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학원 이사회가 선임한 신학대학원 원장이 총회운영위원회를 무사히 통과하여 인준을 받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칫 신학대학원 졸업식장 및 입학식장이 축하를 주고받는 즐거운 자리가 아닌 어수선하고 불쾌한 자리가 될 수도 있었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대학원 원장 임명과 인준 과정이 유쾌하지도 명쾌하지도 매끄럽지도 않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지켜본 교단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아쉽고 안타까운 점들을 살펴보는 것은 불편하지만 필요하다.
고려학원 이사회와 신학대학원 교수회 사이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일을 하다보면 의견이 상충될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는가?
진리가 왜곡되거나 짓밟힐 위기 상황이라면 결코 물러설 수도 물러서서도 안 되겠지만 진리 문제가 아니라면 서로 적당한 선에서 양보하고 합의하는 것이 신앙의 도리일 것이다. 더욱이 두 기구는 서로 돕고 협력해야할 기관이 아닌가? 그런데 발표된 두 기관의 글에서 상대에 대한 양보나 배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쉽고 안타깝다.
고려학원이사회에 바라는 점
고려학원 이사회는 법적으로 고신대학교 총장의 추천을 받아 원장을 임명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총장은 원장 임명이 인사문제요, 보직문제이므로 인사위원회를 거쳐야 추천할 수 있다. 그래서 원장을 임명하기 전에 인사위원회가 미리 대기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학대학원 교수회가 추천한 원장이 이사회에서 부결될 것을 사전에 확실히 알지 못하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랬을까? 왜 이사회는 교수회에 원장 추천을 하지 못하도록 종용하는 ‘무리수’까지 두었을까? 모든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이유 하나는 이사회가 교수회의 원장 추천을 “하나의 관행에 지나지 않을 뿐 법과 규칙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회는 신임 원장의 선임을 "정관에 명시된 규칙을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왜 이사회는 추천 관행을 일종의 ‘나쁜 관행’으로 치부한 것일까?
이사회의 신임 원장 임명이 정관대로, 법대로, 규칙대로 이루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법’이란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최선도 차선도 아닌 최후의 수단이다. 그렇다면 과연 ‘법대로’ 결정했기 때문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법대로’ 한 것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라면 그것이 정당한 결정이라고 주장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왜 이사회는 교수회의 의견을 무시하고는 ‘법대로’ 처리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왜 이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관행’을 ‘법’이라는 방패로 저지하려 했던 것일까?
이사회가 신임 원장의 선임 결정을 아무리 합법적인 일이었다고 항변해도 13인의 교수가 밝힌 입장에서 알 수 있듯이 “신대원 구성원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의견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든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이사회가 제시한 “학내에 형성된 주도 세력의 존재”와 유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과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다면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입장에서 볼 때, “임명권이 이사회에 있는데 ‘대학원’ 교[수]회가 무슨 권리로 대학원장을 추천하느냐는 식의 횡포가 느껴”졌을 것이다. 차제에 이사회는 이런 의혹들을 사지 않도록 신학대학원 원장 선임절차를 합리적으로 만들고, 교수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것이다.
신학대학원 교수회에 바라는 점
신학대학원 교수회는 이사회가 교수회의 원장 추천 관행을 왜 그렇게 쉽게 ‘나쁜 관행’으로 치부하고 ‘법대로’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 나쁜 관행이 아니지만 나쁜 관행이 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교수회 내부에서 추천하는 원장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잡음이 외부로 새어나간다면 결국 그것은 ‘추천 관행’을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빌미가 될 것이다. 또한 신대원 교수회가 원장을 ‘우리끼리만’ 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외부 인사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이것 역시 교수회의 추천을 ‘나쁜 관행’으로 판단하는 빌미가 될 것이다.
이사회는 이전의 선임 원장 연임 건을 다룰 때부터 이미 ‘추천 관행’에 대해 불신한 듯하다. 그렇다면 ‘추천 관행’이 허물어지게 된 시점은 어쩌면 이번 사건 이전에 일어난 이사회의 원장 연임 부결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때부터 이사회는 ‘법대로’ 원장을 세울 계획을 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이미 교수회는 이사회가 교수회를 불신할 빌미를 제공했는지도 모른다. 교수회가 하나되지 못했다는 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내용이 어떤 것이든 교수회가 하나되지 못한 모습이 오이부에 알려졌고, 이로 인해 교수회가 스스로 불신을 받을만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교수회의 주장이 하자 없는 명분과 정당성과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교수회의 하나됨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추천된 원장 후보를 부결시키고 다른 후보를 원장으로 임명한 이사회의 결정에 대해 13인의 교수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교수회가 건전한 상식과 판단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선생들이 집단행동을 함으로써 교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번의 집단행동이 과연 피치 못할 일이었을까? 이번에 신대원교수회는 신대원의 정서를 내세웠지만 정작 교단의 정서를 제대로 읽었을까?
신대원 교수회는 이번 사태를 통해 자신들을 교회 직분즈들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교단 교회들에 설교초청을 종종 받는다고 해서 교단 정서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이제부터라도 신대원교수회는 원장추천권을 가지고 교수회의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신대원교육과 운영내용을 가지고 인정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 더 첨언하자면 차제에 신대원교수회는 대학총장과 대학신학과 교수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것이다. 교육부 법상으로는 신대원이 대학총장 휘하에 있기에 어떻게 되었든 대학과 신대원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신대원장 선임뿐만 아니라 운영에 있어서 마찰과 잡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대학 신학과 교수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리는 것은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의 신학과 교수회와 신학대학원 교수회는 공히 교단의 신학자, 교회의 교사라는 인식하에 적극적으로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의 입장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하겠다.
어쩌면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은 우리 모두 의식하지 못한 채 빠져버린 ‘집단이기주의’, 혹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이상한 ‘명예욕’과 연관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씨름하는 훈련이 우리 스스로에게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