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고재수 교수의 한국 생활과 사역
고서희 사모
제가 남편의 한국 생활과 사역에 대해 말하기 앞서, 남편이 직접 한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남편은 캐나다 개혁교회에서 레이던 목회 사역을 끝낸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목회 사역을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레이던 목회 사역에 익숙할 뿐 아니라 즐겼습니다. 몇 년 동안 한국 생활은 외로웠습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와 신학교에 큰 도움을 줄 수 없었기에 목회 사역이 그리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부산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캐나다 신학교에서 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자매 교회인 고신 교회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 우리 아들 Henk는 두 살이 조금 넘었고, Albert는 구 개월이었습니다. 부산 고려신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졸업식은 약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제 이름을 제외하고는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아내와 제가 레이던에서 한국어 과정을 수강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에서의 초기 몇 년을 언어 훈련에 집중했습니다. 첫 학기에는 라틴어 과목을 하나 가르쳤습니다. 네덜란드인이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로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언어 장벽 때문에 저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꽤 큰 교회의 목사였던 제가 그런 전환을 겪은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라틴어 수업에 학생 절반만 참석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네 명이 사망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은 방화의 주요 용의자가 고신대학교의 옛 학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로 인해 학교 전체에서 이 사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날 오후에는 아무도 수업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네덜란드인 교수 본인만 수업을 했던 것입니다. 점차 우리는 한국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고, 학생들은 우리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신학교 직원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교수님들은 우리를 많은 인내로 기다려주었고, 학생들은 더 많은 인내심을 보였습니다. 학생들과의 관계가 초기 몇 년의 외로움을 극복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한국 학생들의 개방성, 열정, 친절함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저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이 말이 우리가 한국에서 겪었던 기쁨과 어려움을 잘 요약합니다. 한국 사회에서의 외로움,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는 느낌, 어려운 한국어로 소통하려는 노력, 그러나 곧 한국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과 가르치는 일에 대한 사랑이 생겼습니다. 학생들이 점차 네덜란드 교회의 교인들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1980년 2월 14일에 시작되었습니다. 박도호 교수와 그의 아내 Margreet, 그리고 그들의 자녀 Jesseka와 Lukas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고려신학교와 하도레(Theodore & Grace Hart) 교수 부부의 환영을 받으며 부산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첫 몇 주 동안 우리는 이근삼 교수 가족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박도호 교수 가족은 하도레 교수와 함께 지냈습니다.
가구가 실린 컨테이너가 도착해서 우리는 첫 번째 한국 집인 201호 우림 맨션으로 이사할 수 있었고, 박도호 교수 가족은 401호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 중 한 명이 유해무 학생입니다. 그는 아내 옥현순과 함께 같은 아파트(106호)에 방을 빌려 살았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근처의 태양열 주택으로 이사했을 때, 그들은 한국어 교사로 도와주었고, 첫 번째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나라에서의 생활을 도와준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 한국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신학교 동료들, 특히 박성복 교수와 이보민 박사, 그리고 언어 선생님들과 ‘일하는 아주머니’(Ilhanun Adjumoni)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집과 새로운 일 외에도 우리는 새로운 교회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송도제일교회의 교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언제나 우리는 매주 일요일 오전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하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거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Hananim’, ‘Kido’, ‘Jesunim’ 같은 단어를 알아들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환호했습니다.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설교를 이해하게 되었고, 몇몇 찬송가도 배웠습니다. 그중 하나인 ‘Koruk, Koruk, Koruk’(거룩, 거룩, 거룩)을 작년 남편의 장례식에서 한국어, 영어, 네덜란드어 버전으로 함께 불렀습니다. 오후에는 네덜란드어 설교를 카세트 테이프로 듣거나 영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특히 초기의 의사소통이 힘들었지만, 우리는 항상 한국 교회 형제자매들의 친절함과 환영의 미소에 감사했습니다.
새로운 집에 자리를 잡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레이던에서 한국어를 조금 배웠지만, 한국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언어와 너무 달라 매우 어려웠습니다. 한국에 갔을 때, 남편의 친구가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갔습니다. 1년 후, 그는 인도네시아어로 첫 설교를 했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비교해 보면, 남편은 우리가 도착한 지 2년이 지나서야 한국어로 첫 설교를 했습니다. 남편은 28세까지 학생이었고, 그 후 레이던 교회에서 즐겁게 목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시 학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신학교는 우리를 위해 개인 교사를 찾아주었습니다. 그후 2년 반 동안 우리의 주요 일과는 한국어 공부와 저녁 숙제였습니다. 남편은 다시 학생이 된 것이 아주 힘들었지만, 주님이 새로운 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그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게 했습니다. 부산에서 2년간의 개인 학습 후, 그는 한 학기 동안 서울 명도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 후, 그는 한국어로 신학을 강의할 수 있었습니다.
1981년 여름, 우리는 아파트에서 동양 시멘트 공장 근처의 태양열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 집은 미국 OPC 선교사 랄프 잉글리시(Ralph English 양길수) 목사를 위해 지어진 것이었지만, 그가 부산을 떠난 후 우리가 임대했습니다. 우리 가족, 한국 학생 가족, 그리고 나중에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네덜란드 교사를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집에 지네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네를 보면 남편을 불렀습니다. 그는 부엌에서 큰 요리용 칼을 가져와 지네의 머리를 강타했습니다. 지네는 남편을 두려워했는지, 저와 우리 작은 아들 Kees는 물었지만, 남편은 절대 물지 않았습니다. 또한 크고 들판과 같은 정원이 있어서 아이들이 놀 수 있었고, 봄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쑥을 뜯으러 오셨습니다. 일하는 할머니와 함께 방앗간에서 쑥떡도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지하실에 멋진 서재가 있어서 책을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강의를 준비했으며, 레이던에서 시작한 박사 논문 작업도 계속했습니다.
1981년 10월, Henk와 Albert는 작은 동생 Kees를 맞이했습니다. 그 즈음 네덜란드에서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떠나는 것이었지만, Kees는 사교적인 아이였기 때문에 조부모를 보고 싶어 했고, 예상보다 한주 혹은 두 주 일찍 태어났습니다. 신기하게도, 2년 후 딸 Jentine를 출산하려 할 때, 이번에는 제 어머니와 남동생이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와 남동생은 한국에 있으려 했지만, Jentine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예정일 몇 주 후에 태어났습니다. 결국 친정어머니가 네덜란드에 돌아간 후 Jentine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출생은 절대로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1982년, 박도호 교수 가족의 장녀 Jessica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우리 아들 Henk도 다음 해에 학교에 입학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한국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네덜란드 교육 과정을 따라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 중 한 명이 교사였는데, 그녀가 한국에 와서 1983년 1월에 우리만의 “네덜란드 국제 학교”를 설립해 주겠다고 해서 매우 기뻤습니다. 신학교는 건물의 최상층에 있는 교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신학교는 교실을 페인트칠하고 칠판과 겨울에 방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난로를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온 교사들이 1년 또는 2년 동안 머물며 유치원부터 고학년까지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신학교 운동장에서 놀았고, 신학교 학생들은 그들에게 축구와 한국식 탁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침내 1983년 초, 남편은 한국에 온 목적인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어로 교리, 라틴어, 그리스어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글로 작성한 강의 내용을 한 단어씩 읽어야 했고,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쌍방 모두 영어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한국어 실력이 향상되어 결국 자유롭게 강의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질문을 이해하고 한국어로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강의 때뿐만 아니라 교실 밖에서도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졸업반 학생들이 졸업 여행에 그를 초대했을 때 매우 영광스러워했습니다. 한 번은 고씨 가문의 발생지인 제주도까지 방문했습니다.
매년 여름, 우리 가족과 박도호 교수 가족은 번갈아 가며 3개월 동안 휴가를 떠났습니다. 우리는 네덜란드 교회에 사역을 보고하고, 친척들을 만나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보통 짝수 해에 휴가를 갔지만, 1985년 초에 특별한 여행을 했습니다. 남편이 신학 박사 논문 방어식을 위해 캄펀(Kampen)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성’에 관한 학위논문을 썼습니다. 우리는 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갔고, Henk와 Albert는 한국에서 네덜란드 선생님과 남았습니다. 여행은 힘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눈 때문에 지연되고, 짐이 분실되고, 네덜란드에서는 심한 눈보라로 기차 운행이 중지되어 부모님 댁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우리 짐이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긴장하셨지만, 왜 그런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저에게 다가와서 속삭였습니다. “네 남편 논문 방어식 노트는 가지고 있니? 아니면 분실된 짐에 있니?” 저는 남편이 논문 방어식에 필요한 모든 자료와 옷을 기내 수하물에 가지고 있다고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네덜란드 도착 며칠 동안은 비행기에서 입고 있던 옷만 입고 지냈습니다. 다행히 항공사가 우리의 짐을 찾아서 배달해 주었습니다.
1985년 1월 21일은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캄펜의 Broederkerk 건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 논문 방어식이 열렸습니다. 네덜란드 관습에 따라 두 명의 일종의 도우미(Paranymphs)가 있었는데, 한 명은 그의 형제 Jan Pieter였고, 다른 한 명은 오랜 친구 Hibert Gunnink 목사였습니다. 남편은 Doekes 박사와 함께 박사 과정을 시작했지만, 결국 Kamphuis 교수가 지도교수가 되었습니다. 방어식 후에는 리셉션과 친한 친구 및 가족과의 저녁 만찬이 있었습니다. 방문객에는 한국인 얼굴도 몇 명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2주를 보낸 후,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큰 자녀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한국 결혼식에도 참석했었습니다!
다음 해 우리는 정기 휴가로 네덜란드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머물던 태양열 집이 팔렸고, 새 주인은 우리가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는데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할 수 없이 박도호 교수 가족이 우리의 짐을 보관해 주었고, 새로운 집도 찾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송도의 아름다운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송도에서 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남편은 그 집 2층에 있는 서재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큰 창문으로 송도 바다가 보였고, 서재 앞 발코니에는 연못과 작은 바위가 있는 정원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곳에서 1년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동아대학교 근처의 대신동으로 이사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9년 동안 우리는 네 번 이사했습니다. 이사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이사하는 일은 항상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책을 번호 매긴 상자에 포장해야 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캐나다로 이사할 때, 우리는 가족을 위한 충분한 공간과 좋은 서재가 있는 집을 찾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1989년에 구입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외에도 ‘구속사적 설교 그룹’을 인도했습니다. 또한, 가끔 우리 교회의 젊은이와 다른 학교 학생 그룹을 위해 강연을 했습니다. 그는 부산 주변 교회에서도 설교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설교를 위해 통역이 필요했는데, 종종 박성복 교수가 통역을 맡았습니다. 설교 중에 교인들이 여러 번 웃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웃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박 교수님께 사람들이 왜 웃었는지 물어보니, 그는 네덜란드 설교가 너무 진지해서 교인들도 조금 웃을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통역할 때 몇 가지 농담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 남편은 한국의 상황과 교회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한국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강의와 마찬가지로 그는 책도 바로 한국어로 썼고, 나중에 학생들이 그의 언어를 교정해 출판 준비를 도왔습니다. 그의 마지막 책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우리가 네덜란드로 돌아가 캐나다로 이사하기 전, 부산에서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우리 가족은 애린 유스 호스텔의 한 방에서 살았고, 거의 매일 남편과 그의 학생 도우미 권수경 씨가 출국 전에 마지막 책을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끝냈습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저녁에 그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공항으로 갔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한국에서의 시간 동안 어려움과 좌절도 있었지만, 항상 한국의 형제자매들과 함께한 시간에 감사했습니다.
한국을 떠난 해인 1989년 말, 남편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연례 소식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과 작별을 고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었고,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의 10년 전에 시작한 일이 이제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한국 친구들과의 교제도 중단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행복한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는 것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만, 한국에서의 삶은 우리에게 깊게 새겨졌습니다. 우리는 다른 문화와 다른 교회 생활의 경험으로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졌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남편이 말했듯이, 우리는 주님의 교회가 한 나라나 한 대륙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21주일’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온 인류로부터 그의 교회를 모으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보았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찬양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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