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고재수 교수의 생애
고서희 사모
먼저, 오늘 남편의 삶과 사역에 대한 강연회를 가능하게 해주신 준비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고려신학대학원, 고신언론사, 개혁정론, 개혁교회 목사 성경공부 모임, 보편교회를 꿈꾸는 목사 성경공부 모임에도 감사드립니다.
남편은 1948년 7월 16일, Hendrik Gootjes와 Zwaantje Gootjes-Kooistra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세 명의 형제 중 둘째 아들이고 자매는 없습니다. 네덜란드 북부 Leeuwarden 시에 살았습니다. 그곳 자유 개혁교회에 다녔습니다. 부친은 처음 과일과 채소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나중에는 국제 트럭 운송 회사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그 회사는 기독교 회사는 아니지만, 그의 아버지는 모든 운전자가 주일에 가정에서 쉴 수 있도록 항상 신경 썼습니다. 그래서 원한다면 교회에 갈 수 있게 했습니다.
남편은 기독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언어보다 수학에 뛰어났습니다. 그가 언어, 특히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수학 선생님은 서운해했습니다. 목사가 되려는 그의 마음을 알고는 응원을 보냈습니다. 제 자녀들도 수학을 잘합니다. 그건 분명 저를 닮은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항상 언어를 어려워했지만, 매우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10개의 외국어를 말하고,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말, 남편의 아버지가 50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큰 슬픔이 가족에게 닥쳤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슬픈 그림자로 남았습니다.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어린 시절 부엌 의자에 서서 형제들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캄펀(Kampen) 자유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는 특히 야콥 반 브루헌(J. van Bruggen) 박사 밑에서 신약을 즐거이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그는 바로 목회에 들어가지 않고, 석사 학위 과정을 밟기로 했습니다. 그는 교의학을 더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교의학이 중요한 과목이지만, 캄펀에는 교의학을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부 외에도 취미가 있었습니다. 탐정 소설을 좋아했고, 음악을 즐겼습니다. 그는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학생 시절 레슨을 받고 싶어 했지만, 부모님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던 그의 형(Kees)이 고맙게도 레슨 비용을 주었습니다. 남편은 큰 교회 오르간과 작은 풍금, 펌프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우리는 네덜란드의 첫 집에 파이프 오르간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 한국에서도 작은 풍금이 있었으며, 해밀턴에서는 전기 모터가 달렸고, 건반이 두 개이고, 완전한 형태의 페달을 갖춘 오르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큰 행복이었습니다. 남편은 퇴근 후 종종 오르간을 연주하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는 바흐를 사랑했지만, 슈베르트와 슈만의 독일 가곡도 연주하고 노래했습니다.
캄펀에서 석사 학위를 공부하는 동안, 남편은 여름 선교 캠프에도 참여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이 캠프 참가자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를 가르치고, 노작 활동도 했습니다. 프로그램은 큰 인기였습니다. 부모들은 조용한 오전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친구 때문에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났습니다. 어느날 저녁, 제가 승마 학교에서 승마 수업을 돕고 있을 때, 제 형제 중 한 명이 자전거를 타고 저에게 달려왔습니다. “지금 당장 와, 닉 Gootjes가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저는 진짜 낡은 바지와 더러운 부츠를 신고 말똥 냄새가 나는 상태로 자전거로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보고도 좋아했으니,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1975년 약혼하고, 1976년 결혼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손님들이 왔습니다. 당시 남편은 큰 버스를 빌려 부모님 집에서 시청, 식당, 교회로 손님들을 이동시키는 멋진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다들 그 아이디어를 칭찬했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목회자 후보가 되었습니다. 일곱 개의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일곱 교회를 모두 방문했습니다. 많은 고민과 기도 끝에 우리는 네덜란드 서부의 역사적인 도시인 레이던(Leiden)으로 결정했습니다. 레이던에서 우리는 매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남편은 설교, 교리 교육, 그리고 교회 성도들과의 교제를 참 좋아했습니다. 또한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남편이 레이던에 오기 전에는 회의가 자정이나 그 이후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남편이 회의를 주재할 때는 보통 10시 30분이나 11시쯤 끝났습니다. 그는 바쁜 장로와 집사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레이던에는 좋은 대학 도서관도 있었습니다. 교회 당회는 남편이 박사 학위를 위해 일부 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1977년 8월 첫 아이 아들 Henk(행군)가 태어났습니다. 두 해 후에 Albert(요한)가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을 때 두 명의 아이를 더 낳았습니다. Kees(네리)와 우리의 유일한 딸인 Jentine(연이)입니다. 나중에 캐나다에서 우리는 또 한 명의 아들, Gerard를 낳았습니다. 그는 한국 이름이 없지만 김치를 매우 좋아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신앙을 가진 배우자와 결혼했고, 12명의 손주를 두고 있습니다.
남편은 늘 행복하고 감사하는 아버지였으며,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했지만, 특히 책 읽어주기를 좋아했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매일 저녁, 그는 큰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주변에 둘러앉게 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었습니다. 몇 줄만 있는 단순한 아기 책부터 시작하여 톨킨의 <반지의 제왕> 같은 두꺼운 책까지 읽었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두 번이나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Henk와 Albert를 위해, 몇 년 후에는 Kees와 Jentine를 위해 읽어주었습니다.
둘째 아들 Albert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아기를 바라보며 한가롭게 있었습니다. 그날 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축하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말이죠. “당신은 한국에 가서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는 전화였습니다. 꽤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교지가 선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먼 나라로 가는 것을 한 번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선택지로 등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레이던에 온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레이던을 정말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 전화를 받은 후 처음으로 지도를 펼쳐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물론 남편은 캄펀에서 박성복 교수를 만나 한국에 대해 알긴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김치도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결국 우리는 주님이 그곳으로 부르신다고 느꼈고, 그래서 우리는 고려신학대학의 청빙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섭리로 우리가 살던 레이던은 네덜란드에서 유일하게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우리는 한국어 학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말이 어렵지만 재미있습니다”(Hankook mali orioptchiman, chaemi issumnida)와 같은 표현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1980년 2월, 우리는 네덜란드를 떠나 부산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1989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그 10년은 어렵기도 했지만 복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그 시절 한국에서의 삶과 사역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10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남편은 다시 목사로 섬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캐나다 해밀턴에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남편은 목사로서의 경력이 3년밖에 없지만, 교수로서의 경력은 9년이 넘기 때문에 교수로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로 가는 선택은 어려웠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목사의 일은 교수의 일보다 더 보람이 있습니다. 목사는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더 직접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89년 9월에 해밀턴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새로운 집’(외부는 캐나다식, 겨울에는 많은 눈/ 내부는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많은 것들), ‘새로운 교회’, ‘새로운 동료들이 있는 새 신학교’, ‘새로운 차’(레이던에서는 모리스 미니, 해밀턴에서는 가족 모두를 위한 스테이션 웨건), ‘새로운 취미’(차고 세일, 골동품 찾기, 필요하면 수리하기), 그리고 4개월 후, ‘새로운 아기의 탄생’, Gerard!
캐나다 생활 10년은 참 좋았습니다. 한국보다 학생 수가 훨씬 적었지만, 가르쳐야 할 과목은 훨씬 많았습니다. 한국처럼 일부가 아닌 교리 전체, 윤리학, 철학 개론, 신조학, 신학 개론, 변증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교리는 벨직 신앙고백서에 집중했고, 2008년에 그의 책 <벨직 신앙고백서, 그 역사와 기원>이 출간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엮은 것으로 남편의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 그 전에 낙태와 안락사, 영화 감상 등에 관한 작은 책들이 출판되었고, 일부는 학생들과 함께 썼습니다.
2001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해입니다. 결혼 25주년과 목회 2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축하 행사를 했고, 우리 교회와 신학교도 축하 행사를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남편과 나는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레이던의 옛 교회를 포함한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25년 전 신혼여행 때 방문했던 런던에도 갔습니다.
그 후 몇 가지 하이라이트는 2004년 남편이 해밀턴 신학교에서 공부한 우리 아들 Albert에게 신학 석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었던 날과, 2006년 남편이 딸 Zentine과 사위 Matt의 결혼식을 주례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2001년 남편은 질병의 초기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는 우리가 이야기한 것을 잊어버리곤 했고, 운전 중에 길을 잃기도 했으며, 컴퓨터를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곤 했습니다. 2008년 더 이상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과로라고 생각했지만, 2010년 그는 초기 발병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큰 충격이었고, 우리 모두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5년 동안 집에 머물렀지만, 2013년에는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2013년 6월 남편은 해밀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Grimsby의 Shalom Manor라는 요양원에 들어갔습니다.
Shalom Manor 요양원은 그 지역의 기독교 개혁교회 집사회에 의해 45년 전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네덜란드 문화를 지향하는 기독교 요양원입니다. Shalom Manor는 우리 모두에게 복이었고, 남편이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사랑받으며 돌봄을 받은 곳이며, 우리가 항상 환영받고 집처럼 느낀 곳입니다. 2023년 8월 20일 주님이 그를 집으로 데려가신 날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한국의 교회가 남편을 기념하는 오늘을 준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편의 한국 생활은 신학자로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습니다. 남편은 여기서 많은 학생을 가르쳤고, 그들 중 일부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왔습니다. 남편은 구속사적 신학에 관한 특별 세미나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한국어로 많은 책을 출판했으며, 그중 일부는 지금도 재판되고 있습니다. 오늘 남편을 기념하며, 남편의 사역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더 큰 영광과 그분의 교회를 위한 것이기를 소원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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