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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1586년 헤이그 총회의 중요성

- 1586년 헤이그 총회가 예식서의 수를 일곱 가지로 늘린 것과 이들 예식서를 배포한 것을 중심으로 -

 

 

에릭 드 부어(E. A. de Boer) 교수

임모세 목사(박사과정 중)

 

 

 

Yearbook for Ritual and Liturgical Studies

Vol. 38 (2022) 73–90

© 2022 Erik A. de Boer & Moses Lim (CC–BY)

 

초록

네덜란드 개혁파 총회는 국가적 위기 시에 영국 레스터의 백작에 의해 1586년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레스터의 백작과 총회는 신학에서부터 예전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연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한 총회의 결실이 교회법과 예식서들이다. 특별히 바로 이 총회에서 세례 예식서의 축약본을 승인하고 네 가지 새로운 예식서들을 작성하여 확정하였다. 총회는 교회법과 예식서들의 필사본을 지방총회들(the provincial synods)과 노회들에 배포하였다. 이는 네덜란드 개혁파 역사에서 교회법과 예전에 대한 헤이그 총회의 권위와 중요성을 보여준다.

   본 논문은 예전과 관련하여 헤이그 총회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 새 예식서들이 어떻게 의제화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배포되었는지를 다룬다. 지방총회들과 노회들의 회의록들에 대한 연구가 예식서의 수를 세 가지에서 일곱 가지로 늘리고 개혁파 예전의 수준을 향상시킨 헤이그 예전의 영향력을 보여줄 것이다.

 

주요단어

예식서, 1586년 헤이그 총회, 교회법, 로버트 더들리(레스터의 백작), 다테누스 시편찬송

 

 

들어가는 글

 

페트루스 다테인(Petrus Datheen)의 시편찬송이 하이델베르크에서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이후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세례, 성찬 그리고 결혼 예식서를 갖추게 되었다. 같은 해 1566년 영국에서는 얀 우튼호버(Jan Utenhove)의 시편찬송이 출판되었다. 그의 시편찬송도 예식서들을 가지고 있었고 공개적인 자복과 사죄(赦罪), 교회회원의 출교 혹은 출교 당한 사람의 해벌을 위한 예식 모범(liturgische vormgeving)도 있었다. 이민 교회로서 은밀하게 종교개혁을 단행하던 시기에 이런 식으로 개혁파는 두 가지 다른 교회책자(kerkboek)를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있은 후 개혁파 교회가 설립되는 때에 네덜란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두 교회책자가 출판되고 20년 후인 1586년에 새롭게 작성된 예식서들이 출판되었다. 이들은 목사안수식 혹은 임직식예식서(de bevestiging van predikanten), 장로와 집사의 공동임직식을 위한 예식서(de gezamenlijke bevestiging van ouderlingen en diakenen), 완고한 죄인의 출교를 위한 예식서(de afsnijding van een hardnekkig zondaar van de gemeente), 회개한 죄인의 해벌을 위한 예식서(de hernieuwde opname van een bekeerd zondaar in de gemeente)였다. 이들 중 마지막 두 예식서들은 우튼호버의 영국 교회책자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작성된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사 연구에서 해결되지 못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교회는 예식서의 수가 늘어나기를 바랐을까?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1586년 헤이그(’s-Gravenhage) 총회가 네 가지 새로운 예식서들을 확정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예식서들의 작성 동기, 작성 방법, 도입에 대해 무언가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인가? 일곱 가지 예식서들이 언제 어떻게 시편찬송과 성경 판본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1. 헤이그에 대한 관심

 

   ‘네덜란드 고전적 개혁파 예전의 역학관계: 예전의 문서들과 그 문서들의 역사’ (The dynamics of the classical reformed liturgy in the Netherlands: its texts and their history)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갑자기 우리는 1586년 헤이그 총회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총회에 참석한 교회들이 예식서의 수를 넷에서 일곱으로 늘리기로 단번에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후 성인 세례 예식서를 추가한 것과 같은 변화는 있었다. 그러나 예식서와 관련해서는 그 무엇도 헤이그 총회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식은 시편찬송집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거의 완성되었다.

   헤이그 총회에 대한 프레데릭 로더바이크 뤼트헤르스(Frederik Lodewijk Rutgers)의 연구가 1889년 출판되었다. 이는 가장 최근에 나온 상세한 연구다. 그는 1586년 확정된 교회법의 비평본(the critical edition)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부록에 구(舊)총회 기록보관소(het Oud-Synodaal Archief)에서 보관 중이던 헤이그 총회와 관련된 문서들을 제공하였다. 20세기가 끝날 즈음 교회사적 연구가 16세기 대다수의 총회들(1571년 엠든 Emden, 1578년 도르트Dordrecht 그리고 1581년 미들부르흐Middelburg)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들 총회들 바로 뒤에 개최된 1586년 헤이그 총회는 같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들 예식서의 발단을 밝혀줄 헤이그 총회의 수기(手記) 회의록이 16세기 말 이후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뤼트헤르스의 연구가 나온 바로 직후 람브레흐트 아브라함 판 랑어라트(Lambregt Abraham van Langeraad)가 총회 의장인 키메돈키우스(Kimedoncius)와 서기 헬미키우스(Helmichius)의 서명을 담고 있는 헤이그 총회 교회법의 두 필사본을 발견한다. 게다가 둘 중 한 필사본은 1586년 헤이그 총회가 확정한 다섯 가지 예식서들을 담고 있었다. 헤이그 예식서들이 출판된 해는 1598년으로 보였다. 2022년에 온라인으로 접근가능한 성경책들 중 얀 파츠 야콥스존(Jan Paedts Jacobszoon)의 1589년 판 성경이 일곱 가지 예식서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제한된 1차 자료와 2차 자료가 헤이그 총회에 대한 연구의 근저에 놓여 있었다. 이 논문은 1586년 총회가 예식서의 수를 늘리는 데 이르게 한 동기와 작업방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된 상세한 연구의 잠정적 결론이다. 서로 다른 예식서들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의 모든 일원이 이 총회를 다루기 때문에 1586년 헤이그에 대한 한 개별적인 논문이 필요할 것 같았다. 프로젝트 전체 일원은 현 논문에 의견을 제시하여 여러 차례 비판하였다. 이는 논문을 개정하는 동기가 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은 판본들을 식별하는 작업이 어떻게 새로운 통찰을 주었는지 보이기 위해 우리는 이 논문의 흐름에 따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문서화하려 한다.

   (1) 첫째, 우리는 1586년 헤이그 총회의 역사적 배경을 주시할 것이다. (2) 다음으로 헤이그 총회에 대해 보고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3) 이는 세례 예식서와 다섯 가지 새로운 예식서들의 편집을 위한 수기(手記)문서의 중요성을 보여줄 것이다. (4) 1586년에 나온 두 판본의 발견은 총회와 교회들 간의 구체적인 의사소통을 보여줄 것이다. (5) 이 교회들은 질문을 보냄으로써 총회의 안건을 확정하였다. (6) 연구의 다음 부분은 헤이그 교회법과 예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고 (7) 마지막으로 1586년 예식을 실제로 사용하였는지를 지방총회들과 노회들의 회의록에서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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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586년 네덜란드와 헤이그

 

   1584년 윌리암 오렌지 공에 대한 암살 그리고 1585년 스페인군에 의한 안트베르펜(Antwerp) 함락은 네덜란드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네덜란드 의회(the States General)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네덜란드를 통치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엘리자베스는 거절하였지만 대신 레스터의 백작(Earl of Lecester)인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를 네덜란드로 보냈다. 레스터는 북부 네덜란드의 총독과 군총사령관의 역할을 했다. 반란군 지도자의 죽음과 남부지역의 상실은 혼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라이든(Leiden)의 카스파 콜하스(Caspar Coolhaes), 하우다(Gouda)의 헤르만 헤르베르츠(Herman Herberts), 레스터가 정착한 곳인 우트레흐트의 휴베르트 다위프하위스(Hubert Duifhuis) 그리고 심지어 헨트(Gent)에서 목회한 후 탈선한 페트루스 다테인(1566년에 나온 예식서를 담고 있는 첫 찬송의 책의 번역자이자 출판인)과 같은 목사들에 대한 여러 논쟁이 계속 되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1581년 미들부르흐 총회(the synod of Middelburg)가 받아들인 교회법을 채택하지 않았고 목사 임명과 감독에 대한 정부의 권한을 고수하였다.

   레스터의 백작은 네덜란드에서 개신교 연합의 이상과도 같았다. 새롭게 총회를 개최하려는 계획은 헛되지 않았다. 미들부르흐 총회는 헨트를 총회개최를 주관하는 교회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1584년 도시가 포위되면서 헨트는 안트베르픈에 임무를 맡아달라 요청한다. 그러나 안프베르픈도 정해진 시간 내에 총회를 조직할 수 없었다. 그때 아른헴(Arnhem) 목사인 요하네스 폰타누스(Johannes Fontanus, 1545-1615)가 델프트(Delft)의 목사이자 1581년 총회 의장인 아렌트 코르넬리스(Arent Cornelisz., c.1548-1605)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레스터의 백작과 연락하는데 있어서 핵심인물은 라이든 대학의 교수이자 1585년부터 총장을 맡은 아드리아누스 사라비아(Adrianus Saravia, 1532-1612)였다. 헤이그 총회는 레스터의 백작의 정치에서 선봉이었다.

   헤이그 총회는 1586년 6월 20일에서 8월 1일까지 열렸다. 회의 준비에 대해서는 지방총회들(the provincial synodes)의 회의록에서 유추할 수 있다. 로테르담에 열린 남부홀란드 지방총회(the provincial synod of South Holland)는 “레스터의 백작 각하의 요구에 따라” 6월 20일 헤이그에서 시작해야 하는 총회를 준비하라는 의회의 지시를 언급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레스터의 백작을 “기독교, 교회와 회중의 평안과 일치에 대한 감독과 관리를 하는 [...] 특별한 임무”를 내렸다. “왜냐하면 이 땅의 번영이 이에 달렸기 때문이다.” 레스터의 백작에게 이를 위한 최고의 수단은 총회의 개최였다.

   가장 잘 알려진 헤이그 총회의 결과는 교회법이 확정되고 이를 레스터의 백작이 비준한 것이다. 되찾은 총회지도부의 서명이 담긴 필사본을 보면 총회는 교회법을 지방총회들과 노회들에 바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의회는 1586년 교회법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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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기와 회의록

 

   총회가 필사본을 보내는 모습은 헬미키우스(Helmichius)가 서기로서 회의록에 심여를 기울인 것과 일치한다. 총회가 끝난 후 정확히 한 해를 지나 그가 쓴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명확해진다. “최근 제가 지난 총회의 가장 믿을만한 모든 회의기록들을 계속 검토하고 완전하게 정서(淨書)하고” 그리고 “한 총회의 회의록을 주의 깊게 보면서.” 그러나 그는 콜하스와 관련된 사안을 어떤 형태로 보고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세한 기밀보고 형식, 아니면 대중을 위한 짧은 형식으로 할 것인가? 그는 총회 심사관(assessor)인 코르넬리이(Cornelii)에게 두 가지 형식의 견본을 제시하고 조언을 구했다. “제가 이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떤 것을 고수해야 한다 생각하십니까?” 헬미키우스는 코넬리우스가 선택한 형식의 “바로 이 문서”를 다시 보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는 추가작업에 대해 양해를 구하면서 편지를 끝맺는다. 그러나 작업의 목적을 이렇게 표명한다: “또한 총회 회의록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1587년 11월에 쓴 편지 마지막에 ‘회의기록(acten)’을 프랑스어로도 번역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 총회는 “두 언어의 교회들 이름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회의기록의 중요성은 마닉스 판 세인트 알드혼더(Marnix van St. Aldegonde)의 시편찬송(de Psalmberijming)에 대한 문서에서 볼 수 있다. 비록 예식에 대한 이런 측면이 이 연구에서는 제외되어 있지만, 이 새로운 시편찬송에 대한 관심은 헤이그 총회의 중요성을 새로이 부각시킨다. 륏트헤르스는 다음의 제목이 달린 문서를 제공한다: “1586년 6월 20일에서 7월 21일까지 헤이그에서 열린 총회의 회의기록 발췌본” (“Extract uyt d’Acten des Nationalen Synodi gehouden in Sgravenhage den 20e Junii etc. 1586, van den 21Julii.) 헬미키우스 자신이 발췌본을 인증하였고 이로 인해 마닉스의 시편찬송을 교회에 도입할 수도 있다는 잠정적인 결정이 알려지게 되었다.

   서기로서 베르네르 헬미키우스(Werner Helmichius)의 핵심 역할은 3년 뒤인 1589년 북홀란드 지방총회(de particuliere synode Noord-Holland 1589)의 회의기록에서 나타난다. 엔크하위즌 노회(de classis Enkhuizen)는 정부의 대표단이 당회에서 침묵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우트레흐트에 있는 “헤이그 총회 서기였던” 헬미키우스에게 교회법 중 이 부분에 대해 문서로써 문의하기로 결정된다. 이 요청은 “그가 그 총회[헤이그 총회]의 서른 네 번째 항목에서 정부가 당회에 추가한 사람들의 침묵에 대해 어떤 언급이 있는지 조사하기를 원하다”는 것이다. 지난 총의의 서기(scriba)는 이후에 에이담(Edam)의 당회와 연락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의 목사들에게 자신의 답변을 보내도록 요청을 받는다. 규정은 “조항이 발견되든지 않든지 간에” 무조건 대답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암스테르담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편지가 헬미키우스에게 도착했는지 그가 답변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1589년 북홀란드 사람들은 1586년 총회 회의기록을 서기가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어찌 됐든지 헬미키우스가 만든 1586년 수기 회의기록 발췌본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 발췌본은 7월에 열린 총회의 두 번째 회기 때 다룬 헨리쿠스 불키우스(Henricus Bulckius)에 대한 것이었다. 륏트헤르스는 발췌본의 연대에 대해 “의심할 여지 없이 1592년에 요청되었고 보내 진 것”이라 말한다. 아마도 이는 1586년 회의기록이 그 해에 헬미키우스의 소유였고 우트레흐트에서 델프트로 이사할 때 가져간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륏트헤르스는 자신의 1586년 헤이그 교회법 출판을 위해 수집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헬미키우스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우며 이렇게 말하였다. “1586년 헤이그 총회 회의기록만큼 그의 기록에 관심을 쏟았다.” 베르네르 헬미키우스와 심사관 아르놀두스 코르넬리이(Arnoldus Cornelii)사이의 편지를 인용하며 이를 설명한 후에 륏트헤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작업은 거의 무의미했다. 왜냐하면 언급한 회의기록이 갑자기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심지어 당시의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시는 세상에 드러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 륏트헤르스는 헤이그 총회가 그 다음 총회를 개최하도록 지정한 암스테르담 당회가 도르트 총회를 앞두고 지난 총회의 회의록을 찾으려 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수색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이 교회[암스테르담 당회]가 총회를 개최하도록 86년 회의기록으로써 임무를 줘야 하는데 아무도 회의기록을 찾을 수 없다.” 헤이그 회의기록이 소실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새로운 예식서들의 진본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행운이다.

 

 

4. 단 하나의 수기문서에 담긴 다섯 가지 예식서들

 

   판 랑어라트(Van Langeraad)가 헤이그 총회의 상세한 수기문서를 발견한 것은 특별히 우리가 얼마나 총회의 의제나 작업방식을 모르고 있는지를 자각할 때 흥미롭다. 위에서 언급한 수기 총회회의기록은 보존이 안 되었다. 대신 이 유일한 문서는 도르트 노회 기록보관소(het archief van de classis Dordrecht)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세례예식서 축약판 (een verkorte versie van het doopformulier), 또한 목사의 안수식 혹은 임직식을 위한 예식서(een formulier voor de eerste bevestiging van predikanten), 장로와 집사의 임직예식서(een voor de bevestiging van ouderlingen en diakenen), 교회 회원의 출교를 위한 예식서(een voor de afsnijding van een lid van de gemeente)와 출교당한 자의 해벌을 위한 예식서(een formulier voor de wederopneming van een eerder gebande persoon)를 포함한다. 게다가 이 수기문서는 교회생활을 위한 다른 두 문서도 포함한다. 이들 원 텍스트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상세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언급한 텍스트들은 서명하고 송부(送付)된 교회법 사본 바로 다음에 그리고 레스터의 백작의 승인 문서 (de acte van authorisatie van Leicester)의 사본에 이어 도르트 노회 서류 안에 배치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제목을 달고 있다.

 

• 세례를 주기 위한 예식서 (Forme om te doopen)

• 전에 섬겨 본 적이 없는 말씀 사역자들의 임직예식서 (Forme vande bevestinghe der dienaren des woorts die noyt tevooren gedient en hebben)

• 장로들과 집사들이 동시에 혹은 함께 임직을 받도록 하는 임직예식서 (Forme vande bevestinghe der ouderlinghen ende diakenen daer deselfde ghelyck ofte tsamen bevesticht worden)

• 출교 예식서 (Forme des bans ofte affsnydinghe vander ghemeinten)

• 출교당한 자의 해벌을 위한 예식서 (Forme van wederopneming des affgeneden in de Ghemeente Christi)

• 교회법 항목에 따른 교회 감독의 형식 (Forme van inspectie over de ghemeyne kercken te houden volgende den articulen der kerckenordeninghe)

 

   교회법 필사본과 같이 위 마지막 텍스트도 의장 카메돈키우스와 심사관 코넬리이가 서명하였다. 이에 이어서 교칙(校則/schoolorde)의 일부분, 라이든의 콜하스 사건(de zaak-Coolhaes van Leiden, 1586년 7월 25일)에 대한 논의 그리고 하우다의 헤르베르츠 사건(de zaak-Herbertsz van Gouda, 1586년 7월 31일)에 대한 논의가 들어 있다. 이 서류에는 성찬예식서와 결혼예식서를 넣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1574년에서 1575년에 축약된 세례예식서와는 달리 이 예식서들은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 서류는 1586년 총회가 작성하였으며 우리가 수기형태로 만날 수 있는 네 가지 예식서들을 담고 있고 이들 예식서의 발생 역사에 대해 무언가 발견할 수 있는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문서다.

   도르트 노회의 기록보관소에서 이 서류를 우연히 발견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르트는 홀란드 주(州)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여기서 모든 교회가 참여한 총회가 1578년에 처음으로 개최되었고 또한 1618년에서 1619년에 마침내 마지막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특별히 도르트 교회만 헤이그 총회 지도부를 통해 이 문서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본 서류에 동본된, 이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글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필사본이 도르트 노회에 보내진 것과 같이 필사본에 있는 교회법과 예식서들의 관계는 1586년 8월에 각 주(州)에 있는 각각의 노회에 이 서류가 송부되었을 거라 짐작하게 한다. 총회지도부 4인이 서명한 1586년 총회의 교회법은 필사본 형태로 여러 교회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버아이셀 지방총회 책(het boek van de provinciale synode Overijssel)은 총회지도부가 서명한 1586년 교회법이 “총회책”(Synodael boeck) 전반부에 있다. 총회의 지도부는 의장(preses)인 미들부르흐 목사 야코부스 키메돈키우스 (Jacobus Kimedoncius, c.1550-1598), 우트레흐트에서 온 서기(scriba)인 베르네르 헬미키우스 (Werner Helmichius, c.1551-1608) 그리고 심사관(assessor)인 아렌트 코넬리스 크루서 (Arent Cornelisz. Croese 혹은 Arnoldus Cornelii Crusius, 1547-1605)로 구성되었다. 이들 셋 모두는 ‘십자가 아래의 교회’(de gemeente onder het kruis) 즉, 스페인 지배 하에 있었던 네덜란드 남부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키메돈키우스는 아마도 독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1584년 헨트(Gent)에서 도망쳤다. 헬미키우스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ein)의 첫 교회를 섬겼다. 크루서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한 후 처음 팔츠(Fankental 혹은 Pfalz)에서 섬겼다. 그들의 서명은 1586년 헤이그가 확정하고 노회들에 보낸 교회법의 필사본들이 진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현재 확보한 서류와 비교할 수 있는 예식서들을 가진 또 다른 서류들은 여타 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반면에 교회법 필사본들은 보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도르트 노회의 필사본이 얼마나 중요한가? 필사본을 살펴본 후 우리는 임직예식서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러번 오기(誤記)하고 실수로 삭제한 사실은 필사본이 시범작업과 관련된 것이라 짐작케 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 서류에서 어느 총회참석자의 시범 작업을 다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예레미아스 바스팅기우스 (1551-1595)일 수도 있다. 바스팅기우스는 안트베르픈이 함락 이후 1586년 초기에 도르트에서 목사가 되었고 남 홀란드 지방총회(de provinciale synode Zuid-Holland)는 그를 대표로서 헤이그 총회로 보냈다. 아마도 그도 예식서 작성에 관련되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이 필사본의 중요성은 총회의 작업방식에 대한 몇몇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어느 대표자 혹은 규모가 작은 위원회가 그 예식서들을 쓰는 임무에 착수했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는 작성작업이 단회적이었는지 여러 번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도르트 노회 서류는 예식서 텍스트의 최종 필사본은(목사 임직예식서와 장로 집사 임직예식서의 경우에는 최종본 바로 전이다)출판업자의 손에 주거나 혹은 총회참석자가 자기 노회로 가져가기 위함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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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586년 출판물의 발견

 

   성경, 시편찬송집 그리고 요리문답출판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인해 1586년 라이든에서 얀 파츠 야콥스존(Jan Paedts Jacobszoon)이 출판한 신약성경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성경에는 다테인의 시편찬송 (De C.L. Psalmen Davids)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예식들과 기도문이 함께” (Mitsgaders den Christelijcken Catechismo, Ceremonien ende Ghebeden) 들어 있다. 요리문답에서부터 페이지 번호가 다시 시작된다. ‘예식들’ 부분에 여섯 개의 예식서들이 들어 있다. 즉, 헤이그 총회가 축약한 세례예식서, 개정되지 않은 성찬과 결혼예식서, 그리고 총회가 새롭게 작성하게 하여 확정한 네 개의 예식서들이다. 우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파츠(Paedts)의 1589년 판 성경을 사용하였다. 이 성경도 헤이그 총회 예식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총회로부터 이 성경이 출판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성경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1586년에 교회들은 헤이그 예식서들을 이미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필사본은 어떻게 3년 후에야 라이든에서 출판되었는가? 1586년 판 교회책자의 발견으로 총회는 총회가 열린 바로 그 해에 일곱 개의 예식서들이 출판되어 예식을 위해 사용가능하도록 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두 번째로 발견한 것은 우리로 헤이그 총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했다. 즉 또 다른 출판물이 있는 것 같았다. 파츠의 시편찬송집처럼 일곱 개 예식서들이 아니라 1586년 총회가 만든 다섯 개의 예식서들이 출판되었다. 표지는 없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이 예식서들의 묶음은 델프트(Delft)에서 심지어 1586년에 알브레흐트 헨드릭스(Aelbrecht Hendricxs)가 8절판 형식(in-octavo formaat)을 출판한 것이 확실하였다. 아래에 열거된 다섯 개의 헤이그 예식서들의 제목은 위에서 제시되었던 도르트 노회의 서류 내용과 명확히 일치한다.

   유일한 델프트 출판물(알브레흐트 헨드릭스, 1586년)은 다음과 같은 예식서들을 포함한다.

• 거룩한 세례를 거행하기 위한 예식서 (Forme om den. H. Doop vvt te richten, 1-7p)

• 전에 섬긴 적이 없는 말씀 사역자들을 임직시키기 위한 예식서 (Forme om te bevestighen de Dienaers des Woorts, die noyt te voren ghedient hebben, 7-17p)

• 장로들과 집사들을 동시에 임직받게 하는 임직예식서 (Forme van bevestiginge der Ouderlinghen ende Diaconen, daermen deselfde teghelijck bevesticht, 18-28p)

• 출교 예식서 (Forme des Bans ofte Afsnijding vander Ghemeente, 28-32p)

• 출교당한 자의 해벌을 위한 예식서 (Forme van vvederopneming des afghesneden inde Ghemeente, 33-38p)

 

 

   헤이그 예식서들의 필사본이 도르트 노회에서 델프트 출판으로 그리고 델프트 출판에서 라이든의 얀 파츠의 교회책자에 채택되는 과정을 겪었다. 1586년 8월 1일 총회가 폐회된 후 이들 출판물들은 짧은 시간 내에 현실화되었다. 필사본의 형태로 각 교회에 송부된 교회법뿐만 아니라 예식서들도 빠른 시일 내에 교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헤이그 예식서들이 1589년보다 빠르게 출판되었을 수 있다 추측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편지들이 이를 암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레스터의 백작은 바로 1586년 8월 1일에 글을 쓰기를, 그는 확정된 교회법에 만족하며 “[네덜란드] 정부에 전달하고 이후 예식서들과 서른 일곱 개의 항목들(de XX[X]VII artijckelen)들 모두 인쇄가 되기를” 바랬다. “이는 문서가 어디서나 보존되기 위함이다. 그리고 출판된 것들을 영국 여왕 폐하께 보내기를 바란다.”

   이 인쇄된 견본들은 분명 첫째로 예식서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본은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다.

   1586년 8월 30일 자 헬미키우스가 코르넬리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헬미키우스는 총회에 회부된 여러 안건을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서둘렀기 때문에”(door ons haesten) 모든 안건이 세심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유감을 표했다. 여러 대표들은 서둘러 떠났다. 레스터의 백작(Zijne Excelletie, de graaf van Leicester)은 총회의 모든 결정사항을 눈으로 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분명 “엄숙히 교회법과 함께” (solenniter neffens de kerkoordeninge) 전달되었을 것이다. 한 주 뒤에 헬미키우스가 델프트에 있는 코르넬리이에게 알리기를, “저는 예식서의 인쇄본이나 인쇄된 견본과 함께 당신의 편지를 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쓰신 바대로 배포할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알브레흐트 헨드릭스의 델프트 판을 가리키는 것 같다. 헬미키우스는 총회가 서둘러 폐회하였기 때문에 예식서들이 인쇄되고 있다고 다시 언급한다. “인쇄본이나 인쇄된 견본”이라는 말을 골라 쓴 것은 델프트에서 알브레흐트 헨드릭스가 실현한 것과 같이 출판을 가리킨다. 델프트의 목사이자 지도부의 서기로 선택된 아렌트 코르넬리스는 총회 개최의 주역이었다. 그가 이 출판을 주선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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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예식 관련 사항을 의제로 하는 것에 대한 단서들

 

   총회가 예식과 예식문서들을 다뤄야 할 것이란 점은 예견된 것이었다. 총회의 안건을 규정하는 소위 “특별 논제들”(특별 혹은 지방 총회들에서 총회의 의제로 올린 논제들)이 보존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논제는 교회법에 어떠한 죄들에 대해 출교라는 수단을 사용할 지를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총회는 “주요한 죄들은 성찬예식서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다 대답했다. 그와 같은 의제들이 소위 지시(instructies)라는 형태로 지방에서 총회에 제시되었다. 지시들의 원래 형태가 아닌 총회가 이들을 모아 정리한 것들만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 어느 지시가 올라왔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총회가 모아 정리한 지시들을 각 지방이 1586년 총회를 준비하면서 예식과 관련하여 어떤 점들을 다뤘는지 기술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세례와 관련하여 “또한 세례 시에 묻는 질문과 세례를 거행하는 행위가 일치해야” 한다는 지시가 총회에 제시되었다. 이는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북부지역에서 교황을 따르는 자들, 산파들, 농부들 등”과 같은 온갖 사람들이 세례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역자들은 세례를 위한 같은 예식서를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결합된다. 이는 1574년에서 75년 세례 예식서가 축약된 이후 왜 헤이그 총회가 총회 이후로 어떤 예식서를 사용해야 하는가를 결정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성찬에 관하여는 빵이 담긴 접시를 내미는 것보다 빵을 모든 성찬 참여자의 손에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질문만 제시되었다. 총회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했는지는 모른다.

   출교와 해벌을 위한 예식서에 대한 논제도 지방에서 나왔다. “[범죄에 대한] 설명과 출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 어떤 한 예식서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1581년 미들부르흐 총회의 특별 질문들 (de particuliere vragen) 중에 39번 째 항목을 가리키지만 이런 규칙이 실행에 옮겨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출교를 위한 예식서의 근원을 추적하고 싶다면 어떤 경우에도 1581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헤이그 총회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도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악하고 더 이상 우리가 다루기 힘든 죄에 대해서 출교를 적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마도 이는 발생하는 많은 죄에 대하여 출교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출교 당한 자의 해벌을 위한 예식서도 언급한 질문에 나타난다. 즉, “회개하는 사람의 죄 고백으로 인해 해벌할 때도 어떤 한 예식서를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지방총회들에서 온 질문들은 이와 같이 새로운 예식서들의 작성과 총회에 대한 레스터의 백작의 의도에 걸맞게 개혁교회의 (또한 예식의) 일치를 진척시키는 동기를 만들었다.

 

 

7. 예식과 교회법을 하나로 묶기

 

   목사들에게 보낸 한 편지를 통해 총회는 각 지방총회가 자신의 대표단을 통해 받은 교회법 필사본을 “단지 여러 분의 총회에서 읽고 듣고 공표할 뿐만 아니라 교회법을 모든 부분에 있어서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1586년에 확정된 교회법은 예식서들을 여러 차례 명확히 언급하고 예식서들의 사용을 규칙으로 만들었다. 교회법 항목 4번은 목사의 공적인 임직식(서임식)은 “격에 맞는 질문들, 권면, 기도 그리고 임직식을 거행하는 목사(혹은 더 많은 목사들이 있을 경우 몇몇 목사들)의 안수(按手)로 서임/임직 예식서를 따라” 시행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이전에 목사가 아니었던 사람들의 합법적인 소명과 관련된 예식서의 원제목과 완전히 일치한다. 다른 교회로부터 소명을 받았으면 임직식에서는 “먼저 언급한 질문과 기도”를 사용하지만 교회법은 예식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항목 5번). 또한 장로들의 선출과 임직에 대한 교회법의 항목(20번)은 임직식을 “임직예식서를 따라서” 거행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집사들과 관련하여 이들의 임직은 장로들과 같은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짧게 교회법에 나와있다 (항목 22번).

   “견책과 교회적 권면”에 관한 헤이그 교회법 제4부에서 출교(excommunicatie)에 대해 다룰 때 출교 예식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항목 70번). 그러나 그 다음 해벌의 가능성에 대해 논할 때는 예식서를 언급한다. 이 엄숙한 사건은 성찬과 연결된다. 회개의 과정에서 교회와의 화해를 원하는 사람은 “그와 관련된 예식서에 따라 공개적으로 자신의 회개를 고백함으로써 다시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진다 (항목 71). 이들 항목은 도르트 노회 필사본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어떻게 교회법과 예식서들 전체가 필사본으로 하나처럼 만들어져 교회들에게 송부되었는지를 설명한다.

 

 

8. 각 주(州)에서 예식서 사용을 실행하다

 

   지방 총회들의 회의록에서 1586년으로부터 나타난 헤이그 총회 결정의 효력을 볼 수 있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법 필사본은 오버아이셀 지방총회의 “총회 책” (Synodael boeck)의 초반부가 되었고 그때부터 총회에 참석한 목사들은 교회법에 서명했다. 1587년 1월 오버아이셀 정부에 “첨부된 레스터 경의 조서”와 함께 제출하기 위해 “[헤이그] 총회의 교회법”을 언급되었다. 1587년 회의에서 “헤이그 총회 교회법을 낭독하였다.” 이는 교회법을 모든 교회에 적용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그리고 헤이그 총회의 교회법이 레스터의 백작과 함께 기사단(騎士團)과 도시들에 의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총회는 헤이그 교회법의 항목 4번, 20번, 21번, 그리고 55번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55번에 대해서 총회는 “교회 성도들이 예식의 특정 방식에 익숙해지고 성찬행위의 근본을 더 잘 배워 이해하기 위해 성찬 예식서를 성찬대에서 읽어 주는 것”을 다뤘다. 결혼예식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그것으로 인해 [예식서로 인해] 교회성도들을 긴 훈시(訓示)로 잡아두지 않게 된다. 목사들에게 설교 내용을 줄이라 권하고 또 그들은 결혼식 때는 예식서 책 안에 결혼에 관한 것 [결혼예식서]을 어느 정도 줄여서 낭독해야 한다. 이와 동일한 결혼예식서는 또한 부적절한 결합으로 결혼생활이 시작된 사람들이 결혼식을 행할 때도 계속 사용되어야 한다.

 

   “예식서 책”은 여기서 다테인의 교회책이나 헨드릭스 판(1586년 델트프)을 가리킬 것이다.

   새로 작성된 예식서들 중 하나에 대해서 말하자면 출교 예식서에 대한 관심이 스킬란트-로테르담 노회(de classis Schieland-Rotterdam)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흥미롭게도 1586년 8월 말 노회 회의록에서 코넬리우스 힐리스존 목사 (de predikant Cornelis Gillisz.)가 같은 노회에서 한 지시를 받았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미셸 안드리스존(Michel Andriesz.)에게 “그가 사용한 출교 예식서”를 노회책(het classisboek)에 기록해야 했다. 미셸 안드리스존은 일찍 제이븐하위즌에서 목사로서 면직되었고 코넬리스가 뒤를 이었다. 1582년 노회는 새로 임직한 목사(코넬리스)에게 그 사람(안드리스존)을 교인들 앞에서 출교하라 권고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사용한 예식서”가 1586년에 언급된 것을 보면 이는 아마도 당시(1582년)를 위해 작성하고 읽은 문서를 뜻할 수도 있다. 또는 헤이그 총회의 출교 예식서가 (아마도 교회들이 이를 받은 후 바로) 처음으로 사용된 경우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스킬란트 노회의 1586년 8월 26일 회의는 대부분 얼마 전에 받아들인 교회법 실행에 관한 것이다. 노회가 성례에 관한 교회법 항목들과 관련하여 “각 목사는 세례 예식서를 따라 행해야 한다”고 표명해야 할 이유를 찾은 것은 중요하다. 이어서 노회는 성찬 예전 장소와 관련하여 “성찬 예식서는 성찬대 앞에서 읽을 것이다”라고 결정하였다. 총회가 확정한 문서들은 “형식”(forme)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반면 노회는 세례, 성찬 그리고 출교의 경우 “예식서”(formulaer/fomulair)라는 말을 썼다.

제일란트 지방 총회(De provinciale synode Zeeland)는 1591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목사들은 세례 시에 세례의 제정과 사용에 관한, 그리고 그러한 목적으로 인쇄된 예식서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노회는 “성찬 예식서와 성찬식에 사용되는 기도문을 함께 성찬대 앞에서 읽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들 항목들은 그 해 제일란트의 교회법의 일부가 된다. 교회법에 기술된 “권징의 형식”(forme van discipline)은 절차에 관한 것이며 교회법의 더 많은 항목들이 이를 다루게 된다. 모든 권면에 대해 완고히 거부하는 경우 최후의 순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되어 있다. “출교 예식서에 따라 완전한 출교를 위한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또한 프리슬란트 지방 총회(de provinciale synode)에는 1587년에 헤이그 총회의 결정이 반향을 일으킨다. “모든 목사들은 (헤이그 총회가 언급한) 세례 집례를 위한 예식서와 기도문들을 가능하다면 사용해야 한다.” 총회의 결정이 이미 알려졌던 것이다. 1589년 지방 총회는 “기도문들과 세례, 성찬, 그리고 결혼 예식의 집례에 대해서는 총회의 결정들과 총회가 만들고 인쇄하고 각 노회에 보낸 예식서들을 똑같이 따라야 한다”라고 결정하였다. 이는 1586년 총회가 예식서들을 작성하고 인쇄하였다는 것을 기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쇄본(아마 알브레흐트 헨드릭스의 델프트 판)이 각 노회에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9. 관점들: 예전, 전기(傳記) 그리고 신학

 

   16세기에 열린 개혁교회의 마지막 총회는 예전의 관점에서 볼 때 6주라는 기간 동안 예식서의 수를 둘에서 여섯으로 확장하면서 그 박력을 보여주었다. 도르트 노회의 사본은 첫 번째 출판본(델트프: 알브레흐트 헨드릭스, 1586)이 특정되면서 시범적인 작업을 한 것이라는 점이 확실해졌다. 그렇게 예식서들이 (임시)최종형태로 교회들에 보내졌다. 또 그렇게 예식서들이 교회책에 삽입된다(라이든: 얀 파츠, 1586).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진 출판은 레스터의 백작과 총회 지도부가 교회 일치에 기울인 관심을 보여준다.

   우리의 연구는 네 가지 새로운 예식서들의 작성에 기여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첫 번째는 야코뷔스 키메돈키우스(Jacobus Kimedoncius, -1596)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지혜의 대학(Collegium Sapientiae)에서 가르쳤었고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의 동료였다. 그 이후 키메돈키우스는 제네바에서 가르쳤고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지혜의 대학 학장이 되었다. 또한 그는 헨트(Gent)에 있는 대학에서 도시가 함락될 때까지 교수로서 일했으며 미들부르흐에서 짧게 목사로 있었다. 그래서 헤이그 총회에 대표단 자격으로 참여했고, 1589년 하이델베르크로 돌아갔다.

   의장인 키메돈키우스와 함께 베르네르 헬미키우스(Werner Helmichius)가 서기로서 총회의 지도부에 있었다. 아마도 서기직은 너무 많은 임무가 주어지기 때문에 헬미키우스가 예식서들에 대한 창의적인 작업에는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사관(assessor)인 델프트에서 온 아렌트 코르넬리스(Arent Cornelisz.)도 예식서들의 작성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 그가 델프트에 있는 출판사와 연락을 취했었던 사람이다. 그의 손으로부터 예전(liturgie)에 대한 더 많은 청사진들이 보존되어 있다. 목사의 첫 임직을 위한 예식서와 관련하여 후보자 검증에 대하여 완성된 청사진이 수기문서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코르넬리스는 “요리문답의 순서에 따른 검증”(d’examinatie na de orden des Catechismi)(12페이지)에 대해 질문을 써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들로써 예식의 윤곽을 설정했다. 첫째로 “노회 회의에서 목사가 될 사람에 대한 검증을 위한 기도”(Gebet voor d’examinatie eens toecomendem predicants inde ‘tsamencomste dess classis) 그 다음으로 “비록 검증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검증 후에 감사와 기도”(Dancsegghinge ende gebet na d’examinatie wanneer die noch niet is voleijndicht) 그리고 (여러 질문 후에) “검증이 완전히 끝난 후 감사와 기도”(Dancsegghinge ende gebet na de voleijdinge der examinatie.“ 완전히 서식화(書式化)된 기도문 문서는 이 문서가 델프트 노회에서 실질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 주요한 세 가지 기도문들에 대한 작업과 이 기도문들의 역할에 대한 추가 연구는 1586 헤이그 총회의 새로운 네 가지 예식서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또한 예레미야스 바스팅기우스(Jeremias Bastingius)에게도 해당한다. 그도 헨트에서 교수였고 도르트에 새로 임직한 목사로서 1586년 헤이그 총회에 대표단 자격으로 참여했다. 1588년 그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서가 준비를 마쳤고 빛을 보게 되었다. 요리문답에서 제30주일을 다루면서 그는 교회 권징에 대해 자세히 썼다. 1586년 헤이그 총회의 예식서들과 바스팅기우스의 신학작업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요구된다. 1591년에 그의 해설서가 도르트에서 같이 일한 헨드릭 판 데르 코르푸트(Corputius, 1538-1601)에 의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de Verclaringe op den catechisme der Christelicker religie). 흥미로운 점은 1581년 미들부르흐 총회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스 바스팅기우스와 발허른 노회는 우리 교회들의 요리문답에 대한 주석을 만들어야 한다” 주석 혹은 해석은 젊은 목사들이 요리문답을 가르치기 위한 예배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짧은 설교 형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요구가 많아 출판을 생각해야 했던 것 같다. 결국 바스팅기우스는 스스로 주석 형식을 선택하였고, 그의 주석은 처음에는 라틴어로 출판되었다. 그는 헤이그 총회에 참여하고, 2년 뒤인 1588년에 출판한 것이다. 이는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조직화된 신학서들 중에 하나이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종교개혁과 예식서 책에 담긴 예전의 발전 경과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가치가 있다.

 

 

 

필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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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알렉산더 브 부어(Erik. A. de Boer)는 네덜란드 캄펀-우트레흐트 신학 대학교(the Theological University Kampen-Utrecht)의 교회사 교수 이며 남아프리카 블룸폰타인 자유대(Free State University, Bloemfontein, South-Africa)의 신학, 종교 학부 연구원이다. ‘네덜란드 고전적 개혁파 예전의 역학관계: 예전의 문서들과 그 문서들의 역사’ (The dynamics of the classical reformed liturgy in the Netherlands: its texts and their history)라는 연구 프로그램에서 그는 출교와 해벌 예식서들을 연구하고 있다. 그의 연구는 또한 예전의 마지막에 위치한 병자에 대한 위로(Den Siecken Troost)에 집중되고 있다.

E-mail eadeboer@tukampen.nl

 https://orcid.org/0000-0001-9299-0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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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모세 (Moses Lim)는 캄펀-우트레흐트 신학 대학교(the Theological University Kampen-Utrecht)에서 박사과정에 있으며 ‘네덜란드 고전적 개혁파 예전의 역학관계: 예전의 문서들과 그 문서들의 역사’ (The dynamics of the classical reformed liturgy in the Netherlands: its texts and their history)라는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그는 목사의 임직식 예식서와 장로와 집사 임직식 예식서를 연구 중이다.

E-mail mlim@tukampen.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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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장로교회 헌법, 어디로 가야 하나? -예장 통합, 합동, 고신 교회 『교회정치』를 중심으로-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서론 본 글은 현재 한국 장로교회 가운데 예장 통합, 예장 합동, 예장 고신 교회의 『교회정치』를 서로 비교하며 이를 중심으로 한...
    Date2022.05.06 By개혁정론 Views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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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시찰 없이는 노회는 없다: 노회의 시찰 직무에 관해 (성희찬 목사)

    시찰 없이는 노회는 없다: 노회의 시찰 직무에 관해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서론 노회의 직무 중 하나는 구역을 나누어 시찰회를 조직하고 시찰 위원을 두어 관내 교회를 시찰(視察)하는 것이다. <교회정치>에서 분명하게 이를 규정하고 있다(제137조 시...
    Date2022.04.22 By개혁정론 Views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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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한국장로교회헌법, 어디로 가야 하나? -예장 통합, 합동, 고신교회 『예배지침』을 중심으로-

    한국장로교회헌법, 어디로 가야 하나? -예장 통합, 합동, 고신교회 『예배지침』을 중심으로- 안재경 (온생명교회 목사) 한국장로교회 대부분의 교단은 교단헌법을 가지고 있다. 그 헌법에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포함하고 있고, 이후에 교회정치를 중점...
    Date2022.03.31 By개혁정론 Views1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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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고신 교회 70년과 ‘재판권을 부여받은 전권(全權)위원’(1981-2010)

    이 글은 고려신학대학원 변종길 교수(신약학) 은퇴기념 논문집에 실린 것으로 필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 편집자 주 고신 교회 70년과 ‘재판권을 부여받은 전권(全權)위원’(1981-2010)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서론 변종길 교수님은 고려...
    Date2022.03.29 By개혁정론 Views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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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위협세력과 대처방안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위협세력과 대처방안 - 교회 안의 위험한 기류와 해결책을 중심으로 - 권기현 (로뎀장로교회 목사, 대구서부노회) 1. 서론 작년(2020년) 초만 해도 길어야 몇 주, 아무리 길어도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 예견했다. 그러나 신종코로...
    Date2021.06.08 By개혁정론 Views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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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바른 교리와 이단 개론: 이단의 뿌리와 교회의 응전

    총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조완철 목사)가 2021년 5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단 전문상담가 3차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 고려신학대학원 이성호 교수가 ‘바른 교리와 이단 개론’을, 로뎀장로교회 권기현 목사가 ‘포스트 코로나 시...
    Date2021.06.02 By개혁정론 Views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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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고신교회 제7차 헌법개정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고신교회 제7차 헌법개정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서론 교리표준(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과 관리표준(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으로 이루어진 교회 헌법은 법 조항들로 이루어진 교회론이라 할 수 있...
    Date2021.05.11 By개혁정론 Views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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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교실, 정신과학교실, 인지과학협동과정,시스...
    Date2021.04.30 By개혁정론 Views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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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범 교수)

    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범 교수 (서울대) 오늘 뜻깊은 자리에서 제가 큰 흥미를 느끼는 주제에 대해...
    Date2021.04.26 By개혁정론 Views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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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성찬상을 모독하지 마라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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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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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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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