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환영합니다.
최종편집
조회 수 189 추천 수 0 댓글 0

 


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동료로서 본 고재수 교수의 고려신학대학원 사역

 

 

KakaoTalk_20241107_135836575_05.jpg

 

박도호 교수 J. M. (Kim) Batteau


 

 

   존경하는 교수님, 직원분들, 학생들, 졸업생들, 고려신학대학원과 고신교회의 친구들, 그리고 존경하는 참석자들, 특히 우리의 소중한 친구이자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인 고서희 사모님과 아들 Albert!

 

   오늘 오후 이 자리에 서게 되어 남다른 감회가 있습니다. 준비위원회의 요청으로 “동역자가 본 고재수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의 봉사”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 마그리트를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고 한국을 방문하게 해 주신 준비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고재수 교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 관점입니다.

 

   저는 1979년 고재수 교수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부산에 위치한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기 위해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재수 교수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전형적인 젊은 목사라는 첫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는 당시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th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Vrijgemaakt)라고 불렸던 교단의 목사였습니다. 그는 친절하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한국에 교수로 부름받은 것에 대해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일은 그 교회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두 명의 목사가 교단을 대표하여 자매 교회의 신학대학원에서 ‘교수 선교사’(Missionary Professors)로 가르치기 위해 한국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아주 먼 거리의 한국으로! 정말 멀었습니다.

 

   우리는 그때만 해도 서로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8년 동안 지내면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족으로서 서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기쁜 날들이었습니다.

 

 

006.jpeg

 

 

   저는 고재수 교수를 특히 교수 선교사로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인이고, 개혁주의자이고, 충성스럽고, 잘 훈련되어 있고, 생산적이고, 독립적이고, 그리고 에큐메니컬 진보주의자였습니다.

DRLDPIP(Dutch, Reformed, Loyal, Disciplined, Productive, Independent, ecumenically Progressive)!

 

 

1. 고재수 교수는 확실히 네덜란드인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북부 프리스란트 주의 레이우바르던(Leeuwarden) 출신으로 캄펀에 있는 자유 개혁교회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네덜란드인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와 비교했을 때 더욱 그랬습니다.

   고재수 교수의 모국어는 네덜란드어였고, 그의 성격, 습관, 선호도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다소 내성적인 사람이었으나 친해지고 나면 매우 사귐이 쉬워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외향적이라기보다는 내향적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미국인처럼 시끄럽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요란하고 매력이 있었습니다. 강압적이거나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네덜란드 음식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의 다양한 요리와 맛을 시도하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의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는 한국에 있는 동안 내내 전형적인 네덜란드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는 설탕을 넣지 않은 죽을 먹고, 점심으로는 빵에 무언가를 얹어 먹었는데, 대체로 치즈를 선호했습니다.

 

   고재수는 철저하게 네덜란드식으로 교육받고 훈련받았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에서 탁월했고, 신학교에서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라틴어 교부들의 저서를 읽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미국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고등학교에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도 잘 배워 현대 언어로 된 신학 서적을 읽는 데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대부분 미국인이 가지지 못한 강점입니다.

 

   캄펀 신학대학(현재는 Utrecht로 옮겼고, “신학 대학교”로 불림)에서 그는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신학 교육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지금은 다소 덜 까다로워진 듯).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잘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구약과 신약, 개혁주의 신앙고백, 교의학, 교회사에 대한 지식도 철저해야 했습니다.

 

   캄펀 신학교는 존 칼뱅, 아브라함 카이퍼(父),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특히 클라스 스힐더의 영향을 받아 개혁주의적이고 성경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비판적인 정통주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1967년 9만 여명의 교인 중 약 1/3이 새롭고 좀 더 자유주의적 교단으로 분리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연대 밖 개혁교회’라고 불렸고, 대다수는 더 엄격한 신앙고백을 유지하며 비공식적으로 ‘연대 내 개혁교회’라고 불렸습니다. 네덜란드어로는 ‘바위턴페르반덜스’(buitenverbanders)와 ‘빈넌페르반덜스’(binnenverbanders)라고 합니다.

 

 

007.jpeg

 

 

008.jpeg

 

 

2. 교재수 교수는 철저한 개혁주의 신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캄펀은 ‘연대 내 개혁교회’의 신학교였습니다! 신학교는 상당히 철저했습니다. J. 캄프하위스, C. 트림프, J. 반 브루헌, J. 다우마와 같은 교수들은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 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가 교회 연합의 신앙고백 기준으로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연대 밖 개혁교회’는 예를 들어 “사후에는 어떤 상태가 되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의 차이를 허용했습니다. 일부는 기독교인이 죽으면 천국에 가지 않는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몸과 구별되는 ‘영혼’이나 ‘정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재림 때 새로운 몸으로 다시 일어나기까지 땅에 묻혀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2주일에서 “나의 영혼은 죽음 후 즉시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갈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모순됩니다. ‘연대 내 개혁교회’는 단호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죽으면 즉시 영혼은 천국으로 갑니다.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1주일에서 말하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위로”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캄펀 신학교는 그점에서 분명했습니다!

 

   고재수 교수는 이러한 배경과 확신을 가지고 한국에 왔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유 개혁교회의 초기 역사의 결과물을 한국에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어, 클라스 스힐더의 영향입니다. 1952년에 사망한 스힐더는 1930년대 개혁교회의 갱신을 이끌었습니다. 스힐더는 1920년에 사망한 위대한 지도자 아브라함 카이퍼를 높이 평가했으며, 카이퍼의 성경 권위와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스힐더는 몇 가지 점에서 카이퍼의 신학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언약과 세례’의 문제였습니다. 카이퍼에 따르면, 17세기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하나님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택자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언약은 이미 중생한 것으로 간주 되는 신자의 자녀들과도 맺어집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중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유아 세례를 시행합니다. 스힐더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스힐더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신자들과 그들의 모든 자녀와 언약을 맺으시며, 이는 자녀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세례 시의 약속은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세례 시의 약속이 성취됩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주님을 떠나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언약의 자녀’이지만, ‘불신 언약의 자녀’입니다. 교회에서 엄청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개혁교회의 총회는 스힐더를 캄펀의 교의학 교수직에서 해임하고, 그를 분열주의자로 교회 징계에 처했습니다. 이는 스힐더를 따르는 많은 교인이 그 결정에 항의하며 교단을 떠나는 직접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참 교회를 이어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총회의 비성경적 결정에서 ‘스스로 자유한다’(liberating themselves)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의 종교개혁이 탄생했으며,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네덜란드어로 “Gereformeerde Kerken (Vrijgemaakt)”).

   고재수 교수와 제가 네덜란드 교회를 대표해서 한국에 왔을 때 소개해야 했던 꽤 긴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1944년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가 붙잡은 개혁 신앙에 대한 헌신은 우리의 유산의 일부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유산은 고재수 교수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그가 부산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방식에서 확실히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 그 권위에서 파생하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 개혁교회 전통에 따르면,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대한 헌신 내에서도 신학적 여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 많은 빛을 찾고, 신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심지어 일부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는 여지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분열하지 않고도 가능합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에 대한 명확하고 일관된 헌신이 있는 한, 하나의 신학적 의견의 묶음을 정경화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semper reformanda). 이것이 고재수 교수가 개혁 신학자로서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는 부산 고려신학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했습니다.

 

052.jpeg

 

3. 고재수 교수는 충성스러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재수 교수는 주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충성됨은 그에게 개혁신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삶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흠이 없는 성인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었습니다. 단점, 실패, 그리고 기이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차적인 문제에서도 엄격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그의 견해가 다소 경직되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고려신학대학 채플 시간에서 그가 기도하는 방식은 그의 충성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진실하고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에 충실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교회 회원으로서, 목사로서, 그리고 부산에서는 교의학 교수로서 말입니다. 당시 그의 동료였던 우리와 그의 많은 학생들은 그의 충성심을 고신 교회와 고려신학대학원에 증언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 내외의 관계에서도 신실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위해 정치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뒤에서 험담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로서 맡겨진 신뢰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는 교수 회의에서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는 강의를 할 때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는 저에게도 충성스러웠습니다.

 

KakaoTalk_20240830_224056420_14.jpg

 

 

4. 그는 매우 규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재수 교수는 철저한 규율의 사람이었습니다. 시간 엄수와 일상적 루틴을 지키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한국어를 배우는 방식에서도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는 한국어를 잘 배웠고,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습니다. 한국어를 잘 배우기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이 흉내 낼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말입니다! 그러나 고재수 교수는 한국어를 연습하고, 조교들과 대화를 많이 하며,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점점 더 잘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는 강의를 준비하는 방식에서도 규율을 지켰습니다. 강의는 그에게 사소한 일이 아니었고, 즉흥적으로 준비 없이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죠. 그의 강의는 신학교, 학생들, 그리고 그의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헌신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논문 작업에서도 훈련된 규율을 잘 지켰습니다. 1985년 1월 21일, 캄펀 신학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학위 논문 <하나님의 영성>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1985년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 이전 수년 동안, 특히 부산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이 어려운 주제를 읽고, 소화하고, 평가하고, 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영이시니 (헬라어: pneuma),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쓴 것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구했습니다. 그는 논문과 함께 출판한 18개의 신중하게 작성된 “명제” 중 첫 번째에서 “하나님의 영성”이란 창조주이자 구속주로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몸을 가지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전체 논문의 간결하고 명확한 요약입니다. 고재수 교수는 저에게 그의 확장된 요약의 영어 번역을 부탁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영으로 묘사함으로써 우리는 성경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알게 되는지를 확립합니다. 창조주가 몸을 가지지 않으시고 모든 생명을 그의 처분에 두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우리 피조물과 맺는 관계가 그려집니다.” (De Geestelijkheid van God, p. 237)

   우리는 이 논문이 1980년부터 시작된 많은 강의 일정 가운데 이루어진 집중적 연구와 글쓰기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재수 교수의 훈련된 규율이 그 열쇠였습니다!

 

 

5. 고재수 교수는 생산적이었습니다.

 

   생산성이라면, 고재수 교수는 1980년대에 대부분의 교수들이 달성한 것을 초과했습니다. 우리는 방금 그의 논문 작성이라는 큰 업적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9년 동안의 강의 준비, 예배와 설교, 교수 회의와 조교들과의 토론, 그리고 물론 수업에서 학생들과의 토론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역할에서 활발하고 참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신학자로서 그의 생산성을 가장 잘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당시 한국어, 영어, 네덜란드어로 쓴 책과 글들의 숫자일 것입니다.

   2010년 그의 글을 수집하고 Teaching and Preaching the Word: Studies in Dogmatics and Homiletics이란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이 책의 일부 장은 1980년대 네덜란드어로 작성된 기사들의 영어 번역입니다. 이 작업의 끝에 있는 선택된 참고 문헌목록(p. 411-413)에서 1980년대에 쓴 책과 더 많은 글의 목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 네덜란드어, 영어로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인간”: 원래 네덜란드어로 작성되어 1980년에 자유 개혁교회의 학술지 Radix에 게재됨.

“성경과 관련된 성령의 증거”: 원래 네덜란드어로 작성되어 1985년에 Radix 잡지에 게재됨. 영어 번역을 요청받아 기쁘게 작업함.

“이 일들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설교와 “구속사적 설교”와 “모범적 설교”의 문제에 대해 Prof. C. Trimp의 최근 작업에 응답하는 내용. 1986년에서 1987년 사이에 주간지 De Reformatie에 실린 글; 본래 네덜란드어로 작성됨.

“성령 세례와 오순절의 의미”: 본래 네덜란드어로 작성되어 1987년에 Radix 잡지에 게재됨.

 

마지막 부분에는 한국어로 쓴 책과 논문 목록이 있는 참고 문헌이 있습니다.

 

<성경 해석과 설교 사이: 구속사적 설교의 실천>(한국어 1987)

<성령 세례와 신자의 체험>(한국어 1판 1980년대/ 2판 1991)

<십계명 강의>(한국어 원래 1980년대 강의; 1993)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수집된 논문) (한국어 1판 1980년대/ 2판 2001)

<그리스도, 교회와 문화>(한국어 1판 1980년대; 2판 확장판 2008)

 

이 기간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작성된 다음 논문들:

“Bedoelen jullie dat een Christen zich zo kan voelen: Een kennismaking met de charismatische Beweging” (De Reformatie, 1985)

“The Sense of Divinity: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Views of Calvin and Demarest”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1986)

“Special Revelation in its Relation to General Revelation”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1985)

 

   다행히도, 고재수 교수가 1989년 캐나다 온타리오 해밀턴으로 이주한 후에도 그의 생산성은 계속되었습니다. 캐나다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작성된 Teaching and Preaching the Word: Studies in Dogmatics and Homiletics에 많은 논문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책의 끝에 있는 참고 문헌 목록의 계속 이어진 부분을 참조하십시오. 정말 인상적입니다!

 

098.jpeg

 

6. 고재수 교수는 독특한 틀 안에서 독립적 사고를 하는 분이다.

 

   고재수 교수는 매우 네덜란드적이고, 매우 개혁주의적 신학자였으며, 큰 충성심과 분명한 규율을 가지고 있어 놀라운 출판 목록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독립적 사고와 표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의 많은 대화를 기억합니다. 그의 독립적 사고는 특정 신학자, 특정 해석적 질문, 그리고 당시의 중요한 문제에 반응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한 번은 우리가 칼뱅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칼뱅이 그의 주석에서 성경 구절을 논의할 때 좋은 주석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특정 본문에 대해 교회 전통이나 현재의 개신교 해석 다수 의견에 반드시 동의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독립적인 의견을 유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원의 영원한 선택 교리에 관해서, 그는 중요한 본문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살펴보는 데 매우 신중했습니다. 그는 본문이 어떤 것을 “증명”한다고 빨리 결론짓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중간에 남겨두고,” 본문이나 구절이 A 또는 B 또는 C를 의미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종종 그는 이렇게 접근했습니다. “해석자 #1은 이 본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해석자 #2는 다르게 말합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독단적일 수 없지만, 세부 사항에 대해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몇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후 자신의 해석을 제시합니다. 고재수 교수는 “네, 칼뱅은 ‘냉철한’(sober-minded) 해석자입니다. 나는 그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냉철한”(nuchter)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성경 해석을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네덜란드 사람들의 “냉철한” 삶의 접근 방식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자유분방한 미국인들”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냉철한” 접근 방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고재수 교수는 기독교인과 신학자로서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본문과 주제를 신중하게 살펴볼 권리를 유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칼뱅을 존경한다고 해서 항상 칼뱅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의 세례” 문제에 관해서는, 그가 이에 대해 쓴 글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칼뱅은 “성령으로의 세례”가 사도행전 2장에서 묘사된 오순절 사건과 확실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더 넓게 보았으며,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성령의 부어짐”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전체와 이후 교회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따른 구속의 적용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칼뱅은 “성령으로의 세례”가 오순절에 국한되지 않고, 개별 기독 신자의 성화의 시작과 계속으로서의 하나님의 중생 사역에서 계속된다고 보았습니다. 고재수 교수는 여기에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으로의 세례”가 오순절 사건을 독점적으로 가리키며, 교회가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사건이라고 보았습니다. 개별 신자들은 교회에 통합됨으로써 사도행전 2장에서 묘사된 이 일회성 “성령으로의 세례”의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당시 한국에서 저는 이 점에서 칼뱅과 다른 신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저는 여기에서 고재수 교수와 의견이 달랐고, 여전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성령으로의 세례”의 증거로 방언을 말하는 “두 번째 경험”을 기대하는 오순절 운동과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사실, 고재수 교수는 어떤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도 “합의에 동참”하는 것을 상당히 주저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그의 신약학 교수 야곱 판 브루헌(Jacob Van Bruggen) 교수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판 브루헌(Van Bruggen) 교수는 여러 주석에서 주어진 본문에 대해 “보수적 신학적 합의”와 다르게 해석하여 우리를 계속 놀라게 했습니다. 여러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신약학자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캄펀에 있는 다른 신학교, 즉 개혁교회(Synodaal)의 신학교에서 보수적 신학자로 활동했습니다. 그 신학교는 1944년 “자유”(Vrijmaking) 당시 스힐더를 따르지 않은 더 큰 그룹이었습니다. 리델보스는 여러 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미와 아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한 세대 전의 미국 성경신학 전문가인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왔지만, 예수님의 재림 때에만 완성될 것입니다. 판 브루헌 교수는 그의 주석에서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미래의 성격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만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는 것이죠. 고재수 교수는 이 점에서 판 브루헌 교수와 의견을 같이한다고 저에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판 브루헌과 고재수가 이 점에서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판 브루헌 교수뿐만 아니라 고재수 교수를 특징짓는 것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주해와 해석에 있어서 “판 브루허니안”(Van Bruggian) 접근 방식을 취했습니다. 따라서 고재수 교수는 반드시 “보수적 신학적 합의”나 심지어 “정통 개혁 신학적 합의”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종종 다른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아마도 클라스 스힐더(Klaas Schilder)가 보여준 본의 영향을 일찍이 받았을 것입니다. 스힐더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존경하면서도, 언약, 세례, 일반 은총과 같은 문제에서 카이퍼와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여러 주제에 대해 고재수 교수는 성경의 권위, 명확성, 충분성에 전적으로 헌신하셨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Sola Scriptura” 원칙입니다. 그는 또한 성경의 메시지를 요약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 본문과 주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분석하고 해석하며, 때로는 “새로운 통찰”을 얻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진정으로 “스힐더리안”(Schilderian)이자, “판 브루허니안”(Van Bruggian)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성령으로의 세례” 문제에 대해 언급했듯이, 저는 고재수 교수가 쓴 모든 것에 대해 언제나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친절한 동료이자 좋은 친구로 남았습니다. 이는 제가 여전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7. 고재수 교수는 “에큐메니컬하게 진보적”이라고 불릴 만큼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적 대화와 공개 토론에서 반복하는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그 문장은 “이 접근 방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였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는 “이 접근 방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고, 퇴보하게 합니다”라고도 표현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이후로, 종종 “신칼빈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세 가지를 하고자 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1) 16세기의 “오직 성경”의 원리에 따라 성경으로 계속 돌아가고,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성경의 좋은 요약으로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 2) 비성경적 사상과 운동을 대립적이고 종종 논쟁적 방식으로 반대하는 것, 3) 신학과 교회 생활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접근 방식을 개발하여 우리를 뒤로 물러서거나 정체되지 않게 하는 것.

   카이퍼는 단순히 과거(17세기의 청교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현대의 죄와 오류를 피하고자 했습니다. 스힐더는 언약과 다른 성경적 개념을 사용하여 교회 생활을 심화하고 풍요롭게 하여 교육과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재수 교수는 고신 교회를 진정한 개혁주의 교회로 보고, 한국 장로교회와 세계 장로교회에 충실하고 개방적인 자세로 임하는 에큐메니즘을 보여주었습니다. 스힐더와 캄펀 신학교의 후배 교수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관을 거부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25장에서 두 개의 교회, 즉 1) 모든 종류의 교회에 있는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인 ‘불가시적 교회’와 2) 성경적이지만 순결의 정도가 다른 세상의 모든 교파와 교회인 ‘가시적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힐더와 그의 직계 후배들은 이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교회는 ‘불가시적’ 면과 ‘가시적’ 면이 있는 하나의 참된 교회였으며, 벨직 신앙고백서 27-29장에 묘사된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징(순수한 설교, 순수한 성례전 집행, 교회의 권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세계 장로교회는 신앙고백적으로는 진정한 개혁교회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 J. 캄프하위스 교수의 주도로 이러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고재수 교수도 한국과 다른 지역의 장로교회를 진정한 개혁교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고재수 교수는 벨직 신앙고백서의 27~29조를 확실히 따랐지만, 이는 그가 부산의 지역 고신교회 회원으로서 전심으로 협력하고, 고려신학대학 생활에 충실히 참여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살았던 동안, 우리는 장로교와 개혁교회, 심지어 복음주의 세계 전체에서 카이퍼와 바빙크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증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편으로, 고재수 교수는 카이퍼와 바빙크가 재능 있고 헌신적 개혁신앙 신학자였기 때문에 이 진전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당대에 새로운 종교개혁과 개혁주의 에큐메니즘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몇몇 주제에 대해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 카이퍼의 가정적 중생 개념, 교회의 다형성, 카이퍼의 문화적 야망, 비기독교인에게 성령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카이퍼의 견해 등입니다. 따라서 카이퍼와 바빙크의 모든 입장에 동의하는 것은 고재수 교수의 말로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부분은 교회 생활에서 변화할 성경의 내용을 서로 도와서 새롭고 긍정적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속사적” 설교는 스힐더와 자유 개혁교회 전통의 다른 사람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부분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문구에서 전 세계의 장로교와 개혁 교회, 신학자, 선교사, 그리고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ICRC(국제개혁교회협의회)와 같은 조직에 함께 모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라는 문구는 아마도 고재수 교수의 스타일과 가장 깊은 동기를 나타내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는 에큐메니컬하게 진보적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열망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저서와 목소리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들어봅시다. 항상 “이것이 우리를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말입니다.

 

 

KakaoTalk_20241027_160053626.jpg

 

 

결론

 

   추모 강연을 마치며, 제 동료이자 친구인 Niek Gootjes 교수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그의 초기 발병 알츠하이머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신학교를 섬기며 교회를 섬기는 삶을 계속할 수 있었던 삶을 단축시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우리는 고재수 교수를 맹목적으로 모방하거나 그의 모든 견해를 따르는 것으로 그의 기억에 충성을 나타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현명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냉철한” 사람이고 신학자였던 고재수 교수는 분명히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따라야 할 것은, 주님이 주신 선물, 에너지, 그리고 고재수 교수의 삶의 열매에 감사하며, 우리의 모든 노력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그의 전심전력의 헌신입니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 고재수의 삶과 고신 교회

    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고재수의 삶과 고신 교회 권수경 목사 (일원동교회 담임) 도입 ‘고재수의 삶과 고신 교회’라는 제목을 받았습니다...
    Date2024.12.03 By개혁정론 Views107
    Read More
  2. 고재수 교수의 가르침과 우리의 나아갈 방향

    고재수 교수의 가르침과 우리의 나아갈 방향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신약학 교수) I. 들어가는 말 신학교 2학년 올라가던 어느 겨울날 고재수(N.H. Gootjes)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미스터 최, 저녁 7시에 우리 집에 차 한 ...
    Date2024.11.28 By개혁정론 Views147
    Read More
  3. 고재수의 신학과 고신교회

    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고재수의 신학과 고신교회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은퇴교수) 고신 교회는 고려신학교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교회로 출발하였다...
    Date2024.11.28 By개혁정론 Views106
    Read More
  4. 동료로서 본 고재수 교수의 고려신학대학원 사역

    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동료로서 본 고재수 교수의 고려신학대학원 사역 박도호 교수 J. M. (Kim) Batteau 존경하는 교수님, 직원분들, 학생들, 졸업...
    Date2024.11.15 By개혁정론 Views189
    Read More
  5. 고재수 교수의 한국 생활과 사역

    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고재수 교수의 한국 생활과 사역 고서희 사모 제가 남편의 한국 생활과 사역에 대해 말하기 앞서, 남편이 직접 한 말을 인용하...
    Date2024.11.13 By개혁정론 Views260
    Read More
  6. 고재수 교수의 생애

    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고재수 교수의 생애 고서희 사모 먼저, 오늘 남편의 삶과 사역에 대한 강연회를 가능하게 해주신 준비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
    Date2024.11.10 By개혁정론 Views368
    Read More
  7. 10월 27일, 어떻게 모일 것인가?

    10월 27일, 어떻게 모일 것인가?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고신총회가 올해 종교개혁기념주일에 광화문 일대에서 열리는 ‘10. 27 악법저지를 위한 200만 연합예배 찬양 & 큰 기도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
    Date2024.10.26 By개혁정론 Views569
    Read More
  8. 10월 27일 광화문 집회 논란을 통해 생각해 볼 여러 주제 (2)

    10월 27일(주일) 오후 2시에 열릴 1027 연합예배 및 찬양 &큰 기도회와 관련하여 개혁정론에서 이미 게재한 손재익 목사의 글 2번째를 아래와 같이 싣는다. 찬성과 반대 또는 고민 중인 모두가 정독하여 좋은 결론에 이르기를 바란다. 한 번에 읽기를 원...
    Date2024.10.21 By개혁정론 Views1873
    Read More
  9. 캐나다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 벧엘 캐나다 개혁교회 박광영 목사 캐나다에서의 동성애 관련 설교 저는 이곳 캐나다 개혁교회에서 동성애에 관한 성경적 진리를 강단에서 그대로 설교해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성경적 진리를 고수...
    Date2024.10.19 By개혁정론 Views4801
    Read More
  10. 10월 27일 광화문 집회 논란을 통해 생각해 볼 여러 주제 (1)

    한국교회 상당수가 참여하는 집회가 2024년 10월 27일(주일) 오후 2시 광화문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로 인한 논란이 거세다. 개혁정론은 이미 2차례에 걸쳐 이 집회에 대한 염려를 다뤘는데, 이번에 좀 더 상세하게 다룬 손재익 목사의 글을 게재한다. 찬성과...
    Date2024.10.18 By개혁정론 Views12705
    Read More
  11. 무목교회의 공포가 다가온다

    무목교회의 공포가 다가온다 정찬도 목사 (주나움교회 담임목사) 무목(無牧)교회란 목사(牧)가 없는(無) 교회를 의미한다. 해외 교회들은 오래전부터 목회자 부족 현상과 더불어 목회자 은퇴 이후 성도들만 남겨진 교회들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고령화 시...
    Date2024.10.08 By개혁정론 Views751
    Read More
  12. 74회 고신총회의 10월 27일 200만 연합예배 참여 결정에 대해 정중하게 드리는 어리석은 질문

    제74회 고신총회의 10월 27일 200만 연합예배 참여 결정에 대해 정중하게 드리는 어리석은 질문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제74회 고신총회는 총회 이튿날인 9월 11일(수)에 고신교단이 속한 한국교회총연합에서 요청한 한국교회 2백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
    Date2024.09.28 By개혁정론 Views8079
    Read More
  13. 제74회 고신총회를 결산한다

    제74회 고신총회를 결산한다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제74회 고신총회가 2024년 9월 10일(화)부터 12일(목)까지 고려신학대학원(천안)에서 열렸다. 이번 회기 주제는 ‘선교, 일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요 20:21)다. 그동안 고신교회가 해외선교...
    Date2024.09.20 By개혁정론 Views699
    Read More
  14.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임모세 목사 (남울산장로교회) 1. 예식에의 참여 교회는 예식을 행합니다. 가장 중요한 예식은 예배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예식인 성례입니다. 성례는 두 가지인데 세례와 성찬입니다. 그리고 성례는 아니지만 중요...
    Date2024.02.03 By개혁정론 Views1180
    Read More
  15.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며칠 전 동기 목사의 장례가 있었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주일 저녁에 단톡방에 난데없이 부고가 올라왔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프다는 이야기는 몇 개월 전에 ...
    Date2024.01.30 By개혁정론 Views328
    Read More
  16.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제73회 총회(2023년 9월 19-21일)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고신 교회 제73총회가 얼마 전에 있었다. 총회는 장로교회에서 1년마다 열리는 최고 치리회(治理會)다. 개체교회의 당회, 지역 단위의 노회와 함께 그리스도의 치리를 대신하...
    Date2023.10.12 By개혁정론 Views452
    Read More
  17.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없는가?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없는가?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담임) 이번 주간에 정기노회가 열렸다. 그런데 여러 노회에서 시찰위원 선정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시찰위원 선정을 할 때 이번에 공포된 개정헌법이 이전과 다른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
    Date2023.10.11 By개혁정론 Views701
    Read More
  18.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그를 기억하며 그리워하는가?

    본 글은 월간고신 생명나무 2023년 10월호에 기고한 것을 허락을 얻어 게재함을 밝힌다. - 편집자 주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1948-2023) - 우리가 왜 그를 기억하며 그리워하는가? -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담임) 고신교회의 신학교인 고려신학대학원(고려...
    Date2023.10.06 By개혁정론 Views556
    Read More
  19.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왔나?

    왜 고재수(N. H. Gootjes)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왔나?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 들어가며 2023년 8월 20일 고재수는 향년 75세로 캐나다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어떤 사람은 그의 이름을 보고 한국 사람으로 알지만, 네덜란드인이...
    Date2023.10.06 By개혁정론 Views803
    Read More
  20.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 고신교회 제73회 총회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는 표제하에 2023년 9월 19일(화)부터 21일(목)까지 열렸다. 코로나 이후 지난 3년 동안 온라인이나 여러 장소에서 회집하...
    Date2023.09.26 By개혁정론 Views614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Next
/ 10
사설
[사설] 성찬상을 모독하지 마라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고재수의 삶과 고신 교회
고재수 교수의 가르침과 우리의 나...
고재수의 신학과 고신교회
동료로서 본 고재수 교수의 고려신...
고재수 교수의 한국 생활과 사역
고재수 교수의 생애
10월 27일, 어떻게 모일 것인가?
10월 27일 광화문 집회 논란을 통해... 1
캐나다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할...
10월 27일 광화문 집회 논란을 통해...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