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요한 기자
10월 16일 서울영동교회에서는 “한국 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 네 번째 시간이 있었다. 이번에는 한국 초기 개신교와 민족주의 운동과의 관계, 교단의 분화를 다루었다.
강사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이재근 교수(선교학 강사,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 Ph.D., 사진).
강연의 대략을 아래에 정리하였다.
한국 개신교와 민족주의
왜 한국 개신교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빠르게 성장했는가. 그 한 요인으로 한국 민족주의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민족주의와 개신교 전파가 엇갈린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국 민족운동 및 정치 지도자 일부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개신교 유입을 곧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물론 기독교 전파과정이 전혀 제국주의의 옷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등에서 나타난 제국주의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자강을 강조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기독교의 힘을 입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려 하였다. 특히 개신교를 믿으면 영국과 미국과 같은 나라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 일본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기독교 민족주의와 서구 개신교가 결합한 것이다.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전반적으로 분열 양상 없이, 한국인과 서양인 사이의 갈등도 (비교적) 없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갈등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민족운동과 개신교와 함께 가기는 했지만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의도와 개신교를 통한 민족 자강을 꿈꾸었던 사람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갈등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시기는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표면으로 부상하고 난 이후였다.
선교사들의 1차 목표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었다. 인권운동이나 해방 등이 1차 목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일본이 한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일에 대하여 같이 저항하고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시간이 지나며 한국의 기독교는 많이 부흥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보기에 한국은 독립된 나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사실상 국권이 넘어간 이후 선교사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피할 수 없다면 서구 수준으로 올라온 일본에게 한국의 지배를 맡겨 한국도 발전하면 선교가 용이해질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이 나타났다. 일부 선교사들은 노골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지지하기도 했다. 친일행적을 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면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이를 위해 신앙을 좀 더 ‘영적인’ 것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장치, 제도, 행동을 유도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과 선교사의 갈등이 일어났다. 분화의 시작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초기 개신교 역사에서 나타난 부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있다. 정치사회학적,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시각이 있다. 선교사들이 영적인 것,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국가적인 측면이나 일본이 저지른 악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의도를 가지고 부흥을 조작했다는 주장이다. 당시에도 선교사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편 초기 미션스쿨을 통해 성장한 기독교민족주의는 1905년부터 한국인이 세운 학교를 통해 더욱 토착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보창학교, 오산학교, 대성학교가 대표적인 학교였다. 이 무렵 여러 언론매체가 등장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1896년 「독립신문」, 1904년 「대한매일신보」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1903년에 창립된 YMCA를 구심점으로 청년 기독교 민족운동이 전파된다. 을사늑약 체결 후 수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기독청년들의 역할은 상당했다.
이 시기 활발했던 의병운동에 기독교인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의병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선교사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는 의병이나 의열 활동에 긍정적이었다. 일본 통감부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 김병록, 이동수, 김정익, 전태선, 조창호, 1900년대 국내 최대 항일 비밀결사조직 신민회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1900년대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갈라지는, 특히 기독교 지식인과 선교사, 민중 기독교인 사이에서 갈라지는 현상이 시작된다. 이 분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 일반 신자와 선교사, 그리고 교회 밖 활동을 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갈등으로 확산된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 중 더 많은 이들이 감리교인이었다. 상대적으로 장로교인들이 교회 안에 머무르는 경향을 보였다.
3.1 운동과 개신교
3.1 운동은 기본적으로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이지만 일종의 종교운동으로 볼 요소도 있다. 일본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천도교, 대종교는 정식 종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기독교는 애국 성향을 보이면 탄압받았다. ‘포교규칙’에 따라 모든 종교단체 설립은 허가를 받아야 했고 이후 검열을 받았다. 일본이 종교에 대해 대처할 때 효과적으로 사용한 정책은 교육법이었다. ‘사립학교법’에 따라 일제의 교육규칙과 기준에 맞지 않는 학교는 폐교되었다. 재정의 한계가 있었던 기독교 학교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각지의 교회가 자체적으로 세워 운영하고 있던 소학교 상당수가 없어졌다. 1910년 무렵 829개에 달하던 종교계 사립학교는 3.1 운동이 진행 중이던 1919년 5월에는 298개로 줄었다. 이 법은 종교만을 겨냥한 법은 아니었으나 종교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3.1 운동에 기독교와 천도교계 인사가 대거 참석한 배경에는 이런 요소도 있었다. 1910년 이후 선교사들은 일본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는다. 선교와 외교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조직 차원에서 할 수는 없었다.
3.1 운동 예비 모임이 국외에서 조직되고 1919년 2월 8일에 일본유학생들이 동경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국에서는 종교지도자와 학생을 중심으로 반응이 나타나 종교․학생 연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3.1 운동이 일어난다. 3월 1일 이후 전국에서 계속해서 벌어진 크고 작은 시위에서 종교인, 특히 종교계 학교에 속한 교사나 학생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당시 시위 후 수감되거나 검거된 이들 중 최소 절반은 종교인이었고 이 중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인 비율은 17-22%였다. 천도교는 11-15%, 불교는 1%, 유교는 1-3%였다. 당시 총인구 중 기독교인 비율이 1.5%에 불과했던 상황을 보면 이 비율은 놀라운 것이다. 교역자의 비율은 더욱 높았고, 피검된 여성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65.6%를 차지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모든 운동을 주도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3.1 운동에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토착화된 종교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3.1 운동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두 가지 입장을 가졌다. 일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이 있었고, 참여하는 학생들이 희생당할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현실적 판단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그저 반대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선교사들에게는 분명히 저항하는 학생들의 희생에 대한 것도 염두에 두었다. 선교사와 학생들의 관계에는 갈등이 있었지만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실 1910년대 한국의 기독교는 정체 현상을 보였다. 1900년대 대부흥 시기를 거치면서 기독교가 크게 성장했지만, 1910년대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포기한다. 이 시기 기독교가 타계적인 경향을 나타내며 민족주의 성향이 많이 사라지면서 외면 받은 경향도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도 3.1 운동을 기점으로 다시 기독교가 반등하게 된다. 그리고 1919년 이후에는 확연히 선교사와 한국 개신교인 사이에서의 리더십 이양이 이루어지고 역할이 나누어진다.
192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는 두 가지 유형의 신앙을 낳았다. 첫째, 주류 신앙으로서 초월적 경건주의 신앙이다.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 부흥사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 흐름에 경도되었다. 경건주의적 개신교 신앙은 3.1 운동 직후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가 가득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신앙은 1930-40년대에는 타계적이고 내세 중심적인 재림 및 종말론적 신앙 전통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계몽주의 신앙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지양하거나,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국민의 수준을 높여 일제에 맞선다는 소위 ‘민족개조론’ 유형의 소극적인 저항신앙이다. YMCA 등 청년학생단체와 기독교계 중, 고등, 대학교가 주축이 되었고 윤치호, 이상재, 신흥우, 김활란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교파교회 및 신학의 확립
1901년 감리교에서는 최초의 한국인 개신교 목사를 배출했고 장로교에서도 1907년 독노회 설립 이후 목사를 배출한다. 목회자 안수를 위해서는 신학교육이 필요했다. 장로교는 1900년 이전부터 주로 농한기를 이용하여 교육하는 ‘신학반’(Theological Classes)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는 1901년 이후 4개 장로교 선교회가 연합하여 전임 교수선교사를 임명하는 평양신학교로 재편된다. 감리교는 1905년 서울에 협성신학교를 설립함으로 공식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동양선교회가 1911년에 서울에 세운 성서학원은 오늘날 서울신학대학의 기원이다. 1908년에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도 1910년에 구세군식 사관학교를 세웠다. 1912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후원 하에 한국 최초의 초교파 신학 연구기관인 피어선 성경학교(오늘날 평택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교단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한국 기독교 지형을 지배한 것은 한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선교가 교단 중심으로 시작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1920년대 이후 뚜렷해진다. 만약 장로교 신학교가 평양이 아닌 서울에 세워졌으면 신학 색깔이 상당히 달라졌을 수 있다. 교단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연합하는 것이 강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지역갈등이 작용하기도 했다. 1907년 이래로 서북지역(평안도, 황해도) 기독교 대 비서북지역 기독교의 분화가 나타나고 1920년대 이후 이것이 더욱 심화된다.
1920년대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을 비교하면 교단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두 학교 모두 성경신학을 가르치는 비율은 높다(감리교 25.5%, 장로교 38.5%).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성경신학을 중심으로 역사신학(16.8%), 이론신학(20.8%), 실천신학(18.7%) 등 신학을 가르치는 비율이 높았다. 또한 당시 장로교에서 성경신학을 가르치던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성경해석을 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것이 장로교 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장로교 신학교에 비해 감리교 신학교는 언어, 기초 인문 등을 가르치는 교양의 비율(46.6%)이 아주 높았다(장로교 5.2%). 당시 감리교 신학교는 영어, 일본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의 과목도 가르쳤다.
이런 이유로 감리교는 장로교에 비해 미국, 일본으로 유학가는 학생의 비율이 높았고, 그 결과 한국인에 의한 창의적 신학 작업도 먼저 이루어졌다. 감리교 유학생들은 새로 배워 온 내용을 소개하거나 창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감리교의 자유로운 신학 학풍 전개에 기여했다. 장로교 유학생들은 강한 보수주의 입장을 취하거나(박형룡), 온건한 개혁파라 하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남궁혁). 그리고 장로교는 사역을 주로 ‘교회’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고, 감리교도 여전히 교회 중심이기는 했으나, ‘사회’운동이나 ‘연합’기관 활동에서 장로교보다 더 열심히 참여하였다.
1920-30년대 한국교계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분규에는 교파 간, 교파 내부의 신학적 차이가 작용했고 한편으로는 지방색, 교권, 선교사와의 관계 등이 맞물려 있었다. 선교 초기 단계에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 정책은 선교사들이 협력하는 가운데 효과적으로 선교가 이루어지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리더십 이양과 역할 분화가 나타나고 1920년대 이래로 교세의 지역적 차이가 벌어지면서 결과적으로는 한국 교회 분열의 요인이 되고 만다.
장로교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으로는 1934년 총회에서 다루어진 ‘여권 문제 사건’(김춘배)과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 사건’(김영주)이 있었다. 또한 1935년에는 성서비평학을 사용한 주석인 『아빙돈 주석』과 관련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길선주는 당시 이 주석을 이단서로 정죄하였고, 선교사 곽안련은 개별 조사 후 관련 인사들에게 반성하는 의미의 각서 제출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는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이 『신학지남』에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장로교가 교단의 보수성을 공식화하고 내부의 진보인사를 배제하고 감리교와의 차이를 뚜렷하게 부각시켜 이후 연합 및 교류를 거의 철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해방 후 교단 분열의 징조를 확인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신편찬송가 사건’, ‘기독신보 사건’이 있었다. 신편찬송가 사건은 원래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사용하던 「신정찬송가」를 장로교가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장로교 실세 정인과가 만든 「신편찬송가」를 교단이 공식 사용하기로 결의한 사건이다. 장로교와 감리교뿐 아니라 장로교 내 서북계와 비서북계의 긴장을 보여 준 사건이기도 하다. 기독신보 사건은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발행하던 「기독신보」를 1933년에 한국인 최초로 사장에 취임한 전필순이 장악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비서북계인 기호지방(서울경기) 인사로 사장에 취임한 전필순은 기독교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진보인사였다. 전필순은 사장이 된 후 의도적으로 한국인 직원만을 채용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선교사를 배제하면서 조선예수교서회와의 관계가 나빠져 감리교를 배제하게 되고 진보인사의 글을 자주 실으면서 서북계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서울과 영남을 중심으로 정치력과 주도권이 집중되어 온 한국에서는 서북 지역은 역사적으로 홀대받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감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외부 사상과 요소에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에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증한 데에도 이러한 요인이 영향을 주었다.
정리하면, 1920년 이래로 나타난 한국 교회의 분열은 전통적으로 한국에 있었던 지역 갈등이라는 배경 하에서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의 갈등, 교파 사이의 신학적 문제, 교파 안에서의 지역 갈등, 선교지 분할정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등에 의한 것이었다.
보론: 선교현지의 독립과 선교사의 활동,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한국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의 상황에 대처한 것을 두고 그들이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쉬워도 선교사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지혜로운 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선교사들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아쉽다는 입장을 가질 수는 있다. 종합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활동에 대하여 무조건 ‘반민족주의자’, ‘친일’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공정한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개화파 지식인의 친일 행위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했을 때, 대표적인 사람이 윤치호다. 윤치호가 쓴 일기가 있다. 50년 분량의 일기가 남아 있다. 윤치호의 감정과 그가 이해한 시대적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윤치호는 분명 친일을 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맞다. 그런데 친일의 동기가 복잡하다. 일기를 통해 보자면 윤치호는 스스로 자신의 친일이 애국의 다른 방편이라 생각한 것 같다. 한국이 잘 살고 부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일본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진화론이라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었다. 윤치호는 서구화된 나라, 이상적인 체제와 질서를 갖춘 나라를 원했다. 윤치호는 처음에 일본에 저항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체념하고 일본의 수준에 올라야 한다는 방향으로 수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를 보통 친일로 평가하고 이를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윤치호의 일기를 읽어 보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행적에 대한 평가를 다양한 해석의 틀로 신중하게 내릴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친일의 유형을 다양하게 구분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윤치호의 행적의 원인과 결과는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다.
설요한 기자 juicecream@naver.com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