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요한 기자
“세계기독교 관점에서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역사를 조망한다.”
9월 18일(목), 서울 강남구 소재 서울영동교회에서는 현대기독연구원이 주최한 “20세기 한국복음주의 역사지형도 그리기”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있었다. 강사는 이재근 교수(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 Ph. D,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학). 이번 강좌는 지난 6월 17일부터 7월 22일까지 진행되었던 “20세기 세계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 세미나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교수는 첫 주 개관 강연을 통해 한국기독교사를 이해하는 방식,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역사 등을 조망하였다. 한국기독교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서 이 교수는 “흔히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를 ‘교회사’라고 통칭되어 온 관점에 대해 한국교회사, 한국기독교사, 한국종교사의 관점으로 분류해서 바라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아울러 한국 기독교사 연구방법론의 역사를 개괄하며 선교사관, 민족사관, 민중사관, 실증사관, 교회사관을 소개한 뒤 이를 종합하는 본인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9월 18일부터 시작한 “20세기 한국복음주의 역사지형도 그리기” 세미나는 10월 9일인 한글날을 제외하고 11월 13일까지 총 8주간 진행된다. 첫 주에는 한국기독교사 연구방식과 역사를 조망하였고 앞으로 한국 복음주의의 기원, 확장, 분화, 변절, 분열, 부패, 대안 등을 다룰 예정이다.
이하는 이재근 교수 첫 번째 강연의 대략을 기술한 것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바라보는 세 가지 방식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를 해석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다루는 주제의 범위를 중심으로 보면 한국‘교회’사, 한국‘기독교’사, 한국‘종교’사다. 한국과 같이 기독교 역사가 짧은 국가에서는 기독교 역사라고 하면 대개 교회사를 의미한다. 유럽과 같은 기독교세계(Christendom)을 겪지 않았기에 기독교가 거의 교회 안에 머물러 있고 교회 외부의 기독교 전통,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서적을 통해 다루는 내용을 보아도 서양권 기독교사 서적에는 교회와 더불어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회자되는 기독교사는 교회가 언제 세워지고 누가 전도자였고 교회는 언제 부흥해서 어느 지역으로 확장했는지 등의 내용을 위주로 다루고 있다.
세속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의 연대와 투쟁 등의 이런저런 관계를 겪은 유럽의 경우 교회뿐 아니라 교회와 연관된 사회의 모든 조직, 제도, 인물이 모두 학문의 대상이 된다. 미국은 헌법상 정교분리를 채택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기독교국가로 생각했을 정도로 기독교적인 국가였다. 따라서 미국 기독교사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주제와 범위의 폭이 넓고 다양하다.
종교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기독교를 기독교가 아닌 다른 문화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경향이 있다. 비서구 국가들은 처음부터 다원적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보면 한국의 기독교 역시 진공 상태에서 정착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 이미 유교, 불교, 도교의 3대 종교가 1500년 이상 주도적으로 한국인의 기층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고 기독교가 전파되던 시기에 동학, 증산도 등의 토착고유종교가 함께 등장하며 기독교와 경쟁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전파한 기독교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연관되어 변형된 형태로 정착했다. 새벽기도나 산기도 같은 것이 이러한 유형의 예이다. 실제로 기독교가 유대와 로마 제국 내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이방인 공동체에 뿌리를 내린 순간부터 문화와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전한 기독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를 종교사에 종속시킬 때에는 기독교 고유의 역사경험이 배제되고 그 가치와 의미가 흐려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사가 마크 놀(Mark Noll)은 『미국․캐나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 교회들이 신앙과 실천과 제도의 독특한 결합체를 발전시켜 왔다고 말하는 것은 인류 공통의 종교 경험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본인(이재근 교수)의 관점은 교회사에서 몇 가지 요소를 취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기독교사의 관점이다. 기독교사로서의 기독교를 정치, 문화, 종교, 민족, 민중, 외교, 사회운동, 독립운동, 제국주의, 근대성 등의 한국사의 제영역과 한국기독교와의 연관관계, 세계기독교의 흐름과 한국기독교와의 관계성이라는 상호 관계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1: 선교사관
한국은 중국과 일본보다 개신교 선교가 늦게 이루어진 데 비해 짧은 시간에 급성장했다. 1884년에 복음이 전파될 때 이미 공인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복음과 함께 간접선교, 즉 의료와 교육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80% 정도는 미국 선교사였고 이들은 주류 교단(감리교, 장로교)에 속해 있었다. 캐나다, 영국, 호주에서 들어온 선교사 역시 주로 주류 교단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의 재정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에는 일찍부터 학문을 할 수 있는 학자군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보수 기독교가 한국인을 우민화했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그 결과 일찍이 영어와 서구 학문을 접하며 두각을 드러낸 미션스쿨 출신자나 기독교 선각자들이 세운 한국 학교를 다닌 사람들 중 일부는 선교사나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해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중 기독교 역사를 공부한 역사가로서 한국 기독교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백낙준 박사다. 백낙준은 파크 컬리지, 프린스턴 신학교, 프린스턴 대학, 예일 대학, 즉 미국 내에서도 최상위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1832년부터 1910년까지의 한국개신교 선교 역사」(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였다. 그는 스승인 케네스 라투렛(Kenneth S. Latourette)을 따라 기독교의 선교적 확산을 승리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라투렛은 19세기를 확장된 선교가 이루어진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로 보았다. 백낙준은 1929년 영어로 출판된 자신의 책에서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史)이고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자초지종 선교사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개신교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기독교 역사 전체를 선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선교사관’이다.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백낙준을 비판한 이들은 백낙준의 기술이 주로 서구 선교사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졌다고 비판한다. 실제 복음 전파의 주역이었던 한국인의 경험, 고백, 공헌, 기여 등을 공정하게 기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낙준에게는 분명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 백낙준은 연구 당시 미국에 문서 보관소(archive)도 없던 상황에서 선교사가 집, 친구, 교단, 선교 본부, 출신 교회 등에 보낸 편지를 모으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벼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는 상당하여 오늘날 연구자들도 그의 원전자료를 온전히 다 소유하거나 활용하지 못할 정도다.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면에서도 그는 한국 현대 역사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교육, 행정, 경영 등의 일을 해야 할 처지가 되면서, 그리고 해방 후에는 여러 정치활동에 참여하면서 학자로서의 역량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제자를 한 명도 양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대동아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이화여대의 김활란과 더불어 비행기 구매, 학도병 선전 등의 동원의 참여하면서 친일을 하게 된다. 개인 역량이 탁월했음에도 후학 양성 실패, 친일 등의 오점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2: 민족사관
백낙준 이후 한국인의 관점을 균형 있게 다루려는 노력이 오문환, 장정심, 채필근, 이호운, 김양선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전반적으로 자료 접근의 부족, 빈곤 등으로 인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불균형의 문제를 해결한 시기가 1970년대이고 이 시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연세대의 민경배 교수였다. 민경배의 등장 시기에는 한국사 연구 전반에서 반성적 차원으로 당시 주류 사관이었던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족사관이 정립되고 있었는데 이를 한국기독교사에 차용한 사람이 민경배였다. 민경배의 문제의식은 선교사 증언에 비해 수용자, 즉 한국 신자의 고백과 증언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민경배의 작업에는 한국 교회의 문제를 교회 내부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한국사가의 관점이 반영되었다. 민경배가 1972년 발간한 『한국기독교회사』는 기독교 학계와 일반 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서 민경배는 『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1974), 『교회와 민족』(1981), 『한국기독교교회사 개정판』(1982) 등을 연속으로 펴내며 연세대를 중심으로 민족사관학파라는 자신의 학파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백낙준과 비교했을 때 민경배의 업적은 후학을 양성했다는 것이다.
민경배는 교회와 민족, 즉 종교와 사회를 ‘내연과 외연’이라는 독창적인 원리로 파악했다. 즉 한국기독교사를 단순한 제도의 변천, 사건의 나열, 교회의 시간적 성장으로 보지 않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영적 힘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이라는 내연의 요소’가 ‘민족 중흥과 국가발전이라는 외연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민경배는 한국 교회가 민족을 이끌어 간 주체적 힘으로 작동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는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경배의 역사관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일정한 반대를 받았다. 가장 큰 비판은 그의 역사관이 엘리트주의라는 것이다. 민경배의 기독교사 서술은 주로 의식적 선각자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민중을 중심으로 서술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3: 민중사관
민경배의 시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크게 노력한 사람들은 민중신학자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신대의 주재용 박사다. 주재용은 「한국기독교백년사-민중사관의 입장에서의 분석과 비판」이라는 논문을 통해 민경배를 비판하였다. 주재용은 한국기독교사의 주체를 엘리트나 지식인 계층이 아니라 민중계층의 평신도, 무명의 헌신적 기독교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중신학자들은 역사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역사학파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전문 한국기독교사가가 아니기에 통사나 영향력 있는 종합 저술을 생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민중신학과 당대의 여러 일반 학계의 신마르크스주의 담론 성장의 결과로 오늘날에는 보수 복음주의권 진영에서도 기성 제도나 목회자 중심의 일방적인 신학, 역사 서술에서 탈피하여 소외된 기층의 교인, 특히 평신도와 여성, 장애인, 소수자, 외국인 등의 입장에서 신앙과 신학을 조망하는 글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민중신학과 민중사관의 긍정적인 영향이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4: 실증사관
이와 더불어 1982년에는 이만열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발족되어 어느 한 사람의 독점적 연구 성과에 매달리지 않는 공동연구라는 새로운 기독교역사 연구의 흐름이 나왔다. 이 흐름은 일종의 실증주의 사관을 확립했다. 원전이 없이는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만열은 숙명여대에서 해직된 후 합동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 과정을 하면서 한국교회사를 가르쳤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자료를 수집하여 다시 돌아와 원전에 근거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는 1990년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발전하고 1997년부터 한국기독교역사학회라는 학회를 발족하여 이후 한국기독교역사학을 주도하게 된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서론에 의하면 이 학파의 연구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즉 종래의 연구가 지나친 무비평적 호교론에 치우쳤거나 자교파 중심주의로 흐른 것을 비판하고 발굴되지 못하거나 주목받지 못한 과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둘째, 연구의 영역을 단지 교회의 사건과 인물 안에 가두지 않고 인접학문, 즉 한국사, 종교학, 신학, 사회학, 인류학과의 학제 간 통섭 연구를 통해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사 자료를 실증적이고 과학적으로 취급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미 해석된 2차 자료보다는 원본을 발굴하고 이 자료를 저자의 원래 의도와 문맥에 맞게 해석해내는 데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2, 3』이 나오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 계보 5: 교회사관
앞선 네 가지의 연구방법론이 신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한국교회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파의 울타리 안에서 신학의 한 영역으로 교회사를 다룰 경우에는 민족, 민중, 정치, 사회, 문화, 종교와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를 다루기보다는 특정 교파 교회의 성장과 교파 내 신학의 발전에 더 강조점을 둔 교회사로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사를 쓰더라도 신학적 입장에서 쓰기에 ‘교회’사이거나 역사‘신학’이 된다. 『한국교회사』를 쓴 김영재는 “교회사는 기독교사와는 달리 교회의 역사와 신학이 하나로 결합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용자보다 전달자의 가치를 더 정통적이고 전통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백낙준의 선교사관의 지배적 영향 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교회사관은 자파 신학의 우월성을 전제하는 교회사 연구이기 때문에 실증적, 비평적, 객관적 연구가 어렵고 호교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한 교파의 전통에 깊이 몰입하기 때문에 연구의 객관성과 세밀함을 담지한다면 미시적 관찰을 통하여 창의적 연구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선구적 연구자들을 통해 전수된 다양한 연구 방법론은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갖고 한국기독교사 또는 교회사라는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다. 후속 세대의 과제는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서,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취합하여 새로운 세대를 위한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고 창의적인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 이재근 교수가 한국 기독교사 연구 역사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 설요한
세계기독교사관을 통해 보는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사
본인은 여기에 쓴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이들의 장점을 통합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요 역사관과 방법론의 장점을 최대한 잘 취합하여 균형 잡힌 동시에 엄정한 역사해석을 근거로, 가능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역사해석을 구현하기를 소망한다.
- 선교사관: 복음을 전수해 준 선교사들과 그들의 출신 국가와 교회, 신학의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여, 한국기독교 탄생에 끼친 그들의 역할을 비중 있게 인정한다.
- 민족사관: 그러나 복음은 결코 진공상태에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가 처한 삶의 정황, 즉 그들의 문화, 종교, 언어, 사상, 민족의식, 기질, 사회구조 등의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정황 속에서 전달되어, 수용자의 주체적 해석과정을 통해 번역된다.
- 민중사관: 한편 기독교 복음의 시조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 사도행전의 원시교회, 거의 모든 역사상의 선교현장에서 충분히 드러났듯, 복음을 가장 열정적으로 수용하고 체화한 계층은 언제나 바닥층 민중과 가난하고 소외된 자, 그리고 여성이었다.
- 실증사관: 또한 모든 역사는 기본적으로 해석을 전제하지만 이 해석이 특정 관점에 의해 지나치게 왜곡되거나 과장될 위험이 늘 상존한다. 원전으로서의 1차 자료에 근거한 연구는 필수적이며, 따라서 연구 결과를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실증사관의 원칙이 중요하다.
- 교회사관: 기독교는 개인의 신앙으로 시작하지만 그 신앙의 전수는 공동의 고백과 실천을 통해서만 담보할 수 있으므로 공동체, 즉 교회 없는 교회는 본질상 불완전하다. 따라서 교회의 신앙고백의 시공간적 구현으로서 역사를 바라보는 교회사관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위에 언급한 다섯 가지 연구 관점과는 차별되는 향후 강좌의 두 키워드가 있다.
먼저는 ‘복음주의’(Evangelicalism)다. 본 강좌는 처음 전수된 순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독교 전반을 지배하는 개신교의 정서를 18세기 이래 영미권에서 일련의 부흥과 사회개혁, 선교운동을 통해 부상하고 성장하고 확산된 복음주의라는 용어로 규정한다. 특히 한국기독교를 서구 선교운동을 통해 전파된 복음주의 기독교가 20세기 한국의 독특한 정치, 문화 상황에서 토착화, 상황화되어 탄생한 역사적 산물로 인식한다.
두 번째 키워드는 ‘세계기독교’(World Christianity)다. 오늘날 부상하고 있는 세계기독교학의 방법론을 따라 세계화와 지역화를 동시에 경험한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위치와 의미를 세계기독교 전체 지형 및 한국현대사 전체 흐름과의 관계 속에서 그려내는 것이 강연의 방향이자 목표다. 따라서 강연 중에 자주 선교 주체인 영미기독교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기독교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분석이 등장하며, 동시에 다른 비서구 선교현장, 특히 중국 및 일본에서 성장한 기독교가 한국기독교와 어떤 점에서 유사한 연속선상에 있으며, 어떤 점에서 구별된 불연속성을 띠는지를 자주 비교하고 대조할 것이다.
향후 일정
9월 18일부터 11월 13일까지 이어지는 “20세기 한국복음주의 역사지형도 그리기” 향후 일정은 다음과 같다.
1주. 9월 18일. 프롤로그: 복음주의 정의와 역사, 20세기 세계복음주의와 한국복음주의
2주. 9월 25일. (복음주의) 기원: 초기 개신교 선교사의 정체성
3주. 10월 2일. (복음주의) 확장: 평양에 떨어진 성령의 불
4주. 10월 16일. (복음주의) 분화: 기독교 민족운동과 새로운 신학의 출현
5주. 10월 23일. (복음주의) 변절: 제국과 교회, 그리고 신사참배
6주. 10월 30일. (복음주의) 분열: 교파분열의 아픈 역사와 새로운 시작
7주. 11월 6일. (복음주의) 부패: 자본주의와 독재 앞에 선 기독교
8주. 11월 13일. (복음주의) 에필로그: 한국형 복음주의 운동과 새로운 대안(방향성)
설요한 기자 juicec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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