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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뇌과학이 인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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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정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교실, 정신과학교실, 인지과학협동과정,시스템뇌과학센터)

 

 

 

들어가며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뇌 지식의 확장 속도와 뇌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뇌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실시간으로 소개되면서 뇌지식은 더 이상 전문가에게 한정된 분야가 아니다. 학문적으로 뇌과학은 신경과학이나 인지과학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경계를 넘어 인문학, 사회학, 철학 영역에 속하는 제반 질문을 답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뇌과학이 전통 학문 분야에 대해 새로운 해답을 제시할 것 같은 기대감과 전통적 해석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경계감이 상존한다.

 

   현대 뇌과학 분야에 대한 특징을 요약하면 과도한 철학화 또는 메타과학[1]화 열풍이라 할 수 있다. 뇌에 대한 과학적 발견에 그치지 않고 그 발견이 함의하는 바를 확대함으로 자연 과학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삶의 거의 모든 분야들을 해석하는 새로운 권위를 얻은 듯 하다. 뇌과학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단순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뇌과학의 테이블에서는 생화학적 물리적 활동의 측면에서 관측가능한 것을 대상으로 하고 그 관측을 기반으로 그 대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인간의 의식, 자유 의지, 정신이나 어떤 주제이든 그 테이블에 올라오는 순간 관측 가능한 생물학 측면으로 환원된다. 다른 요소들은 뇌과학 테이블이 아니라 다른 테이블로 가서 이해될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어떤 정신활동을 요구하는 선택 과제를 수행할 때에 뇌 전두엽에서 전기 생리 신호가 측정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정신활동이 전기 생리 활동으로 관측되었기에 물질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탐구하게 한다. 뇌과학 테이블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속성이 있다고 해서 비물질적인 정신 속성은 존재하지 않고 물질적 속성들이 만들어 낸 착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뇌과학 테이블에서 실험을 하고서는 철학자의 테이블로 가서 결론 내리는 것과 같다. 이는 뇌과학에서 출발하여 철학이나 메타 뇌과학화 되는 것이다. 전기 생리 신호를 기반으로 해당 정신활동의 근간이 되는 생물리적 특성에 대한 해석은 그 실험 데이터가 뒷받침할 수 있다. 반면, 그 실험 데이터가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는 속성 (존재 여부)을 판단하는 것 까지 뇌과학이 답 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하면 철학화 되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철학적 진술들이 뇌과학의 이름으로 대중에게 이슬비 처럼 다가가기 때문에 과학과 메타과학적 사실이 구분되지 않는다.

 

 

 

   현대 뇌과학의 또 다른 현상은 대중적 권위화이다. 뇌과학 지식에 대한 선호는 뇌과학자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반 대중 강연에서 어떤 주장을 할 때에 뇌를 기반으로 설명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뇌과학보다 더 상위 주제를 다루는 사회학자나 종교학자들마저도 뇌 생물학적 자료에 의존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그 주장에 반드시 뇌과학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해당 주장을 반드시 뒷받침한다고 할 수 없는 뇌과학 지식이 차용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어떤 주장에 뇌과학적 권위를 부여하면 객관성을 확보하고 대중을 설득하기에 유리할 수 있다. 대중에게 있어서 뇌과학 진술은 보다 더 참신하고 객관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실(견해가 아니라)일 뿐 아니라 개인 서사에 핵심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누구나 치매나 파킨슨 질환이라는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으며 10명중 3명꼴로 뇌 관련 질환이 자신이나 가족에 있으며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스스로를 피곤하게 했던 자신 내면의 문제들에 생물학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은 그 분투하던 개인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위로이다. 감정 조절이 잘 안되고 무기력하며 강박적이며 망상에 사로 잡히고 포르노와 마약에 중독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누구보다 더 힘들다. 생물학적인 “뇌 탓”을 하게 되면 “내 탓”으로 책임 지우던 부분에 대해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생물학적 요인은 뇌정신 질환에 중요한 사실이고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문제를 접근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유익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더 차원 높은 인간의 고유 속성과 사회 문화적 가치 보다는 생물학적인 작동원리가 인간의 모든 행동 원리로 더 주목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현재 뇌과학은 뇌과학[2]에 충실하는 것을 넘어서 특정 세계관(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관)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생물학적 결정론[3]을 기반으로 한 철학적 자연주의(혹은 물리주의)를 뇌과학이 절대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으로 당연시한다. 뇌과학 자체가 어느 특정 세계관에 더 유리한 증거를 제시하는지는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경쟁하는 세계관들의 우월성을 평가하는 것을 뇌과학이 할 수 있는가 묻게 된다. 뇌과학이 세계관에 의해 해석되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뇌과학이 특정 세계관들의 타당성을 평가하려면 그 기준을 정해야 하는데 특정 세계관에 독립적으로 선정하기 어렵다. 객관적으로 입증한다고 하지만 순환적[4]이기 쉽다. 뇌는 무신론적 자연주의든 유신론적 입장이든 인간에게 있는 생물학적 현실이고 정신적 현실이다. 물리, 화학, 생물학적 원리를 따라 약물은 인간의 마음을 바꾸고 전기 자극에 따라 감정과 행동이 바뀔 수 있다. 한편 근원적 사랑과 의미를 추구하고 삶의 가치를 찾지 못했을 때 스스로 삶을 마무리 하려는 심적 고통, 고행을 행해야 하는 죄의식은 뇌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물리적 활동(또는 오작동)으로 치부하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다. 뇌는 그러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에 어떻게 뇌를 이해할 것인가는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에 따라 구분되어 진다. 뇌과학이 밝힌 생물학적 뇌가 인간 실재의 모든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할 것인가로 구분된다. 유물론적 자연주의 입장이 전자에 해당이 된다면 유신론적 기독교 세계관의 경우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의 경우 뇌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마음에 두신 생물학적 계획의 결과물이며 영혼과 구분되는 실체라고 생각할 것이다. 뇌에 대한 지식을 얻어 가는 과정 즉 뇌과학 자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적 능력에 근거하므로  (물리적 속성을 벗어날 뿐 아니라) 그 지식의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믿는다[5]. 인간 자신의 생물학적 양태인 뇌는 단순히 영혼을 매개하기 위해 구상 된 것이 아니라 영과 몸, 하늘과 땅의 완전한 연합을 생각하신 하나님의 의지라고 믿을 것이다. 생물학적 속성으로서의 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계획은 기독교 전통에서 충분히 강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할 신학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생물학적 뇌지식에 대한 상세와 깊이와 너비는 인간을 설계하신 창조 계획의 깊이와 너비를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뇌과학에 의한 생물학적 뇌지식은 영혼 중심적인 반쪽 사고를 보완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 신자라면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서 만유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 이라고 외치지 않는 것은 일인치도 없다[6]” 라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뇌과학이 밝혀 내는 뇌에 대한 지식을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뇌 해석의 주요 논점

 

 

   정보 처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뇌를 이해하는 것도 신경생물학 기반이 강한 뇌과학 분야에서는 다소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 하물며 마음에 대한 문제이고 정신에 대한 문제이며 더 나아가면 영혼에 대한 문제들은 전통적인 뇌과학자들이 다루는 대상이 아니다. 다만 뇌과학 밖에서는 마치 뇌과학에서 심각하게 다루는 듯 요란한 편이다 . 뇌가 죽으면 모든 것이 작동하지 않고 뇌가 식물상태에 있으면 최소한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의식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종래에 마음이나 영혼이라 불리는 것들은 단순히 뇌의 화학적 전기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생물학적 활동에 의해 창발된 것이라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뇌와 영혼은 분리 되어 있다는 전통적 주장 이 더 타당하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다. 뇌와 영혼과에 관계에 대한 부분은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 . 뇌와 관련해서 무신론적 자연주의 또는 물리주의와 유신론적 세계관이 충돌 되는 지점은 뇌과학에서의 충돌이 아니라 세계관의 충돌이다. 물리주의 세계관을 가진 적극적 자연주의자들 이 가지는 뇌 이해의 핵심은 ‘나는 뇌(if and only if)’이다. 뇌 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뇌가 자신의 처음과 마지막이며 뇌 활동 외에는 정신이나 영혼이나 도덕이나 의식이나 자유의지 같은 비물리적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재로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데 사용된 근거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몸이 정신을 매개하는 것은 분명하다 . 당장 뇌가 죽으면 정신 활동은 멈춘다. 뇌에서 도파민과 같은 신경 전달 물질의 결핍이나 과다 생성은 언제나 정신적 문제를 야기시킨다. 마약을 하거나 항정신성약을 복용하는 경우 정신 활동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피니아스 게이즈나 브로카 베르니케 환자들이 그렇고 H.M. 의 경우처럼 뇌가 손상이 되면 언어를  하기 어렵고 기억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혈관성 치매가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생물학적 조작을 통해 선택적인 인간을 만들어 낸다면 그 태어난 생명체는 영구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오로지 물리적 자연만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뇌의 활동 자체일 수 밖에 없다. 자연주의자들 역시 영혼, 신, 자유 의지, 의식 개념에 의해 사회가 형성되어 있고 보편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적절한 방법은 집단적으로 뇌의 오작동, 뇌의 환상이며 그것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근거 자료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물질만 존재한다는 관점에서는 ‘의식’, ‘영혼’, ‘종교’, ‘자유의지’를 모두 물리적 자연안에 두어야 한다 . 반대로 유심론에서는 정신을 유신론에서는 신적 세계를 주장하며 물질과 구별되어 자연 법칙을 벗어난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다.

 

   자연주의 세계관에서 설명을 해 내야 하는 것이 유신론 세계관에서 해야 할 것 보다 더 많아 보인다. 유신론 세계관은 인류 역사상 근대를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검증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고 현 사회 구조와 사고가 상당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 세계관에서 설명해야 하는 것들은 자유 의지와 의식과 인류가 가지는 신앙에 대한 문제들이다. 신앙에 대한 문제는 왜 종교가 발생하였는가? 종교체험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 이 외에도 도덕의 문제등이 있겠지만 비단 뇌과학에 보다 국한된 것은 아니다.

   첫째,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는 큰 도전이다. 뇌는 생화학적으로 작동하고 생화학은 물리적 활동으로 환원 가능하다. 물리적 작동은 자연질서에 구속되므로 모든 것에는 그렇게 작동한 물리적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거나 내가 선택한 것이 내가 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조건지어져서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자연질서에 따라 결정된 것을 따라 가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가능할까? 이렇게 결정론에 이르는 것은 필연적이다 . 자유의지는 원래 과학 보다는 철학적 논쟁중에 하나였다. 이러한 철학적 논쟁을 과학적 실험으로 평가하려는 시도가 리벳의 실험이후 과학으로 옮겨 온 것 같다. 리벳은 뇌파 실험을 통해서 피험자가 선택 결정을 하기도 전에 뇌파가 미리 움직인다는 것을 보고하고 자유의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 논문은 논란이 많고 학술적으로 타당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연주의를 전파하는 프로퍼간더로서 실험 그 자체의 특성과는 달리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학적 실험으로 설파되고 있다. 그 실험에서 발견된 것이 자유의지의 유무를 평가하는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뇌과학계의 검증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만일 자유의지가 있고 그 자유의지가 물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속성이 발생하는 것이 반드시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지가 어떻게 물질과 만나는가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다.

   둘째, 의식의 문제를 뇌과학의 측정을 통해서 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금은 모를 뿐이지만 언젠가는 그 물리적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자유의지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실체가 의식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의식이 물질을 매개하는 과정으로 보는 지에 따라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이 달라 질 수 있다. 의식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되지만 의식의 정의가 일관되지 않고 있다. 대개 실험에서는 잠재의식(subconsciousness)에 근거하여 인식전에 이루어지는 신호 처리를 다루는 부분도 있고 수면 상태나 마취 상태, 식물 인간 상태에 대한 뇌 영상 연구 들을 다루기도 한다. 과학적 연구 전에 의식이 무엇인지 정의 자체가 필요해 보인다.

   세번째, 자연주의로 인간이 유사 이래 한번도 벗어 난적이 없는 종교성을 설명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인간의 종교성을 진화론적 유용성으로 설명하는 진영과 진화에 있어서 부산물로 설명하는 진영으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진화의 부산물인 과도작동인감각설을 주장한다. 인간이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해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 그 사건이 발생된 원인으로 자발적 주체자의 행위로 돌리는 것에 민감하도록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한 밤 중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냥 바람소리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발적 주체자인 도둑이 아닐까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민감한 속성이 신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착각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적 경험 역시 현존하는 현상이다. 자연주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경험을 인격적 관계성이 아니라 개인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경험이라 한정해 버린다.  뇌 영상 연구 를 통해 살펴 보았을 때 종교에 따르는 여러 행위와 경험은 모두 뇌 안에서 일어나는 뇌의 착각 활동 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정신)==뇌’ 프레임에서는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뇌 측두엽 간질환자가 발작할 때 경험하는 체험과 동일하다고 하여 신비 체험을 뇌의 오작동 또는 착각으로 설명한다 . 앞서 서론에서 설명한 논리에 따라 인과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현상과 원인 사이에 축약성 (degeneracy, 한 현상에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원리)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 같다. 더 큰 (의도적) 오류는 신앙을 신비체험이라는 프레임으로 국한하여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정하며 그것을 뇌과학 수준에서 설명이 가능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신비체험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하는 정상 종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가지는 것이다. 신과의 만남은 의사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이해 되거나 이성적 깨달음을 통해서 진행되는 것이지 자신이 조절하여 도달하는 심적 상태는 적어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 체험은 아닌 것이다. 

   자유 의지에 기반한 사회적 시스템, 의식, 종교적 본성이나 체험, 죄 의식의 존재는 현실이다. 어떤 부분은 착각이고 어떤 부분은 착각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가 어떤 권위로 그것을 판단 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자연주의 자들이 자신들의 전제에서 그렇게 판단할 권위가 있는가?

   자연주의들이 이러한 주장을 할 때  대부분 실험 자료를 제시한다. 그러한 선택적 자료 선택과 해석이 소위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뇌 과학은 인간 활동의 생물학적 기전을 찾고 뇌신경활동이라는 생화학, 생물리학적 속성으로 관측하고 이해하려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뇌과학을 이용하여 인간 정신활동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불가피하게 환원적인 성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만일 인간 정신활동의 다양한 측면 중의 하나인 뇌 자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이 해당 자료가 제공하는 범위를 벗어 난다면 이는 뇌과학이 아니라 과학철학, 심리철학이나 신학이 개입해야 할 부분이라고 앞서 말하였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접근할 때 물질적인 대상으로 환원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현상을 간단한 원리로 환원하려는 노력은 대다수 학문의 공통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원리를 찾을 때 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이해하기 위한 실험을 준비하는 것도 단순화 과정 을 거친다. 뇌과학이 생물학 또는 생화학으로 환원하는 단순화 과정은 뇌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하는 뇌과학의 원 속성이다. 뇌과학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는 이유는 뇌과학 자체에 있는 환원성이 문제가 아니라 유물론적 자연주의자들이 뇌과학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유물론적 자연주의 세계관이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대한 문제를 닫혀진 자연주의 (물리적인 자연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체계로 설명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 (인간 행동을 뇌생물학의 측면에서 탐구하는) 뇌과학의 속성이 적절할 뿐 아니라 과학적 권위를 확보하기에도 적합하다. 논리적으로 비약이 있는 논증에 근거한 주장 을 펼치는 경우에도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대중의 피상성은 종종 좋은 환경이다.

   자연주의자들이 뇌과학을 자신들의 프로퍼간더로 사용함으로 뇌과학은 무신론적 세계관의 전당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정신자체가 없고 현상만 있으며 자유의지는 없으나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하고 물질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연주의에 일관된 견해를 뇌과학 발견이 뒷받침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사실은 자연주의 견해에 따라 뇌과학 발견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과학이 세상의 문화와 독립적이지 않듯이 과학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배적인 자연주의적 프레임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따르게 된다. 자연주의자들이 뇌과학을 이용한다고 해서 뇌과학 자체가 자연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자연주의 해석에 너무 깊이 이용되면 뇌과학은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뇌과학은 철학이나 메타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속한다. 통상적으로 과학의 대상은 자연물의 작동원리를 연구할 때에만 과학 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 아니라 과학 자체를 대상으로 하면 이를 과학철학이라고 한다. 신경과 뇌의 활동 기전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이용하여 특정 세계관에 근거한 해석으로 차용하면 (뇌과학적 결과를 자신의 세계관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면) 뇌과학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뇌과학 연구들에 대해서 그 발견물이 가지는 함의에 대한 확대 해석이 항상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해석을 과학적 또는 객관적이라고 혼동하거나 포장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오히려 뇌과학의 연구 결과들은 그 가치와 의미가 더 높은 차원의 사고 체계를 바탕으로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 뇌과학은 인간의 문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에 다른 과학보다 훨씬 더 상위 해석에 의존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뇌과학에 의해 생성된 관찰 결과물을 상위 체계에서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피한 점이 있다. 하지만 자연주의적 관점만이 유일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과학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주의가 뇌과학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듯 다른 세계관이 뇌에 대한 지식을 얻는 뇌과학과 대치 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세계관이 인간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더 나은 해석을 해내는 것인가에 달려 있다. 필자는 자연주의적 해석 보다는 성경에서 설명하는 인간관으로 뇌를 해석할 때 인간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고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성경적인 인간관에 따라 뇌가 해석되어야 인간의 고유성이 훼손되지 않고 뇌과학 지식은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성경적 인간상을 기반으로 한다고 해서 뇌과학자들의 발견이나 연구나 (자연주의적 배경이든 아니든) 그간에 형성된 많은 논의와 지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관찰과 해석을 혼용하고 오해한 결과이다. 오히려 성경적 세계관의 물리적 상세 과정을 채워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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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각으로 본 뇌 이해: 생물학적 인간의 재 발견

 

   뇌의 주 기능은 대상에 대한 지식, 곧 대상에 대한 믿음 습득에 대한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형성 과정 역시 뇌 작동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다. 다만 주 관점이 뇌 자체에 있기 보다는 (뇌를 통하여) 지식 형성을 가능하게 하신 최고 원인자를 향한다. 하나님 지식 형성이 뇌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관찰이 가능한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과 그 나타내심을 관찰함으로 당신의 마음을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뇌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이 인식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셨기에, 하나님을 하나님이 계시한 방식을 따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델, 지식, 믿음을 형성해 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곧 자기 알리심은 전통적으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하여 왔다.[7] 이러한 구분은 근래 들어서 과학과 신앙을 논할 때 자연과 성경으로 종종 표현되기도 한다.[8] 영국 청교도 목사였던 존 플라벨은 그의 책 “섭리의 신비” 권두언에서 하나님의 말씀(기록된 언어)과 하나님의 역사(행위)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자신을 나타내시는 역사는 인간을 포함한 물리적 세계의 창조와 섭리 역사와 인간 문화, 사회학적 섭리 역사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물리적 세계를 드러내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를 살펴 볼 수 있다. 기록된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물리적 세계의 신비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통한 자신을 나타내심은 자연계시보다 더 적극적으로 특정 대상을 염두하고 있는데 바로 인간이다. 말을 듣고 그 말 너머에 있는 대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개체안에 시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인간이 그 제약을 벗어나 하나님과 연합된 지식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하신 기능이다. 인간은 기록된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모델링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지식은 자신을 객체화 하여 모델링거나 또한 타인에게 투영된 자신을 모델링함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타자의 가장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인간에 대한 마음을 그려볼 때에야 인간 자신에 대한 참 지식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모델에 대한 나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my model of your (God’s) model of me). 그러므로 성경적 뇌 해석의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바라보시는 마음과 물리적 자연을 염두하시고 생물학적인 뇌를 염두하신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뇌는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하고 효율적이며 그 속성에 다양한 해석을 낳는 뇌는 생물학적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물리적 자연을 시작하실 때 영적 속성만을 가지거나 실리콘 기계의 형태가 아닌 생물학적 형태로 뇌를 생각하셨다. 생물학적 인간 뇌, 곧 아담 뇌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자연 안에 살고 자연과 소통 가능한 그리하여 연합 가능한 특성이 있다. 인간 뇌는 뇌 밖의 세상인 자연을 경험하고 소통하기에 적합한 오감을 가지고 있다. 가시광선 수준에서 보고 음파 영역에서 듣고 촉각으로 느끼고 압력과 화학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더 다른 형태의 경험 방식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소통함에 있어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감을 벗어난 경험은 인간의 뇌의 창의적 활동에서 개발한 측정 장비를 이용하여 시각으로 청각으로 변환시켜서 세상을 알게 된다. 한편 하나님은 우리에게 운동할 수 있는 몸의 근육을 계획하셨다. 그 근육은 육체적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고 안구 근육, 성대 근육, 얼굴 표정 근육을 움직임으로 자신의 의사와 정서를 표현하고 서로 간에 소통할 수 있게 한다. 그 근육의 범위는 섬세하나 너무 강하지 않다. 더 큰 변화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경우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억을 담당하는 뇌를 설계하셨다. 감각을 통해서 환경을 경험하고 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했던 경험을 생물학적으로 기록하여 학습함으로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게 하신다. 더 많은 기억은 종이와 스마트 폰으로 할당하게 된다. 이렇게 생물학적 뇌는 자연속에서 자연물과 연합하기 위해 적절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뇌는 환경과 타인과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할 때 (소통할 때) 몸을 이용한다. 몸이 필요 없는 뇌는 없다. 뇌는 스스로 감각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다. 몸을 통해서 세상을 만나고 세상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준비된 생물학적 뇌는 “땅”에서의 연합을 이루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인간과 인간의 연합 뿐 아니라 자연 피조물과의 연합도 생물학적 뇌를 매개체로 이루어진다. 자연과 인간의 연합은 인간이 육체의 속성을 가지는 한 필연적이다. 식물과 동물을 음식으로 먹으면서 그 식물과 동물이 우리 몸을 구성하게 된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소들은 서로 다른 피조물을 구성하다가 음식을 먹고 호흡을 하는 동안 지금 이 시점에서 나의 몸에서 연합된 상황이다[9]. 인간에게 고유한 물질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연 어디에나 있는 태초의 물질 요소들이 잠시 잠깐의 기간동안 나에게 들어와서 내가 하는 기능에 참여하고 있다.
   창조된 자연의 흙을 빚어서 육체를 만드시고 영(생기)을 부어 넣으시자 온전한 인간 (생령)이 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본질적으로 육체와 영의 연합으로 의도하셨다고 믿는다. 인간은 천사가 가지지 않는 자연적 속성과 동물이 가지지 않는 영적 속성을 가진, 즉 천사의 요소와 동물의 요소를 모두 가지도록 염두에 두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를 통일케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영적 실체이자 육적 실체인 인간의 교회가 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계시된 당신의 영광을 인식하고 찬송할 능력이 있는 존재,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는, 하늘의 피조물과 땅의 피조물을 모두 대표할 만한 존재로 인간을  창세전에 염두하신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언어와 자연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을 해석 하여 그에 따라 세상과 인간을 돌아보는 섭리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모델을 형성하고 일상생활 속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 모델을 갱신해 나간다. 이 과정은 우리 육체인 뇌가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주체자에게 세상은 자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을 포함한다. 이를 구현한 인간 육체의 핵심인 생물학적 뇌는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시며 하늘과 땅의 연합에 적합하다. 하나님 자신이 물리적 세계와 생물학적 뇌로 스스로를 한정하셨던 성육신을 하신 만큼 생물학적 뇌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인간에게 염두하신 작품인 것이다. 생물학적 뇌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는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지만 뇌과학을 포함한 자연 전반에 대해서 신학적 논의가 더 깊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특히 자연에 대해 분명한 의식을 가졌던 구약과 신약 선지자들이 자연속에서 인격적 창조자를 발견하고 경이를 표하는 독특한 세계관[10]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놀라움을 묘사하는 “경이[11]”라는 단어를 자연주의가 차지한 전철을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자연과 뇌에 전혀 차원 다른 “경이”를 발견하고, 경이롭게 지으신 그 “목적”을 논하고 생물학적 뇌에 부여한 진정한 “의미”, 그리고 자연의 진정한 “의미[12]”를 찾을 수 있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혹자들은 기독교가 다윈의 갈라파고스 군도에 있는 진화되지 않고 곧 도태될 무리라고 생각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 세계관에 대한 자신감과 그들에게 당연히 설명할 우월성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다소 수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지혜롭지 못한 방식으로 인해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학이나 뇌과학의 발전에 대해 경계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 과학 소식을 들으면 두렵게 하는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뇌과학이나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더 확대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 할 것이다. 그 자연에 대한 지식이 경계의 대상인가? 판도라 상자처럼 그 자연의 원리가 밝혀지지 말았어야 하는가? 그 자연이나 생물학적 뇌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신 것임에도 그 피조물들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두려운 것인가? 치료 목적으로 발견되어 인간에 유용한 경우는 예외적으로 그 발견을 환영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경계와 두려움이 자연에 대해 알게 된 지식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 지식에 대한 자연주의 철학적 해석이 문제인가? 아니면 그 지식에 기반한 조작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문제인가?
   조작을 가해 원하는 목표를 이룬다는 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이다. 대상에 대한 과학 지식은 그 자체로 멈추지 않고 대상을 조작하여 인간이 설정한 목적의 도구로 사용되는 과정은 멈출 수 없다. 특정 유전자가 뇌를 특징지운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고 조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고서는 삶의 고통이나 불편의 근원이 되는 뇌를 바꾸려고 할 것이다. 뇌 기능을 높이기 위해 핀셋처럼 조작하는 야심찬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불임을 극복하기 위해 체세포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려고 할 것이다. 생명 자체를 연장하는 생물학적 원리를 알고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고서는 죽지 않는 법을 사용할 것이다. 유물론적 자연주의 체계 내에서 기술이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라고 답한 디스토피아 공상 과학 영화가 현실이다. [13]인간은 끊임없는 욕망과 사회적 경제적 압박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학도 인간의 행위이고 그것을 조작하는 목표를 세우는 것도 인간이다. 하지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생물학적 뇌로 인간을 생각하기에는 그 영향력이 너무 커서 자연주의 모델이 사회 현상에 책임있는 조직인지 의심스럽다.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한 문제 제기는 종래 수천년간 해 왔던 질문이지만 그 강도는 전래 없을 것이다. 전통적 인간 개념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강하게 제기 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뇌생물학과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낳게 된다. 뇌 오가노이드 분야는 뇌를 생물학적으로 직접 제작하는 부분이 현재는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그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크리스토퍼 가위를 이용한 유전 공학의 발전은 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원하는 유전자에 맞게 아이를 출생 시키거나 정자 없이 체세포만으로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한다. 왜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하였는지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는 원성에 대해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내면이나 관계의 여러 문제는 약이나 뇌회로 조작으로 해결할 것이라 서로에게 힘이 되고 격려하던 문화는 더 이상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알파고를 필두로 하는 뇌 인지 과학자들이 컴퓨터 과학자들과 협력하여 특화된 업무를 다루는 것이 아닌 일반화된 인공지능을 만들고 자의식 있는 지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14].
   인간 지능이 별것 아니라는 것이 여러 방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또는 인공지능으로 인간 수준의 뇌를 만들어 내려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인간의 고유성, 천부 인권설, 인간의 탁월성에 대한 질문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게 들린다. 이렇게 생명과학기술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제키고 인공지능 기술이 사회 구조를 바꾸어 갈 수록 “인간이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전통 신학적인 입장과 영적인 해석에만 되풀이 될까 두렵다. 대안이나 설명은 없이 “이것 이것은 아니다”라는 제외의 방법이 아니라 회피하지 않고 정수를 건드리는 방법을 선택하였으면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발전과 뇌인지 정보학에서 이루어지는 인공지능의 흐름을 관통하고 그 본질적인 질문인 인간을 바른 위치로 올려놓는 신학으로 확대되었으면 한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정의가 바뀌는 시점에서 대중들이 새로운 기술에 환호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 없음, 무가치함에 대한 절망을 동시에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이 가져올 불평등과 어두운 측면들은 산업혁명에 의한 것과 다를 것이다. 산업 혁명은 인간이 생산자로 참여하였지만 이제 대다수는 소비자로서 역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술의 편중으로 유익을 누릴 대중보다 고통 받을 대중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고통은 쾌락 추구 자체도 포함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5]는 현실이 되어 가는 것 처럼 보인다. 대중이 기술 환상에 대한 피상성을 벗어날 수 있다면 본질적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는 지나치기 어려워 질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그러한 질문 자체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학 현장에서는 유물론적 자연주의가 큰 영향을 미치고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그러한 조류에 심리적 압박감을 받고 있다[16]. 그리스도인이 과학을 한다고 하면 사이비라는 압력을 노골적으로 받는 상황에 처해 있다. 자연주의의 도전은 뇌과학을 점유하며 대중속에 더욱 강하게 퍼지고 있다. 매스컴이나 온라인에서 자연주의적 메시지는 많은 시청율과 구독율을 받고 있다. 대중은 진실에 관심이 없고 매스미디어가 만들어 낸 이미지로 선호하고 비판한다. 아무리 합리적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돌려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인 동료들은 모두 침묵하고 교회는 마치 인디언 보호 구역에 있는 것처럼 교회 울타리 안에 가두어져 있음을 모르거나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을 식별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속 권력에 집착함으로 스스로 힘 빠진 공룡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인이 되어야 하고 어떤 때는 가장 고결한 박애주의자가 되고 어떤 경우는 열정적인 사랑을 생각하는 낭만주의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논고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따뜻한, 온전한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한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적 엄밀성으로 지식을 대하는 사고 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이 진리를 알아가는 체계 자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합리성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견고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진리를 대할 때 과연 그러한가 재 평가하고 사실과 해석을 구분해 내며 검증 여부에 따라 적절한 권위를 부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과학자들이 선택한 관측 자체가 어느 정도 편향될 수 밖에 없듯이 과학 지식이든 어떤 지식이든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어 왔고 그 매체를 내가 선택하여 받아들인 그 편향[17]을 생각해야 한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말한다고 해서 그 모든 발언이 진리가 아니라 그 말한 내용 자체의 진리성에 대해 평가되어야 한다. 과학은 어떤 발견이 편향되어 실제 사실을 왜곡할까봐 거르는 작업을 혹독하게 한다. 새로운 발견을 일단은 우연히 발생한 것으로 평가 절하해서 기존의 수 많은 노력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과학적 검증 시스템의 일부이다[18]. 자신은 편향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최선을 다해 편향하지 않으려고 제대로 된 과학자들은 노력한다. 나의 경험이 형성한 사고 체계가 혹 신념이 아니었는지 그 신념이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지 않았나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자이다. 그리스도인도 내가 자라온 배경이나 성향에 의한 신념이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을 해석하고 사회를 해석한 것은 아닌지, 신념을 신앙 위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검증해야 할 것이다. 우리 뇌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성향[19]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은 본질상 열려 있는 과정으로 과학자는 이론적으로[20] 새로운 이론이 정당하다면[21] 서서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만일 닫혀 있는 주장을 한다면 또는 어떤 권위에 도전을 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 자체는 열려 있는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지만 과학을 해석하는 세계관은 닫혀 있을 수 있다. 다른 가설의 가능성 자체를 거부하고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공격하는 것은 엄밀하게는 과학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과학계의 지도자라 할 지라도) 특정 ‘~주의자’로서 한 행동이다. 과학을 벗어난 태도이다. 갈릴레오를 공격한 종교 재판과 별반 다름 없다. 옥스포드 교수였던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유신론자들과는 공개적 논쟁을 일절 하지 않는다고 한다[22]. 그보다 앞서 옥스포드 교수였던 C.S.루이스는 소크라테스 클럽에서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위주로 모셔서 논쟁하고 고민하였다. 그 모임에서 강연해서 세계적인 무신론자 반열에 오른 철학자가 된 안토니 플루[23]였다. 또 한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 29세의 여성 철학 강사 앤스컴(G. E. M. Anscombe, 1919-2001)이다. 당시 50세의 관록있던 C.S. 루이스는 자연주의를 비판하여 쓴 ‘기적’이란 자신의 책에 대해 고작 29세로 이제 막 옥스포드에 온 신참에 여성인 앤스컴이  자신이 주관하는 소크라테스 모임에 와서 자신의 논리를 조목 조목 비평한 논리에 오랫동안 숙고하고 12년후 ‘기적’ 3장을 대부분 바꾸고 3배나 넘는 분량으로 보완하였다[24]. 얼마나 열린 자세인가.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어떤 사건에 대해 과거에 형성된 경험이 모든 것이라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더 폭넓고 견고해 지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이 아는 세계를 지키다 보면 자신이 아는 세계마저 지킬 수 없게 된다. 생각을 더 여유있게 열어 둘 때 그간 자신이 믿어 왔던 바가 더 견고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세계를 모르고 자신의 세계의 우월성을 알 수가 없다. 다른 여러 해석을 알고 나서 자신이 믿는 바를 선택할 때 더 담대해 진다. 기독교는 한번도 다수였던 때가 없었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심지어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에도 그렇다고 한다. 갈릴레오는 과학자로서 기독교(당시 로마카톨릭)와 싸운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으로 스며들어 기독교 옷이라고 받아들여졌던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25]과 싸운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26].
   지금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시 104:5),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시 19:5)라는 성경 구절들을 태양이 돈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지금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해당 메시지를 듣는 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혹 우리가 성경이 진정 말하는 것이 아닌 어떤 이들의 해석을 성경 데이터에 잘못 적용할 뿐 아니라 너무 완고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 보아야 한다. 다른 주장을 자세히 검토하기도 전에 속단하는 것은 현재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기독교의 진정한 내용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자신이 경험한 불행한 경험대로 기독교를 설정하고 속단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27]. 기독교 공동체는 예술과 같이 열려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며 스스로 배타적으로 견고하게 세우려고 하면 무너지는 속성을 가지는 것 같다. 하나님 세계는 하나님께서 직접 섭리하시고 스스로 통치하신다[28]. 하나님을 우리가 지켜드려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나님의 세계를 빗장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의 문을 열고 드러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셋째,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측면은 물리적 대상인 자연과 생명체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을 사랑하고 호기심있게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내신 계획의 한 부분이 자연의 법칙속에 사는 인간이지 않는가. 자연의 섬세함을 더 깊이 관찰할 수록 더 하나님의 신비하심과 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을 가진 성도들은 윌리엄 윌버포스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29]. 그는 정원의 민들레와 거미줄을 관찰하며 하나님을 느끼기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사명을 위해 잠시 내려 두고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제도를 고집하던 세상을 바꾼 그리스도인이다. 모든 사람이 자연을 과학자의 측면에서 볼 수는 없고 어떤 이는 시인으로 어떤 이는 사회학적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관찰하고 경이를 가지는 자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이다. 시편 19편을 포함한 상당수가 자연속에 드러나는 창조주의 은총을 노래하지 않는가? 자연 자체가 하나님이 펼치신 시상[30]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체와 의미를 정확히 알고 경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과학자라 할 수 있다.

 

 

   넷째,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있는 과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COVID 문제와 씨름하던 과학자들 처럼 자연이 주는 고통속에서 인간을 위하는 과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연주의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인간상 보다는 더 크고 온전한 인간상을 그리스도인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뇌과학 분야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뇌 질환, 마음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열명 중 한명이 정신과적 치료를 받고 있다. 정신적 고통을 받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다만 숨어 지내는 것일 뿐이다. 정신과적 치료를 받는 사람들을 환자로 볼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 바라보며 어색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생물학적 뇌를 가졌음을 이해한다면 뇌에 신경전달물질에 불균형으로 생긴 것이나 당뇨 인슐린 생산 문제나 크게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이 개인의 서사를 무시하고 약물 치료로 접근하고 그것도 질환 발병 후에 제한된 부분에서만 그 역할을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많지 않은가. 따뜻한 사랑과 이웃 돌아 봄을 통해 고독한 사람들을 돌아 보고 우울증이나 사회적으로 암울한 청소년들을 자살로부터 근원적으로 보호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사회 인식 및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면서 세상의 아픔을 보듬는 것이 고아와 이웃을 돌아 보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들을 진정 더 잘 해결할 방법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것이 진정한 과학자의 역할이 아닌가?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을 넘어 공학자, 사회학자의 마음으로 과학을 바라 보아야 한다. 과학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나면 그 지식을 공학적으로 응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창의성을 발휘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많은 이들이 적정 기술을 사용하여 아프리카 오지의 생활 문제를 적은 비용의 에너지와 기술로 해결해 내고 있다. 물 문제를 해결하고 전기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관개 시설이나 발전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도 그 현장의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도 많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기술 공학자를 넘어서 사회학자의 눈으로 과학을 바라보아야 한다. 물론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기술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고 인간의 손을 떠나 작동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종래에 신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생명의 조작이 많은 부분 가능하게 되고 앞으로 더 가능하게 될 것 같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책임을 질것이냐이다. 선택의 문제는 도덕적 가치로 통제 될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택과 책임을 과학자와 공학자에게 둘 수만은 없다.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된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사람들을 인간 자체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나 탁월한 기능의 뇌로 평가해야 하는가? 좋은 뇌를  가지도록 조작되지 않으면 누구 책임인가?
   4차 산업과 관련해서 기술 발전이 모두에게 공평한 혜택을 주는 것이라 어두운 측면이 더 생길 것이다. 인간을 빅데이터로 일반화 시켜 버리고[31] 제도화 하며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은 쉽게 예측이 된다. 넷플릭스에서 유토피아 영화를 찾을 수 있던가? 그렇다고 기술의 유용성 마저 적으로 치부할 수 없다. 자연은 항상 인간에게 혜택만 준 것이 아니었고 인간은 기술을 통해 자연을 극복하려 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대개 흑백의 논리로 해결 될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사실 단순한 문제들은 이미 다 풀렸고 어려운 문제들만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에 대해 귀 기울이고 책임있는 담론을 누가 만들 것인가? 모든 과학자들 사이에 한결같이 도덕 윤리적 책임이 온전히 작동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과학자 한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 집단이 되면 도덕을 내세우지 않고 속한 집단의 이익을 내세우는 것[32]을 우리는 근래 강대국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 현실 사회에서 보지 않는가? 그렇다고 무작정 ‘성경에서 그러하니 이러 이러해야 한다’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인가? 만일 성경으로 이러 이러해야 한다는 주장을 스스로 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해도 될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대신 자신이 주장한 일들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 사실을 그간 지켜 보지 않았던가? 진정으로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인류를 위하는 변화를 이끌어 가려면 세속적 사회를 설득해 낼 논리와 겸손과 인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야 하지 않을까? 유물론적 세계관이 번영한 시대에서 우리의 착한 행실이 먼저 드러나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적대시 한다는 것은 자신이 없을 때 그러하다. 만일 싸워야 한다면 그 대상을 분명히 하고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는 지혜로움으로 가져야 한다.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당장 우리 집에서 자라는 아이들부터 설득해야 할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과학자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과학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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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하며

 

   종교개혁 시대에서는 ‘이신칭의’가 신앙과 사회의 중요한 질문이었다. 21세기에 교회가 당면한 현실은 무엇인가? 완전히 다른 자녀들을 데리고 살고 있고 우리 자녀들이 만나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도전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정확히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혁주의 세계관을 가진 성도들이라면 바울이 아테네에서 한 변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아테네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한 변증은 (행 17장) 그 당시 지성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건드린 것이다. 신의 거처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그러하였다. 찬란한 아테네 신전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그들에게 신은 인간이 지은 건물에 귀속되지 않음을 설파하였다. 그 시대가 자랑하고 있던 시대정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어떻게 멋있게 죽을까 어떤 것이 가치있는 삶일까에 대해서 소크라테스 이후 가졌던 문화적 철학적 자부심 앞에서 부활에 대해 설파한다. 사실 그들은 살 수 있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프레임으로 그리스 로마인들의 핵심적 문제를 찌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 있다. 모든 도시에서 올려다 보이는 신전을 비추는 아침 햇살로 눈부실 때에 그리고 모두가 그것에 집중할 때 말이다. 이 시대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인간이 누구인가는 그 질문에 유일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뇌를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인간에게 있는 의미를 추론할 수 있는 그러한 목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뇌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다가올 세대에 인류에 대한 소망일 것이다. 전직 레바논 출신 유엔 총장인 찰스 말릭의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문제는 영혼 뿐만 아니라 마음 지성을 얻는 것이다. 만일 온 세상을 얻고 세상의 마음 지성을 잃는 다면 세상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세상을 잃었다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찰스 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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