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요한 기자
현재 한국 개신교 내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교회 등 많은 교파가 있고 각 교파 내에서도 수많은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한국 교회의 교단 분열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까.
10월 30일에 서울영동교회에서 있었던 현대기독연구원 주최 “한국교회 지형도 그리기” 6주차의 주제는 바로 해방 이후 한국 개신교의 분열 양상이었다. 강사는 이재근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학).
이번에도 강연 내용을 전반적으로 정리하였다.
개괄
일제와 신사가 물러가고 난 후 한국 교회는 이전에 없던 분열과 분쟁을 겪는다. 신사참배 참여와 회개, 일제 잔재 청산, 지역 갈등, 신학적 차이, 교권 다툼, 선교모국 선교부와의 관계 등이 분열의 여러 원인이었다. 해방 전까지는 대체로 복음주의적 통일성을 유지한 집단이었던 한국 교회는 해방 후에는 신학, 체계, 조직, 지향성 면에서 다양하게 나뉘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교파들이 한국전쟁 이후 유입되면서 한국 교회는 다양한 기독교 교단과 소종파의 전시장으로 변모한다.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서구 기독교의 흐름과도 관련되어 있다. 고신의 분립은 1920년대에 있었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서 갈라진 장로교 그룹의 영향을 받는다. 기장의 분립은 1890년대부터 시작해서 1920년대까지 이어진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후 감리교, 회중교회, 장로교가 연합하여 형성된 캐나다연합교회의 영향을 받는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1940년대에 시작된 WCC와 연관이 있다. 북미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 의해 형성된 결과가 이후 한국 교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고신의 분립
1952년 고신파 분립은 한국 개신교 역사 가운데 가장 먼저 일어난 교단 분열이었다. 해방 후 한국 교회 재건 당시 경남노회에는 출옥성도와 지지자, 적극적으로 친일한 목사들, 신사참배 강요에 큰 저항 없이 조용히 따랐던 대다수의 목사 및 신자의 세 부류가 있었다. 이 들은 신사참배 참여 목사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갈등한다. 출옥성도는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는 목회를 중단하고 참회하고 자숙하는 기간을 가질 것 등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실상 신사참배를 한 상황에서 이 개혁안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요원했다. 오히려 정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가 통용되었고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교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존속한 것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논리도 등장했다. 그러던 중 1945년 12월에 열린 경남노회 47회 정기노회에서 출옥목사 주남선이 노회장으로 당선된다. 같은 출옥성도였던 한상동은 주남선 및 박윤선과 같이 평양신학교의 보수신학과 정통성을 계승하는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46년에 박윤선을 교장으로 고려신학교를 개교한다. 이 학교는 미국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이하 OPC) 소속 선교사 브루스 헌트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이후 출옥성도와 그 외 사람들 사이의 갈등, OPC 선교사와 박형룡과의 갈등 등을 겪는다. 결국 교단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OPC 선교사가 교단의 통일성을 해친다고 판단하고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을 금하고 경남노회를 삼등분하는 안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출옥성도 지지자들이 저항하고 결국 1952년 9월 진주에서 독자적으로 총노회를 구성하며 교단을 탈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탄생한 고려파(고신) 교단은 1956년에 6개 노회를 구성한 후 공식 총회를 조직했다. 당시 대부분 경남 지역에 집중된 350개 교회, 60여 명의 목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고신은 OPC 외에도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근본주의자 칼 맥킨타이어가 세운 국제교회조직)로부터 실질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기독교장로회의 분립
일제 당시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함경도 출신이자 평양신학교에서는 배제되었던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의 주도 하에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조선신학교는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면서 신학교를 유지해 나갔다.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인 대부분은 친일 이미지, 신학적 자유주의라는 인식 때문에 조선신학교에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7년 4월 ‘조선신학교 학생 진정사건’이 발생한다. 보수적인 학생들이 조선신학교 교육이 근대주의 신학, 성경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 및 합리주의 신학에 물들었다고 판단하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 때 제시한 증거는 주로 김재준의 강의 내용이었다. 장로교 총회의 8인 심사위원회는 김재준이 정통신학을 버렸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인식했지만 박형룡은 김재준의 성경관이 파괴적 고등비평이자 신신학의 교리관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총회적 차원의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데에 뜻을 모은 한국 목사들은 미국 장로교(북장로교, 남장로교) 선교부의 지원 하에 1948년 6월 장로교신학교를 설립한다. 교장은 박형룡이었다.
교단이 인준한 두 신학교의 합동문제가 계속 쟁점이 되자 1951년 5월 장로교 총회는 두 학교 모두 인가를 취소하고 9월에 대구에 학교를 새로 세운다. 교수진 대부분은 장로교신학교의 교수들이었다. 이어 1952년 4월 총회에서 김재준 면직을 경기노회에 지시하고 윌리엄 스코트(서고도)의 본국 송환도 결의한다. 여기에 조선신학교 출신에게 교역자 자격(강도권, 안수)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1953년 4월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관련 인사 80여 명이 이전 총회 결의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53년 6월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는 인사들은 서울 용산구 동자동 소재 조선신학교 강당에서 ‘법통 38회 총회’를 열고 복음의 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자립자조 정신, 세계교회 정신을 강조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가 이 총회 지지에 합류했다. 1954년에는 교단 명칭을 ‘기독교장로회’로 정하여 독립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소속 교회는 600여 개, 주로 참여한 사람들은 함경도 출신이었다.
고신과 기장이 갈라져 나온 것은 한국 교회의 해묵은 지역 갈등의 결과를 보여 준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선교 초기에 경쟁과 갈등의 소지를 줄이며 한국 교회 성장과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선교지 협약과 할당 정책의 부정적인 이면이 드러난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의 분열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가 창립된다. 당시 창립총회에 참석했던 김관식은 한국 교회도 WCC에 가입하자고 요청하고 총회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WCC에 의혹을 품은 사람들은 이내 부정적인 반응을 내놓는다. 박윤선은 WCC 가입은 정통교리에 대한 위반이라는 견해를 표명한다. 특히 1951년 경남법통노회 소속 교회의 후원을 받은 국회의원 22명이 WCC가 용공집단(공산주의를 용납하는 집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사건이 가져온 파급력은 막대했다. 195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WCC 총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 중 김현정, 유호준은 WCC가 건전한 교회 연합이라는 보고를 했고 명신홍은 WCC가 교리적으로는 혼합주의, 정치적으로는 용공이라는 보고를 했다. 1956년 41회 총회는 에큐메니컬운동 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연구 후 보고하도록 했다. 연구위원회에는 WCC에 우호적인 한경직, 유호준, 전필순, 안광국과 적대적인 박형룡, 정규오, 박병훈, 황은균이 함께 속해 있었다. 이후 보고한 내용은 WCC에 선택적으로 참여하라는 권유, 즉 친선과 우호에는 참여하되 단일교회에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WCC 지지 진영과 반대 진영의 갈등은 계속해서 심화된다.
그러던 와중에 ‘총회신학교 3천만환 사건’이 발생한다. 1953년 휴전 후 총회가 대구에 있는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룡이 부지 대금 3천만환을 사기당한다. WCC 지지 진영은 박형룡의 퇴진을 주장했고 WCC 반대 진영은 이에 반대하였다. 박형룡은 1958년에 교장직에서 물어난다. 1959년에는 ‘경기노회 총대 사건’이 발생한다. 전국 장로교 노회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경기노회가 두 진영으로 양분된 상태에서 총회에 파견할 총대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인다. 결국 WCC 지지 진영은 서울 연동교회에서, WCC 반대 진영은 승동교회에서 모여 각자 총회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교단이 갈라진 것이다. 이 때 교단은 거의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진다. 이후 통합측은 오늘날의 광장동, 즉 광나루에 신학교를 세웠고(장로회신학대학교), 합동측은 한강로에서 신학교육을 하다가 이후 사당동에 새 건물을 세운다(총신대학교). 당시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는 모두 WCC에 가입된 교단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교사는 통합측을 지지했다. OPC나 ICCC와 관련된 소수의 선교사들은 합동측을 지지했다. 당시 ‘장로회’라는 이름이나 학교와 병원 등 대부분의 기반시설은 대다수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은 통합측이 받게 된다.
분열 이후에 합동과 고신은 재통합을 시도해 1960년에 통합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지도부 인사의 지위 문제 등 갈등이 발생하여 다시 분립된다. 이때 고신의 세력이 이전보다 더 약해진다. 합동은 이후 교권과 관련한 부패 문제로 인해 계속해서 분열해 1979년 합동보수(2005년에 합동과 재통합), 1980년 개혁(오늘날의 합신) 등의 주요 교파 분열을 겪는다. 또한 ‘합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100여 개의 독자 교단이 생겨났다. 현재 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으로 약 200개의 교단이 존재한다.
감리교의 분열과 통합
감리교는 해방 후 세 차례의 분열을 겪으나 모두 재통합에 성공한다. 각각 1946년, 1954년 1974년에 분열을 겪지만 1949년, 1959년, 1978년에 각각 재통합한다.
1946년 분열은 해방 후 일제 잔재를 청산하며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945년 12월 당시 재건파는 친일파 정춘수가 1939년 감독이 된 이래로 만든 제도와 규정을 부인하였다. 하지만 친일 행위에 가담한 이들은 1946년 9월 특별총회를 개최하여 재건파에 저항한다. 이들을 복흥파라 부른다. 재건파는 소수였기에 교회를 장악하지 못했지만 평신도 청년운동가들의 통합 노력에 힘입어 1949년 재통합에 성공한다.
1954년 분열은 총리원파와 호헌파 사이에 일어났다. 1949년 재통합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될 김유순이 전쟁 중 납북되면서 1951년 11월 류형기가 감독으로 선출된다. 류형기는 자격요건 중 목회 기간과 관련하여 시빗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선출되었다. 이후 1953년 총회에서 류형기는 다시 감독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감독 임기 관련법을 개정하자는 의견과 임시법으로 처리하자는 의견 사이의 법 논쟁이 벌어져 교단이 류형기 지지파와 반대파로 분열된다. 이 때 쟁점이 된 것은 미국에서 보내 온 선교비 문제였다. 당시 류형기는 총회의 허락을 받고 이 돈을 무역업체에 투자했다가 막심한 손해를 보았다. 류형기는 자진 사의를 표했으나 감리교 실권을 쥐고 있던 총리원파의 설득으로 감독직을 회복하였다. 이때 반대하였던 호헌파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1955년에 단독 총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제2차 분열이었다. 이 분열은 1차 분열의 연장선에 있다. 총리원파는 주로 재건파 인사들이었고 호헌파는 복흥파의 연장선에 있었다. 총리원파는 주로 중부 지방 출신, 호헌파는 주로 북한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역 갈등의 성격도 있었다. 분열은 1959년까지 지속되지만 1959년 3월에 경기도 출신 김종필의 감독 선출과 함께 2차 통합이 이루어진다.
1974년 분열은 호헌파와 성화파 사이의 갈등에 정동파가 가세하는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갈등의 내용은 감독 선출을 위한 주도권 다툼이었다. 성화파 윤창덕이 1970년 감독에 당선되자 불만자들이 자신의 연회를 형성하고 급기야 1975년에 연합총회를 구성하여 새 교단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1974년 12월에는 호헌파 김창희가 감독이 되자 성화파는 갱신총회를 열고 자신들만의 감독을 선출했다. 감리교는 당시 네 계파가 자기 세력을 규합한 채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5년 11월에 세 파가 연합하고 1978년에 나머지 하나와도 통합이 이루어져 오늘날 감리교는 하나의 교단으로 존재한다. 감리교 분열은 장로교와는 달리 신학적 이유의 분열은 없었다. 감리교가 비교적 자유롭고 포용적인 신학을 지향한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성결교와 침례교
원래 성결교는 교파가 아니라 영미권 감리교 계열에서 나온 성결운동으로 등장했다. 이 그룹은 자체적으로 선교회를 결성하여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교단을 만들고 한국으로도 유입된다(킬보른 선교사 1907년 5월 한국 도착). 성결교는 조직적인 면에서는 자생교단의 성격이 있지만 신학적 특징 등의 기원은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다. 성결교는 해방 후 연합활동에 적극성을 보이며 1946년에는 WCC 한국지부격인 조선기독교연합회(오늘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1955년에는 복음주의협의회(당시 전미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 세계복음주의연합[World Evangelical Fellowship, WEF]과 연결)에 각각 가입하여 중도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교단 내에서 에큐메니컬인 WCC와 복음주의권인 NAE를 지지하는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결국 1960년 총회에서 두 기관을 모두 탈퇴하자는 안을 두고 투표가 진행되었다. 결과는 탈퇴 보류였다. 이때 보수적 인사로 구성된 ‘양기관 탈퇴안 재검토’ 지지파가 보수총회를 세우며 교단을 탈퇴한다. 그리고 1962년 4월에 자신의 총회를 17회 총회로 선언하고 교단 이름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으로 바꾼다. 그리고 성결교신학교(오늘날의 성결대학교)를 세운다. 나뉠 당시 교세는 기성이 2/3, 예성이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 비율은 오늘날에도 큰 변화가 없다.
한국에 침례교가 들어온 것은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Malcom C. Fenwick)에 의해서이다. 펜윅은 한국 전역을 누비며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다. 침례교는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그러다가 해방 후 1946년 9월 교회를 재건하며 동아기독교회 명칭을 다시 사용하고 목회자 파송제를 청빙제로 바꾼다. 이때 이에 반대한 경북 예천 지역 10여 개 교회가 1947년에 ‘대한기독교회’를 설립하여 이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아기독교회는 미국 남침례교단의 후원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동아기독교회에서 주류파로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은 안대벽이었다. 하지만 미국 남침례교 한국 선교회는 안대벽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8년에 안대벽이 총회장에서 물러나고 교단 전도부장직을 맡게 되자 남침례교 선교회는 안대벽에게 불신임을 통보한다. 이로 인해 교단은 주류파와 비주류파로 나뉜다. 결국 1959년에 공식 분열이 이루어진다. 비주류파는 4월에 대전에서, 주류파는 5월에 포항에서 각각 총회를 연다. 대전총회는 기독교한국침례회, 포항총회는 한국기독교침례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남침례교의 지지를 받은 대전총회는 성장했으나 포항총회는 재정 문제로 큰 어려움에 처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젊은 세대가 부상하면서 본격적으로 통합을 추진하게 되고 결국 1968년 4월에 재통합된 한국침례교연맹이 탄생한다. 그리고 1976년에 교단 명칭을 한국기독교침례회로 바꾸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교단의 등장
일제 강점기 한국 개신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대 산맥이 있는 가운데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가 소규모로,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등이 미미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오순절교회, 루터교회, 나사렛교회, 퀘이커, 그리스도의교회 등이 들어온다. 모르몬교 등의 유사기독교 종파의 유입까지 보자면 한국 개신교의 지형은 매우 복잡하고 다채로워졌다.
해방 후 가장 먼저 들어온 새 종파는 나사렛교회였다. 1948년에 미국 유학파 부흥사 정남수가 한국 내 일부 성결교 집단을 미국 나사렛교회와 연결시키면서 토대를 닦고 1954년 미국인 선교사 도널드 오언스가 내한하여 나사렛신학원을 세우고 이듬해 정식 교단을 발족했다. 현재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천안 나사렛대학교를 운영한다.
순복음교회의 원래 이름은 ‘하나님의 성회’다. 1952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 A. B. 체스넛(A. B. Chesnut)이 내한하여 흩어져 있던 오순절형 교회를 모은다. 그리고 1953년에 정식으로 교단을 발족한다. 순복음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용기인데 그가 개척한 천막교회는 세계 최대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성장했다. 순복음교회는 ‘온전한 복음’을 주창했는데 이것은 영혼과 일상, 육체 모두를 온전하게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세례의 표적인 방언, 신유, 예언, 은사, 능력을 강조하고 경제적 풍요 역시 축복의 요소로서 강조한다. 1980년대까지 한국 개신교 주류 교단, 특히 장로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가 복음을 왜곡하고 불건전한 은사와 표적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이단이나 사이비로 규정했다. 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전례 없이 성장하자 오순절운동을 목회와 신학의 표준으로 삼는 사람이 늘어났고, 1970년대 이후에는 많은 교회가 오순절화되는 ‘은사주의 갱신’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루터교는 1971년 1회에 한국루터교회 총회를 열었다. 주로 루터란아워 라디오 방송과 컨콜디아 출판사, 베델성서연구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현재 한국에는 약 40개의 루터교회가 있다.
퀘이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친우회는 한국전쟁 후 구호사업 과정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1959년에 미국인 아서 미첼이 최초의 신앙집회를 열면서 공식 모임을 시작하였다. 유명한 인물로는 이윤구(적십자, 월드비전 대표 역임), 함석헌(말년에는 무소속) 등이 있다.
보론: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사건
한국 교회 100년 역사 가운데 세 가지 큰 사건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의 한국 교회 색깔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신사참배. 해방 이후 한국 교회 전반적인 분열 양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 오순절, 순복음 교회의 등장. 이후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앙 유형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설요한 기자 juicec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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