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요한 기자
21세기를 맞은 한국 개신교의 미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망과 분석, 대안이 나오고 있다. 현대 사회에 더욱 잘 적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교파별로 개신교회 전통에 충실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가 각 시대에 각 지역에 뿌리내린 모습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어느 지역의 개신교의 미래에 대해 전망할 때에는 지역에서 뿌리내린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기독연구원에서 이재근 박사(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학 강사)가 8주 동안 진행한 “한국 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는 한국에서 형성된 복음주의 개신교의 역사를 조망하고 현재 서 있는 상황을 점검하였다. 서울영동교회에서 11월 13일에 있었던 8주차, “쇠퇴와 다원화” 시간은 1990년대 이후 개신교 유형의 분화 양상을 다루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세미나에서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기원, 부흥, 부패, 분열 등을 다루었다.
마지막 강연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쇠퇴와 다원화: 1990년대 이후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
그동안 했던 내용을 정리해 보면, 1880-90년대는 한국 개신교의 기원, 1900-10년대는 교회의 부흥과 확장, 1910-20년대는 교단의 분화 및 교파별 특징, 1930-40년대는 군국주의 시대 속에서 신사참배 및 투쟁, 1950-60년대는 과거 역사의 결과로서의 분열 및 개별 교단 및 교파의 형성, 1960-80년대는 폭발적인 성장과 부패를 다루었다.
1990년대와 새천년을 맞은 이후의 21세기 한국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 개신교 전반을 대표하는 특징은 ‘쇠퇴와 다원화’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 외부 진영에서 보았을 때에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수주의 내부에서 나뉘어졌다는 점에서 이것을 ‘다원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쇠퇴
1995년을 기점으로 한국 개신교 성장세에는 정체 현상이 시작되며 2000년대가 되면 개신교의 양적 쇠퇴가 분명한 현실이 된다. 1995년 이후 10년 간 통계적으로 큰 폭의 하락세를 겪은 것을 확인했고 지금도 이 하락세는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많은 개신교인들은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 특별히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가장 큰 폭의 하락세를 드러내는 연령층은 20대와 그 이하의 유소년, 청소년층이다. 지난 10년 간 한국이 저출산국가가 되었다는 사회적 요인과 더불어 젊은 층이 한국 개신교 신앙 전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이미 이러한 징조는 1980년대 주일학교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하였고, 이러한 추세는 현재는 30-50세 연령층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2050년 경에는 교회 구성원의 60-70%가 은퇴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교회의 교인 수, 특히 주일학교 청소년 층 감소의 결과는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성장과 발전의 한 축이었던 선교단체(para-church)의 쇠퇴로 이어졌다. 기존 교회는 중장년, 노년층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층의 빠른 이탈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성원이 청년층인 대학 캠퍼스 선교단체에게 이와 같은 현상은 위기였다. 세속화, 다원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자란 20대 초반 대학생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는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사실상 지난 10년 동안에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캠퍼스 전도 활동 자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거나 접근방식을 바꾸었다. 1세대 선교단체 지도자들의 사망, 은퇴 이후 새로운 세대가 이어받으면서 기존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조직 내부의 여러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세대가 바뀌면서 이전 세대의 열정적인 모습보다는 좀 더 지성적이고 점잖은 형태로 바뀌기도 했다.
물론 복음주의 개신교의 쇠퇴 현상에 대해서는 보다 다각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역사에는 늘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쇠퇴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지 아니면 지속될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1990년대 이후 다원화의 세 가지 요인: 사회에 대한 관점, 교회에 대한 관점, 신학 전통
원래 한국 개신교 각 교단은 역사적으로 조금씩 다른 지향점을 가지면서 발전하였다. 한국 감리교의 경우 원래 18세기 영국에서 감리교가 태동될 당시의 열정을 유지하면서도 19세기 후반 미국 감리교가 추구했던 지식 추구와 사회적 지위 상승의 욕구를 결합한 형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국 장로교의 경우에는 선교국인 미국에서 발생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결과로 두 진영으로 분열된 역사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주로 가장 지성적인 형태의 기독교를 추구했던 미국 장로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발생한 이 논쟁의 결과로 두 계열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는 이 중에서 주로 보수적인 근본주의 유산을 지지하는 방식을 취했다. 선교 본국에서 나타난 사건이 20세기 초 선교지 한국이라는 환경을 만나며 새로운 유형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950년대 한국 개신교가 에큐메니컬 진보와 복음주의 보수로 재편된 후에도 한국 개신교인 대다수는 복음주의자로 자칭할 수 있을 만큼 초기에 전수한 보수적인 유형의 신앙을 공통적으로 유지했다. 또한 1990년대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한국 복음주의자가 반공, 반공과 연결된 친미라는 정치적 대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한국 복음주의자에게 보수적 종교 성향과 보수적 정치 성향은 한 몸과 같았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탄생 등의 정치, 사회적 변혁을 거치면서 복음주의권 내부의 다원화가 나타났다. 이 다원화를 크게 정치 및 사회관, 교회와 교회 외부 조직과의 관계, 신학 전통을 기준으로 살펴볼 수 있다.
1) 정치, 경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1987년 전후로 의식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로잔언약 등 1970년대 영미권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영향 하에 기독교 신앙과 보수 정치의 일치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상당수 복음주의자가 한국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은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1997년 대선 어간이었다. 더욱 결정적인 변화는 2002년 대선을 통해 드러났다. 당시 노무현은 젊은 층의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이는 보수 복음주의권에 속한 청장년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복음주의 교회 내 청년층과 노년층 사이에서 노골적인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경험한 노년 세대는 여전히 사회주의 사상과 기독교 신앙이 공존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개발독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오류를 여러 수단을 통해 인식한 젊은 복음주의자는 오히려 정의, 평화, 통일, 화해, 상생, 공존 등의 가치가 역사적 복음주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에는 신학적, 신앙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인식을 지닌 복음주의자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2) 기성 교회와 교회 외부 단체 간의 관계
1950년대에 처음 소개된 이후 캠퍼스 선교단체는 지역교회와의 관계 설정에 자주 애를 먹었다. 캠퍼스 선교단체의 대부분은 초교파적이고 교회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독립 단체들이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는 상대적으로 다른 교단에 비해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조했다. 따라서 자유롭게 활동하던 선교단체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2차 대각성 운동을 통해 등장한 자원단체가 미국 장로교의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 사이의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구학파는 교회가 선교와 전도, 사회활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원단체의 존재를 반대했다. 하지만 신학파는 교회 외부 단체가 있어 교회가 직접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교회 정치나 직분에 대한 교파별 인식차는 장로교를 가운데에 놓고 보자면 퀘이커, 메노나이트, 침례교회, 회중교회는 상대적으로 저교회주의에 가깝고(퀘이커 > 메노나이트 > 침례교회 > 회중교회),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는 상대적으로 고교회주의에 가깝다(가톨릭 > 루터교/성공회 > 감리교).
한국 내에서 기성 교회와 선교단체 사이의 갈등이 생긴 데에는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이후 선교단체 및 비교회 조직들이 더 세분화된 후 기존 교회의 정치 및 사회 성향에 비판적인 단체가 등장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이러한 단체들이 기성 교회의 의혹과 적대감을 키웠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선교단체 외에도 교회 비판적 외부 조직이 상당히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활동가와 기성교회, 특히 기득권 목회자 사이의 적대감은 상당하다.
3) 신학 전통의 차이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일반적인 보수 신학에서 더 엄격한 유형의 16-17세기 개혁파 지향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16세기 칼뱅과 17세기 유럽대륙 개혁교회 및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엄격한 신조주의(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신조)에 근거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웨슬리파 복음주의자(일부 감리교인, 성결교인, 오순절 교인, 일부 침례교인)와 자신을 구별하려 한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기보다는 개혁주의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칼뱅주의를 따르는 이들이 보기에 복음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출판물이 나오고 온라인을 통해 이들의 논의가 회자되면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앞선 논의를 종합하여 요약하면, 새로운 천 년을 맞은 2000년대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서구 국가가 경험한 것보다 더욱 빠르게 진행하는 세속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한 교회의 쇠퇴 현상에 더하여 다양한 외부 사상의 유입과 자생하는 집단의 성장으로 인한 전례 없는 다원화를 경험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많은 전환점 있었던 것처럼 한국 교회 개신교 130년 역사 가운데에도 많은 전환점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다만 대개의 전환점은 각 시대의 인간이 자신의 시대가 인류 및 교회의 종말이 될 것이라 예상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났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론: 역사가의 특징
역사가와 신학자는 차이가 있다. 신학자의 경우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이 입장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절대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 역사가(특별히 교회사가)의 경우에는 교회와 신학의 성립 배경을, 즉 이면에 있는 맥락(context)을 본다. 변수에 따른 다양성, 사람과 환경을 보게 된다. 역사가로서 가지는 유익이 있다면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어난 사건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다. 단지 하나의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는 옳고 그름에 대한 내용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일어난 사건의 변수와 상호작용을 본다.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고, 일어난 사건이 처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어떠한 사건을 접할 때에도 이와 관련된 맥락을 고려하고 이면에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설요한 기자 juicec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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