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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가?

 

 

David H Krannendonk 2.PNG

 

 

저자: 데이비드 크라넨동크 목사(Rev. David H. Kranendonk, ‘메신저’ 잡지 공동 편집자, 옥스포드 카운티 프리 리폼드 처치 교회 목사)

번역: 김재한

 

 

 

   이론과 실천, 신앙과 삶, 교리와 경건은 최고의 친구들이다. 성경적인 교리는 ‘경건에 관한 교훈’이다(딤전 6:3). 바울은 “나의 교훈”과 “행실”을 같이 묶는다(딤후 3:10). 야고보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지] … 말라”(약 1:22)고 권면한다. 교리는 경건의 기초이며 원천이고, 경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리를 더 알고 가치 있게 여기게 만든다.

   너무나 자주 이론과 실천은 서로에게 낯선 대적이 된다. 우리 중 누가 행함과 말함 사이에 일관성이 없다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누가 우리가 믿는 바를 고백하는 것과 그 믿는 대로 살지 못하는 일관성 없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가장 이상한 것은 우리가 모순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어느 정도로 나는 이론적 칼빈주의자인가 그리고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가?라고.

   내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한 방문 교수의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여기에서는) 개혁주의자일지 모르지만, 교회에 가면 매우 실천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통해 보여주는 실천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론적 아르미니우스주의

 

   개혁파 고백문서에 서명한 교회의 모든 회원들은 이론적으로는 개혁주의자이다. 교회의 고백서는 그 교회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직분자들은 교회 회원들이 교회의 고백서에서 참되다고 고백한 것에 호소할 수 있다. 우리의 고백서들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오류들에 대한 분명한 거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도르트 신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리적 아르미니우스주의란 무엇인가?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 신학(아르미니우스주의)은 두 개의 철학적 원리로부터 나온다. 먼저, 성경은 신앙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인간의 행동으로 여기기에 이는 하나님에 의해 발생할 수 없고,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으로 시행된다; 둘째, 성경은 신앙을 복음을 듣는 모든 이의 편에서 볼 때 의무적인 것으로 여기기에 믿을 수 있는 능력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입장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인간은 결코 복음이 그 앞에 놓여졌을 때 구원받을 만큼 그것을 믿지 못할 정도로 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고, (2)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조종되어서 복음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3) 구원받을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택하심은 그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믿게 될 것을 예견하신 하나님의 예견에 의해 시행된다. (4) 그리스도의 죽음은 누구의 구원도 보장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 죽음이 누구에게도 믿음이라는 선물을 보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루어진 것은 그보다는 믿는 자 누구에게든지 가능한 구원의 가능성을 창조한 것이다. (5) 신앙을 지킴으로써 스스로를 은혜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달려 있다. 이것에 실패하는 이는 떨어져나가게 되고 잃어버린바 된다. 따라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사람의 구원이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구원받을 믿음을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이 아닌 그 사람 자신의 일로 보여지게 만든다.

 

 

   어쩌면 여러분이 이 진술들을 읽으면서 ‘그리 나쁜 얘기는 아닌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교리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여러분을 괴롭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여러분이 얼마나 깊이 실천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 증상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 다른 증상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알아보자.

   먼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이들을 구원하시고 뜻하시는 대로 어떤 이들을 완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듣기 싫어한다. 죄인들은 오직 성령의 주권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사역에 의해서만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짜증이 난다. 여러분이 스스로 참되다고 고백하는 이러한 가르침들이 듣기 싫어질 때 이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생기 있게 만든 영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이 여러분을 구원받게 한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어볼 때, 여러분은 단순하게 ‘글쎄요, 제가 믿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한다. 믿는 자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하는 방식은 믿는다는 그 행위가 여러분의 구원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고, 혹은 구세주의 은혜보다는 그 행위가 더 여러분의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말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식과 거의 다르지 않다.

   셋째, 여러분은 영적인 자부심이 넘친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을 내려다본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연민도 없는데 이는 그들은 단지 여러분이 그랬듯이 믿으면 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씨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인내도 없는데 이는 그들은 그저 여러분처럼 되면 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죄에 빠진 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는 여러분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만이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자기 확신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넷째, 여러분은 믿기를 미루는데, 이는 여러분이 언제든지 원할 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폭포로 향해 흘러가는 강물에 휩쓸려 가고 있는 배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타고 있는 것과 같은데, 이는 여러분이 상류로 가고 싶어지면 그저 시동을 켜서 모터를 가동시키면 안전한 곳을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치명적인 오류임이 입증되었다.

   다섯째, 여러분은 다른 이들에 대해 포기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이 방황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말해주었다면… 이러저러한 것을 해 주었다면… 그들도 구원 받았을텐데.” 혹은 “만약 내가 그들을 설득할 만큼 충분히 선하게 살았다면…” 혹은 여러분은 그저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생각이 그러한 낙심과 절망 뒤에 있을 수 있다.

   여섯째, 여러분은 여러분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경주에서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여러분의 삶은 부침을 거듭한다. 어떨 때는 여러분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지만, 또 다른 때는 잘못될 길로 가고 있을까 두렵다. 여러분은 어떻게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을지, 해낼 수 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개혁주의가 아닌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사고 방식이 그러한 불확실한 상태를 만들어낸다.

   일곱째, 여러분은 복음전도를 위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이렇게 소개한다: “하나님은 여러분은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 거하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예수님께 마음을 여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만약 여러분이 구원을 매력적인 것으로,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을 신나는 일로, 예배 드리는 것이 즐거운 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이 교회로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은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처럼 들린다.

   여덟째, 여러분은 언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 편에서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제 믿음과 회개로 이에 응답하는 것은 여러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언약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과도한 언약주의적, 혹은 연합주의적 비전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생각 뒤에는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놓여 있다.

   아홉째,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죄에 대한 애통함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리고 열렬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아르미니우스적 가르침을 사용하지 않을지 모르나, 이런 것이 아르미니우스적 특징이다.

이러한 증상들을 점검해 볼 때, 우리 중 누가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실천적 질병의 원인

 

   왜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개혁주의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가? 심지어 하이퍼-칼빈주의자인 조셉 허시(Joseph Hussey)도 이렇게 고백해야 했다: “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되는 것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내게 자연스럽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은혜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 전에는 모든 이들이 본성상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되려는 자유 의지를, 노예 의지가 아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태어났고, 은혜의 힘없이는 우리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개혁주의의 진리보다는 우리의 본성적 교만, 자기 의존성, 그리고 자기 의지와 더 잘 어울린다. 어느 누가 본성적으로 자신들은 그저 병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겠는가? 누가 본성적으로 궁극적인 주권을 가지신 그리고 하나님께 엎드리려고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려고 하겠는가? 누가 본성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이 세우신 대리자를 통해 구원받기 원하겠는가? 누가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자신들을 이기고 지키기를 원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런 진리들은 우리의 교만한 육체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우리의 육욕적인 생각과 맞지 않는다. 그것이 왜 그렇게 많은 개혁주의 교회들이 여전히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처럼 살고 있는 지에 대한 이유이다. 자유로운 은혜의 전장에서 무릎 꿇고 이러한 (개혁주의) 진리들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왜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육체에 속한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감염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심지어 그들이 은혜의 교리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도 말이다.

   만약 이러한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타락한 육체의 타락한 열매라면, 우리는 이것이 두려운 것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다.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많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1)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킨다. 그것은 구원의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빼앗는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손상을 가하고,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의 완전함을 감소시키며, 성령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한다.

   (2) 사람을 우쭐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연인을 성경이 말하는 정도까지는 나쁘지 않은 존재로 만들고, 신자들에게 자랑할 이유를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리스도 한 분 만을 믿는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3) 체험적 경건을 매우 쉽게 제거해버린다. 초점이 구원받는 인간의 행위와 기독교인의 삶에 있을 때, 성령의 사역을 무시된다. 구원과 기독교적 삶의 본질은 쉽게 우리가 성령의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무언가로 격하된다. 이와 함께 성령님이 일하시는 체험적인 경건에 대해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4) 쉽게 보다 타락한 이론적 아르미니우스주의로 퇴보한다. 은혜 교리가 압도하던 시절이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영향 하에 경험적인 측면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이론적 칼빈주의는 메말라서 부스러졌고, 그 자리는 교리적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쉽게 대체되었다. 교리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지배할 때, 그것은 쉽게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을 점차 증가시켰고, 이와 동시에 구원에 대한 견해의 약화를 가져왔다. 야곱 아르미니우스가 오늘날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면 아마 충격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날 많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보다 훨씬 정통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고백하는 케이스 드루리 (Keith Drury)는 이렇게 경고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주권자 하나님과 주권자 인간이라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인본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데, 이는 항상 인본주의가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실천적)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뿌리 박혀 있고 또 그것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두려워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의 자연적 육신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우리를 해롭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본성적 경향은 오직 우리가 본질적으로 타락했고, 우리 육체는 오염되었으며,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필요하다는 진리를 확증해줄 뿐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에게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라는 치료제를 베푸시는 하늘에 계신 의사에게 가져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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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찰 없이는 노회는 없다: 노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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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교회 70년과 ‘재판권을 부여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