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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2024년 9월 29일 주일 오전예배 시간에 한길교회(담임 손재익)에서 행해진 설교입니다. 요한복음 강해를 진행하다가 성경 순서에 따라 요한복음 18장 11절을 다루면서, 최근 한국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10월 27일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양심의 자유에 근거하여 행한 것이며, 전국교회가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9월 29일 한길교회 주일오전예배>

 

 

요한복음 강해 (113번째)

세상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방식

-10월 27일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설교자: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본문: 요한복음 18:1-11

설교: (요한복음 강해 113) 세상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방식

 

 

 

서론

 

세상 속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 그리스도인입니다. 골방에 혼자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떠날 수 없듯, 그리스도인은 세상도 떠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두셨습니다.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요 15:19).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고,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의무도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살고, 세상에 관여하고,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열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1]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기 때문입니다(마 5:13-14). 예배당이 깊은 산속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한 세상의 반응

   이렇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만나는 세상이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할 때도 있지만, 우리를 적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이미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죠? 요한복음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20절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시편의 수많은 구절은 신자의 삶을 대적하는 원수를 언급합니다. 시편이 신자의 실존을 잘 담고 있음을 안다면, 구약 신자들의 실존과 오늘날 우리들의 실존이 같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세상의 적대 앞에 늘 설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우리의 세계관이, 우리의 문화가 세상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고, 적대하고, 심지어 핍박하고 박해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한 때에 세상을 어떻게 대하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내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교회를 대적하는 세상을 마주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을 함께 보겠습니다.

 

 

본론

 

I. 본문 설명

 

두 그룹의 마주섬

   오늘 본문에는 두 그룹이 나옵니다. 한 그룹은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한 그룹은 유다와 군대와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입니다. 편의상 A그룹과 B그룹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3절을 보면 B그룹의 손에는 등과 횃불과 무기가 있습니다. 반면 A그룹의 손에는 무엇이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A와 B, 두 그룹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뭔가 모를 어색함과 위협과 살기가 느껴집니다. 영화로 치면 이제 곧 큰 충돌을 앞둔 두 그룹이 서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긴장하면서 대척하고 있습니다.

   이 두 그룹 중 A그룹은 분명 약자(弱者)입니다. 평범한 목수와 어부, 세리로 구성된 사람들이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온 군대와 나름 특별히 구성된 사람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행동

   A그룹의 대표자 예수님이 먼저 그들을 받아들이십니다(4). B그룹이 강자(强者)인줄 알았는데 6절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A그룹의 대표자 예수님이 잡히려고 할 때, 이 그룹의 오른팔 베드로에게 마침 칼이 있었습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단검입니다. 베드로가 그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Malchus)라는 사람을 칩니다. 오른쪽 귀를 베어버립니다.[2]

 

교회와 세상의 충돌

   A그룹은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즉 교회입니다. B그룹은 교회를 대적하는 측이니 세상입니다. 한 동산에서 교회와 세상이 마주했습니다. 이 두 그룹은 대립적입니다. 서로 다른 두 가치가 만났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억압하려고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박해하려고 합니다. 이때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가 세상을 때립니다. 무장(武裝)한 그들을 무력(無力)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보면 통쾌합니다. 관중이 있다면 박수를 칠 만한 장면입니다. 세상이 공격하기 전에 교회가 먼저 공격했습니다.

 

칭찬하고 싶은 베드로의 행동

   베드로의 행동, 얼핏 보면 칭찬할 만합니다. 자기 스승에 대한 분노의 적절한 표출입니다. 선생님에 대한 깊은 사랑, 위험에 처한 선생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행한 일입니다. 횃불과 무기를 든 자에게 칼로라도 저항하는 건, 상식입니다. 자신이 잡히는 순간임에도 오히려 자기 자신보다 제자들을 염려하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에 대해 베드로 역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칼을 빼어 쳤습니다.

 

베드로의 무력에 대해 꾸짖으시는 예수님

   그러나 A그룹의 대표자, 교회의 머리 예수님은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반응하십니다. 1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오히려 베드로의 무력을 꾸짖으셨습니다. 그의 행동은 예수님의 의도에 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었습니다.

 

 

II. 본문 해석

 

예수님의 기본적인 의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의도하시는 바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비록 요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모두 나오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씀과 관련됩니다(마 26:39; 막 14:36; 눅 22:42).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에게 잔을 주셨으니, 그 잔은 구약에서 자주 표현되는 여호와의 손에 있는 분노의 잔 또는 진노의 술잔이요(시 75:8; 사 51:17, 22; 렘 25:15-17, 28; 49:12; 계 14:10; 16:19),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 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주신 잔을 마셔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가 주신 사명,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뜻입니다.[3]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려면, 베드로가 칼을 칼집에 꽂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잡히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잔을 예수님이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행위는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구속사적 계획을 사람의 힘으로 막으려는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4]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의도

   이것이 기본적인 의도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또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이야기를 다룬 다른 복음서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51을 봅시다. 복음서가 동일한 내용을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음은 우리에게 계시의 풍성함을 보여주는데요.

   오늘 본문에는 칼을 빼서 귀를 벤 사람이 베드로라는 것을 정확하게 밝혔습니다만, 마태복음 26:51은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라고 해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누가 그랬을까?’ 궁금해 할 독자는 요한복음을 통해 이 사람이 ‘베드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라고 했는데요. 마태복음 26:52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바로 이 구절에 오히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이 없고 오히려 요한복음에 나오고, 마태복음에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5] 칼로 귀를 베어버린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칼을 빼든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칼이 있어야 할 곳은 칼집이라는 사실을 알리십니다(요 18:11).[6]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 26:52). 아무리 복음과 교회를 대적하는 무리라 할지라도, 칼로 즉 무력(武力)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B그룹이 칼을 든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방식대로 일합니다. 그렇다고 A그룹마저 칼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칼을 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무장한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체포해 가더라도 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합니다.

 

세상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방식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오늘 설교의 제목대로 “세상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을 봅니다.

 

 

III. 세상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

 

교회의 특성

   그리고 또한 우리는 “세상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세상은 교회에 비해 강자(强者) 같습니다. 그들이 더 숫자도 많고, 그들에게 더 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6절처럼 약자(弱者)입니다.

   교회는 한편으로 약자 같습니다. 숫자도 적습니다. 가진 것은 복음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강자입니다. 어떻게 약자가 아니라 강자입니까? 교회가 가진 복음의 특성 때문입니다.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기독교 복음의 특성은 “약함”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약할 때 강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독특성입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강자 같은 이가 약자요, 약자 같은 이가 강자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진정한 강자요, 세상은 약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든 그들에게 먼저 나아가십니다(4). 칼을 빼든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11). 세상이 비록 교회를 대적하더라도 교회가 강하게 나가서는 안 됨을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의 담지자(擔持者) 교회는 약한 그때 강합니다.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맡은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칼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칼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교회 역사 속 실패 십자군 전쟁

   교회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십자군 전쟁(The Crusades, 1096년 ~ 1270년)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달리 교회가 칼을 들었던 때입니다. 평화를 사랑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십자가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켰으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때는 1096년입니다. 이슬람이 확장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중에는 예루살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성지(聖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슬람이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를 방해합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종교 회의를 엽니다. 이른바 성전(聖戰)론을 주장합니다. 거룩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동원되어서 “이것은 거룩한 사업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은 어떠한 죄도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대규모의 다국적 군대가 결성되어 예루살렘으로 출발했습니다. 십자군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무려 8차례에 걸쳐 200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명분도 신념도 방법도 잘못된 이 전쟁은 결국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고, 이때 행한 무지는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의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교회가 무력으로, 악으로 행동한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지금까지도 잘 보여줍니다.

 

세상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때로 여러분을 대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치관을 조롱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박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바울과 베드로는 각각 말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롬 12:17)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벧전 3:9)

   칼이 아니라 꽃으로도 때리지 마십시오.

 

 

IV. 적용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이게 성경과 교회 역사의 가르침일진대, 언제부턴가 교회가 세상을 향해 거친 언사를 퍼붓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교회의 숫자나 힘을 자랑합니다. 약함보다 강함을 자랑합니다.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천만 기독교인의 이름으로"라고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언젠가부터 교인이 예배당보다, 삶의 현장보다, 광장에 더 많이 나갑니다. 광화문 광장은 기독교인들이 자리를 꿰찬 지 오래입니다. 사랑, 정의, 화평을 외쳐야 할 자들의 손에는 피켓과 확성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배를 빙자합니다. 기도를 내세웁니다. 그러면서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데 사실상 사람을 향하니, 그런 모습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3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12-113문답).

 

약한 복음으로 강한 능력을 나타내야 할 교회

   복음은 강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지 않고, 약하고 미련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깁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합니다(고전 1:23). 그래서 복음은 약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강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5). 복음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고전 1:24).

   하나님은 약한 우리를 사용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고전 1:27). 그렇기에 결국 복음은 강합니다. 교회는 강합니다. 반면, 세상은 약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힘으로 전복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도의 미련한 것으로(고전 1:18, 21), 이 세상의 어리석고 미련함을 부끄럽게 해야 합니다(고전 1:27).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

   물론 교회는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설교의 시작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변화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살고, 세상에 관여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열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한 목소리란 호통(號筒)이 아닙니다. 시위(示威)가 아닙니다. 설득입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15는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는 복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복음의 가치를 전하고, 복음의 능력을 증거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내어야 할 목소리는 우리의 삶의 목소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산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않고, 말을 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무례한 이들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2024년 10월 27일 주일 오후 2시)

   교계 소식과 이슈에 관심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 전 우리교회가 속한 고신교단의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가 200만 성도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발단은 2024년 7월 18일 대한민국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선수 대법관)가 동성 동반자도 사실혼 관계의 이성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 일입니다.[7] 손현보 목사는 이 판결에 대해 분노하며 종교개혁 기념 주일인 10월 27일 주일에 개신교회가 단결하여 악법 저지 운동을 벌이자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손현보 목사는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를 동원해서 일을 더 확대했습니다. 결국 9월 9일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라는 이름의 조직위원회를 꾸렸습니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를 공동대표로 해서 10월 27일 주일 오후 2시 광화문에서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손현보 목사는 “한국교회가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200만 성도가 모여 하나님께 간구하면 악법이 절대 통과되지 않을 것이다. 이 집회가 대한민국을 살리고 제2의 종교개혁의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한국 교계의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9월 둘째 주간에 열린 고신 총회는 이 집회에 참가하는 것을 총회가 결의했습니다.[8] 그리고 지난 주간에 열린 합동 총회와 통합, 합신, 대신, 백석 총회에서도 오정현 목사와 손현보 목사가 직접 독려하여 이 집회의 참가를 총회가 결의했습니다.[9]

   이에 따라 장로교 주요 교단인 예장 고신, 합동, 통합, 합신, 백석, 대신 등에 속한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10월 27일 주일 오후 2시에 광화문 광장에 모입니다. 부산, 울산의 어느 교회는 이미 전세버스를 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교회소식을 통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한길교회는 총회의 이 결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 결의는 성경의 가르침이나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 4-5절), 그리고 교회헌법(전문 제3장 제4항)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치리회가 내린 결정은 하나님 말씀에 일치되는 한 구속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집회가 잘못되었는지, 왜 총회가 결정한 것을 우리교회는 따르지 않는지, 설명하고 지적할 주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본문과 무관한 것 하나만 먼저 말씀드립니다. ①공예배와 주일성수 문제입니다.

   고신 총회가 이 집회 참가를 결의하기 전 논의를 했습니다. 한 총대가 이렇게 발언했습니다. “그날은 주일인데, 주일예배는 어떻게 합니까? 주일성수를 어겨도 되는 겁니까?” 고신교회 상당수가 부산 경남, 대구 경북에 있는데 주일 오후 2시의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려면 주일 아침에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발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느 총대가 나와 말했습니다. “전날 서울에 올라와서 서울에 있는 교회에 예배 참석하면 됩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입니다.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의 예배를 아무렇지 않게 빠지고 다른 교회에서 예배한다니 말입니다. 공예배가 단순히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인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더 심한 말도 나왔습니다. 총회장을 지낸 바 있는 어느 은퇴목사는 이렇게 발언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서 예배 드리면 됩니다.” 주일 공예배와 평일 야유회 때 잠시 드리는 경건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발언입니다. 고신 교회 헌법에는 “주일에는 예배와 안식에 방해되는 행위를 금하고, 세상 염려와 세속적 행위를 삼가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배 참석자는 “예배를 방해하는 모든 행위를 삼가고, 세상의 모든 일을 내려놓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의 마음, 믿음의 순종과 감사, 사랑과 온유함이 풍성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준비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분명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 5:14)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그날 하루 종일 운전해야 할 버스 기사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 외에도 생각해 볼 만한 주제가 많이 있습니다. ②대법원의 판결이 과연 동성결혼을 인정한 것인지, ③세상은 교회가 아닌데 세상이 비성경적인 결정을 했을 때 교회가 관여해도 되는지, 만약 관여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관여해야 하는지, 교회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대한민국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로 바꾸도록 국가와 국회를 압박해도 되는지, ④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과연 교회를 공격하는 것인지 등등 말이지요.

   그런데 이걸 다 다룰 수는 없고, 오늘 본문과도 직접적으로는 상관없기에,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만 생각해 봅시다.

 

   과연 세상에 대해 교회는 그런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까? “200만 명이 모인다.” “200만의 이름으로 가만두지 않겠다.” 이것이 과연 기독교의 모습일까요? 약함을 자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는 기독교인의 말은 칼이 아닙니까?

   교회가 세상을 대할 때, 온유와 겸손으로 하지 않고, 광장과 거리를 차지하고,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시위(示威)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대하는 방식일까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롬 12:17)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벧전 3:9)라는 말씀에 비춰볼 때, 이 집회는 과연 성경적일까요?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비록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그 순수한 마음을 우리가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행위 역시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을 향한 충정과 사랑에서 칼을 빼었고 귀를 베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예수님께 유익을 끼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라도 경솔하게 행동한다면 유익이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10] 로마서 10:2은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목표도 방법도 이유와 동기도 하나님의 뜻, 주님의 뜻에 따라 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때로는 우리의 잘못된 열심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11]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예수님과 교회역사의 교훈

   오늘날 한국교회의 과격한 모습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예수님은 한국교회의 잘못된 열심을 책망하십니다(롬 10:2).

   지금은 한국 사회나 정부가 교회를 대적하거나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습성대로 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악한 세상이 악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대법원은 성경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을 기준으로 판결하는 세속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 신자는 광장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성도 개개인이 각자 부름 받은 삶의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변화를 이끌어야 합니다. 신자는 피켓이나 확성기를 들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과격한 목소리, 힘의 논리가 아니라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해야 합니다. 예배, 찬송, 기도가 시위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도리어 믿지 않는 세상으로 하여금 무례한 기독교로 비춰지게 만들 뿐입니다.[12]

   만약 정말로 세상이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며 무력으로 무너뜨리려는 세력이라 하더라도 똑같이 무력으로 맞서는 일은 어리석습니다.[13]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들에 대해 직접 보복하지 않습니다. 혁명적 폭력의 방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모든 걸 맡깁니다(롬 12:19). 인내하며 기다리고, 하나님께서 신원(伸冤)하시길 기다립니다.[14] 역사상 존재해 온 건전한 교회는 결코 힘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고후 11:30).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은 횃불과 무기를 들고 왔지만, 예수님은 순순히 자기를 내어놓으셨습니다. 칼을 꺼내든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52에서는 좀 더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전투하는 교회

   물론 교회의 사명 중 하나는 전투하는 교회(Ecclesia Militans)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교회 안팎의 흑암의 영적 권세에 대항하여 부단히 전투를 수행해야 합니다.[15]

   그러나 전투하는 교회는 진리의 허리띠, 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투하는 것이지(엡 6:13-17), 힘이나 숫자, 시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아니라 복음으로

   앞으로 세상은 계속해서 전통사회의 가치 규범이 무너지고, 다원주의, 상대주의, 해체주의 등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성 윤리만 아니라 생명윤리, 권위 등의 문제에 있어서 이미 큰 변화를 겪었지만 앞으로도 더 큰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피켓을 들고 항의할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과 구별된 윤리를 보여줌으로서 기독교의 가치를 잘 드러내어, 세상에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더더욱 타락할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음을 더더욱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거대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 4:12). 많은 사람의 마음을 찔러 회개케 합니다(행 2:37-41).

   복음은 목소리를 크게 높여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윽박지르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온유하게 해야 합니다. 뱀 같이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마 10:16).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롬 12:17, 21; 살전 5:15).

 

개개인에게 적용

   교회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을 향한 세상의 부당하고 이유 없는 고난과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답게 산다는 이유로, 여러분이 복음적 가치관을 따라 살아간다는 이유로,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로, 심지어 여러분이 그냥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말입니다. 무신론이 지배하는 시대, 세속주의의 물결이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딤후 1:8). 복음으로 고난을 이기십시오. ‘누룩’처럼 세상에 스며들어 차분하고 온화하게 복음을 말하십시오. 사람의 가장 강한 것보다 하나님의 가장 약한 것이 더욱 강합니다.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온 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 18:6) 무력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무너집니다. 무기를 들고서도 결국 두려움을 느끼는 것. 이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결론

 

   세상을 대하는 예수님의 방식을 통해, 세상을 대하는 교회가 해야 할 태도를 배웁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세상을 마주하셨습니다(요 18:3).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을 대하십니다. 세상의 재판을 받으십니다(요 18:28-38). 세상의 핍박을 받으십니다(요 19:1-24).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취하시는 태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태도가 곧 교회가 해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마주해야 하고, 세상 속에 침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반대, 미움, 박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칼로 우리를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복음의 맛과 능력을 잃은 교회와 신자는 똑같이 힘으로 대결하려고 합니다. 반면 복음을 아는 교회와 신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 James Davison Hunter(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To Change the World: the Irony, Tragedy and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배덕만 옮김,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정치신학의 한계와 가능성』(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16.

[2] 황원하에 의하면 정확하게는 ‘귓볼’(earlobe)이다. 황원하, 『요한복음』(서울: SFC, 2017), 367.

[3] 황원하, 『요한복음』, 368.

[4] 옥스퍼드 성경대전, 402.

[5] 예수님의 제자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칼로 베어버린 이야기는 복음서 네 권에 모두 나오나, 구체적인 묘사는 복음서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는 말은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종의 귀를 자른 사람이 베드로라는 사실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며, 잘린 귀를 예수님이 다시 붙여 주었다는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6] 참고로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라는 말도 있다.

[7]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소성욱 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 선고기일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소 씨는 “실질적 혼인 관계인데도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부인하는 것은 피부양자 제도의 목적에 어긋난다”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공단이 동성 동반자인 원고를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고 이 사건 처분을 한 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원고에게 불이익을 줘 그를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과 차별하는 것으로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반하여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또 “두 사람의 관계가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제도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차별행위이고, 그 침해의 정도도 중하다”고 했다.

[8] 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1942

[9]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6684

[10] 옥스퍼드 성경대전, 412.

[11] 이성호, 『요한복음, 복음으로 읽기』(서울: 좋은씨앗, 2020), 258.

[12] 리처드 마우, 『무례한 기독교: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홍병룡 옮김(서울: IVP, 2016).

[13] 김성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설교집 2021)』(용인: 마음샘, 2024), 32.

[14] Craig L. Blomberg and Mariam J. Kamell, James, ZECNT (Nashville: Zondervan, 2008), 정옥배 옮김, 『강해로 푸는 야고보서』(서울: 디모데, 2014), 235, 243.

[15]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권수경, 이상원 역, 『조직신학 (하)』(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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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렬 2024.10.08 14:49
    1. 세상을 대하는 예수님의 방식은 '사랑'입니다. 문제는 사랑의 표현에는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선 창조질서를 세우시면서도 사랑을 표현하셨고, 희생과 구원으로도 사랑을 표현하셨으며, 심지어는 책망과 심판을 통해서도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2. 주님의 사랑의 방식이 '오직 한 가지'인 것처럼 오해한 것이 이 글의 맹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담은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주님께서는 지상명령을 통해 성경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르지 않은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외쳐야 하며, 바른 것은 바르다고 외쳐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3. 인본주의적 인권으로 가장한 차별금지법은, 어느 누가 동성애를 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수준의 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동성애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이를 반대하면 무한히 처벌하겠다는 '자유 박탈 독재법'입니다. 이를 통해 서구유럽과 미국, 캐나다 등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창조질서 파괴, 남녀 양성 붕괴, 가정 해체, 신앙과 개인의 자유 박탈' 사태를 우리는 두 눈과 귀로 보고 듣고 있지 않습니까?

    4. 이것은 비단 교회만의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는 운동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정치 운동' 혹은 '무분별한 종교 통합' 등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운동이며, 나아가 정의와 자유와 질서가 있는 세상을 원하는 시민이라면 동참해야 할 운동입니다.

    5. 어떤 이는 10.27 연합예배가 주일에 하기 때문에, 7계명을 지키기 위해 4계명을 버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정부가 교회를 폐쇄하고, 온라인 예배를 강요할 때에 갑작스런 사태에 무방비로 있다가,
    일제의 강요 앞에서도, 625 전쟁 시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대면예배, 회중예배를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차별금지법으로 또다시 교회를 억압하고 가정을 파괴하려는 시도 앞에서 벙어리 개와 같이 잠잠히 있는 것이야 말로, 3계명과 4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6. 주님께서는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손현보 목사님만큼 주일성수를 위해 목숨 걸었고 걸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차별금지법]으로 가장한 [동성애 찬성법/창조질서 파괴법/자유 박탈법]을 막지 못하면, 우리의 주일성수도, 다음세대의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 주시길 호소합니다.

    7. 하나님께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에스겔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2:30-31)"
    서구유럽과 미국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께선 경고하셨는데도 이를 막아서지 않는다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8. '아군오사'는 안 됩니다!
    다함께 10.27 한국교회 2백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에 동참합시다!
    그래서 이 시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우리 교회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하며 호소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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