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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산책
설요한 기자

현대기독연구원에서 주관하고 이재근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학, 사진)가 강의하여 진행하는 “20세기 한국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 5주차 강의에서는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를 다루었다.

이번 강의에서는 1930년대부터 강화되어 강요되는 일제 군국주의와 신도의 진행과정, 이에 대한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반응,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활동과 의의 등을 다루었다.

강의의 대략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와 신도 강요

2.jpg 1930년대부터 일본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상하이 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진행되고 1945년 원폭에 의한 결정적 패배를 맞으면서 마무리된다. 이 시기에 일본은 한국 교회를 천황제와 신도주의에 협력하는 도구로 활용하려 하였다.

신도(神道, Shintoism)는 원래 고대 일본의 ‘가미’(神, 신)에 대한 신앙에서 기원한 것으로 토착신앙에 불교, 도교 등의 요소가 결합된 것이다. 일본은 매우 종교적인 나라인 듯하지만, 종교적인 요소를 세속적인 것과 결합시켜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속화된 이데올로기를 종교화시키는 모습을 보여 왔다. 신도는 일본 천황권이 강화되는 가운데 정교일치 유형의 조직적 신앙으로 발전하고 1866년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등장하며 근대 일본의 핵심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한국에 신도 사상과 천황제 숭배가 들어온 것은 1876년 개항 직후이다. 그러다가 1910년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국공립 지배 종교로서 강요되기 시작한다. 국지적으로 혹은 일본계 학교 중심으로 강요되기 시작한 신도는 1930년 군국주의가 대두하면서 전국적으로 강요되고, 이에 대한 거부자들은 강력한 처벌과 박해를 받게 된다.

이 때 중요한 세 사건을 꼽자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 태평양 전쟁이다. 1930년대 본격적인 군국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과 대만에 이어 중국을 잠식하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얀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사이판을 점령하여 아시아권을 지배한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는 내선일체라는 사상을, 아시아권에서는 이를 확장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정치적, 군사적 흐름을 확장, 강화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용한 틀이 신도였다.

일제의 강압과 굴복하는 기독교

강압의 시작은 교육계였다. 교육계부터 접근하는 것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는 많은 아이들이 민족계 및 기독교계 사립학교 대신 일본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910-30년대 사이에 교육법으로 인해 사립학교가 많이 사라졌을 뿐더러 3.1 운동의 실패 이후에 일본이 한국을 계속해서 지배하고 지배력이 더 강해졌기 때문에 민중은 이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사상통일을 위해 각종 행사를 열고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기독교계 학교는 초기에(1931-1933년)는 일관되게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반대했다. 광주, 평양, 원산에 있는 학교들이 저항한 분명한 사례가 있다.

이에 일본은 더욱 강력한 제제를 시행한다. 이와 관련한 사건이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이다.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도내 공립, 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에게 도지사가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당시 기독교계 학교 교장들이 이를 반대한 것이다. 결국 일본 당국은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고 그 회답에 따라 학교장직 파면 및 폐교를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당시 일본 교육당국이 내세운 신사참배 정당화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고, 예배행위가 아니라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해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기며 강제하지 않는다.

일본의 적극적인 압박 이후 기독교 교육계 내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이 나뉘게 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천주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의 교파는 결국 일본의 주장을 수용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학교를 유지한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총회 차원의 공식 결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장로교는 이와 관련하여 큰 혼란을 겪었다.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1938년 5월 ‘교육인퇴’를 결의하고 평양 3숭(숭실중학, 숭실대학, 숭의여학) 및 기타 학교를 잇달아 폐쇄한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1937년 2월에 풀턴 성명서를 발표하여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하고 모든 선교계 학교를 폐교한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 역시 1936년 2월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하고 1939년 1월에 선교부 소속 학교를 모두 폐교한다. 신학적으로 온건한 자유주의를 유지했던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1933년 9월 저항 이후에는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로 받아들이며 일제에 순응하고 학교를 유지한다. 이 그룹은 후일 기독교장로회로 발전한다. 역사적으로 1960-70년대에 독재에 저항했던 거의 유일한 그룹인 기독교장로회가 이 당시에는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신사참배에 대한 찬성 논리는 제사 허용 논리와 비슷하다. 신사참배를 일찍 허용했던 교단이 후일 제사에 대해서도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된다.

교육계에 대한 압력으로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일반 사회로 퍼져 나가고 교회에도 여러 회유와 협박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1935년부터 교단별로 신사참배 결의가 이어진다. 1935년 12월 안식교, 성결교, 1936년 5월 천주교, 1938년 9월 감리교가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에 결의하는데 당시 조선총독부는 장로교 세력을 장악하고자 사전 준비를 한다. 각 지역 경찰서장은 총대로 참석 예정인 노회 대표들을 만나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 신사참배 논의에 대해 침묵할 것, 동의하지 못할 시에는 불참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시에 투옥할 것이라고 겁박했다. 결국 100여명의 정복, 사복 경찰이 검을 차고 지키는 가운데 신사참배 결의안이 통과된다. 선교사 브루스 헌트가 항의하다 끌려 나가는 사태가 있었지만 대체로는 짜인 대로 진행되었다.

이제 일본 당국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예배 순서에 동방요배(황궁이 있는 동방을 향해 절하는 행위) 등의 의식을 강요했다. 종말과 심판을 강조하는 설교와 찬송을 금지했다. 1945년까지 기독교 계열 각종 연합단체가 해산하거나 일본 본부의 지부로 편입되었다. 한국 내 교단 교파 역시 일본 교파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선교사들 역시 적성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안위를 위협받고 자국으로 철수했다. 떠나기를 거부한 소수 선교사들은 포로교환 형식으로 추방당했다. 1920년대까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였던 사람 중 많은 사람, 특히 지식인 대부분이 이 시기에는 친일을 했다.

소수의 저항자들

이런 와중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소수의 신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연대로 저항하였다. 거부운동의 유형은 소극적 방식인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 적극적 방식인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으로 나뉜다.

청원운동은 193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다. 총회 차원에서 진행되던 청원운동이 일본 당국자들에 의해 저지되고 1935년 이후 공식적으로 금지되자 이 운동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때 등장한 유명한 인물이 박관준(장로, 의사)이다. 박관준은 193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요인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 저지를 호소하고 급기야는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기독교 국교화, 신사참배 강요 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고장을 투척하기에 이른다. 박관준은 이 일로 투옥되고 옥중에 병을 얻어 1945년 3월 병원에서 사망한다. 당시 박관준과 동행하여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고 외치고 투옥되어 6년의 옥고를 치른 사람이 『죽으면 죽으리라』로 유명한 안이숙이다. 당시에 일본 정계 요인을 통해 청원운동을 한 사람으로는 김선두와 김두영도 있었다. 이들은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는 일본 정계요인들과 함께 한국에 돌아와 장로회 총회의 강제 신사참배 결의를 막고자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사실 이러한 청원운동은 일본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청원자 측이 이미 일제 식민통치를 인정한 상태에서 벌이는 운동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순교를 각오하고 종교탄압에 대항하여 문제를 폭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내에서는 교역자와 신도가 연대를 맺고 신사참배에 대해 조직적, 집단적 거부 및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중심인물은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 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함남의 이계실 등이었고, 만주에서도 박의흠, 김형락, 김윤섭 등이 활약하였다. 당연히 일본의 탄압이 있었다. 1940년에 나온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이나 1940년 9월 20일 새벽에 실시한 ‘조선 기독교도 불온분자 이제 검거령’은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용학, 주기철, 최봉석, 최상민, 김윤석, 박의흠 등의 순교자가 나왔다. 크고 작은 신사참배 거부 항쟁은 전국 어디에서나 있었고 일본 경찰은 항쟁자에 대해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보안법, 불경죄 등을 적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투옥된 사람은 약 2천여 명에 이르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는 50여 명에 이르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의의

이상과 같은 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신앙 순결운동으로 교회사적 의미가 있다. 당시에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대체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영향을 받은 임박한 종말론을 지니고 있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근거가 신앙의 요인이 강하기 때문에 이 운동을 단지 신앙 운동으로만 보려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황민화 정책,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녔다는 면에서 민족사적 의의도 있다. 실제로 일본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민족주의자, 즉 체제 반대자로 규정하여 치안유지법, 보안법을 적용하고 불경죄로 처벌하였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활동을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룬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역시 민족주의 운동이나 독립운동으로 수용될 여지가 있다.

설요한 기자 juicec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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