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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0월 31일(화) 세계로교회당에서 열린 제1회 송상석 목사 기념 포럼에 발제된 글을 아래와 같이 차례로 올립니다 - 편집자 주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박사

(초원교회 담임, 철학박사)

 

 

들어가면서

 

   해방 이후 고신교단의 출범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1946년에 설립된 고려신학교는 고신교단의 설립에 주초를 놓았다. 이 신학교의 설립은 한상동(韓尙東, 1901-1976) 목사와 주남선(朱南善, 1988-1951) 목사가 주역이었다. 하지만 송상석(宋相錫, 1896-1980) 목사와 박윤선(朴允善, 1906-1988) 목사도 이에 깊게 관여하였고 모종의 역할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신교단의 역사를 논할 때 초기 지도자 3인으로 한상동과 박윤선 그리고 송상석을 언급한다. 이들을 신앙과 신학 그리고 행정의 정초를 놓은 지도자로 평가한다. 고려신학대학원 이성호 교수는 박윤선이 박형룡 박사의 제자이고 그가 웨스트민스터로 유학할 때 추천서까지 써준 관계를 들면서 박형룡이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내려놓고 떠날 때 박윤선이 함께 떠났다면 고려신학교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진단했다. 그만큼 박윤선이 고려신학교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공헌이 큰 것을 지적한 것이다.

   또 교회사학자인 이상규 교수는 “송상석 목사 또한 고신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적지 않지만, 그는 고신 본령에서 무시되거나 경시되어왔다.”라고 했다. 정암 박윤선이 고신교단을 떠난 후 합신교단에서 정암(박윤선) 기념강좌를 35회째 잇고 있다. 고신교단에서도 한상동 기념강좌를 12회를 진행했다. 하지만 송상석 기념강좌는 그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지 43년 만인 2023년에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있다.

   2021년 고신대학에서 고신교단의 설립과 성장에 공헌한 인물을 기리는 조형물을 전시하여 한상동을 위시한 8인을 소개하고 전시하면서도 송상석 목사는 보이지 않아 의도적 경시와 무시가 드러나고 있다. 이런 즈음인 2021년 6월 ‘송상석과 그의 시대’가 출판되었고 이번에 송상석이 담임목사로 지도력을 발휘했던 제일문창교회와 그가 속했던 노회를 중심으로 확장된 8개 노회가 ‘제1회 송상석 목사 기념포럼’을 열게 되고 그가 남긴 역사적 유산을 성찰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를 통해 고신교단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게 되는 일은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귀중한 일로 생각한다. 이에 필자는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를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 목회자의 길

 

1) 평양신학교 입학

 

   송국필(宋國弼)과 손일남(孫一南)의 아들로 출생한 송상석 목사는 7살 때부터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한문을 공부하던 그는 마산공립보통학교(현재의 성호초등학교, 1910)와 이 학교의 부속학교인 마산간이농업학교(1916)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에 진학했으나 가정 형편상 학업을 중단(1918)하고 귀향하였다. 잠시 양산 통도사에서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경찰 생활을 시작하여 약 5년간 근무했다.

   그러다가 경찰직에서 떠나 사립원량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고 그 당시인 23세 때 욕지교회의 강사영(姜仕榮) 영수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신자가 된 그는 즉각 술과 담배를 끊고 절제를 실천하며 전도에 열심을 냈다. 1924년 9월 13일 제1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보고된 경남노회의 보고서에는 ‘욕지교회에서는 교우 송상석씨가 추도라 하는 섬에 가서 전도하여 20여 명의 신자를 얻어 예배하오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즈음 송상석은 원량학교를 사임하고 1924년 호주선교부와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에서 세운 진명여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대화정교회에 출석하면서 통영지역의 청년 활동에 열심을 냈다. 또 경남지방 YMCA 운동에도 참여하여 부산의 양성봉, 마산의 이영한 등과도 교분을 나누며 청년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 경력이 문제가 되어 교사직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런 내용이 1925년 5월 11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는 “그 후로 형사의 길을 사임하고 교회에 들어와서 얼마 있다가 세례를 받고 금년 삼월에 목사 안수까지 되어 차츰 시간이 지나 진명학교 교원이 되었으나”라고 기록하였다. 정작 송상석은 1934년에 목사안수를 받았기에 그보다 9년 전에 그가 목사로 보도될 만큼 신앙과 전도 열정이 뜨거웠음을 알 수가 있다. 송상석의 경찰 전력을 문제 삼은 진평헌은 통영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었고 3.1만세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송상석은 통영에서 황해도 황주의 이동희 선생을 만나 황주 양성학교의 교사로 2년간 근무하면서 절제 운동에 참여했다. 송상석은 1925년 11월 9일 신앙이 돈독한 김난출과 결혼한 후 서울 종로 중앙감리교회의 김창준(金昌俊, 1890-1959) 목사를 만나 생활하던 중 권사가 되었고 금주 단연 등 절제 운동을 하다가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에 입문했다. 송상석이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간의 신앙생활 중 만난 사람들과 무관할 수 없으나 동희 형의 도움을 받았고 무엇보다 아내이자 평생의 동역자인 김난출 여사의 영향이 컸다.

 

2) 신학 수업

   평양신학교는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에 의하여 1901년 평양의 자기 집 사랑채에서 시작되어 1904년에는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4개의 장로교 선교부(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에서 공동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요청으로 장로회신학교로 시작되었다. 이 학교는 1907년 첫 졸업생 배출과 함께 장로회신학교는 4개 장로교 선교부의 정식 허락을 받아 ‘대한장로회신학교’(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라는 공식 명칭을 갖게 되었다.

   송상석은 이 장로회신학교(이하 평양신학교)에 1931년에 입학하여 1934년 3월 제29회로 졸업하였다. 김창준 목사의 영향이 있었으나 1907년에 설립된 현재 감리교 신학대학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였다. 1931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송상석이 목사로서 사명을 감당할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보성전문학교에서 수학했을 정도로 지성을 갖춘 송상석이었기에 그는 신학 수업을 이수할 소양을 갖춘, 당시에는 준비된 대표적인 학생이었다.

   그가 신학교에 입학한 해에 후일 한국 보수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인정받은 박형룡 박사가 동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송상석은 이런 박형룡을 통해 변증학 등을 수학했고 신사참배 강요의 격랑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신앙 정신까지 새기게 되었다. 그가 졸업 후 4년 만에 동 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 문제로 폐교한 점은 송상석의 신학과 신앙을 가늠하게 한다.

   송상석의 당시까지 지적 여정은 박형룡의 신학을 이해하고 접목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46년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송상석은 생명의 위협을 마다하지 않고 만주 봉천까지 찾아가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 와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한 일은 양자가 특별한 사제관계였음을 반증한다. 그에 앞서 한국인에 의해 쓰인 최초의 본격적인 신학서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박형룡의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을 편집하고 교정한 이가 송상석이었다. 그 후 고신교단에서 송사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평양신학교 동기인 박윤선의 ‘송사 불가론’에 교단이 다른 경우에는 송사(응소)할 수 있다는 ‘송사 정당론’을 주장한 것은 박형룡을 통해 수학한 신학 특히 변증학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당시 평양의 장로교신학교에는 박형룡 외에도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 1864-1939), 라부열(Stacy L. Roberts, 1881-1946), 이눌서(William D. Reynolds, 1867-1951), 업아력(Alexander Francis Robb, 1872-1935), 왕길지(Gelson. Engel, 1868-1939) 교수와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1878-1961) 교수가 있었다. 조경현은 이들이 보수신학교 출신이고 무디의 영향으로 선교 비전까지 가졌고 복음주의 정신이 투철했다고 지적했다.

   1920년대 말부터 한국인도 신학 교육에 동참하여 남궁혁(南宮爀,1882-1950) 박사가 1927년에, 이성휘(李聖輝,1889-1950) 박사는 1928년에, 박형룡 박사가 1931년에 교수가 되었다. 송상석은 박형룡 교수와 곽안련 교수에게 영향을 받았고 이들과 관계가 남달랐다.

   31년 동안(1908-1939) 실천신학을 가르쳐 온 곽안련 선교사는 목회학(牧會學)이란 “교역자가 복음의 진리를 신자의 생활에 실제로 적용하는 일을 도와주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발견한 진리를 실천, 실행하게 하는 데 치중한다. 송상석은 곽안련 교수를 통해 목회학과 강도학(설교학) 등을 수학했다. 곽 교수는 강해 설교를 강조했지만, 자신의 설교에서는 상당 부분 제목 설교를 사용했다. 이런 성향이 후일 송상석 목사에게 영향을 미쳤다. 곽안련의 지도하에 1931년 6월 1일 평양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금주 현상 웅변대회를 계기로 조선기독교 절제운동회의 조직을 시도하였고 여기에는 125명이 참여하였다. 마침내 1932년에 조직된 이 회의 고문을 곽안련이 맡았고 송상석은 총무였다. 이는 곽 교수와 송상석이 특별한 사제관계였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송상석의 목회와 설교에 있어 곽안련의 영향이 지대했다.

 

2) 목사 안수

   곽안련은 목사직을 “다른 일반적인 직분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친히 창설하신 특수한 직분으로 이를 둔 목적은 부름을 받은 사람이 자기의 개인적 소원이나 이익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신성한 일을 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송 목사는 개인적 소원과 이익을 버리고 구령에 진력하는 목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35세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38세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졸업 후 한 달여 만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학교 졸업 당시 평서노회에 속한 황해도의 요촌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졸업 후에는 평양노회의 대타령교회 청빙을 받아 이적하여 사역했다. 전도사로 사역하는 동안 목사직을 감당할 훈련을 나름대로 받았다. 그러다가 제26회 평양노회는 송상석과 조택수, 차종식, 최창근의 목사안수를 허락하여 4월 6일에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그 후 4월 15일 주일 오후 2시에 대타령교회에서 송상석 목사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송상석은 신학생 시절에 학교가 주최한 금주 강연대회에서 2등을 했고 1932년에는 ‘조선기독교 절제운동회’의 총무로 이듬해에는 ‘절제시보’(節制時報)를 창간하고 주간으로 일했다. 이때 약 1년간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 화보」를 편찬한 일은 놀라운 사안이었다. 박형룡, 남궁혁 등 당시 평양노회의 지도자들은 송상석의 역사의식과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고 이는 향후 송상석의 목회 여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국교회가 일제하에서 복음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이에 수반되는 고난과 박해를 생각할 때 송상석을 안수한 지도자들은 송상석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1920년에서 30년대 절제 운동은 기독교의 대표적 사회운동이었고 송상석은 이 절제 운동을 복음화 운동의 한 방식으로 이해했다. 이 역시 향후 그의 목회에서도 반영되어 나타났다.

 

3) 목회 여정

   송상석은 1934년 신학교 졸업할 당시 38세에 요촌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같은 해 대타령교회에서 목사로 장립 받고 위임목사가 되었다. 이 교회에서 약 2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하다가 평양 신광교회로 이동하여 1940년까지 담임했다. 1938년 9월에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할 만큼 교계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시기였다. 이즈음인 1939년 6월에 초량교회를 담임하던 이약신 목사가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신광교회에 부임하여 송 목사와 동사했다. 이 목사의 부임 후에 송 목사는 목회를 이 목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절제 운동과 선교사를 돕는 일 등에 힘썼다. 신광교회 시무 기간에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지원하고 규합한 일로 평양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이를 지면을 통해 공개한 바 있다. 결국 송상석은 신사참배 강요의 파고 앞에 잠시 목사직을 인퇴(引退)하고 선교사 추방으로 스승인 곽안련 선교사가 물려준 자금과 황주의 농장경영으로 신사참배로 고난을 겪는 자들을 도왔다.

   해방되자 송 목사는 황주에서 평양으로 돌아가 사동교회를 개척하고 새롭게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당 정권의 탄압으로 1946년 4월 초에 각종 사료들을 수집하여 남하했다. 이때 동사했던 이약신 목사의 소개로 1946년 5월에 거제도 옥포교회 5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1896년 10월 호주 선교사 아담슨의 전도로 설립된 교회로 송 목사는 1948년 11월까지 시무하게 된다. 송 목사가 옥포교회에 시무할 당시 교회쇄신 운동이 시작되고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송 목사는 이약신 목사와 오랜 동지였고 박윤선과는 신학교 동기였다. 한상동 목사는 평양신학교 32회 졸업생으로 후배였지만 같은 경남 출신 목회자로 서로 간에 잘 알고 지냈다. 박윤선과 이약신 그리고 한상동 등이 교회쇄신 운동의 일원으로 송상석을 받아들인 점은 여러 의미가 있다. 곧 송 목사가 해방 전까지 기독교 신앙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음을 인정한 일이고 특히 경찰 전력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확인한 셈이 된다.

   송 목사는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 개교식에 참석했다.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 송상석은 이 학교를 위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알았다. 자신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바가 있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으며 이 학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폐교한 점은 고려신학교를 통해 평양신학교의 신학 사상과 정신을 잇는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송 목사는 이 학교를 위해 1947년 4월에 박형룡 박사를 모시러 만주로 가서 5개월 만인 9월 말에 모시고 오게 된다. 송 목사는 이 일을 “마치 블레셋 군대와 충돌하면서 사선을 넘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생수를 길러오던 용사(삼하 23:13-17)의 심정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박형룡과 박윤선의 애제자로 합동교단 총회장을 2회나 역임한 박병식 목사는 박형룡 박사가 송상석 목사를 따라 부산까지 와서 1948년 10월 14일에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한 것은 단순히 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에는 송상석 목사의 역할이 컸고 무엇보다 박형룡 박사가 평양신학교 교수 시절부터 송 목사를 특별하게 인정한 제자였기에 가능했으며 송 목사는 신학자 박형룡이야말로 신생 고려신학교가 평양신학교 정신을 제대로 계승시켜 이끌 학자로 확신했다고 했다.

   송 목사는 1948년 12월 27일에 마산 문창교회 12대 위임목사로 부임했다가 1950년 12월 13일에 사임한 후 부산 항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고 1952년 3월에 사임했다. 이어 마산 문창교회와 밀양 가술교회의 임시목사로 전임하였고 그해 9월에는 마산 문창교회는 송 목사가 자신이 없어도 감당할 교회라고 생각하여 사임하고 가술교회 위임목사로 사역했다. 그러다가 1953년 12월 29일 다시 문창교회의 청빙을 받아 22년간 시무하고 1975년 7월에 은퇴하고 동시에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송 목사가 문창교회에서 사역한 일은 경남노회 혹은 경남법통노회 목사로서 경남노회를 대표하며 고신교단의 중심에 서서 그의 은사를 활용하게 된다.

 

 

송상석 목사의 목회자로 활동한 여정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무기간

지역

교회명

직책

비고

-1936

평양

요촌교회

전도사(?)

 

1934 - 1936

평양

대타령교회

담임목사

평양신학교 졸업과 동시 청빙

1936-1940

평양

신광교회

담임목사

이약신 목사와 동사목사

1945-1946

평양

사동교회

개척 담임목사

8.15 해방 후

1946-1948

거제

옥포교회

담임목사

옥포교회의 홈피에는 1950년까지 시무한 것으로 표기(착오인 듯)

1948. 11. 28.

1950. 12. 10.

마산

문창교회

담임목사

 

1950. 12. 13.

1952. 3.

부산

항도교회

담임목사

 

1952. 4. - 1953. 11.

창원

가술교회

담임목사

공식적으로는
1954. 7. 사임

1953. 11. - 1970. 9.

마산

문창교회

담임목사

 

1970. 9. - 1975. 7. 3.

마산

제일문창교회

담임목사

문창교회와 분립

 

 

2. 송상석 목사의 목회

 

   송상석 목사는 곽안련 교수의 지도를 통해 목회를 교역자가 복음의 진리를 신자의 생활에 실제로 적용하는 일로 이해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 진리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먹여주며 양육, 인도, 보호하는가는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송 목사는 이론 신학은 성경 진리를 발견하고 이단으로부터 진리를 옹호하며 진리를 증거함이 목적이지만 목회를 포함한 실천신학은 발견한 진리를 실제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는가로 이해했다. 정판술 목사는 송 목사가 박윤선의 그늘에 가려 있었기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당시 국내와 교단의 목사 중 가장 뛰어난 신학적 소양을 갖추었고 이를 기초로 목회와 생활에도 그대로 진솔하게 녹여냈기에 자신을 포함한 따르는 말 없는 다수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1) 목회 행정

 

   고신교단의 지도자를 논할 때 송상석은 행정적인 면에서 지도력을 발한 목사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송 목사의 행정력은 목회 현장은 물론 고신교단을 위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다. 한국교회는 1910년대 절제 운동을 통해 금주, 단연 운동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활동으로 전개하였는데, 1930년대에는 이 절제 운동을 단순히 국민 의식 운동이나 정신운동으로만이 아니라 입법 활동을 통해 법제화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주도한 실제 인물은 송상석이었다. 1927년경 황주에서 시작한 절제 운동은 이미 30대 초반의 나이에 그의 행정력을 보여 준 사안이었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경남노회와 남부총회의 논란에 있어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때 총로회 발회식 선언문을 공표했고 참여한 5인 중 송 목사는 위원장이었다.

   제36회 총회장(1986.9.25~1987.9.21)을 역임한 류윤욱 목사는 2011년 ‘뒤돌아본 고신 역사,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송상석 목사와 송사 문제’를 주제로 120쪽에서 159쪽까지 장문의 기록을 남겼다. 이때 송 목사를 1. 멀리서 보기보다 가까이에서 보면 매우 자상한 분이다. 2. 집념이 매우 강한 분이다. 3. 지칠 줄 모르는 노력가이다. 4. 행정력과 정치적 기지를 가진 분이다. 5. 물러설 때와 전진할 때를 아는 분이라고 적었다. 류 목사는 한상동 목사는 신앙과 교단 형성의 첫째 인물로, 송상석 목사는 행정과 정치적으로 기여한 둘째 인물로, 박윤선 박사는 신학적으로 신학 교육에 기초를 놓은 셋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류 목사가 송 목사를 행정력과 정치적 기지를 가진 목사라고 평가한 것은 주로 교단 행정에 공헌한 부분을 평가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혹자가 송상석 목사는 정치 목사로서 목회에는 열심을 내지 못했거나 실패자라고 경멸하는 언사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제일문창교회가 증거이고 이 교회에서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목회하고 은퇴한 후 경남법통노회가 공로목사로 제일문창교회가 원로목사로 추대한 것도 증거라고 했다.

   많은 역사학자 등이 송상석을 행정에 능한 목사로 평가한 것처럼 그의 행정력은 교회를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송상석 목사는 법률을 공부한 바 있어 문서관리나 교회 행정에도 밝아 각종 자료와 문헌을 작성하고 관리하였고, 역사에 대한 깊은 식견으로 중요한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거나 사료를 보관하고 관리했다. 그가 문창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사역한 1953년부터 은퇴한 1975년까지 한국교회는 대체로 교회 역사 사료를 정리하거나 보관하는 일에 미약한 시기였다.

   송 목사의 행정력을 보면 오히려 교회를 통한 목회행정력이 교단의 지도자로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다고 함이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송 목사는 교회 건축 시 사택매매로 대출을 받으면서 이를 맡은 한 집사가 부정한 일을 행한 것을 알고 당회를 통해 치리를 시행하였다. 하지만 송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이광원 청년이 불신 결혼을 한 것을 알고는 권고로 마쳤다. 두 예를 볼 때 신앙의 경중에 따라 송 목사의 목회적 행정력이 다르게 적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는 목회에서 나타나는 구령과 양육에 있어 균형이 잡힌 목회자였음을 보여 주는 한 사례가 된다.

   송 목사의 목회행정력은 교단을 위해서도 줄기차게 헌신하므로 나타났다. 일례로 송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을 서울로 이전하자고 줄기차게 주장했고 교단 발전 종합연구위원회까지 발족하여 추진했지만 한명동 목사 등의 저지로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이성호 교수는 고려신학대학원의 천안 이전의 유익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여 결과적으로 송 목사의 혜안을 가늠하게 하고 있다.

 

2) 심방

   송상석 목사는 기존 총회로부터 당한 예배당 명도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25년간에 걸친 긴 소송에 힘을 다해 감당했다. 이 일로 목회를 소홀히 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문창교회 목회 외에도 경남법통노회, 총로회, 그리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총회 봉사 등 교단을 위한 일, 총회파 문창교회와의 법정투쟁으로 분주했다. 그러나 그는 일차적인 문창교회 목회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곽안련 교수는 “목사는 책임 맡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면서 부지런하지 않은 목사에게 대한 네 가지 비난이 심방을 잘하지 않고, 주일학교 및 청년 사업을 등한시하며, 교회의 문서 정리에 주의하지 않고, 지방 노회 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를 참고할 때 그의 제자인 송상석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부지런하게 목회한 목사임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춘·추기 연 2회 정기 심방, 새 신자 혹은 초신자와 환자들을 위한 심방, 각종 경조사 주관, 정기집회 인도 등으로 분주한 날을 보냈다.

   35년간 제일문창교회 찬양대 지휘를 하고 1981년 장로로 장립 받은 현선영 장로는 송상석 목사와 자기 부친인 현기택 장로와의 관계를 바늘과 실과 같은 존재로 비유하면서 송상석 목사의 심방에 대해 언급했다. 송 목사가 쌀이 떨어진 교인을 찾아 쌀을 전하고 “우리는 없어도 언제든지 천사가 먹을 것을 문 앞에 갖다주시더라”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챙겼다는 것이다. 또 “자녀 대학 등록금이 없어 애태우던 집사에게 전액을 송 목사가 대납해 주었고, 한 집사가 병원비가 없다는 소식에 심방을 하여 병원비를 내주었다.”라고 했다.

   송상석 목사에게 그의 말년에 두 가지 당부를 받았다는 손상률 목사는 교단의 두 지도자 중 한상동 목사는 부목사 등을 통하여 심방 사역을 하게 하였지만, 송상석 목사는 언제든지 자신이 직접 찾아가 심방을 하면서 성도들을 보듬는 전형적인 목회자였다고 했다.

 

3) 교회 교육

   손상률 목사는 ‘시대의 선각자 송상석 목사’라는 글을 통해 한국절제교육 연구사료집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이 글에서 “송상석 목사는 절제 운동을 통한 교회교육과 경건 생활이 기독교를 대변하는 교회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언제부터인가 교회에도 세속화 바람의 영향을 받아 주일학교 교과서에서 절제 공과가 사라져 버렸다고 안타까워하셨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목사님이 한국교회 절제 운동 사료집을 편찬하신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아 한국교회의 신앙적 전통을 이어가게 하고자 하는 심정이었다.”라고 밝혔다.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 목사의 화해를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실행했던 고신교단 부총회장을 역임한 박윤섭 장로는 한상동 목사는 출옥 성도라는 것만으로 존경받았지만, 송상석 목사는 그 시대 보성전문학교에 다녔을 정도의 실력자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목회자였고 이는 문창교회의 교육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고 했다. 자신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무식자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노회와 교단의 일을 감당하면서 송 목사의 교육을 받으면서 기독교 소양은 물론 교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송 목사는 교회 교육의 원천이 성경 말씀이라고 생각했기에 중고등부 학생들도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여 송 목사의 설교를 듣고 마치면 자체 성경 공부 시간을 가지게 했다. 송 목사는 전국학생신앙운동(SFC)에서 주관하는 수양회에도 교회에서 전액 경비를 부담하여 참석하게 하였다. 이런 집회에 참석하면 학생들의 신앙 함양은 물론 교회사랑 의식과 교단 의식은 물론 장차 목회자 감을 찾는 데도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4) 기도 생활

   곽안련은 기도할 때 자기를 잊어버리고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또 목사는 기도회가 교회와 개인 생활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자각하라고 했다. 송 목사는 개인의 기도는 물론 교회의 기도회를 중시했다. 여러 증인의 전언에 의하면 기도회 인도 시 설교는 거의 하지 않았고 기도에 몰입하는 점이 송 목사의 기도 인도 방법이었고 이는 그의 스승인 곽안련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는(송상석 목사) 분주하고 피곤한 상황에서도 새벽기도회를 거르는 일이 없었고”, “그는 새벽 4시면 일어나 새벽기도회로 하루를 시작했고”, “그는 언제나 교회사무실에서 기도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편지를 쓰거나 각종 주제에 대한 원고를 집필했다.” 송 목사의 막내딸 송은숙 권사는 평소 송 목사가 목회하고 교단의 일을 보면서 분초를 쪼개어 사용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해도 좀 여유가 나는 시간에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남편과 아버지로서 시간을 가져주기를 바랐지만, 설교 준비 등을 마치면 기도하면서 가족과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했다. 류윤욱 목사는 이사회로 모이면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도착하여 한쪽에서 기도하고 있는 송 목사의 모습을 대하면서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의 힘은 기도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3. 송상석의 설교

 

1) 설교 이해

 

   송상석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에 12대 위임목사로 1948년에 부임했다가 2년이 채 못되어 마산 문창교회는 이만하면 자립이 되었으니 이제 다른 교회로 가서 목회하겠다며 부산 항도교회로 부임했다. 그 후 1952년 3월에 사임하고 마산 문창교회와 밀양 가술교회를 전임했다. 1951년 기존 총회는 마산 문창교회를 비롯하여 6개 처 교회에 예배당 명도소송을 걸었기에 이에 위기를 만난 마산 문창교회는 송 목사의 인도와 지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가술교회를 담임하면서도 동시에 문창교회를 섬기게 하였고 1953년 말에는 가술교회를 사임하고 마산 문창교회에 재위임했다. 이는 행정력이 뛰어난 송 목사를 통해 소송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감당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그때부터 1975년 7월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송 목사의 목회는 행정적인 면에 치중했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지만 송 목사가 소송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교회를 지켜냄에는 그의 목회에 있었고 송 목사의 목회에서 설교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송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곽안련 교수에게 설교학을 교수 받았고 자연스럽게 곽 교수를 통해 설교를 이해했고 자신의 목회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했다. 곽 교수는 1906년부터 36년간 실천신학 교수로 사역했으며 다양한 분야의 서적 51권을 저술하거나 번역하여 우리나라의 기독교 토양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그중 그가 1925년 발행한 ‘강도학’이 재판을 발행할 때인 1954년에 ‘설교학’으로 책명이 변경되었다. 곽 교수는 이 책 서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여라.”라고 강조했다. 송 목사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으로 이해했다. 이에 대한 정판술 목사 등 여러 증언자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송 목사는 설교가 자신의 목회와 행정의 전 부분을 주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2) 설교방식

   송상석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준 곽안련(1878-1961) 교수는 성경의 영감과 오류가 없음을 원문에만 국한을 시키고 사본이나 번역본에까지는 확장하지 않았다. 곽 교수는 강해 설교를 강의와 자신의 책에서 강조하였지만 실상 자신은 본문 설교나 제목 설교를 즐겨 사용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에서 수학할 정도의 지적 수준이 있었던 송 목사는 곽 목사의 설교에 관한 강의를 잘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통상 3대지 설교를 통한 제목 설교나 본문 설교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본문을 충실하게 해석하여 전하려는데 치중했다. 한 가지 소재나 본문을 선택한 후에 전체 성경을 동원해서 그에 대해 가르치는 방식을 취한 제목 설교와 성경에서 본문을 택하고, 본문에서 제목을 잡고, 본문에서 대․소지를 분류하여 전하는 본문 설교가 송 목사의 설교에서 대체로 사용되었던 점은 곽안련 교수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송 목사는 이런 설교의 형태를 석원태 목사가 잘 이어받아 전한다고 여겼고 그런 설교를 기반으로 지도력을 발휘한다고 보아 자신이 고신교단에서 어쩔 수 없이 잠시 떠나게 되었을 때 석원태와 반고소고려 교단을 함께 했다. 송 목사는 설교가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여기고 행정사역 등 분주한 중에도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했고 이것이 마산 문창교회를 소용돌이 속에서도 건진 이유였다.

   송 목사의 설교를 보다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의 생전에 남긴 원고를 파악함이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의 건축 과정과 자녀에 의해 교회에 보관된 송 목사의 자필 설교 원고 등의 자료가 소실되거나 처리되었다. 따라서 교회가 아닌 외부에서 전한 일부분 남은 설교와 송 목사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을 통해 증언을 받고 송 목사의 설교와 그 방식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송 목사가 제21회 총회 개회 설교에서 전한 ‘진리 저울에 공정한 추’(겔33:17-20, 요4:16)와 1971년 고신대학교 개교식 설교에서 전한 ‘고신대학교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무엇인가?’ (왕하6:1-7), ‘원수의 술’ (갈 5:19-21, 벧후 1:6) 등의 설교를 보면 설교의 기본요소 중에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강조하는 디다케적(διδαχή) 요소가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사실과 내용을 명백하게 진술하는 설교의 본질인 케르그마적(κῆρυγμα) 요소를 디다케를 통해 강조하는 방식의 설교를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송 목사는 설교 원고를 반드시 적어 강단에 올랐다. 그러나 원고를 거의 보지 않고 설교했다. 설교의 음성은 언제나 잔잔했고 설교 중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성도들을 꾸짖는 설교를 하지 않았다. 정한 본문의 말씀을 성도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통상 3대지로 나누어 설교했으며 본문에서 벗어난 다른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본문에 관련된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른 성경을 인용할 때도 잠시 예증으로 사용했다. 예화를 사용할 때도 주변의 이야기가 아닌 교회 역사를 들어 전했다. 주일설교는 30분에서 33분 정도를 사용했기에 준비한 원고에서 벗어난 설교를 한 적이 없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로 동 기간에 이사장 송상석 목사를 도와 이사와 서기로서 동역한 류윤욱 목사는 이사회나 교단 행사 그리고 국가조찬기도회 등에서 송 목사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류 목사는 설교를 들으면서 한상동 목사와 같이 우렁차고 강한 목소리의 설교가 아닌 차분한 어조의 설교를 전하면서도 송 목사 자신이 설교 본문으로 정한 성경을 배경으로 주석하여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였다. 그리고 설교의 결론에 본문이 주는 교훈을 전해 마무리함으로 당일 모임의 목적에 맞게 설교했다고 했다. 이를 통해 교회에서의 설교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했고 특별히 설교한 대로 삶을 사는 진실한 목사로서 교단 행정을 이끌었기에 자신이 소위 ‘송파’라고 때로 오해받았을지라도 송 목사의 뜻을 이해하고 따랐다고 했다. 정판술 목사는 설교방식에 있어 한상동 목사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과 방식으로 전했고 송상석 목사는 어머니와 같은 방식으로 전했다며 결과적으로 교단은 어머니를 버리는 과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3) 신·구약 균형

   구약학자인 악트마이어(E. Achtemeier)는 “미국교회가 구약을 상실할 단계에 있으며 구약을 상실한다는 것은 신약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구약을 다시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국교회에 강단에서도 구약 본문 설교는 매우 소홀했다. 장일선의 조사에 의하면, 1982년 당시의 대표적인 설교자 20여 명이 출판한 설교집에 나타난 설교 본문을 조사해 본 결과 구약이 설교 본문으로 채택된 경우는 전체 설교의 25% 미만으로서 전체 설교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약 중에서도 주로 창세기, 시편, 이사야, 출애굽기에 크게 편중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빈도에 있어서 구약 설교는 전체 설교의 4분지 1에 해당하고 그중에서도 4권의 책이 주로 설교 되고 있으므로 다른 35권의 구약 본문은 비록 의도적이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거의 무시되거나 경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약 본문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은 보수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설교자들에게도 같다.

   이 점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나 신학적 의미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또 역사적 본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해 설교자의 이해 결핍도 그 원인이다. 이런 점 때문에 구약을 설교해도 그 본문은 구속사적 관점보다는 예증이나 모범으로 이해되었고,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 치중하였다.

   송 목사의 설교자료가 소수로 남아 있고 그것도 교회 안에서의 설교가 아니라 교단 행사와 관계한 설교가 남아 있기에 송 목사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을 통해 송 목사의 설교를 확인하는 어려움은 수반되었으나 증언자들이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어 송 목사의 설교를 가늠함에 유익했다.

   송 목사는 설교 본문을 정할 때 언제나 신중했다. 김성곤 장로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송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는데 송 목사가 구약과 신약의 본문을 번갈아 가면서 설교한 것으로 기억했다. 김 장로보다 10년 선배인 이광원 집사도 송 목사가 구약과 신약성경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설교한 것으로 진술했다. 송 목사는 제21회 총회(1971.9.23-28) 개회 설교에서 ‘진리 저울과 공정한 추’(겔 33:17-20, 요 4:16)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들어 설교했고 내용에 교회 역사를 예로 들어 설교함으로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균형 있게 설교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송 목사의 ‘진리 저울에 공정한 추(鍾)’(겔 33:17~20 요 4:16)라는 설교의 서두에서 “창세기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사에 중심 과제가 되는 에덴동산에 심어진 선악과로 제출된 사람의 생사 문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점(基點)으로 한 갈보리 산 십자가로 그 답안을 내게 된 것입니다.”라고 시작했다. 이 설교에서도 구약과 신약성경을 폭넓게 이해하고 설교함이 드러나고 있고 교회 역사와 신조까지도 적절하게 인용하여 구약과 신약을 균형 있게 설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설교가 끼친 영향

 

(1) 송상석 목사 자신의 경건 생활을 유지하게 했다.

   송상석 목사는 목회의 주된 동력원이 설교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산 문창교회 목회는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기존 총회로부터의 예배당 쟁탈소송은 그의 영과 육을 곤비하게 했다. 그런 중에도 교회가 지켜지고 외적으로 교단을 위하여 여러 유익을 남긴 점이 송 목사의 설교가 끼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류윤욱 목사는 “송상석 목사님이 남긴 영향을 그가 가진 행정력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의 삶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쁜 일상 중에도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진력했고 자신이 깨닫고 전한 설교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신 분입니다.”라고 했다.

   송상석 목사의 설교를 들었고 또 송 목사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증언해 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송 목사의 신앙 인격의 고매함을 들었다. 목사의 신앙 인격은 자신이 교과서로 대하는 성경에서 출발한다. 이를 늘 연구하고 실천해보고 전하고 가르침에서 나타난다. 여러 증언자의 일치된 점은 송 목사가 늘 교회의 집무실에서 성경을 읽었고 기도하는 생활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준비된 설교를 전하였고 그 설교에 부합된 삶을 살고자 부단히 애썼던 점은 그의 설교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고신교단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신앙의 지도자라며 영성을 강조하고 송상석 목사를 행정적인 공헌을 많이 한 지도자로 평가해 왔다, 하지만 송 목사에게 영적인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경남노회와 경남법통노회를 이끌 수가 없었다. 25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소송 건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교회를 이끌며 성도들을 잘 살핀 것은 송 목사 자신의 설교에서 기인하는 영적인 권위 즉 말씀에 합한 삶의 일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신교단은 송 목사의 행정 분야의 기여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의 그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2) 교회와 교단을 지켜내는 동인이었다.

   필자는 ‘불의한 자 앞에서 소송하느냐-성경과 역사로 본 그리스도인의 법정 소송 문제’라는 저술을 통해 고신교단의 형성과 태동기와 내분 시기의 불신 법정 소송 문제 그리고 반고소 운동기의 소송 문제를 밝혔다. 이때 송상석 목사의 역할을 깊이 들여다보고 박윤선과의 신학적 논쟁도 구체적으로 살피게 되었다. 문창교회의 재산권을 지키고자 분투한 송 목사는 신학적으로 박윤선의 공격 내지는 비판받는 형국이 되자 파수군에 “교회 소송 문제의 재검토”(제63호, 1957년 6월호)와 “교회 소송 문제 재검토(2)”(제64호, 7월호)로 사실상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밝힌 바가 되었고 박윤선은 이에 “「파수군 제63호, 64호에 대답”(제65호 8월호)으로 자신의 심중을 밝혔다. 이에 송 목사는 “교회소송문제 재검토에 대한 박윤선 목사의 대답에 대한 대답”(제66호 9월호)과 “교회 소송 문제 재검토(3)”(제66호 9월호)로 치열하게 논쟁했다. 이 논쟁에서 양자 사이에 성도 간의 불신 법정 소송 문제에 있어 성경해석의 차이는 있었지만 송 목사도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을 심도 있게 성찰하고 있었고 결국 교단이 다른 경우, 즉 치리권을 달리하는 경우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응소해야 함을 들어 소송에 임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담임하는 문창교회와 나아가 교단의 재산권을 지켜내는 데 일조했다. 이는 송 목사의 목회 특히 그의 설교에서 영향력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 논쟁에서도 송 목사의 성경해석 수준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고 이는 그의 설교에 그대로 용해되어 전해졌음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판술 목사는 송 목사가 설교한 대로 살고자 하는 일치성 때문에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고 이는 합동 측과 합동한 후 다시 분열하여 복귀할 때 경남노회에 속한 교회의 90% 이상이 환원하였고 부산노회의 경우는 50% 정도에 그쳤다고 했다. 송상석 연구가인 강종환 장로는 고신교단의 한상동과 송상석이란 지도자 틈에서 송 목사를 지지하는 이들은 말 없는 다수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송 목사가 설교한 대로 삶을 보이는 데 있었다고 했다.

   이런 송 목사의 설교는 대단히 논리적이었다. 단순히 잘 믿자고 전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생활에 대해 정연한 논리로 설교했기에 교회가 그를 신뢰했고 동료와 후배 목회자들도 그를 따르고 신뢰했다. 전기한대로 송 목사는 자신이 전한 설교대로 살고자 하는 모습이 주변에 그대로 비추어졌고 인식되어 교회와 교단에 영적인 영향력을 파급시켰다. 이런 송 목사는 당시의 고신 목사로서는 엘리트 목사였다. 다수가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신학을 했으나 송 목사는 지금의 고려대학교인 보성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법적으로도 박식했기 때문에 성도 간의 불신 법정 소송 문제가 발생 시 대응을 했지 법을 모르면 전혀 감당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송 목사를 따르는 이들이 많았음을 덧붙인다.

 

 

나가면서(요약과 결론)

 

   고신교단 초기 지도자로 든든한 산파역을 감당한 송상석 목사를 평가할 때 그가 가진 행정력에 치중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신교단에 내재 된 소송 문제에 잘 대응하여 재산권을 지켰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가 있는 반면에 성도 간의 불신 법정 소송의 여지를 남겼다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가 있다.

   그런 중에 2021년 6월에 ‘잊혀진 인물, 다시 찾은 역사, 송상석과 그의 시대’가 출판됨으로 송 목사 자신과 그가 교단에 미친 영향에 대한 편견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적은 제일문창교회 허성동 목사는 송상석 목사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지 40여 년이 지나 그를 새롭게 재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제70대 총회장을 역임한 박영호 목사는 이제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의 관점에서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며 고신 교회 형성기에 활동했던 박형룡, 박윤선, 한상동 목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박손혁, 이약신, 황철도 목사와 같은 인물 연구가 계속 이루어진다면 고신 교회의 역사가 더욱 풍요로워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고려신학대학원장을 역임한 신원하 목사는 고신총회가 설립된 이후 고신 교회는 한상동 목사와 송상석 목사 두 분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터에 이번 책의 출판으로 균형 잡힌 고신 역사를 써가는 데 좋은 징검다리 역할을 기대한다고 했다. 제41대 총회장을 역임한 정판술 목사는 송상석 목사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책이라고 축하하면서 이 책의 출판은 교단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또 우리 교단을 위한 큰 선물이라고 적었다. 이 책은 1부 송상석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2부로 송상석과 그의 시대에 이어 부록과 필자소개 순으로 기술되었다.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송상석 목사에 관한 연구도 되었다고 보지만 실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터에 송상석 기념강좌가 시작되고 필자에게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를 연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감사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이 따른 일이다.

   여러 증언자의 말을 종합하면 송 목사의 목사로서의 삶과 목회는 성경을 대하는 그의 자세에 있었다. 그에 대한 행정적 지도자라는 평가는 그를 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송 목사는 설교가 목회의 한 부분이 아니고 전부로 볼 정도로 여겼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목회와 교육, 행정과 심방의 축이며 동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언제나 설교 준비에 충실했고 이는 늘 성경을 교과서로 삼아서 자신의 신학과 신앙에 녹여 자신이 맡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에 관한 부분은 더한 연구가 이어질 것을 기대하고 송상석과 한상동과 같은 지도자의 수고와 희생의 터 위에 세워진 고신총회가 초기 지도자들의 목회와 설교를 더 깊게 이해하여 적용하고 특별히 송상석 목사와 같이 전한 설교에 합한 삶을 통해 고신교단의 개혁과 변화 그리고 성숙한 모습으로의 전진에 유익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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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편. 『송상석과 그의 시대』 .파주: 발해커뮤니케이션, 2021.

이성호. “1950년대 경남노회 상황과 고려신학교.” 『고신총회 70년사』. 서울: 총회출판국, 2022.

이성호. “고려신학대학원의 천안으로의 이전.” 『고신총회 70년사』. 서울: 총회출판국, 2022.

장일선. “한국교회와 설교.” 『세계와 선교 79』, 1982.12.

제일문창교회 120년사 편찬위원회. 『제일문창교회 120년사 1901-2021』. 서울: 새한기획출판부, 2021.

조경현. 『초기 한국 장로교 신학사상』. 서울: 그리심, 2011.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위원회.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화보』. 서울: 한양도서주식회사, 1934.

 

 
 
 

  1.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이상규 교수)

    2023년 10월 31일(화) 세계로교회당에서 열린 제1회 송상석 목사 기념 포럼에 발제된 글을 아래와 같이 차례로 올립니다 - 편집자 주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이상규 교수 (전 고신대교수, 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시작하면서 지난 ...
    Date2023.11.17 By개혁정론 Views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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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박사)

    2023년 10월 31일(화) 세계로교회당에서 열린 제1회 송상석 목사 기념 포럼에 발제된 글을 아래와 같이 차례로 올립니다 - 편집자 주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박사 (Evangelia University 교수) (오렌지 카운티 샬롬교회 담임목사) 이...
    Date2023.11.13 By개혁정론 Views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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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박사)

    2023년 10월 31일(화) 세계로교회당에서 열린 제1회 송상석 목사 기념 포럼에 발제된 글을 아래와 같이 차례로 올립니다 - 편집자 주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박사 (초원교회 담임, 철학박사) 들어가면서 해방 이후 고신교단의 출범...
    Date2023.11.10 By개혁정론 Views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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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1586년 헤이그 총회의 중요성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1586년 헤이그 총회의 중요성 - 1586년 헤이그 총회가 예식서의 수를 일곱 가지로 늘린 것과 이들 예식서를 배포한 것을 중심으로 - 에릭 드 부어(E. A. de Boer) 교수 임모세 목사(박사과정 중) Yearbook for Ritual and ...
    Date2023.02.14 By개혁정론 Views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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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석과 새로운 제안 (4) - 권징조례 부분

    2022년 7월 14일(목) 열린 제11회 서울포럼에서 발표한 안재경 목사의 글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석과 새로운 제안" 중에 마지막으로 권징조례에 관한 부분입니다. - 편집자 주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석과 새로운 제안 (4) - 고신교...
    Date2022.08.10 By개혁정론 Views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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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석과 새로운 제안 (3)

    2022년 7월 14일(목) 열린 제11회 서울포럼에서 발표한 안재경 목사의 글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석과 새로운 제안" 중에 교회정치에 관한 부분입니다. 다음에는 권징조례 부분을 실을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
    Date2022.08.02 By개혁정론 Views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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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에 대한 안재경 목사의 제안

    2022년 7월 14일(목) 열린 제11회 서울포럼에서 발표한 안재경 목사의 글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석과 새로운 제안" 중에 예배지침에 관한 부분입니다. 다음에는 교회정치 부분을 실을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
    Date2022.07.25 By개혁정론 Views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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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석과 새로운 제안 (1) - 교리표준 부분

    2022년 7월 14일(목) 열린 제11회 서울포럼에서 발표한 안재경 목사의 글입니다. 이번 9월 총회에 상정될 헌법개정안에 관한 분석과 제안입니다. 글이 길어서 나눠서 싣습니다. 아래에 싣는 부분은 개정 전반과 '교리표준'에 대한 부분입니다. 다음 ...
    Date2022.07.21 By개혁정론 Views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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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No Image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전통적’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의 연구보고서

    최근 헌법개정위원회(위원장 김세중 목사)가 헌법개정 공청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새롭게 개정할 헌법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34, 35장을 삭제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헌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교리표준의 일부 내용을 삭제하는 것은 ...
    Date2022.06.29 By개혁정론 Views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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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

    아래 글은 제66회 고신총회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보고하여 총회가 받은 내용입니다. - 편집자 주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 현유광 명예교수 매사(每事)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나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
    Date2022.06.20 By개혁정론 Views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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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한국 교회의 위기: 노회의 기능과 역할

    아래의 글은 2022년 3월 제11회 서울 포럼을 위한 소포럼에서 발제한 원고입니다. - 편집자 주 한국 교회의 위기: 노회의 기능과 역할 정요석 (세움교회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외래교수) 한국 교회가 위기란 말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다. 이 위기를 해결...
    Date2022.05.17 By개혁정론 Views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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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한국 장로교회 헌법, 어디로 가야 하나?

    한국 장로교회 헌법, 어디로 가야 하나? -예장 통합, 합동, 고신 교회 『교회정치』를 중심으로-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서론 본 글은 현재 한국 장로교회 가운데 예장 통합, 예장 합동, 예장 고신 교회의 『교회정치』를 서로 비교하며 이를 중심으로 한...
    Date2022.05.06 By개혁정론 Views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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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시찰 없이는 노회는 없다: 노회의 시찰 직무에 관해 (성희찬 목사)

    시찰 없이는 노회는 없다: 노회의 시찰 직무에 관해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서론 노회의 직무 중 하나는 구역을 나누어 시찰회를 조직하고 시찰 위원을 두어 관내 교회를 시찰(視察)하는 것이다. <교회정치>에서 분명하게 이를 규정하고 있다(제137조 시...
    Date2022.04.22 By개혁정론 Views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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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한국장로교회헌법, 어디로 가야 하나? -예장 통합, 합동, 고신교회 『예배지침』을 중심으로-

    한국장로교회헌법, 어디로 가야 하나? -예장 통합, 합동, 고신교회 『예배지침』을 중심으로- 안재경 (온생명교회 목사) 한국장로교회 대부분의 교단은 교단헌법을 가지고 있다. 그 헌법에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포함하고 있고, 이후에 교회정치를 중점...
    Date2022.03.31 By개혁정론 Views1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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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고신 교회 70년과 ‘재판권을 부여받은 전권(全權)위원’(1981-2010)

    이 글은 고려신학대학원 변종길 교수(신약학) 은퇴기념 논문집에 실린 것으로 필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 편집자 주 고신 교회 70년과 ‘재판권을 부여받은 전권(全權)위원’(1981-2010)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서론 변종길 교수님은 고려...
    Date2022.03.29 By개혁정론 Views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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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위협세력과 대처방안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위협세력과 대처방안 - 교회 안의 위험한 기류와 해결책을 중심으로 - 권기현 (로뎀장로교회 목사, 대구서부노회) 1. 서론 작년(2020년) 초만 해도 길어야 몇 주, 아무리 길어도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 예견했다. 그러나 신종코로...
    Date2021.06.08 By개혁정론 Views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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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바른 교리와 이단 개론: 이단의 뿌리와 교회의 응전

    총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조완철 목사)가 2021년 5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단 전문상담가 3차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 고려신학대학원 이성호 교수가 ‘바른 교리와 이단 개론’을, 로뎀장로교회 권기현 목사가 ‘포스트 코로나 시...
    Date2021.06.02 By개혁정론 Views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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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고신교회 제7차 헌법개정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고신교회 제7차 헌법개정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서론 교리표준(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과 관리표준(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으로 이루어진 교회 헌법은 법 조항들로 이루어진 교회론이라 할 수 있...
    Date2021.05.11 By개혁정론 Views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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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교실, 정신과학교실, 인지과학협동과정,시스...
    Date2021.04.30 By개혁정론 Views2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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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범 교수)

    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범 교수 (서울대) 오늘 뜻깊은 자리에서 제가 큰 흥미를 느끼는 주제에 대해...
    Date2021.04.26 By개혁정론 Views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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