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27)
음모론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설교 본문: 요한복음 19:31-20:29
설교자: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서론
음모론
요즘 자주 듣는 말 중에 음모론(陰謀論, conspiracy theory)이 있습니다.[1] 음모론이 뭐냐? 여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진실이 아니고, 사실은 뒤에서 어떤 집단이나 권력자들이 조종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음모라는 말처럼 “사실은 그게 아닌데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서 마치 그렇게 된 것처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음모론의 상당수는 터무니없습니다. 전혀 믿을만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갸우뚱거릴 만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쉽게 음모론에 빠집니다. 너무나 확실한 거짓을 진실로 믿습니다. 한 번만 생각해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더 생각해 보지 않고 빠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는 정부와 환경 단체의 거짓말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이 일으킨 소행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 세계를 지배하는 비밀조직(Deep State)이 있다고 말합니다.[2] 어떤 사람은 어떤 집단에 의해 부정선거가 이뤄졌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그러한데 우리가 모두 속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눈을 가리면서 그렇게 속인다는 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두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수백, 수천, 수만의 사람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온 세계를 한 번에 어지럽힐 만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나 집단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 속여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속여서 얻을 유익도 없습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모론은 불신으로부터
그럼에도 음모론에 빠지는 건 불신 때문입니다. 음모론에 빠지는 이유는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의심하기 때문입니다.[3] 어떤 사실을 믿지 않고 그것을 거짓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음모론이 시작합니다. 그러니 음모론은 불신, 즉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사실을 믿지 못하는 대신 다른 것을 믿습니다. 사실과 진실을 믿지 못하면서 정작 거짓을 강하게 믿습니다. 믿어야 할 것보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습니다. 음모론은 불신에서 시작해서 강한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그 강한 믿음 때문에 더더욱 불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음모론은 참된 것을 믿지 않고 거짓된 것을 믿는 것이기에 특히 그리스도인은 조심해야 합니다.
음모론에 빠지는 그리스도인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조차 음모론에 빠집니다. 아니 최근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이 목사라는 사람들이 장로라는 사람들이 음모론을 아무렇지 않게 사실로 믿습니다.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을 따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음모론을 퍼뜨리는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제9계명을 아무렇지 않게 어깁니다.
동성애자가 교회를 무너뜨린다고 합니다. 동성애를 합법화하면 교회가 망한다고 합니다. 어떤 정당은 종북(從北)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정당이 집권하면 우리나라가 공산주의가 되어서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부가 코로나 19 방역을 핑계로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중국에 의해 부정선거가 이뤄졌다고 확신합니다.[4] 얼마 전 일어난 산불이 간첩의 소행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주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안타깝습니다.
[5] 이러한 현상은 약 3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1994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3집 앨범을 발표했을 때 거기에 실린 수록곡 ‘교실 이데아’의 카세트테이프를 거꾸로 틀면, “피가 모자라 배고파 피가 고파. 아 피를 안 주면 재미 없을 걸”이라고 한다면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서태지가 사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음모론의 피해자였던 기독교
그런데요. 그리스도인들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한때 음모론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요.
기독교에 대한 음모론은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자라는 음모론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음모론이 있습니다.[6]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신격화시켰다는 음모론이 있습니다. 1992년에 출판된 『다빈치코드』(The Da Vinci Code)라는 소설은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음모론을 기초로 합니다. 특별히 AD 64년에 있었던 로마 대화재(Great Fire of Rome) 당시, 로마 제국 황제 네로는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음모론을 퍼트려서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음모론
기독교에 대한 많은 음모론 중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음모론입니다.[7]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불신했습니다. 이러한 불신에서 음모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따르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②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로 죽은 게 아니라 단지 기절했을 뿐인데 죽은 것으로 오해했다.”[8] 기절설(the swoon theory)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보니 너무 힘들어서 한동안 의식이 없어지고 기절했는데, 그걸 사람들이 죽었다고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기절하신 예수님이 무덤에 갇히셨을 때 무덤이 돌무덤이니까 그 안 그늘에서 누워 계시던 중에 정신이 깨어나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입니다.
③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는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허위설(the Falsehood theory)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것을 보고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마침 그들은 예수님이 생전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는 로마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는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고 말합니다.
④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헛것을 봤다. 환상을 봤다.” 환상설(the vision theory)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은 절대로 죽을 분이 아니라고 강하게 믿다 보니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는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믿지 않고, 거짓을 믿으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음모론을 퍼뜨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이 진짜 사실일까요?
본론
예수님이 스스로 하신 증언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증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1을 찾아봅시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21절 위에 보면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이르시다’라고. 예수님은 이때 이미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처음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7:22-23을 찾아봅시다.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
22절 위에 보면 역시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다시 이르시다’라고. 예수님은 두 번째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17-19을 찾아봅시다.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
17절 위에 보면 역시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시다’라고. 예수님은 세 번째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죽으실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니 말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백입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 한 말은 증언이기보다 자백입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한 말입니다. 아직 일어나기 전의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조차 믿지 않았으니, 좀 더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증거(1) - 군인들의 확인
그래서 다음으로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19장을 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명백한 증거가 여러 개 발견됩니다.
33절을 보시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서 시체를 치워달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고 하는데,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분명 죽으셨습니다.
“혹시 군인들이 잘못 본 것 아닙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설령 그렇더라도, 이어지는 34절에서 군인이 한 행동을 통해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미 죽었는데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고, 피와 물이 나오니, 예수님은 분명 죽으셨습니다.[9]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방 사람 로마 군인들, 즉 복수(複數)의 사람들에 의해서 분명히 확인되었고,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름으로 분명해졌습니다.[10]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바로 앞, 30절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증거(2) - 요한의 증언
다음으로 35절을 봅시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는 일,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행동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본 자가 있었습니다. 이를 본 자는 본 그대로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그 증언이 참이라” 이 증언하는 사람은 이 책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 요한입니다. 그는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확신케 하려고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이 책에 남겼습니다.
특별히 요한은 예수님 당시 유행했던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의 잘못을 다른 서신서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요일 4:2-3). 그런 요한이 여기에서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의 주장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11]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증거(3) - 빌라도의 확인
예수님의 죽으심은 로마 총독에 의해서도 다시 확인됩니다. 38절을 보시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원합니다. 빌라도는 이 요청을 허락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면 빌라도는 시체를 달라는 요셉에게 “아직 죽지 않았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죽지도 않은 사람을 왜 시체라고 하느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분명 죽으셨기에 빌라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셉에게 내어줬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증거(4) -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장사되심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매우 확실한 증거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장사(葬事) 되심입니다. 38절 이하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 안에 예수님을 둡니다. 이때 39절에서 니고데모도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바르고,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쌉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장사 되셨습니다(40절).
예수님이 장사되셨다는 건, 예수님이 분명히 죽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죽지 않은 사람을 장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12] 산 사람을 장사하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장사되심을 통해, 예수님이 죽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착각한 것도 아니요(가현설), 기절한 것을 죽었다고 착각한 것도 아니라(기절설), 분명히 죽으셨음이 확인되었습니다.[1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가르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문답은 예수님의 장사되심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증거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1문: 그리스도는 왜 “장사”되셨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가 진정으로 죽으셨음을 확증합니다.3)
3) 사 53:9; 마 27:59-60; 눅 23:53; 요 19:40-42; 행 13:29; 고전 15:3-4 |
이렇게 예수님은 의심의 여지 없이 죽은 자들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로마 군인들, 요한, 로마 총독 빌라도, 요셉과 니고데모, 그분의 장사되심이 증거하고 있으니, 전능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분명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죽으셨고 장사되신 예수님이 삼일 째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부(復), 살 활(活), 부활(復活)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것 역시 증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1) - 빈 무덤
31절과 42절을 보면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입니다. 즉 안식일 전날입니다. 금요일입니다. 요한은 토요일 하루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안식 후 첫날은 일요일입니다. 난외주에 있는 대로 “그 주간의” 첫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갑니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습니다. 그 즉시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라고 말합니다(2). 막달라 마리아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뛰어갑니다(3).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세마포가 놓여 있습니다(6).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습니다(7). 아무리 살펴봐도 시체는 없습니다.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시체를 무덤 안에 둔 지 24시간 겨우 지났을 뿐인데 말입니다.
빈 무덤,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시체가 없는 무덤,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세마포와 수건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사람이 가져간 것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시체를 가져갔다면 세마포를 두른 채로 가져갔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스스로 일어나셔서 수건과 세마포를 정리하셨습니다.[14]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2) -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오히려 기절설(the swoon theory)과 허위설(the Falsehood theory)의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음모론이 퍼지지 않도록,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11절 위의 소제목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덤 밖에서 마리아가 울다가 14절에서 뒤를 돌아보니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서 있을 수 없습니다(14). 시체가 말할 수 없습니다(15). 그러면 분명,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15).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18절에서 제자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3) -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한 사람의 말만으로는 믿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 명의 증인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두세 증인이 필요합니다(참조. 신 19:15; 고후 13:1; 딤전 5:19). 19절 위에 보니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저녁때 제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한 명의 제자가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복수(複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나타나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19), 그래도 믿지 못할까 봐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20).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4) - 도마에게 만지게 하시다
이때 제자들 중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도마가 뒤늦게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25) 제자들이 증인입니다.
그런데 도마가 말합니다. 25절.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자기를 속인다고 생각합니다.
8일이 지났습니다. 제자들과 도마가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26).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27절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도마가 25절에서 한 말을 아시고 친히 손과 옆구리를 만지게 하십니다. 그 손의 못 자국,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도마와 함께 있었던 제자 중 한 사람이요,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창에 찔리신 것을 직접 보았던 증인 요한(요 19:35).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고, 도마의 행동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쓴 요한일서 1:1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5) - 수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심
빈 무덤, 막달라 마리아, 제자들, 도마의 확인. 이것만으로 부활의 확실성은 충분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더 많은 사람에게 증거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15:3-8을 찾아봅시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3-4절을 보시면 “...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 이후에는 누구에게 그것을 보여주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5절의 ‘게바’는 베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5절까지는 방금 오늘 본문으로 살펴봤던 내용에 다 나왔습니다. 6절에 보면 그 이후에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7절에 보면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는 누구입니까? 고린도전서의 저자 바울입니다.
빈 무덤, 막달라 마리아,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바울까지 이렇게 많은 증거와 증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6) - 부활 후 40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은 잠시 잠깐 보이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3을 찾아봅시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뒤 숨어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무려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수님의 죽음,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죽으셨습니다. 군인들이 확인했고, 요한이 보았으며, 빌라도가 시체를 내주었고,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지냈습니다.
죽으셨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復活)하셨습니다. 이 또한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고, 막달라 마리아가 보았고, 열두 제자들이 보았고, 오백여 형제가 보았고, 야고보와 바울이 보았습니다.
증거가 있고, 증인이 있고, 한두 사람이 아니라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히 12:1).
우리가 증인이라고 하는 사도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 자들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비밀로 하지 않았습니다. 떳떳이 증언했습니다.
게바라 하는 베드로가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하면서 말했습니다. “(14)너희가 ... (15)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베드로는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면서 말했습니다. “(39)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행 10:39-40)
맨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던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하면서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3:27-31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
죽음과 부활에 대한 분명한 증거 - 성령님께서 성경에 기록케 하신 명확한 증거와 증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 증인들의 솔직한 진술이 바로 이 성경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벧후 1:21).
이 성경은 그 어떤 인간의 기록과 비교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헤로도토스의 『역사』, 일연의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역사의 기록입니다(벧전 1:19).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명확한 사실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2절).
이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보존하심을 통해, 교회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 손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 증거 속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통한 증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너무나 확실하기에, 우리의 마음heart 속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증거 하시기에(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5절), 2세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사용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장사되셨고, 삼일 째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음모론 비판
설교의 서론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예수님이 진짜로 죽은 게 아니라 단지 기절했을 뿐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는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제자들이 헛것을 봤다. 환상을 봤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음모론에 불과합니다. 한 사람이 봤다면 모르겠습니다. 두어 사람만 봤다면 모르겠습니다. 한두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한 시대는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00년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수많은 증거와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히 12:1). 2000년 동안 변개되지 않고 이어져 온 이 성경이 지금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안식 후 첫날인 이 일요일에, 예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살아 있는 증인입니다. 매주일 사도신경을 사용해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장사되셨고, 삼일 째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입니다(행 2:32; 눅 24:48).
음모론에 빠지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증거를 얼마나 더 보여줘야 믿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얼마나 더 보여줘야 믿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음모론에 빠졌던 나
고백하자면 저는 음모론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저는 불신가정에서 혼자서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건 하나가 있었는데요. 그 일로 인해 저는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데, 저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 제가 다니는 교회 교인들이 모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매주 교회도 오고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라고. 마치 영화 ‘트루먼 쇼’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야말로 음모론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너무나 명확한 진리를 왜 믿지 않는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것은 음모론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고, 사실도 아닌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라고 말하면 기독교도 음모론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입니다.
세종대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와 기록보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기록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고, 장사되셨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어떻게 부인한단 말입니까?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놀라우신 예수님을 왜 믿지 않는단 말입니까?
성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음모론
오늘 우리 앞에 예수님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성찬입니다. 이 증거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성경의 증거만큼이나 명확하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성찬에 대해서도 음모론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인들이 성찬식 때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고 하니, 그것을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독교인들이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거짓 소문이 돌았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음모론입니다.
성찬은 음모의 근거가 아니라 진리의 증거입니다. 이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합니다. 이 성찬은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증거합니다. 주님이 죽으셨기에 찢어진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빵과 잔을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기에 썩지 않은 싱싱한 빵과 부패하지 않은 잔을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시기에 저와 여러분을 이 식탁에 친히 초대하십니다.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이 식탁에서 우리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십니다.
우리는 빵이 떼어지는 것을 보면서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셨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잔이 나에게 분배되는 것을 통해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도 쏟으셨음을 생각합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5문답). 빵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6문답). 빵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뵙습니다.
음모론자로 오해받을 위험
설교의 시작을 음모론으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음모론의 주체가 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안타까움을 내비쳤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음모론의 피해자였던 기독교의 역사 때문입니다. 음모론의 피해자였던 기독교가 오히려 음모론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음모론을 퍼뜨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음모론자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그리스도인은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 말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만,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그거 음모론 아니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한편으로 음모론(陰謀論, conspiracy theory)은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사건이나 현상이 발생할 때,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의도적으로 비밀리에 공모하여 이를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설명입니다. 그러니, 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음모론처럼 비추어지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말하니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더더욱 그리스도인은 음모론에 빠지거나 음모론을 퍼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요즘 기독교 목사들이 퍼트리는 음모론처럼 하나님과 같이 위대한 존재가 아니면 결코 벌일 수 없는 일을, 누군가가 했다고 말해버리면, 결국 하나님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15] 우리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전능한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음모론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 자꾸 음모론을 펼치면, 우리가 전하는 부활과 복음과 진리마저도 음모론으로 오해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곧 음모론자’라는 등식이 생겨버리면, 그리스도인이 하는 말, 그리스도인이 믿는 믿음도 모두 다 음모론으로 치부됩니다.
기독교는 결코 허황된 것을 믿거나 터무니없는 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토대 위에 세워진 진리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맹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너무나 확실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음모론은 거짓과 불신에서 출발합니다. 반면 기독교는 진리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음모론과 양립(兩立)할 수 없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진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진실이요, 진리입니다.
거짓은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요 8:44). 우리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신 32:4; 딛 1:2).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 4:25).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장사되셨고, 삼일 째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지 말고, 믿어야 할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가 없다 하는 말을 믿지 마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이 어디 있느냐 하는 말을 믿지 마십시오(고전 15:12). 죽으셨으나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지 말고 믿으십시오.
설교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
1) 음모론(陰謀論, conspiracy theory)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음모론으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3)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증거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4)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5)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음모론을 우리는 어떻게 반박할 수 있습니까?
6) 기독교인이 음모론을 퍼트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음모론은 요즘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있었다. 다만 요즘에는 음모론이 더 빠르게 전파된다. Jan-Willem van Prooijen, The Psychology of Conspiracy Theory (Routledge, 2018), 신영경 옮김, 『음모론』(서울: 북스힐, 2020), 42-48, 175.
[2] 톄거, 『대중은 왜 음모론에 끌리는가』(서울: 미래의 창, 2015), 149.
[3] 전상진, 『음모론의 시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4), 25.
[4]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의 목회자들 중 일부가 그런 주장을 공식적으로 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https://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8062
[5] 제대로 틀었을 때의 가사는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이다.
[6] 톄거, 『대중은 왜 음모론에 끌리는가』, 282.
[7] 부활에 관한 음모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권수경, 이상원 역, 『조직신학 (하)』(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582-583; 제라드 크리스핀, 『부활: 개봉되지 않은 선물』, 김귀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31-62.
[8] Berkhof, 『조직신학 (하)』, 582.
[9] Zacharias Ursinus, The Commentary of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 by G. W. Williard, (Columbus: Scott & Bascom, 1852; Reprint, Phillipsburg: P&R, 1985), 원광연 옮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381.
[10] Berkhof, 『조직신학 (하)』, 582.
[11] 『옥스퍼드 원어 성경 대전』, 551.
[12] 손재익, 『사도신경, 12문장에 담긴 기독교 신앙』(서울: 디다스코, 2017), 171; Ursinus,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380.
[13] 김성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설교집 2021)』(용인: 마음샘, 2024), 199.
[14] 황원하, 『요한복음』(서울: SFC, 2017), 404.
[15] 많은 음모론은 음모의 주역을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가정한다. 음모론자들은 음모를 꾸미는 개인이나 단체가 실수나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