어 1960년 7월 오랫동안 동역했던 정통장로교회 선교사 스푸너의 출국시 발생한 주일예배 불참에 다른 주일성수 문제로 1960년 9월 고신교회를 영영히 떠났다. 사실 남영환의 언급과 같이, 이 문제는 주일성수 문제이기 보다는 박윤선과 송상석의 소송논쟁의 여파라고 보는 것이 옳다.

 

2)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출판

일제강점기에 박해가 심했던 시절 목회를 떠나 황해도 황주에 내려가 은둔생활을 하던 송상석은 서울에서 절제운동을 재건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송상석은 거제 장승포교회와 가술교회를 거쳐 마산 문창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하였다. 문창교회는 초기에는 고신을 지지하는 성도들이 많았지만, 경남노회 유지재단의 명도소송에 응소하면서 오랜 교회분쟁이 지역사회에 덕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던 고신계 성도들이 제2문창교회와 오동동교회(현 마산동광교회)를 설립해 떠나면서 교회 내 다수가 되지 못했다. 송상석은 21년간의 긴 소송을 거쳐 “교회의 재산은 교인의 총유”라는 대법원 판례를 받아 내었다.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교회당을 내어주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송상석은 출옥성도는 아니었지만 교회쇄신운동에 참여해 몇 년 사이에 고신교회 안에서 총회적인 리더십을 갖게 되었고, 박윤선의 고려신학교 인퇴후 한상동과 함께 확고부동한 양대 지도력을 갖게 되었다. 1968년 11월 이사장 취임 이후 교수회와 여러 차례 심각한 갈등이 있었고, 병원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되면서 관계자들이 불편을 느끼고 있었고,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유일한 지도자였던 한상동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이사장으로 재임중에는 교수들이나, 복음병원과도 불편한 일들이 더러 있었다. 그는 1972년 이사장 임기 4년을 마쳤지만, 문교부의 임기가 남아 있다는 해석을 근거로 이사장직을 이관하지 않고, 법적 이사장을 주장했다. 고신교회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 과정에서 교단 내 소송이 이루어졌으며, 송상석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제24회 총회에서 경북노회가 제출한 헌의안에 따라 송상석의 비행에 대한 처리의 건은 총회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처리하기로 결의하였고, 그는 1974년 12월 4일 목사 면직 판결을 받았다.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가 있었지만, 이는 평생 고신교회를 섬겼고, 또 일정한 공헌이 있었던 지도자에 대한 처분으로서는 과한 것이었고, 그 결과 경남(법통)노회가 행정을 보류하면서 노회가 둘로 나누어지는 불행이 왔다.

   1975년 7월 제일문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된 그는 평소 가졌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법정소송과 종교재판』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1976년 경남법통노회에서 발행한 이 책은 국배판 양장본으로 294면과 부록으로 되어 있다. 삼 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상편에 성경과 공법원리에서 본 소송원리를 주제로 소송에 대한 삼대 비판과 척도, 법정소송 문제에 대한 비판의 삼대 표준원리, 비성경적 성도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 등 12편의 논설, 중편에 문창교회 소송에 대한 진상과 고려파교단 재산관리 처분 문제 등 두 편, 하편에 소송 원인과 결과를 주제로 하여 고려파 교단의 역정, 고려파 내분의 진전과정, 총회 소유 재산 귀속 문제, 출판물 명예훼손 문제 등 6편의 논설이 실려 있다. 부록에 경남노회의 고려신학교 인가증명서를 비롯한 고신교회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송상석이 총회특별재판국에서 면직된 후 생애 마지막에 자신에 대한 해명성 저서로 출판한 것이라 한상동에 대한 원망이 여러 곳에 묻어나는 등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교회 소송에 관한 다양한 기록과 고신교회 역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망라해 독자적인 저술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4. 송상석 목사와 역사의식

 

1)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 편집

송상석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던 1934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을 맞았다. 총회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3회 총회를 개최하면서 희년대회를 갖고,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를 간행했다. 이 책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발행하고, 편집 책임은 송상석이, 발매는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가 담당하였다. 표지 안에 조선교회라는 글자에 지도자들의 사진을 넣었고, 이어 미국남북감리교회 선교부를 포함해 조선 주재 각 선교부의 담당구역을 지도로 표시하였다. 총회장 이인직이 권두사를, 북장로교회 선교회장 허대전이 영문으로 축사를, 송상석이 편집 과정을 적었다.

   가로 27cm 세로 20cm의 크기의 앨범식으로 된 이 역사화보는 모두 20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를 중심으로 각 선교부들과 협력, 방대한 사진들을 모아 모두 23부로 구성했다. 제1부 총서에서 각 노회 분포도와 교세 비교, 조선교회의 발아기, 종파별 현황, 연대별 약사. 50주년 약사를 정리하고, 이어 24편에 걸쳐 조선교회 창설 기초 공작, 조선교회 수난 약사, 중요 초대교회당들, 선교사들의 사진, 선교 25년 이상 된 선교사들, 전문교육기관과 중등학교 교육, 주일학교 대회, 기독교 문화운동과 청년운동 등으로 자세하게 분류, 정리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희년 축하연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이상규는 “이 책을 편집, 출판한 공로만으로도 그에게 큰 상을 주어 마땅하다”고 할 정도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서책이다. 역사화보편집위원회는 총회장 이인직, 서기 홍택기 외에 4인 위원이 있었고, 송상석은 총무의 책임을 맡았다. 이 서책의 부록으로 제공된 통계표는 한국장로교회의 모습을 파악하게 한다.

   송상석은 숭실전문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된 한국장로교회 50주년 축하 기념예배를 위해 대회의 설비위원으로도 봉사했다. 이때는 3월 14일 총회 기간에 졸업식을 가졌는데, 송상석이 신학교 재학중에 화보 편집 책임자가 되고, 50주년 기념대회와 축하회 순서에 이름이 포함되었던 것을 보면 그의 역량이 절제운동과 박형룡이 저술한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 교열을 통해 박형룡과의 사제지간 외에도 특별한 관계를 맺었고, 그가 신학교에서는 물론 총회지도부에서 널리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2)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50년 약사』

1959년 연동측과 승동측을 분리된 지 1년 만에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하여 합동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송상석이 역사와 관련된 두 번째 일은 총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50년 약사』를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이대영, 이인직, 송상석이 공동으로 편집, 46판 100면으로 출판해 1912년 총회 설립 이후 장로교 총회 50년의 역사를 담았다.

   이 약사는 먼저 합동총회, 제1회 독노회, 최초의 7인 목사, 출옥성도 사진 등을 20면 화보로 구성하였다. 상편에서는 본격적인 역사로 한국장로회 약사를 정리했는데, 한국인의 장로교회 준비시대, 외래선교 준비시대, 한국장로교회 조직시대, 한국장로교회 육성시대, 한국장로교회의 수난시대, 희비극교차시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과 합동, 하편에서는 5년의 독로회의 역사와 장로회 총회를 연대별로 중요 결의사항과 역사적 사실을 정리했다. 특히 고신측이 분리된 제37회 총회(1952년)부터는 고신측 총로회부터 10회 총회까지의 역사를 병기했고, 합동총회였던 제45회 총회의 결의사항을 정리했다. 부록으로는 선교 상황 보고, 전국여전도회 현황, 세계장로교 선교부의 상황, 한국교회의 3대 은사와 4대 박해를 실었다. 이인직의 수기 일부를 포함한 부록 제4부를 제외하면 중요한 부분이 송상석의 작품이었다.

   합동 총회시 고신측 역사를 이원적 사실로 기록하게 한 합동원칙대로, 송상석은 약사 편찬에서 고신측의 총회 단절 이후의 역사를 병기했던 것이다. 한상동은 총회장 서문에서 “특히 고신측 총회와의 경사스러운 합동사실이 약사에 수록된 것을 거듭 감사”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50주년 약사”를 집필한 송상석은 이를 총회 창립 50주년 기념대회에서 낭독하였다.

 

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제1회-제10회)(1961),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제11회-제20회)(1972)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노회 상황보고와 부록의 자료를 포함하여 매년 총회록을 발행했지만, 고신교회는 교세가 작고 재정도 충분치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총로회가 조직된 후부터 「파수군」을 통해 그 결과가 공지되었고, 총회 촬요를 정리해 전국교회에 배포했다.

   송상석은 총로회 조직 이후 10년간의 총회 회록을 모아 고신교회의 역사적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제10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바로 승동측과 합동이 추진되어 속회 때까지만 총회장으로 일했다. 총회장으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합동 추진이었고, 합동추진위원으로서 합동 과정과 선언문 작성에 그의 노력이 담겼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제1회-제10회)』은 국판 세로쓰기 218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회록과 각 회 부록으로 임원과 부원, 각 노회 상황 역대 임원, 총회 통계 등이 함께 실려 있다. 각 회수별로 색지를 간지로 넣어 구분이 편리하게 제작했고, 차례 뒤에 역대 임원 명단을 종합하여 실었다. 제1회 총로회 부록으로는 고신의 출발을 선언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 발회 선포문’을 실었고, 제6회 총회의 부록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의 첫 총회 규칙, 그리고 헌법 채택과 그 수정안 내용이 실려 있다. 이 회록은 1961년 9월 5일 발행하였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송상석, 그가 대표로 있던 칼빈문화출판사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송상석은 합동 당시 총회장이었고, 출판부장이기도 했다. 그는 기구적인 고신교회가 없어지는 순간에도 총회록을 편집, 출판함으로써 고신교회 초기의 역사와 사료를 남긴 것이었다.

   송상석은 1970년 9월 제2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어 임기를 마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제11회-제20회)』을 발행하였다. 이 회록은 국판 가로쓰기 346면으로 되어 있고, 당시 서기 이기진이 엮었다. 이 책에는 합동 제45회(고신 제10회) 총회의 계속회 자료를 실어 합동과정과 관련된 합동위원 보고서가 실려 있고, 헌법과 총회 규칙 수정안, 초안위원장 송상석이 작성, 제출한 합동 취지 및 선서문이 상세하게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송상석은 고신교회의 초기 2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총회 회록을 두 차례 정리, 간행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역사성 있는 성회의 작업 실태를 영구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회록 간행 이유를 적었다. 이 두 회록은 오늘날 고신교회 초기 역사 연구에 소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4) 교단 창립 20주년 화보 『우리 교단의 어제와 오늘』 등

송상석이 제20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총회 20주년 기념화보를 간행하기로 결의했다. 사실 이 일은 김도윤 장로가 개인적인 열망에 의해 제17회 총회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송상석에게 요청하여 성사되었다. 그런데 총회에서 편찬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김도윤이 홀로 책임을 지고 일하였다. 그는 한 해 동안 준비해 이듬해 총회시에 『우리 교단의 어제와 오늘』을 펴내었으며, 송상석이 머리말을, 한상동과 한부선이 찬사를 썼다. 140면 앨범식으로 구성된 이 화보집에는 한국교회 역사로 송상석이 편집하였던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의 사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고신교회 역사로 고려신학교, 복음병원, 선교사 편 등이 포함되었고, 각 노회별로 교회의 사진과 중요직분자들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산하기관들의 조직과 임원 사진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화보 제작을 위해 개인적인 열망으로 노력해 오던 중 송상석의 협력으로 가능하게 되었고, 홀로 위원이었던 김도윤은 송상석이 편집하였던 그 서책의 자료들을 다수 활용하고 있고, 그의 지도를 받아 편집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고신교회는 한국교회 100주년, 고신교단 창립 50주년 등 세 차례 역사화보를 출판하였다.

   송상석은 이와 함께 「파수군」 지령 100호를 기념해 편집부의 청탁을 받고, “장로교회의 한국유래와 고신파 진리운동의 발전 경위(1, 2)”를 발표하면서 고신교회의 역사를 잘 정리했다. 그가 밝히는 것과 같이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사양하였으나 편집부의 간청으로 이 글을 집필했는데, 학술적인 논문은 아니지만, 고신교회 역사와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 현실을 보여 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송상석의 역사의식의 소산이었다.

 

 

5. 송상석의 출판과 문서 운동

 

1) 총회 출판위원 활동과 칼빈문화출판사 대표 활동

송상석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로회 제5회 총로회에서 출판위원을 설치하면서 출판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칼빈문화출판사 대표로 있었다. 그는 신학생 시절 박형룡의 『현대신학난제선평』(1935) 교열,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1934) 편찬, 「절제시보」 발행은 물론 절제운동을 전개하면서 절제공과 집필과 단행본 『유년절제독본』(1934)을 출판한 일도 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편집과 출판에 전문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는 칼빈문화출판사를 통해 『사랑의 원자탄』 (전편), 『사랑의 원자탄』 (속편), 『태양신과 싸운 이들』 (1956) 등을 출판하였다. 이 출판 수익은 ‘대한기독교순교자유가족원호회’를 통해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 유족들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그의 출판 활동은 「기독교보」 창간과 『새찬송가』 발행,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 발행 등으로 나타났다.

 

2) 「기독교보」 창간

고신교회 지도자들은 초기부터 문서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장로교 총회 안에서 소수파로서 교회쇄신 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문서운동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신학교가 ‘진리운동’ 소책자를 네 차례나 간행한 것이나, 「파수군」을 창간한 것도 그 이유였다. 한부선도 이와 관련해 미국에서 인쇄용지도 수입했고, 출판 설비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을 볼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는 문서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1955년 4월 제4회 총로회에서 출판위원회를 신설했고, 송상석이 위원장을 맡았다. 송상석은 사업계획 보고에서 「기독교보」 창간 계획을 밝혔지만, 출판위원회의 보고 별지가 보존되어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송상석은 총회결의를 기반으로 1955년 6월 8일에 「기독교보」의 창간호를 내었다. 신문의 창간은 많은 인력과 재정이 필요한 것이었고, 전후의 물자 사정도 여의치 않았지만, 그가 1934년에 이미 「절제시보」를 창간하고 발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

   송상석이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한상동을 고문으로, 박윤선이 주필로, 청년 김경래가 편집부장을 맡아 「기독교보」를 간행했는데, 따블로이드 판 2면이었다. 창간호에는 한상동, 박윤선, 전철홍의 축사가 실렸고, 정부의 공보실장 갈홍기의 ‘파수꾼의 나팔이 되라’는 격려사가 실렸다. 박윤선의 ‘우리의 신앙노선’이 3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고려신학교의 연혁도 볼 수 있다.

   「기독교보」 편집에는 독자를 위해 제3호부터는 임옥인의 소설 연재, 교계와 사회의 ‘주간 동정’, 기자들의 후일담 ‘교계춘추’, 외국인들을 위한 ‘English Edition’이 포함되어 신문으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기독교보」는 창간호 발행 이후 6개월 동안 정상적으로 발행했지만, 12월에 합병호를 두 차례 발간했고, 1956년에는 총회까지 9개월 동안 네 차례만 발간해 출간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고신교회의 규모와 재정적 역량으로 잡지와 신문 두 가지를 함께 발행하는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박윤선은 진리운동 10주년을 맞이하여 총회 석상에서 고신교회가 당면하게 개혁해야 할 과제로, 예배당 쟁탈 문제, 교회 질서에 대한 문제, 「기독교보」에 대한 문제, 신학교에 대한 재정문제 등 네 가지를 제시하였는데, 「기독교보」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서 발간하였던 「파수군」과 중복되어 교회쇄신운동에 지장을 준다고 여겼을 것이다.

   「기독교보」의 운영이 작은 교단 규모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1956년 9월 제6회 총회에 그 부채 문제가 정치부에 보고되었고, 송상석은 출판위원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사면서를 제출했다. 신문 발간에 따른 60만환의 부채를 구제위원회가 담당하기로 하였고, 향후 신문은 총회와는 관계가 없어지는 것으로 하고, 계속 발행 여부와 사장 사면에 관한 것은 직원들에게 위임되었다.. 이것은 총회가 더 이상 재정 부담을 하기 어려우니 폐간하라는 결정과 같아서, 「기독교보」는 1956년 9월 20일 32호를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는 신학교도 운영도 어려운 때였으니 교단의 교세와 재정 규모로 보아 「기독교보」와 「파수군」을 함께 운영할 여건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기독교보」는 정간 후 43년만인 1989년 총회를 기해 복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송상석 목사와 교회 미래를 위한 준비

 

   송상석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보고,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준비해 제안하고 회원들을 설득하여 일을 추진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신교회에서 은급제를 도입한 것과 새찬송가 편찬 작업이다.

 

1) 은급제도의 도입

송상석은 제17회 총회에서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총회에 은급제위원회를 제안하였고, 그가 제안한 초안을 기초로 제5장 15조, 부칙 4조에 이르는 규칙을 제출, 통고하여 은급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총회의 규모가 작아서 대상자인 목회자 수가 제한되었고, 불행하게도 담당 회계의 재정 사고로 이를 지속할 수 없었다. 총회에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이는 총회 측(통합 측)이 은급제도를 도입한 이듬해이었다. 고신교회는 1994년에 다시 시작하여 오늘의 총회은급재단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교회의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고, 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장통합 측에 이어 한국 여러 교단 중에서 은급재단의 보유금이 1,000억을 넘기며 한국교회 교단 제2위의 규모를 갖추고 있고, 가장 내실이 있는 연금제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새찬송가』 편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고도 밀접한 것이 성경과 찬송가이다. 이 둘은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에 늘 함께해 이에 대한 친근감의 정도가 신앙의 질을 결정한다. 새찬송가 서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생명의 양식을 주는 보고라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이야말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성도들의 감사와 감격에 넘치는 신앙생활의 표현일 것이다.”로 시작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가 제6회 총노회에서 총회로 승격되면서 출판위원이 신설되었는데, 송상석은 출판부장으로 선출되어 승동측과의 합동시까지 봉사했다. 그는 총회에서 찬송가 편찬 작업을 제안해 제7회 총회에서 찬송가를 계속 발간하도록 허락받았다. 제8회 총회에서는 출판위원과 별도로 찬송가 출판위원회가 특별위원회로 구성되었고, 그는 부장으로서 찬송가를 발행하지 못한 경과보고를 하였다. 제9회 총회에서는 찬송가 편찬을 위해 마두원, 박손혁, 안용준, 한대식, 김상도 5인을 전문위원으로 선임하였고, 제10회 총회에서 문덕준이 추가되었다. 제9회 총회가 예산도 지원하면서 편찬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당시까지 한국장로교회 찬송가 역사는 1893년 언더우드에 의해 국내 처음으로 한글로 된 찬송가를 출판하였고, 1897년 미국북장로교회에서는 찬송시가 출판되었다가 1928년에 장감 연합으로 신정찬송가를 출판했지만, 공동으로 사용치 못하고, 장로교회에서는 400장으로 된 신편찬송가를 발행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1946년 장감성에서 합동찬송가를 출판하여 사용하였고, 고신교회는 이전의 신편찬송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장로교 총회측에서는 WCC와 관련된 신앙노선 문제가 부각되면서 합동찬송가가 그러한 연합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알고, 1957년 찬송가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WCC문제가 총회의 블랙홀이 되면서 큰 진척이 없었다.

   고신측은 제9회 총회 후 송상석과 전문위원들이 총회의 예산 지원 아래 23차례 모여 선곡과 독회를 거쳐 신편찬송가 안에서 383곡, 마두원 선곡 30곡, 기타 각국 찬송 249곡 등 모두 662곡을 선정, 독회를 마치고 출판을 위한 예산안을 제출했다. 제10회 총회에서는 찬송가 출판을 위해 생명의 말씀사와 교섭해 출판비 부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보고한다.

   그러다가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하면서 합동위원회에서는 합동 기념사업으로 찬송가를 편찬하기로 결의하였고, 수년 동안의 준비에 이어 다시 한 해 동안의 준비를 거쳐 모두 671곡과 교독문을 엮어 1962년 12월 20일에 초판을 출판했다. 이렇게 발행된 『새찬송가』는 1985년 한국교회 100주년을 맞아 하나의 찬송가로 통일작업을 할 때까지 20년간 보수적인 교회를 대표하는 찬송가였다. 그러나 이렇게 고신 측의 노력으로 편찬한 『새찬송가』는 이듬해 합동측에서 환원할 때 「파수군」과 함께 판권을 합동 측에 그대로 두고 나와야 했다.

 

 

6. 합동과 환원기의 송상석 목사

 

   송상석은 합동과 환원기에 특별한 봉사를 했다. 그는 고신총회 제10회 총회(1960. 9. 20-23)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승동측과의 합동을 원하지 않았으나 한상동의 강력한 의지로 합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나 그 직무는 합동을 위한 준비하는 3개월이 임기의 전부였다. 행정에 밝은 그는 총회장으로서 합동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헌법개정을 주도하였고, 합동위원회에서 승동측에서는 ‘신학교 일원화’와 ‘총회 직영의 단일신학교’를 제안했지만, 합동총회에서는 신학교 ‘일원화’하는 것으로 수정하여 통과하였다. 단일화는 두 신학교의 합병으로 인한 고려신학교의 폐쇄를 의미했지만, 일원화는 한 이사회의 관할을 받는 두 신학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송상석이 고려파의 존립을 위해 신학교를 존립하게 해야 한다는 송상석의 예지가 반영된 결과였고, 신학교 이사회도 양측 동수로 결의했지만, 결국 정치에 능한 승동측의 인사들에 의해 신학교 단일화가 추진되었다. 합동총회 제46회 총회(1961)에서 승동측에 속한 인사들의 긴급 제안에 따라 총회장으로서 사회를 맡았던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에 의해 고려신학교 합병이 결의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였다. 그것도 이는 고려신학교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부산남교회에서 있은 일이었다. 합동총회 제46회 총회(1961)에는 총회결의 무시와 신학교 폐쇄 등에 다른 항의로 경남노회가 항의하고 퇴장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경남노회에서는 《경남(법통)노회 결의와 해명을 공개함》라는 책자를 발행하여 합동총회의 잘못된 행정에 대해 항의하며, ‘총회 퇴장은 최종적인 호소’임을 분명히 했다.

   환원에 대해서도 송상석은 고신측이 합동하였으면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에 환원을 원하지 않았지만, 다시 고려신학교 폐쇄에 다른 위기감을 늦게 인지한 한상동의 뜻에 따라 환원에 동참하였다. 고신측이 환원했을 때는 환원에 동참한 교회를 보면 한상동이 속한 부산노회는 100교회 중에 69교회(69%)인 반면, 송상석이 속한 경남노회는 161교회 중에 143교회(88.8%)가 환원함으로 그의 정치력과 리더십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송상석의 평소의 강한 리더십은 노회원들에게는 부담이 되었을 수 있었겠지만, 교회들이 강한 연대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경기노회의 경우 이북 출신 목회자들이 소송문제에 대해 박윤선의 입장을 지지해 행정보류로 이미 이탈하였기 때문에 환원비율이 높은 것이다.

 

 

합동과 환원시 고신교단의 통계 비교(1960-1963)

 

노회

교회 수

당회 수

목사 수

1960

1963

비율

1960

1963

비율

1960

1963

비율

경남

161

143

88.8

37

42

113.5

23

35

152.1

경기

23

21

91.3

-

미확인

 

11

7

63.6

부산

100

69

69.0

34

24

70.5

39

32

82.0

진주

155

85

54.8

32

16

50.0

18

16

88.8

전라

30

20

66.6

4

미확인

 

9

5

55.5

경북

경북

121

70

80.1

28

32

114.2

26

38

173.8

경동

27

미확인

7

합계

590

435

73.7

135

114+a

84.4

126

140

111.1

 

 

 

요약과 맺는말

 

   지금까지 송상석 목사가 고신교회에서 어떻게 사역하였고 그가 고신교단에 어떤 공헌하였는가를 정리했다. 그의 공헌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송상석은 고신교회 초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내정된 박형룡 박사와 그 가족을 귀환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UN군(미 군정)의 신탁통치 상황에서 남북한은 물론 한국과 중국의 국교가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둘째, 송상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50주년 기념화보』 (1934)를 편찬한 경험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록(제1회-제10회)』 (1961), 『대한예수교장로회 50주년 약사』 (1962),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록(제11회-제20회)』 (1971), 고신총회 20회 기념 『고신교단의 어제와 오늘』 (1971)을 편찬 혹은 발행하여 교단이 합동되어 사라지는 순간에도 역사의식을 갖고,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고신교회 첫 10년의 역사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셋째, 그는 「기독교보」를 창간, 문서운동을 전개하여 교단의 신앙적 신학적 일치와 연대를 추구하도록 했다. 「절제시보」를 창간한 바도 있는 그는 문서운동가로서, 총회파와의 관계에서 고신교회 변증가로서 지울 수 없는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고신교회에서 절제운동과 행정, 문서운동에서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넷째, 그는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고신교회가 총회와의 갈등 과정에서 여러 문서를 작성하고 발행하는 일에 앞장서 총회 측의 교권주의 행태를 고발하고 행정적인 문제점을 지적해 개선하고자 했다.

   다섯째, 송상석은 찬송가 출판위원장으로서 여러 해 동안 찬송가 편찬 작업을 지휘하였고, 책이 출간을 앞둔 시점에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기념으로 새찬송가를 출판하였다. 새찬송가는 1985년 통일찬송가를 편찬하기까지 고신측과 합동측은 물론 한국교회 보수교회가 사용하였던 공식적인 찬송가였다.

   여섯째, 송상석은 특유의 행정적인 감각으로 고신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았고, 은급제도 도입, 「기독교보」 창간, 새찬송가 편찬 등의 중대한 과제를 총회에 제안하고 설득하고 이에 앞장서서 추진해 분야마다 큰 성과를 얻었다. 지난 130년의 한국교회 역사에서 초교파적으로 이같은 광범한 성과를 얻고 영향을 미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일곱째, 송상석은 1960년 승동측과의 합동기에 신학교 ‘단일화’가 아니라 ‘일원화’로 고려신학교를 존립하는 근거를 마련하였고, 이후 발생할 수도 있는 만일의 사태에서 ‘고려파’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 삼았다. 아울러 1963년 환원시에 부산노회가 100교회 가운데 69교회가 환원하였던 것에 비해, 경남노회는 161교회 가운데 143교회가 환원함으로써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송상석은 합동과 환원기에 신학교 문제나, 승동측의 다수의 탈법과 횡포에 대해 항의하였고, 경남노회에서 교회를 격려하여 고신교회의 기반이 무너지지 않게 한 공헌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가 1960년대 고신교단에서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한 것은 이같은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신교회는 물론 그의 한국교회사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송상석은 박윤선과 생사를 건 송사 논쟁으로 박윤선이 고신교회를 떠나는 일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이는 고신교회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소송이 장기간 지연되어 대법원까지 올라가면서 한국교회에서 고신교회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는 데도 관여되었다. 또 그는 고신교회에서 ‘행정의 달인’이었지만,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할 당시 과도한 행정으로 설립자나 교수진은 물론 복음병원 관계자 등과 갈등하면서 1970년대에 고신교회에 불행한 정치 바람을 불게 했다. 무엇보다도 한상동, 박윤선, 송상석 세 지도자의 리더십 정립과 균형으로 고신교회가 신앙적, 신학적, 정치적으로 안정을 가져왔지만, 박윤선의 고려신학교 인퇴 이후 한상동, 송상석 두 지도자의 직접적인 대립을 가져왔고, 경남(법통)노회의 행정보류와 반고소고려측과 40년 동안 교단 분열 상태를 가져온 것은 무척 불행한 일이었다.

   역사적 인물들은 누구나 그 시대의 아들들이다. 누구나 시대의 영향과 제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공과 과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교회와 한국교회 역사에서 송상석 목사가 남긴 족적은 앞서 언급한 여러 책과 문헌에 선연히 새겨져 있다. 송상석 목사의 삶과 사역과 정신이 오늘의 고신교회의 경건과 영성 형성에 한 흐름을 만들어오고 있다. 선진들의 아름다운 삶과 경건이 우리 역사에 풍요롭게 가미되고 아름답게 계승되어 고신교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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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고신교회 제7차 헌법개정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고신교회 제7차 헌법개정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서론 교리표준(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과 관리표준(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으로 이루어진 교회 헌법은 법 조항들로 이루어진 교회론이라 할 수 있...
    Date2021.05.11 By개혁정론 Views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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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교실, 정신과학교실, 인지과학협동과정,시스...
    Date2021.04.30 By개혁정론 Views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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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범 교수)

    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범 교수 (서울대) 오늘 뜻깊은 자리에서 제가 큰 흥미를 느끼는 주제에 대해...
    Date2021.04.26 By개혁정론 Views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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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설] 성찬상을 모독하지 마라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