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주일) 오후 2시에 열릴 1027 연합예배 및 찬양 &큰 기도회와 관련하여 개혁정론에서 이미 게재한 손재익 목사의 글 2번째를 아래와 같이 싣는다. 찬성과 반대 또는 고민 중인 모두가 정독하여 좋은 결론에 이르기를 바란다. 한 번에 읽기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파일을 업로드했다. - 편집자 주
(1편에 이어)
(1편 링크 http://reformedjr.com/1852345 )
10월 27일 광화문 집회 논란을 통해 생각해 볼 여러 주제 (손재익)-개혁정론 기고용.pdf
10월 27일 광화문 집회 논란을 통해 생각해 볼 여러 주제 (2)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II.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원주의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다(요 15:19).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때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를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한 입장을 지닌 사람과 어울려 산다. 내가 신앙에 따라 살듯, 남들도 불교, 이슬람교, 미신, 무신론, 유물론, 범신론, 회의론 등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산다.[1] 이런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입장을 세상에 일방적으로 강요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
만약 불교가 개신교처럼 자신들의 입장에 근거하여 이런 집회를 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진화론자들이 개신교가 창조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자고 집회를 개최하면 어떻게 될까? 국민의 대다수인 무신론자들이 신을 믿지 못하도록 하자고 집회를 열고 2천만 명이 모여서 시위를 하면 어떻게 될까?
세상의 핍박을 받을 때
혹여나 세상의 핍박이나 박해를 받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요일 3:13). 세상은 당연히 우리를 미워한다(요 15:19; 시 69:4; 창 3:15). 우리는 세상의 적대 앞에 늘 설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가치관이, 우리의 세계관이, 우리의 문화가 세상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이다.
그런 가운데 성도는 더더욱 경건하게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딤후 3:12).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딤후 1:8; 2:3).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 당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벧전 4:13-14). 성도는 세상의 미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마 10:22; 24:9).
그러면서도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한없이 품어야 할 대상이다. 세상이 미워해도 끝까지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혐오해도 우리는 세상을 환대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랑의 대상을 끊임없이 넓혀 가야 한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무한히 호의적인 세상 속에서 안락함과 편안함을 누리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혐오하고 대적하는 세상 속에 침투하여, 우리를 혐오하는 그들을 사랑하고 희생하며, 세상을 껴안는 종교다.
교회를 먼저 개혁
그리스도인은 먼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며 교회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삼상 7:6).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한다(왕하 22:19; 욜 2:13). 교회는 세상의 들보를 지적하기에 앞서 교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회개해야 한다(참조. 마 7:3). 선지자들은 바벨론의 죄보다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하나님의 눈은 세상보다 교회를 먼저 향하고 계신다(벧전 4:17).
교회 안에 이미 많은 죄가 있다. 교회는 이혼, 혼전순결, 간음, 낙태 등에 대해 권징하지 않은 지 오래다. 교회는 먼저 이러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교회의 사회참여
집회와 시위는 분명 민주시민에게 주어진 헌법상 권리지만, 교회가 행할 권리는 아니다. 교회는 주어진 권리도 행사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교회는 세상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
교회는 피켓을 들고 항의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따라 살면서 말씀의 가치를 증거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동성애를 비롯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무수히 많은 죄,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근거림, 비방,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기 자랑, 부모 거역, 무자비함, 자살, 낙태, 안락사, 간음, 음행, 이혼, 도둑질, 거짓증거 등이 죄라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롬 1:29-32).
그렇지 않아야 하겠지만 혹여나 동성혼이 합법화되더라도, 교회는 오히려 그러한 때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그야말로 우리의 거룩함을 입증할 기회임을 알고 교인들로 하여금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이 일을 견뎌야 한다(벧전 4:12-19). 또한 신자는 절대로 동성결혼을 할 수 없음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동성혼에 동의하거나 동성혼을 하는 이가 있으면 권징해야 한다. 말씀의 법에 따라서는 결혼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간통을 죄로 처벌받지 않는 시대지만, 교회는 간음한 이에 대해 영적 처벌인 권징을 행해야 한다. 혼전순결을 어긴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본인은 2015년 3월 1일 한길교회 소식을 통해 “2015년 2월 26일(목) 헌법재판소에서 결정한 「형법 241조(간통죄)에 대한 위헌판결 (사건번호: 2009헌바17)」 은 그 법리적 해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위배되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모든 교인에게 광고했으며, 2019년 4월 14일 한길교회 소식을 통해 “2019년 4월 11일(목) 헌법재판소에서 결정한 「형법 269조와 270조에 대한 위헌소원판결 (사건번호: 2017헌바127)」 낙태죄 사건은 그 법리적 해석 및 국가의 권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위배되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모든 교인에게 광고했다.
신자의 사회참여
교회에서 말씀을 배운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부르신 삶의 영역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요 17:15-17).
교인은 신앙의 영역에 대해서는 피켓이나 확성기를 들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동성애와 동성혼이 만연한 시대에 교회는 세상의 가치와 달리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긴다는 사실을 복음을 통해 증거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의 가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잘 설득하고, 헌법상 보장된 권리와 의무에 따라 신자다운 자세를 토대로 활동해야 한다. 정치인들을 설득하는 일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삶의 현장에서 세상과 구별된 윤리를 보여줌으로서 기독교의 가치를 잘 드러내어,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에서 승리해야 한다. 세상이 더더욱 타락할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음을 더더욱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거대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2]
무엇보다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일은 동성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 문제를 해결 받으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일이다. 세상을 향해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함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결론
이 집회를 둘러싼 여러 문제가 있다. 그만큼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그렇기에 오해를 무릅쓰고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다. 교회를 위한 반대다. 잘 모르는, 혹은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반대다.
복음은 간단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복음은 명확하면서 풍성하다. 그렇기에 모든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거나 극단주의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성경은 물론 상식과 이성, 분별력을 허락하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절; 29장 6절).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3)
[1] 권수경, 10월 27일 광화문 집회를 앞두고.
[2] http://reformedjr.com/1843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