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요한 기자
현대기독연구원에서 하는 “20세기 한국 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 세미나가 서울영동교회에서 계속해서 진행중이다. 이 세미나는 한국 개신교 역사를 조망하며 한국 복음주의의 정의, 기원, 확장, 분화, 변절, 분열, 부패 등을 다룬다.
10월 2일에 있었던 세 번째 강연의 주제는 한국 초기 개신교 부흥의 특징을 조망하는 것이었다. 강사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이재근 교수(선교학, 사진).
강연 내용을 묶어 하나의 글로 정리하였다.
한국 선교 초기 교회 성장의 이유
한국은 선교가 늦었음에도 다른 나라, 특별히 중국과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당시 나라가 위기인 상황에서 기독교를 대안으로 수용하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개화파 인사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개신교를 수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은 소수였다.
2) 이미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는 저변이 있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이 들어와 있었고 이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나타났다.
3) 한국 초기 기독교는 제국주의적인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면이 있었다. 기독교가 민족의식을 깨우는 대안이자 일반이나 러시아에 대항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상황과는 다르다. 중국의 민족의식 고취는 곧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기독교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4) 한국에는 기독교의 수용을 막는 저항적이고 조직적인 종교세력이 강하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유교가 잠식하던 당시 조선을 일종의 종교적 공백상태로 보았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다.
5)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사이에 협력과 연합이 잘 이루어졌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에서의 선교 경험을 학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6) 한국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결합하여 함께 갈 수 있었다. 3.1 운동 등에 기독교의 영향이 있다. 물론 기독교가 전적으로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니다.
7)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중국에서도 부흥이 있었지만 중국 전체와 비교했을 때 산둥반도 지역에만 해당하는 국지적인 부흥이었다.
8) 자립, 자치, 자전을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하게 했던 성경적이고 탁월한 선교 정책이 초기부터 시행되었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가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시간, 환경, 지리적 요인이 작용했고 한편으로는 후발주자라는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선교지에서 일어난 미국 교회 갈등의 해소
한국에서의 선교는 선교사 간 협력이 아주 잘 일어난 사례에 해당한다. 이것을 미국 남장로교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의 역사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미권에서 제2차 대각성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인해 사회개혁 운동이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노예제 폐지도 있었다. 영국은 1830년대에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였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노예제를 폐지하라는 압력을 행사한다. 당시 미국 일부,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백인보다 흑인 인구가 훨씬 많았다. 미국 북부 지방에서는 노예 제도가 성경적으로 옳지 못하고 인권의 시각으로도 옳지 않다는 흐름이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이러한 문제 제기를 수용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이러한 시각이 계몽주의와 진보 사상의 세속적 인권 사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노예제가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기도 했다. 이것은 농업 위주의 남부 지역에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 해방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어 나타났던 일이기도 하다. 결국 1861년에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북부가 승리하여 공식적으로는 노예가 해방된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남북 갈등은 심화되고 30년이 지난 1890년대까지 그 적개심은 남아 있었다.
한국에 1885년에 들어와 선교 개척을 했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891년에 첫 안식년을 가지는데 이때 아내의 고향인 시카고로 간다. 언더우드는 시카고에 머물면서 맥코믹 신학교에서 한국에 갈 선교사를 모집한다. 그리고 1891년 10월에 밴더빌트 대학에서 열린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신학생 집회의 연사로 서게 된다. 당시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하고 막 에모리 대학으로 옮겼던 윤치호도 함께 연사로 선다. 언더우드는 매우 긍정적이고 밝은 전망으로 한국 선교를 소개한 데 비해 윤치호는 한국 선교가 고난의 길이 될 것이라 연설하였다. 이렇게 상이했음에도 한국으로 갈 선교사가 모집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미국 남장로회의 재정 부족으로 인해 파송할 수 없었다. 언더우드는 타자기 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의 도움을 받고 여기에 본인의 자금을 더하여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 제공한다. 그래서 레널즈(William David Raynolds)를 비롯한 소위 ‘7인의 개척자들’이라고 불리는 남장로교 첫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제물포에서 맞이한 사람이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이었다. 이들은 1895년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지내며 선교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매우 절친한 관계를 형성한다. 당시 미국 남부와 북부의 적개심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한국 교회 초기 부흥의 동력은 네비어스 선교정책과 사경회
당시 한국 선교 정책이었던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이었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특징은 자치, 자립, 자전의 삼자원리다. 자치는 스스로가, 즉 현지인이 교회를 다스린다는 것, 자립은 재정적 독립, 자전은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 원리는 당연한 것 같지만 19세기 후반 선교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현지의 기독교인들은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선교사의 리더십을 유지하고 재정을 미국에서 충당하는 옛 정책을 사용한다. 당시 존 네비어스(John Livingstone Nevius)는 이를 반대하였다. 기독교의 토착화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네비어스는 중국에서 실패했다.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1890년대 한국에서는 네비어스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한다. 그리고 한국의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네비어스의 정책을 만장일치로 수용한다. 당시 감리교는 옛 정책을 고수했다. 반드시 네비어스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네비어스 선교 정책을 채택한 장로교가 더 부흥하게 되었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열정이 많은 한국 사람에게 아주 잘 맞는 정책이었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불러왔다. 188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선교사들의 편지에는 한국 사람의 열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당시 한국 사람은 기도, 선교, 전도, 집회에 열심이었고 재정 모금에도 헌신적이었던 것이다.
초기 한국 기독교 선교를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삼자원리로만 이해하긴 어렵다. 곽안련(Charles Allen Clark)은 네비어스 선교 정책과 더불어 ‘사경회’를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으로 둔다. 한국교회 부흥의 초기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흥’이라는 이미지의 감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말씀을 배우는 사경회가 융성했다. 사경회는 지역별 성경학교와 신학교로 정착한다. 이 사경회가 네비어스 선교정책과 연결되면서 말씀을 배우는 교회를 형성했다.
아울러 한국교회가 자치를 하게 된 계기에는 부흥운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있기 전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교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디의 죄 고백을 시작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국 부흥의 중요한 요소인 죄 고백과 참회가 나타났다. 이 부흥의 결과로 자치가 시작되었다. 부흥은 사람의 가슴을 깨우는 운동이지만 이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메시지가 계속되어야 했다. 선교 초기 단계에는 선교사가 이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지만 언어의 문제로 인해 폭발적으로 전하지는 못했다. 이때 길선주나 김익두 등의 현지인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이후 실질적인 교회의 리더십이 한국 사람에게 이양되고 선교사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감독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자전과 자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1907년은 대부흥과 더불어 한국에 최초의 독노회가 설립된 해이기도 하다. 평양대부흥으로 일어난 리더십 이양이 독노회 설립과 함께 이루어졌다. 평양에 떨어진 불은 심장뿐만 아니라 조직도 변화시킨 것이다.
보론: 기독교와 의료(의료와 한국 초기 선교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
앨런이 한국에서 수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민영환을 치료한 것이었다. 이렇듯 한국 기독교 선교는 의료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전염병이었던 콜레라나 장티푸스가 휩쓸 때 한국에서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이에 대해 서양 의학을 가지고 대처법을 제시해 주었다.
선교사들은 매우 헌신적이었다. 188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선교사 중 자녀나 아내가 죽지 않은 선교사는 거의 없었다. 초기 의료 선교사의 7-80%는 3-4년 안에 사망할 정도였다(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중 3-40년 간 장기근속한 선교사는 복음선교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강력한 선교의 무기는 의료였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있는 사람도 이러한 초기 선교사의 헌신의 역사에 대해서는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한다.
설요한 기자 juicec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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