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우 목사
고신대학교 교수
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
1. 생애
카르타고(Carthago)의 감독 키프리아누스(Cyprianus = 키프리안 Cyprian)의 본명은 타스키우스(Thascius)이며 기독교에로의 개종 시에 카에킬리우스(Caecilius)라는 이름을 얻었다. 카에킬리우스는 키프리아누스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로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라틴명은 Thascius Caecilius Cyprianus이다. 그는 3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난 고향은 카르타고로 추정된다.
키프리아누스가 200-21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그 당시 북아프리카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기독교는 그곳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250년경에는 교회 감독의 수만 해도 250명을 헤아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유복한 이교도 가정에서 자란 키프리아누스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언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종하기 전에는 궁전 변호사와 수사학 교사로 활동했다. 그의 개종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당시 사회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는 것이다. 키프리아누스가 개종할 당시 북아프리카 교회는 로마교회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는 개종 직후 약 245-248년 사이에 세례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례를 받은 지 오래지 않아 집사로 장립되었고 곧이어 장로가 되었다. 그는 248년 7월과 249년 4월 사이에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택되었다.
250년, 즉 감독직에 오른 지 1년 정도 지났을 즈음에 로마 황제 데키우스(Decius)가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이 박해는 특별히 기독교 지도자들인 감독들에게 집중되었다. 데키우스 박해의 최초 순교자는 로마 감독이었던 파비아누스(Fabianus)였다. 박해에 대해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는 적극적이고 용감하게 보이는 순교의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소극적이고 비겁하게 보이는 피신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자신의 안전만을 고려한 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카르타고 교회 전체를 위한 공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한 피신의 길은 감독으로서의 그의 생애 내내 그를 괴롭히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박해의 강도가 줄어들자 키프리아누스는 약 1년 3개월 만에 다시 카르타고 교회로 돌아왔다. 이 때 그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박해 기간에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배교자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그의 자세는 중도였다. 당시 배교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될 수 있는데, 하나는 이교 신들에게 분향한 자들(sacrificati 혹은 thurificati)이요, 다른 하나는 분향하지는 않았으나 분향했다는 증서를 로마 관리들에게서 매입한 자들(libellatici)이다.
배교자들 가운데 일부는 교회의 공식적인 회개 절차를 무시한 채, 당시 영적 권위를 가진 고백자들(confessores), 즉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고백한 것 때문에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가 석방된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에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음으로써 쉽게 교회로 돌아오려고 했다.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던 고백자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배교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사죄 문서를 받은 배교자들을 어떤 회개 조건 없이 교회에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고백자들의 사죄 문서, 즉 ‘평화의 문서들’(libelli pacis)은 남용될 가능성이 높았고 심지어 매매가 되기도 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정한 공적인 회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회에 돌아오려고 하는 편법적인 방법에 대해 반대하면서 너무 쉽게 배교한 자들과 극심한 고문을 당한 후에 배교한 자들을 구분하여 차등적으로 참회 기간을 부과할 것을 요구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강력한 저항 세력, 즉 고백자들과 자신에게 적개심을 가진 카르타고 교회의 두 사람,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 집사와 노바투스(Novatus) 장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노바투스는 키프리아누스가 카르타고 감독으로 선출될 당시 경쟁자였으며 펠리키시무스는 키프리아누스가 박해로 인해 교회를 비웠을 때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바투스에 의해 교회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로 임직된 사람이었다.
배교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단순히 북아프리카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교회의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로마교회는 감독 파비아누스가 순교되자 후임에 코르넬리우스(Cornelius)가 251년 3월에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가장 강력한 후보는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였다. 코르넬리우스가 로마 감독이 되자 노바티아누스는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스로 로마의 대립 감독이 되었다. 배교자들에 대해 노바티아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용납불가라는 강경한 입장이었던 반면에 코르넬리우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키프리아누스를 대적하기 위해 노바투스는 배교자들의 처리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과 전혀 다른 로마의 노바티아누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연합은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아누스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 감독들이 로마 감독 코르넬리우스를 지지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으며, 로마 교회의 노회가 노바티아누스를 파문함으로써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고백자들이 포함된 반대자들의 강력한 저항과 박해 시에 도피했던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위한 진정성 있는 헌신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북아프리카 감독들 대부분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결국 북아프리카 교회는 키프리아누스를 중심으로 안정을 되찾아 갔다.
로마 감독 코르넬리우스가 253년 6월에 순교함으로써 루키우스(Lucius)가 뒤를 이었으나 재임 기간을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로마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기 때문에 254년 12월에 스테파누스(Stephanus)가 로마 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에는 박해가 잠시 소강 상태였으므로 교회가 안정을 찾았으나 이단자의 세례 문제로 내홍을 겪게 되었다. 문제의 요점은 교회 밖에 있는 이단자들과 분파주의자들에게 세례를 받은 자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 할 때 그 세례를 인정해야 하느냐 인정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255-256년 사이에 발생했다.
이단자가 베푼 세례라 할지라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것이라면 교회가 그 세례를 인정해야 한다고 로마 감독 스테파누스는 주장했던 반면에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자신의 원칙에 근거하여 이단자의 세례가 교회 밖의 세례이기 때문에 원천 무효이며 따라서 그가 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테파누스는 키프리아누스를 출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문제로 256년 9월에 카르타고의 감독 87명이 회의를 소집하여 키프리아누스의 견해, 즉 교회 밖의 세례는 무효라는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고 이 결정을 스테파누스 감독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로마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교회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257년에 스테파누스 감독이 죽음으로써 그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교회에서 이단의 세례가 유효한가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기보다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4세기 초 카르타고의 감독 도나투스(Donatus Magnus)와 4세기 말 5세기 초 힙포(Hippo)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의 도나투스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10여 년의 험난한 교회 감독 생활을 한 후 그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의 박해로 인해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했다. 순교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용감하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저술가로 인정되며 그의 라틴어 저술들은 상당수 남아 있다.
2. 저술
키프리아누스의 저술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스타일과 사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뛰어난 독일의 교부 연구가 베른하르트 슈미트(P. Bernhard Schmid)에 의하면 그는 성경 다음으로 테르툴리아누스의 저술들을 탐독할 만큼 좋아했으나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상상력과 독창성이 풍부하거나 표현이 간결하지는 못했다.
기독교로의 개종 초기에 저술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도나투스에게 보낸 편지』(Epistola ad Donatum de gratia Dei) 역시 테르툴리아누스의 방식과 유사하다. 여기서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의 개종 이전의 상태와 회심, 그리고 세례의 효력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 외에도 기독교를 변증하는 내용으로 된 작품들은 『우상들의 헛됨에 관하여』(De idolorum vanitate)와 『유대인들에게 반대하는 증언들 세 권』(Testimoniorum adversus Iudaeos libri tres), 그리고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 등이 있는데, 마지막 작품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부탁하는 전도 형식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키프리아누스의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의 교회 생활과 경건 생활에 관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처녀성에 관하여』, 『죽음에 관하여』(De mortalitate), 『순교를 권면함에 관하여』(De exhortatione martyrii),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 『행위와 구제에 관하여』(De opere et eleemosynis), 『선한 인내에 관하여』(De bono patientiae), 『기도에 관하여』(De oratione)등이 있다. 『기도에 관하여』는 주기도문(Pater noster. 뜻: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해설서인데, 아우구스티누스가 극찬한 작품이다.
키프리아누스의 가장 유명한 저술은 『교회의 통일성에 관하여』(De unitate ecclesiae)이다. 왜냐하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Salus extra ecclesiam non est. =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유명한 용어의 기원이 바로 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3. 사상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바로 다음과 같은 키프리아누스의 선언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자마다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 밖에 (바깥에 끝까지) 머물러 있게 될 자 또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Habere iam non potest Deum patrem qui ecclesiam non habet matrem. Si potuit euadere quisque extra arcam Noe fuit, et qui extra ecclesiam foris fuerit euadet. ‘evadere’ 동사는 본래 ‘피하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구원받지 못하다’로 의역함).
이처럼 키프리아누스에게 있어서 교회의 통일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예컨대 나무와 수원과 태양 등의 비유로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옹호했다.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한 나머지 심지어 그는 군병들이 제비뽑은 예수님의 옷이 훼손되거나 나누이지 않고 통째로 보존된 것을 근거로 교회가 찢어질 수 없다는 통일성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성경 해석학적으로 무리한 해설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러한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교회의 감독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은 감독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과 교회가 감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만일 감독과 함께 있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교회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Unde scire debes Episcopum in Ecclesia esse, & Ecclesiam in Episcopo; & si qui cum Episcopo non sint, in Ecclesia non esse;...). 이것은 한 마디로 ‘감독 없이는 교회도 없다’(sine episcopo non ecclesia )는 사상인데, 후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키프리아누스가 감독직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로 인해 교회의 공적인 체계가 흔들리자 평신도 고백자들을 중심으로 순수 신앙을 추구하는 분리주의적 이단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또한 키프리아누스는 모든 감독들의 동등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베드로의 보좌, 즉 로마 감독의 수위권을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통일성이 파괴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래서 교회를 분리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을 모두 이단으로 정죄했으며 그러한 이단들을 결단코 교회로 간주할 수 없었다. 이단에 대한 이런 강경한 자세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단들에게 교회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이요,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곳에는 성령도 없다. 왜냐하면 [성령도] 하나이기 때문이요, 세상 사람들과 외인들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례 역시 동일한 통일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단들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세례는] 결코 교회로부터도, 성령으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Nam si iccirco apud haereticos Ecclesia non est, quia una est, & dividi non potest: si ideo illic Spiritus sanctus non est, quia unus est, & esse apud profanos & extraneos non potest: utique & baptisma quod in eadem unitate consistit, esse apud haereticos non potest, quia separari neque ab Ecclesia, neque a Spiritus sancto potest).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키프리아누스는 확실히 교회를 위한 교회의 사람이었다. 19세기 유명한 교회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가 가장 유능한 학자였고 테르툴리아누스가 가장 강력한 저자였던 것과 같이 키프리아누스는 가장 위대한 감독이었다. 그는 교회의 왕자가 되려고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