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회 고신총회의 10월 27일 200만 연합예배 참여 결정에 대해 정중하게 드리는 어리석은 질문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제74회 고신총회는 총회 이튿날인 9월 11일(수)에 고신교단이 속한 한국교회총연합에서 요청한 한국교회 2백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참여를 위한 총회 결의 요청 건을 다루고, 논의 끝에 참여하기로 가결했습니다. 예장 고신만 아니라 통합, 합동, 백석, 합신 등도 이와 비슷하게 참여 결정을 했습니다. 10월 27일 200만 연합예배 취지는 동성혼 합법화와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악법 통과를 막고 나라와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위 총회의 결정을 존중하며, 10. 27. 200만 연합예배의 취지도 존중합니다. 이 행사에 참여를 생각하는 모든 분의 의견도 존중함을 밝힙니다.
그렇지만 외람되게도 개인적으로 총회가 이 결정을 한 시각부터 몇 주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음과 양심이 불편했습니다. 저처럼 마음과 신앙 양심에서 불편함을 느낀 다른 분들도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서 어리석은 질문을 공개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질문이 어리석을지라도 지혜로운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편 제7장에서, “有鄙夫(유비부)가 問於我(문어아)하되 空孔如也(공공여야)라도 我叩其兩端而竭焉(아고기양단이갈언)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내게 물어오면 그가 아무리 무지할지라도 나는 양극단을 두드리는 질문으로 그에 대해 뜻을 다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일의 양극단인 시종과 본말을 대답해주시기를 간곡히 바랄 뿐입니다.
우리 신앙고백서(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것처럼, “모든 대회나 공회의는 사도시대 이후부터 총회이든 지방 회의든 간에 오류를 범할 수 있었고 많은 회의들이 실로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회의를 믿음과 생활의 법칙으로 삼지 말고, 믿음과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여야 한다”(31장)고 고백합니다.
이 문구를 인용한 이유는 고신총회가 내린 이번 결정이 오류라고 단정하려고 함이 아닙니다. 다만, 총회라도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을 잊지 말자는 뜻입니다. 금번 제74회 총회 석상에서 ‘성(聖) 총회’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이 용어를 이렇게 많이 들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아는 대로 이 용어는 로마천주교회가 즐겨 사용합니다. 그들은 교회회의의 결정과 교황의 말을 거룩한 것으로 받기에 ‘성(聖)’이라는 말을 애용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장로교회는 총회라도 오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고백으로 ‘성(聖) 총회’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꺼림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헌법 정치(교회정치) 제1조(양심의 자유)는 “양심을 주재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종교에 관계되는 각 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자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1. 10월 27일(주일) 200만 연합예배 결정은 교회헌법 <예배>에서 규정한 “주일성수의 의무”에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가 열리는 날과 시각은 10월 27일 주일 오후 2시입니다. 고신총회가 이 문제로 논의를 할 때 부산 경남권의 교회가 이 집회에 참여하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그러면 주일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있겠느냐는 질의에 대해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드리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교회헌법 예배 제2장은 주일 공예배와 안식을 지키기 위해 주일성수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성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충분히 준비하여 공예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해야 하며, 공예배 외에 성경연구, 묵상, 기도, 찬송이나 기타 전도와 구제 등 선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의 교제를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또 제3장(주일예배)에서도 예배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예배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야 할 것 등 주일예배 참석자의 자세를 상세하게 나열합니다.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 인도를 맡은 목사의 사역과 예배의 모든 순서 진행을 위해 기도하며 참석자와 결석자를 위해 기도하며, 예배를 방해하는 모든 행위를 삼가고, 세상의 모든 일을 내려놓으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준비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진행되는 예배에서 경건한 예배 준비와 이를 위한 기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또 예배와 안식에 방해되는 행위를 금하며, 세상 염려를 삼가며 세상의 모든 일을 내려놓을 것을 말합니다. 지난 7월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동성 동반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동성 결혼 합법화가 조만간에 될 것이라는 염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종교의 자유가 제한될 것이라는 염려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런 염려에서 시작해서 주일 공예배의 장소를 바꾸고 순서를 간소화하는 것이 혹시라도 주일성수의 의무에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까? 이번 10월 27일 주일에 열리는 200만 집회는 “세상의 모든 일을 내려놓으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준비해야 한다”는 예배지침에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또 성경은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 5:14)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고 명하고 있는데, 그날 안식하지 않고 종일 운전해야 할 버스 기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물론 운전기사님이 좋아하실지 좋아하지 않으실지와 무관하게 말입니다.
2. 10월 27일(주일) 200만 연합예배 참여 결정은 주일 공예배를 지키기 위한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귀히 여긴 고신 정신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고신교회는 다른 어떤 교단에서는 볼 수 없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엄격한 주일성수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고신교회의 출발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명(특히 십계명)에 민감한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기간에 열린 제70회 총회(2020년 10월)는 ‘국가의 예배 금지 명령에 대한 질의’ 건을 다루며, 행정명령으로 대면 예배를 금지한 조처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총회적으로 이 일을 한 곳은 고신교회가 유일합니다. 고신총회 소속 악법저지 대책위원회는 2021년 3월 10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예배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이하 예자연, 대표: 김승규)와 연합하여 기자회견을 열고 “현장 예배 제한 및 금지 명령을 철회하고 사과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성명서를 보면 “교회의 예배는 기독교의 정체성이며, 기독교인의 사명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문구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10월 27일 주일에 열리는 200만 연합예배는 주일성수가 하나님의 계명(제4계명)이기에 이를 민감하게 여기는 고신의 지난 전통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또 코로나 중에도 “교회의 예배는 기독교의 정체성이며, 기독교인의 사명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며 현장예배, 대면예배를 강조하며 행정명령으로 이를 제한하거나 금지한 것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자세와는 혹시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3. 동성혼 합법화와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악법 통과를 막고 나라와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취지로 열릴 10월 27일(주일) 200만 연합예배 참여 결정은 성경과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인 “대회와 공회의는 교회적 사안만을 다루어야 한다. 비상시국에 겸허한 청원이나 국가 공직자의 요청을 받아 양심상 행하는 조언 외에는 국가와 연관된 시민적 사안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제31장)와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동성혼 합법화와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악법 통과 저지는 교회적 사안이라기보다 국가와 연관된 시민적 사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인으로서 우리가 각기 신앙 양심을 따라서 힘을 모으고 조직화하여 반대 서명 운동이나 항의 편지 전달과 항의방문을 할 수는 있으나, 교회 회의가 이를 결정하는 것은 혹시 우리 고백서와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또 “연합예배” “큰 기도회”라는 명칭이 부가되어 있지만, 200만(100만은 온라인, 100만은 현장) 명이 모이는 만큼 이는 악법 저지를 위해 기독교계가 힘을 모아서 시위하는 효과를 나타내려는 동기가 약간이라도 있다면 이는 “비상시국에 겸허한 청원이나 국가 공직자의 요청을 받아 양심상 행하는 조언 외에는 국가와 연관된 시민적 사안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 고백서에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비상시국이라 할지라도 겸허한 청원이나 양심상 행하는 조언의 형식으로 하라는 우리 고백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4. 10월 27일(주일) 200만 연합예배 결정은 혹시 기독교 복음의 특성에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총신대학교와 합동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치고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다 은퇴한 후, 올해 초 갑자기 소천하신 김명혁 목사님이 기독교 복음의 특성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 복음의 하나의 특성은 “약함”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약할 때 강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 중 하나는 너무 강하고 너무 지혜로워진 것입니다.
둘째, 기독교 복음의 또 하나는 특성은 “착함”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해왔습니다. 세 가지 모토가 기독교 복음의 중심과 기초가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만을 강조한 나머지 말과 지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은혜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하며 감정만 강조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교회에 설교와 신학과 은혜 체험이 풍성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너무 풍성하고 신학이 너무 풍성하고 은혜 체험이 너무 풍성한 나머지 말만 잘하고 비판만 잘하게 되었고 감정만이 풍부한 이기주의자들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셋째, 기독교 복음의 또 하나의 특성은 “주변 지향적”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 중의 하나는 자기중심 또는 중앙 집중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 민족은 한반도라는 지형적 특성과 유교라는 사회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개인 중심적이고 가문 중심적이고 지역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의 특성은 주변 지향적이고 이방 지향적입니다. 주변 지향적이라는 말은 사회의 중심에서 떠나 주변이나 변두리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소외된 게토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그 사회 안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치와 동화의 삶 즉 성육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10월 27일 연합예배는 복음의 특성인 “약함”보다는 숫자의 결집을 통해 우리 힘과 지혜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요? 만에 하나라도 복음을 거스르는 것은 아닌지요?
5. 10월 27일(주일)에 열리는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와는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에 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태복음 6장 5절).
혹시 10월 27일(주일) 서울 시내 한복판 광화문 일대에서 열리는 큰 기도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시위(示威)는 아닌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경계하신 바리새인의 기도가 될 가능성은 없는지요?
6. 10월 27일(주일)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를 통해 동성혼법,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악법저지를 저지하려고 하는 것은 혹시 사회적 제반 문제들에 대해 정의와 긍휼을 베풀어야 할 한국교회의 자세가 편향적인 것은 아닌지요?
이상하게도 한국교회, 한교총을 비롯해서 주요 장로교회 교단은 현 대통령의 무속신앙 관련(천공, 손바닥에 ‘왕’이라는 글씨를 새긴 것 등) 의혹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하였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와 무속신앙은 다르지 않습니까? 무속신앙은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 지난 몇 년 동안 사회를 향해 정의와 긍휼을 베풀어야 할 책무가 있는 한국교회는 동성애, 차별금지법 등에는 유독 목소리를 크게 내면서도 불의하고 부당한 다른 많은 일에서는 비교적 침묵을 해왔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교회가 10월 27일(주일)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를 통해 특별히 동성혼법,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악법 저지를 위해서 힘을 합하여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것은 혹시 사회적 제반 문제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가지는 자세가 일방적이고 편향적으로 비칠 오해는 없을까요?
7. 동성애,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악법 저지를 위한 10월 27일(주일)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 참여 결정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와 혹시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10월 27일 연합에배와 큰 기도회를 준비하는 사무국에서 “동성애 반대 목사 설교 중 파면, 학생은 체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문구와 관련 동영상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박해를 받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악법 통과를 막기 위해 정당한 방법으로 항의하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로 인해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18).
더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보냄받은 것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마 10:16).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마치 “이리 가운데로 있는 양”과 같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할지언정 이리와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리 가운데로 있는 양”과 같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교회가 동성애,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악법 저지를 위한 10월 27일(주일)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 참여 결정을 하여 세상에 대해 힘을 시위하는 것은 이런 정체성에 모순된 것은 아니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말씀에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요?
또 아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받아야 할지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롬 12:17)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벧전 3:9)
8. 10월 27일(주일)에 열리는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를 조직하면서 혹시라도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거나 이단과 사이비로 의혹을 받는 분을 분별하여 가리지 않고 도움을 받거나 교류와 참여, 후원을 받는 분은 혹시라도 없는지요?
지난 9월에 열린 제74회 고신총회가 10월 27일(주일) 집회 참여를 결정하는 석상에서 논의 중에 제71회(2021년) 총회가 참여 및 교류 금지를 결정한 전광훈 씨와 교류한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10월 27일 연합 집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광훈 씨와 접촉한 일이 관련 동영상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전광훈 씨가 10월 27일(주일) 집회에 참여한다는 의혹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10월 27일 집회 조직위원회에 “실업인 위원 박00 애터미 대표회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터미는 현재 구원파 사상과 유사하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금년 8월에 열린 제4차 한국교회 이단대책위원장 협의회 및 교단 이단대책위원회 전체 모임(고신을 비롯해서 통합, 합동, 합신 등이 속해 있습니다)에서 “애터미 복음사경회와 구원파 사상의 유사성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발표자-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실천신학교수, 김주원). 애터미는 다단계 판매 분야에서 국내 1위를 차지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현재 애터미가 실시하는 복음사경회 내용을 보면 구원파 성경공부 세미나와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이 발표 논문의 핵심입니다.
9. 10월 27일(주일)에 열리는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를 홍보하는 문구나 구호들이 혹시라도 신자 각 개인 신앙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지는 않는지요?
“더 이상은 시간이 없다 머뭇거리지 말자” “성경 믿는 성도 다 모이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모든 성도는 모이자”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루자”는 문구는 행사 참여를 강조하기 위해 논의 끝에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위 문구가 마치 위 행사에 참여하는 성도와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성도를 구분하여, 참여하지 않는 성도는 성경을 믿지 않는 성도요, 바울에게 무릎 꿇은 성도인 듯한 압박감을 양심에 혹시라도 주는 것은 아닌지요?
10. 10월 27일(주일)에 열리는 200만 연합예배와 큰 기도회를 홍보하는 문구 중에서 “이번 10.27 집회가 대한민국을 살리고 제2의 종교개혁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혹시 16세기에 있었던 종교개혁의 원리와 종교개혁가들과 당시 교회들을 오해한 것은 아닌지요?
10월 27일(주일)은 많은 개신교회가 종교개혁주일로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번 10.27 집회가 대한민국을 살리고 제2의 종교개혁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표현이 나온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10월 27일의 집회 목표와 대의명분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종교개혁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요?
종교개혁 당시에 과격한 개혁파라 불린 소위 “재세례파”는 때로는 개혁을 하기 위해 과격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시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예배당 내에 있는 성상을 우상이라는 이유로 찍어 내어버렸고, 때로는 신자들이 회집하여 찬송가를 부르며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시위하기도 했고, 성시화(聖市化)하기 위해 폭력으로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혹시라도 10월 27일 200만명이 모이는 연합 집회로 회집하는 방식이나, 내세우는 구호 중 “거룩한 나라” 등이 일반 국민에게 과격하게 비칠 오해는 없는지요?
현재 부목사로 어떤 교회에서 사역하는 한 목사는 교회 사임을 각오하고 이번 총회의 결정에 따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목사에게는 이 일이 양심에 큰 고통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총회가 결정한 일에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양심을 주관하는 이는 오직 말씀으로 다스리는 주님임을 또한 인정하기에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이번 총회의 결정에 지지하는 분이나, 저와 같이 제74회 총회의 결정으로 인해 양심에 고통을 느끼는 분 모두,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서로에 대해 인내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이 더욱 명확하게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함께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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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으로 고신총회의 답변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