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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2 20:49

고통의 신학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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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9일(금) 오전 11시 천안교회당에서 미래교회포럼(위원장 오병욱 목사)이 열렸다. 권수경, 최승락 교수가 고통을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본지는 두 교수의 논문 전문을 각각 연재한다.


 

 

 

고통의 신학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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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경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가. 고통과 복음의 관계

 

1. 복음과 보편적 고통1)

 

2021년 미래포럼의 주제는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다. 여기서 ‘보편적 고통’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는 어떤 특정한 고통이 모두에게 미치는 경우다. 고통은 대부분 개별적이어서 내가 아플 때 남은 안 아플 수 있다. 그런데 그와 달리 모두가 함께 경험하는 고통이 있는데 그게 바로 보편적 고통이다. 우연성을 가진 개연적 보편성이다. 지금 인류 전체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 범유행이 그런 고통으로서 초기에 제압했더라면 보편적 고통으로 확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는 고통 자체의 특성으로서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겪는다는 뜻에서 고통은 보편적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죽음이든 질병이든 어디 부딪쳤든 배신을 당했든 모두가 아프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종류든 반드시 고통을 겪는다.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므로 고통은 필연적이면서 또한 보편적이다. 코로나가 온 인류를 덮치기 전부터 고통은 전 인류가 함께 겪고 있는 보편적 현상이었다.2)

 

   첫째의 경우 즉 우연성을 가진 보편적 고통은 하나의 개별적 고통이 어떻게 모두에게 미치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 그런 분석은 그 고통의 의미 곧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박해의 고통을 겪었다. 본인들은 무슨 뜻인지 잘 몰랐겠지만 성경은 그로 인해 복음이 확산되었다고 말한다 (행 8:1-4). 코로나19는 보편적 고통인 만큼 전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둘째의 경우 즉 필연성을 가진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구는 그 고통을 공유하는 인간의 공통된 조건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한다. 인간 조건에 대한 연구는 보편적 고통의 심층적 의미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조건의 핵심은 피조성과 죄성이다. 보편적 고통의 경험은 근본적 인간 조건과 맞닿아 있으므로 삶의 다양한 측면을 살피는 좋은 통로가 된다. 그런데 두 종류의 보편적 고통은 함께 간다. 주로 우연적 고통을 계기로 하여 필연적 고통을 인식하게 되므로 코로나19는 고통의 보편성을 논의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된다.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탐구하는 일이나 인간의 공통 조건을 연구하는 일 모두 현실이 제공하는 자료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을 분석하고 뜻을 찾는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므로 보편적 고통에 대한 논의는 시작부터 신학적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볼 때 ‘보편적 고통’을 말하기 전에 ‘복음’을 먼저 언급한 점은 중요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음만이 고통을 바르게 설명한다. 복음은 우선 특정한 고통이 보편적 고통으로 확장된 이유와 의미를 찾는 길잡이가 된다. 또 인간 조건을 설명함으로써 고통 자체의 의미를 찾는 근거가 되고 동시에 그 고통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도 가르쳐 준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그렇게 볼 때 코로나19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2021년의 미래포럼은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 하나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될 것이고 오늘의 첫 모임은 그런 노력을 위한 성경적, 신학적 기초를 놓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고통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신학적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또 관련된 여러 개념도 분류하고 그것들의 상호 관계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고통을 논할 때 사용되는 용어에는 고통, 고난, 아픔, 고뇌 등이 있다. 슬픔, 분노, 번민, 답답함, 쓰라림, 외로움 등도 포함된다. 중요한 두 가지를 고르자면 고통(pain)과 고난(suffering)이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사전의 정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을 괴로움이나 아픔으로 정의하고 아픔은 괴로움으로 또 괴로움은 고통으로 풀고 있다.3) 일단 고통과 고난을 구분하자면 고통은 직접적인 아픔인 반면 고난은 고통을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고통은 우리 몸이 느끼는 감각의 하나다. 그런데 그 감각이 신경을 거쳐 뇌로 전달되어 고통으로 느껴진다. 고통의 여부는 마음이 판단한다. 고난은 그런 느낌에 더하여 그런 느낌을 갖게 만드는 상황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논의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고통에는 정도가 미미한 것도 있다. 철학적으로 정의할 때 약간의 결핍, 순간적인 불편,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도 엄밀하게 말하면 고통에 속한다. 그렇게 본다면 고통은 피조물 곧 유기체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배가 고플 때 먹고 목이 마를 때 마시게 되는데 약간의 시장기도 고통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은 고통에 대한 논의에 포함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핍에 대한 느낌이 너무나 강하여 몸에 강한 증상을 남기고 마음까지 흔드는 그런 경우로서 그것을 겪는 본인이 싫어한다는 점이 핵심이다.5)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고통 역시 철학적으로 정의한 고통이 아니라 상식적 경험적 현상으로서, 싫은 어떤 것, 없었으면 또는 얼른 사라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그런 증상 및 느낌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고통은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없는 ‘문제’다.

 

   삶에 고통이 있다. 몸의 아픔, 마음의 아픔이 있다. 다치고 병에 걸린다. 먹고 살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하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더 많은 고생을 한다. 그런 뒤에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한다. 내가 성공하지 못해 괴롭고 남이 나보다 잘 되면 배가 아프다. 욕을 듣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일이 잘 될 때도 혹시라도 닥칠 불행을 생각하면 괴롭다. 고통을 모르는 이는 없다. 고통은 정말 보편적이다.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그 고통의 절정은 죽음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은 인류가 겪는 고통의 보편성을 입증한다. 고통의 보편성은 모두가 겪는다는 긍정적 표현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부정적 표현에 더 잘 나타나 있다. 모두가 싫어하고 멀리하려 하는 것이 고통인데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또 고통이다. 내가 바라는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은 나를 외면할 때가 많지만 바라지 않는 고통은 절대 나를 피해가지 않는다. 그것이 모든 인류가 겪는 공통현상 곧 보편적 고통이다. 고통은 정말 문제다.

 

   고통은 관계를 통해 존재도 하고 증폭도 된다. 내가 다쳐 아픈 것이 나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내가 아프면 내 가족이나 친구 친척 등 가까운 사람들도 그 고통을 공유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전 인류의 고통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을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고통이다. 이 점에서 고통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개별적 고통을 보편적 고통으로 확장시키는 동력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고통을 위로하고 덜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고통을 만들어내고 증푹시키는 원인이 된다. 빛과 그림자처럼 얽힌 관계다. 사랑의 반대인 미움은 미운 사람의 고통을 즐거워하여 반대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고통도 아니었을 경우가 인생에는 많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마음가짐이 지혜로 통하기도 한다.

 

 

3. 고통의 신학적 의미

 

   이 발제의 주제는 “고통의 신학적 의미”다. 신학에는 여러 분과가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조직신학 내지 교의학을 가리킨다.6) 그런데 교의학은 신학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분과이므로 “고통의 신학적 의미”는 고통의 뜻을 성경 전반, 기독교 신학 전체의 틀에서 찾아보는 작업이 된다.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에서는 고통이라는 주제가 부각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전체 신학의 관점에서 고통을 핵심 주제로 다룬 일은 거의 없고 다른 주제와 관련해 부차적으로 언급하는 정도였다. 고통은 주로 죄가 가져 온 결과로 또 그리스도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 경우에도 고통 자체를 체계적으로 다루거나 분석하지는 않았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도 고통을 크게 다루지 않는다. 고통이 성화에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또 그리스도의 수난이 성도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언급한 정도다.7) 다른 개혁자나 신학자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개혁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많이 사용한 벌코프의 ≪조직신학≫도 그리스도의 고통의 유일성만 간단히 설명한다.8) 고통을 개별 주제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사실 보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이나 별 차이가 없다.

   신학에서 고통을 독립된 주제로 다루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은 핵심에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은 죄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전통 신학은 죄가 가져온 결과보다 원인인 죄 자체를 주로 다룬다. 게다가 죄가 가져온 결과에는 고통 외에도 불의, 탐욕, 속임, 폭력, 음란 등이 있어서 고통은 그 여럿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고통이 독립적인 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세기의 일이다. 아마도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9) 죄가 낳은 다양한 열매 가운데서 고통은 상대적으로 늦은 관심을 받은 셈이다.

 

   보편적인 문제인 만큼 모두가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의학이나 심리학에서도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러 분야 가운데서 고통을 원론적으로 다루는 분야는 철학이고 사상이고 종교다. 도대체 고통이라는 것이 왜 생겨났을까? 고통이 인생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을까? 이런 문제와 씨름하다 생겨난 것이 소위 종교다. 종교는 어느 것이든 고통의 문제를 깊이 다룬다. 자연의 한계 내에서 고통 자체를 주제로 삼아 깊이 천착한다. 특히 불교는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 부른 것처럼 고통이 거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런 종교들과 비교해 볼 때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등한히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고통이 전체 신학의 중심은커녕 주요 주제의 하나로도 언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기독교 신학은 고통을 절대 가벼이 대하지 않았다. 고통이라는 제목만 따로 뽑지 않았을 뿐 고통은 기독교 복음과 신학의 중심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였다. 성경 첫 부분에서 이미 고통은 인류의 숙제가 되었고 구약 욥기도 고통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시편에도 고통받는 성도의 부르짖음이 가득하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불의와 고통에 관한 것이 많다. 신약성경도 인류의 고통과 그 고통에 참여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으며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도 고통과 악의 문제는 신정론이라는 분과를 태동시켰다. 사실 복음의 기본을 담은 창조, 타락, 구원의 구도 자체부터 없었던 고통의 등장 및 그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과 나란히 달린다. 복음은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 고통이 넘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고통의 의미를 일깨우고 또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참 방법을 제시한다.

 

 

 

나. 고통에 대한 자연적 접근

 

1. 종교가 탐구한 고통

 

종교가 전부 고통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종교라면 고통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삶의 근본 문제와 씨름하고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종교인데 고통은 인간 존재 자체와 깊이 얽혀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종교가 고통을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보편적 고통인데도 해석이 다양한 이유는 성찰의 바탕이 되는 신화와 세계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지만 비진리는 다양한 모양을 갖는다. 사람은 마음에 종교의 씨가 있어 하나님을 찾고자 시도하지만 어둠 속을 더듬는 형편이므로 각자의 상황에 따라 온갖 이론들이 태어난 것이다 (창 11:1-10; 행 17:26-27; 롬 1:18-23). 인도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는 범신론 및 윤회론을 바탕으로 고통의 문제를 설명한다. 중국의 경우 실천 중심인 유교는 고통을 거의 다루지 않는 반면 원리를 탐구한 도교는 범신론에 입각하여 자연과의 조화 문제로 고통을 푼다. 서양에서는 범신론에 바탕을 둔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세계관이 운명론이라는 틀에 맞추어 고통을 이해하려고 했다.

   자연 종교의 공통된 특징은 고통을 개별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탐구했다는 점이다. 몸과 마음의 온갖 아픔에다 모든 고통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제까지 파고들었지만 그것을 보편적 고통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고통의 원인을 탐구할 때도 질병, 상처, 죽음 등 개별 현상에 대한 자연적 원인만 따졌을 뿐 그 모든 것들이 공통분모인 고통이라는 것 자체가 왜 있어야 하는지는 묻지 못했다. 자연의 한계다. 다른 모든 유기체가 그렇게 생겨나 자라다가 죽으므로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도 같은 차원에서 보았을 뿐 자연 그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좋은 보기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저승 방문 이야기다.10) 저승으로 찾아가 병, 노쇠, 가난, 전쟁, 사형 등 죽음의 다양한 원인을 살펴보았지만 죽음 그 자체가 문제요 다른 어떤 원인이 낳은 결과임은 파악하지 못했다.11) 자연의 한계를 가진 종교가 죽음의 원인이라며 제시한 것은 사실 죽음의 계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죽음을 비롯한 고통의 참 원인과 그 고통이 삶에서 갖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보편적 고통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도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한계는 모든 자연종교가 공유한다. 고통을 개별 현상으로만 파악한 결과 고통 그 자체의 문제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이 욕망이라고 보고 욕망을 줄이거나 없앰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다.12) 그래서 속세를 떠나 깊은 산으로 가 고행을 하며 도를 닦는다. 하지만 수십 년의 고행과 수련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욕망의 존재는 자연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었다. 다른 종교도 비슷한 경험적 분석를 시도하고 고행, 금욕, 절제, 자선 등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물론 대부분의 종교가 가르치는 실천적인 방안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사회적인 유익도 없지 않으나 보편적 고통이 갖는 근본 문제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고통을 해결하기보다 그대로 수용하라고 가르친 종교도 많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사상은 범신론적 운명론을 가르친다. 범신론은 우주의 모든 것이 신의 일부로서 전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가르침이며 운명론은 우주의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되어 있으므로 아무도 바꿀 수 없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우주와의 조화를 최고의 덕으로 가르치며 개별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관조의 태도를 강조한다. 고통의 경우 나 개인에게는 고통이지만 전체의 안목에서 볼 때는 좋은 것이라 여기고 그대로 수용하라는 가르침이 된다.13) 역시 범신론의 일종인 중국의 도교도 무위자연 곧 자연과의 합일과 조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도교에서도 고통은 그저 수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런 방법은 새옹지마 같은 처세술로도 나타났다.14) 지금 닥친 불행은 그와 반대인 복의 계기일 수 있고 지금의 복된 상황은 그와 반대인 불행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히 거리를 둠으로써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아이소포스의 신포도 이야기도 같은 지혜를 전한다. 이런 논리는 대부분 심리학적 방어기제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문제를 알아 해결하기보다 증세만 서둘러 없애려는 미봉책으로 그친다.

 

 

2. 고통과 악의 결합

 

   고통은 개인적으로도 문제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더 큰 문제로 발전한다. 사회 곧 인간관계는 그저 아픔을 증폭, 공유, 치유하는 역할로 그치지 않는다. 고통이 사회적 차원에서 갖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의라는 악이다. 고통 자체도 아프지만 그 고통이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 공평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더 큰 아픔을 가져온다. 사람은 자연의 빛 가운데서도 고통이 어떤 잘못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양심을 두셨기에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리는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그래서 남다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하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자신이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런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성찰은 언제나 고통 자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그 고통의 불의한 측면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고통 자체도 괴롭지만 그런 고통이 무원칙으로, 때로는 부당하게 주어진다는 점이 우리를 더 괴롭게 한다. 우리 삶은 부당해 보이는 그런 고통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잘못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뜻밖의 사고, 위중한 병, 쓰라린 좌절 등의 고통을 겪는다. 장례식에 참석해 보면 남보다 일찍 죽은 사람들은 유달리 착하게 산 사람들이다. 또 죄를 짓는 사람과 고통을 받는 사람이 다르다. 간음죄는 남편이 지었는데 고통은 아내와 아이들 몫이 된다. 갑이 술을 먹고 운전하면 을이 그 차에 받혀 죽거나 다친다. 술을 마신 사람은 잘 다치지도 않고 벌도 솜방망이다. 인간이 사는 어디에서나 이렇게 고통과 악이 결합된 경우가 가득하다. 이런 부당함이 있어 개별 고통을 통해 보편적 고통을 깨닫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자연 종교는 이 문제와도 씨름하였다. 현실에 존재하는 부당함을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냈는데 자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보니 경험의 범위를 넘어가는 우주론을 활용하게 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범신론과 운명론이 결합된 우주론을 내세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결국 신의 뜻이므로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보기에 부당한 일도 완전한 전체를 이루는 아름다운 일부가 된다. 로마의 황제 겸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이 입장을 잘 보여준다.

 

   “바깥 일로 마음이 괴로운가? 그대를 힘들게 하는 건 그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그대 자신의 판단일세. 그 판단은 지금 그대의 힘으로 얼마든지 몰아낼 수 있네,”15)

   마음을 비우고 그대로 수용하는 이런 태도는 언뜻보면 심오해 보인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불교 화엄경의 가르침하고도 통한다. 하지만 이는 고통받는 자의 아픔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하는 비정한 논리다. 지극히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현실의 부조리를 그대로 덮고자 하는 불의한 동기까지 품고 있다. 현실에서 돈과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나 어울릴 그런 논리로서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저 체념하고 포기하라는 압박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의 종교, 특히 불교는 특유의 윤회론을 이용해 고통과 악의 결합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스토아 운명론처럼 윤회론 역시 입증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도의 종교도 세상에 고통과 더불어 불의가 있음을 일단 인정한다. 악한 사람이 잘살고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일이 많음도 인정한다. 그러면서 윤회론을 이용해 그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낸다. 언뜻 보기에는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생에 지은 죄를 현세에 갚는 것이라는 말이다. 나쁜 일을 하고도 잘되는 듯 보이는 사람 역시 전생에 그런 복을 누릴 업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론은 똑같다. 공의든 불의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한편 논리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인도 종교의 설명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은 현세의 부정과 불의를 그대로 용인하는 잘못이 있다. 이들은 자연의 한계 안에서 창조만 느꼈을 뿐 죄와 타락은 몰랐다. 둘째로는 돈과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높이게 된다. 사회정의나 공평, 자비 등의 가치는 외면을 당하고 돈과 권력을 무한 추구하게 만들 가능성마저 있다. 셋째로는 현재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는 노력마저 우주의 섭리에 대항하는 행위로 규정하게 된다. 결국 부패한 사회구조가 고착되고 영속화된다. 넷째로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바로 이 점이 이 이론이 가진 가장 불의한 요소다. 고통 자체만 해도 힘겹고 부당함 때문에 더 괴로운데 윤회론에 입각한 설명은 그 고통의 원인뿐 아니라 부당함의 원인까지 고통받는 당사자에게 뒤집어씌운다. 현세가 이미 고통인데 전생에서도 나쁜 사람이었다니 정말 견디기 어렵다. 윤회론도 스토아 사상과 마찬가지로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 억압하고 지배하는 일에 활용하기 좋은 논리가 된다. 불가촉 천민의 존재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부당한 고통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그 고통을 더 부당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 윤회론에 바탕을 둔 인도 종교의 설명이다.

 

 

 

다. 성경이 말하는 고통

 

1. 고통의 원인

 

자연의 한계에 갇힌 여러 종교는 눈에 보이는 것만 그대로 수용해 설명한다. 자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운명론이나 윤회론 같은 형이상학을 도입하지만 그 역시 자연의 한계 내에서 합리적 설명을 도출하기 위한 고안품에 지나지 않는다. 기발하기 그지없지만 입증할 수 없는 논리요 막대한 부작용을 안고 있다. 고통을 해결하기는커녕 증폭시키며 고통의 양극화라는 부당함까지 낳는다. 이와 달리 성경은 사람의 한계,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고통의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도 분명한 설명을 주며 올바른 해결책까지 제시해 준다.

   기독교 복음은 처음부터 고통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고통의 문제는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기본적 기독교 세계관 구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경 첫 부분은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에 바로 이어 그 아름다운 우주에 왜 고통과 악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처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의 형상 인간에게 고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고통이 왔다. 원인은 죄다. 특히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교만한 욕망이 불순종으로 이어져 인간에게 고통이 왔고 그 고통의 절정인 죽음도 왔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고통은 인간의 조건 가운데 피조성이 아닌 죄성에 집중한다. 창세기 첫 석 장은 첫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 다양한 고통과 죽음이 왔음을 말하고 있으며16) 로마서 5:12-21 및 고린도전서 15:21-22 역시 아담의 불순종의 죄가 죽음을 가져왔다고 확인하고 있다. 창세기 3:17은 땅의 저주를 말하고 로마서 8장은 전체 피조물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고통은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다.

   자연 종교도 고통의 원인이 죄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는 알고는 있었다. 사람의 마음에 남은 영광의 흔적 덕분이다. 그렇기에 신화도 신에게 대항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그리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그런 도전과 그 도전에 대한 징벌은 개별적인 사건일 뿐 온 우주를 포괄하는 거대담론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쉽게 말해 보편적 고통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에 반해 계시는 인간이 우주의 창조주를 대항하여 저지른 명백한 죄와 그 죄가 온 우주에 미친 영향 곧 보편적 고통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이 너와 나 사이의 수평적 차원 이전에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는 수직적인 욕심이었다는 것이다. 노아의 아버지는 죄가 낳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고 아들 이름을 노아로 지었다 (창 5:29). 모세도 인생을 간단히 줄여 “수고와 슬픔”이라 하였다 (시 90:10). 창세기 첫 석 장의 의미가 구약 시대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17) 주님이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죄로 멸망하게 된 인간의 상황이 거기 분명하게 나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18) 기독교 복음은 고통의 문제를 기독교 세계관의 틀에 맞게 정확하게 설명한다.

 

   죄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불신자들이 볼 때 자연종교가 말하는 윤회론이나 범신론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일 수 있다. 계시를 계시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당연한 판단이다. 하지만 계시는 자연종교가 내세우는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현실 가운데서 그 진리성을 명확하게 입증한다.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의 보편성은 모든 인간이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한다는 사실과 통한다. 사람은 자의식을 갖는 순간 이미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전도를 해 보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또 인간을 선하게 본 공산주의나 여러 사상의 실패도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한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는 성경의 규정은 그 자체로는 숨어 있는 요소일지 모르나 그 선언의 유효성이 삶의 현실을 통해 강력하게 입증된다는 점에서 자연종교가 가진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2. 고통의 유익

 

고통이 죄의 결과라면 고통은 백 퍼센트 부정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라면 없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고통이 왔다. 따라서 죄라는 부정적 조건이 뒤덮고 있는 세상에서는 고통 역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의미 외에 다른 뜻도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죄를 깨닫게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고통은 죄의 존재를 일깨운다. 죄를 병에 비기자면 고통은 그 죄의 존재를 알리는 증세다. 증세는 다양하지만 병은 오직 하나 죄다. 그렇기에 고통은 보편적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고통받던 수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몸의 병만 고치고 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의 병이 나은 것을 계기로 영혼의 병까지 고쳐 구원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주님이 당신을 의사에 비기신 것이 바로 그런 뜻이었다 (마 9:12; 막 2:17; 눅 5:31). 이들에게 몸의 병은 영혼의 병의 존재를 일깨우는 증세였던 셈이다. 자연종교는 개별적 고통만 알았기에 증상을 병으로 착각한다. 따라서 병을 고치려 애를 썼지만 사실상 병은 그대로 두고 진통제만 투여하고 말았다.19) 통증이 줄었으니 나았다는 착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보편적 고통을 인식함으로써 이 땅의 고통은 병이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병에 대한 증세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죄의 병에서 고침받는 참 치료법을 가르쳐 준다.

   고통에 담긴 이런 긍정적인 뜻을 지난 세기 최고의 변증가인 씨 에스 루이스가 잘 설명해 준다. 고통이 아니라면 그저 무시해버릴 수 있기에 하나님은 아무도 쉽게 외면하지 못하는 고통을 이용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를 가만 있게 놔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을 통해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고통을 통해서는 고함치신다. 고통은 귀 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20)

 

   아프지 않으면 무시한다. 그런데 고통이 있다. 그래서 찾는다. 자연종교가 그래서 생겨났다. 물론 계시가 없어 어둠 속을 헤맨다. 하지만 고통의 존재는 적어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히 알게 해 준다. 고통이 없다면 그대로 조용히 멸망한다. 그런데 고통이 있어 사람을 못살게 군다. 아프기에 찾아 나선다. 몸부림을 친다. 물론 자연의 한계 안에서는 답이 없기에 계시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진리로 나아오는 계기는 될 수 있다. 몸의 고통, 마음의 고통, 개인적 고통, 사회적 고통 다 해당된다.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이들은 주님을 잘 찾지 않는다. 반대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계기로 참 구원에 이를 가능성도 크다. 세리나 창녀가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 하신 주님 말씀이 고통이 가진 유익을 일깨운다 (마 21:28-32; 눅 7:37-50). 따라서 고통에는 은혜의 요소가 포함된다.

 

 

3. 그리스도인과 고통

 

   고통은 불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참 하나님을 만난 신앙인에게도 여러 가지 유익을 줄 수 있다. 이 역시 죄가 있는 세상에서 고통이 지닌 유익이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고통의 유익은 부정적, 긍정적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죄에 대한 징계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이런 고통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 만든다.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죄와 싸워 지는 경우가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하나님은 고통을 이용해 우리를 꾸짖으신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죄를 깨닫고 거룩함에 나가아게 된 신앙인의 고백이 많이 나온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 71).

   신약성경도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을 때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의 매를 때리신다는 것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히 12:5-13; 벧전 2:20; 3:17). 하나님은 말씀이나 성도의 교제를 이용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을 사용하신다.21) 고통은 효과가 있다. 루이스의 말처럼 고통은 우리를 가만 있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멀리 하게 만든다 (벧전 4:1). 고통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22) 죄 없으신 우리 주님이 고난을 통해 완전함에 나아가셨다면 죄 가운데 사는 우리는 더욱 큰 유익을 기대할 수 있다 (히 2:11).

   이런 사랑의 매를 맞을 때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사람은 모두 죽은 다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가 성경 곳곳에 담겨 있다. 오해하지 말자. 구원이 내 공로에 달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좋은 나무가 되었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징계의 고통을 겪을 때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낳고 우리의 고통으로 이어졌음을 깨닫는다. 그 죄와 고통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깊이 깨닫는다. 우리 주님이 우리 대신 이미 심판을 받으셨다. 따라서 훗날의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그런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죄를 멀리하게 된다. 징계로 받는 고통은 하나님께 감사드려 마땅한 은혜의 계기다.

 

   두 번째 고통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겪는 고통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 결과 고통을 겪기도 한다. 한 마디로 복된 고통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이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 된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요 15:18-19).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삶은 핍박을 부르는 삶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의 복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 5:10-12).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겪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삶이다 (행 14:22; 벧전 2:20; 3:14, 17). 이 경우의 고난은 우리의 영적 신분을 일깨우고 확인시켜주는 훈장과 같은 복된 고난이다. 그래서 주님의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한 뒤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았다며 기뻐하였다 (행 5:41). 이런 고난은 우리에게 인내의 열매를 준다 (약 1;2-4). 우리에게 연단의 유익을 주어 구원의 완성을 향한 우리의 소망을 더욱 굳게 만드는 유익이 있다.

 

   따라서 고통은 어떤 것이든 누구에게든 유익이 있다.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성기 역할을 하고 성도들은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 된 기쁨을 누리도록 돕는다. 따라서 고통을 만날 때 우리가 보여 마땅한 첫째 반응은 감사요 찬송이다.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굳게 다져야 한다. 고통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만든다.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의 일이다. 하나님은 고통이 없는 천국을 약속하셨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에게는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따름이다. 죄 때문이든 순종의 결과든 구원받은 성도가 경험하는 고통은 하나님을 신뢰할 이유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라. 문제가 되는 고통

 

1. 부당한 고통, 까닭 모를 고통

 

   성경의 기본 구도에 비추어 본 고통의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다. 처음에는 세상에 고통이 없었다. 창조다. 그런데 죄 때문에 고통이 왔다. 타락이다. 죄 있는 세상에서 고통은 인간이 죄인임을 일깨우고 죄를 멀리하게 하는 유익이 있다. 구원이다. 마지막 날 하나님은 우리를 이 모든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구원의 완성이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논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고통은 생각보다 복잡한 주제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인가? 첫째는 부당한 고통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올 때 고통을 도입하되 부당하게, 억울하게, 악과 뒤섞어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은 신자, 불신자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 불신자의 경우 이런 부당한 고통은 죄의 존재를 깨닫게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들 수 있다. 성도들 역시 공의의 하나님을 믿기에 불의한 고통의 존재는 곤혹스럽다. 둘째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은 주로 그리스도인에게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주님의 제자로 살다가 겪는 고난도 아닌데, 어느 날 뜻밖의 고통이 닥친다.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런 고통의 존재는 그리스도인을 시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구약 시편에는 불의한 고통으로 신음하는 성도들의 부르짖음이 가득하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의 불의 특히 선인의 고난과 악인의 승리로 괴로워한 이야기가 시편에 나온다 (시 73:1-28). 악인은 극악한 죄를 짓고도 벌은커녕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반대로 선인은 바르게 살면서도 고난을 겪고 심지어 하나님께 꾸지람도 듣는다. 분명히 죄 때문에 고통이 왔는데 현실 가운데서는 죄와 고통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선지자 하박국도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는 부당한 고통을 두고 하나님께 호소했다 (합 1:13). 자연종교는 윤회론이나 운명론 같은 것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려 시도한다. 성경은 어떤가? 성경은 우선 그런 부당함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부당함 역시 죄가 낳은 악의 하나임을 말한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그런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기다라고 명령한다 (시 37:1).

 

   불의한 고통과 더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이다. 성도들이 살면서 부단히 겪는 고통이다. 평생을 주님을 섬기며 살던 중년 장로가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뜬다. 사역의 열정을 불태우던 젊은 목사가 교통사고로 부인과 어린 아이를 두고 갑자기 죽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통 자체의 존재보다 부당한 고통,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의 존재가 문제다. 사실 인류가 경험하는 수많은 고통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런 것 때문에 고통이 진짜 ‘문제 (Problem)’가 되었다.23) 고통에 대한 논의도 복잡해졌다. 신자들은 고통의 의미를 찾지 못해 당황하게 되고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찾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든다.

 

   고통의 복잡성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현실 가운데서 고통의 의미를 함부로 규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 자신이 고통을 겪을 때도 죄에 대한 징계인지 말씀대로 살다 겪는 고난인지 아니면 그와 무관한 다른 경우인지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타인의 고난일 경우에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도록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도박장에 다녀오던 버스가 사고가 나 열 몇 명이 죽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교회 수련회에 다녀오던 버스가 사고가 나 열 몇 명이 죽은 일도 얼마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낙뢰로 인한 죽음을 저주라 생각하는 것은 동양적 미신이다. 조심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상이 악과 뒤엉켜 복잡해졌기 때문이며 성경은 그런 복잡한 세상에 대해 정확한 분석과 답을 주기 때문이다.

 

 

2. 불의한 고통의 문제

 

   불의한 고통은 모두에게 어려움을 주지만 특히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무기로 사용한다. 하나님을 찾는 계기가 되라고 주신 고난이 그 존재의 불의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자연종교는 윤회나 운명론 같은 형이상학의 논리를 이용해 답을 피해 간다. 현실 가운데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니 반박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모든 고통이 죄 때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현실 가운데서 입증되는 가르침이다. 게다가 성경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르친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 죄와 고통이 직접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반대인 경우조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이 죄에서 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역으로 이용해 기독교 복음을 공격한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논리는 다소 간단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또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다 (시 136;1). 그런데 세상에는 고통이 너무나 많다. 죄 때문이라 하더라도 죄에 비해 너무 심한 고통이 있다. 또 고통 자체도 문제지만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고통도 많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도 많고 악이 초래하는 억울한 고통도 많다. 죄 지은 사람은 떵떵거리고 착한 사람이 오히려 고통을 당한다. 이런 세상에 만약 신이 있다면 능력이 없어 고통을 없애지 못하거나 아니면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나쁜 신일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말하는 전능하면서도 동시에 좋으신 그런 하나님은 없다고 불신자들은 공격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가르침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런 공격에 대항해 등장한 논리가 소위 신정론 (神正論, Theodicy)이다. 신정론은 악과 고통의 문제를 두고 하나님을 옹호하는 논리로서 교회사에서 천 년 이상 사용되어 왔다. 기본적인 틀은 대개 비슷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빛과 그림자의 논리로 설명한다. 선이 빛이라면 악은 그림자로서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이라는 논리였다. 스토아 우주론의 영향을 받은 논리로서 칼뱅도 우주 전체의 역사가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라는 논리로 부당한 고통을 설명한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가능한 최상의 세계라는 논리를 편다. 이론적으로는 고통이 없는 세상이 가능하겠지만 현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없을 수 없는데 지금 있는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 세상 가운데서는 그나마 가장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나름대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복음을 변호하려 한 시도들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은 너무 차가운 논리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이런 사변적인 논리는 전혀 와 닿지 않는 공허한 이야기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 역시 이런 차가운 논리에는 잘 설득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논리는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을 증대시킨다. 하나님의 책임을 면제시켜 드리려 하다 보니 모든 책임을 고통받는 당사자가 뒤집어써야 한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것처럼 이미 충분이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들 뿐이다. 결국 승리자의 관점에서 만는 논리로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한다.

 

   지난 세기 들어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답변이 등장했다.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들 특히 개혁 인식론을 제창한 앨빈 플랜팅가가 주도한 ‘자유의지 변론 (Free Will Defense)’으로서 기존의 신정론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논리는 이렇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그 자유가 완전한 자유가 되려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마저도 거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유로 정말로 창조주를 거역하고 말았다. 그 결과 고통과 악이 오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이 자유 의지를 남용한 결과 생겨난 고통과 악, 그리고 사람이 자유의지로 만들어 내는 고통과 악에 대해서는 사람 자신이 책임을 져야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 것은 사람을 왜 이렇게 멋지게 만드셨느냐 따지는 것과 같은 무지, 다시 말해 하늘을 보고 침을 뱉는 논리가 되고 만다.

 

   자유의지 변론에도 물론 한계는 있다. 사람의 의지와 무관한 고통 이를테면 천재지변 같은 고통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내는 잘못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비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겪는 까닭 모를 고통이나 불의한 고통 가운데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참 많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함을 일깨운 것이다. 궁극적인 답은 종말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당한 고통을 볼 때마다 그것이 죄에서 왔다는 사실과 인간이 그 부당함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깨워야 한다. 그러면서 내가 부당한 고통을 받는다면 신원해 주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견디고, 혹 그런 불의의 희생자를 볼 때도 같은 위로를 전할 수 있다. 그리고 나든 다른 사람이든 심판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절대로 그런 불의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 까닭 모를 고통의 문제

 

   불의한 고통과 더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까닭 모를 고통이다. 불의한 고통과 달리 이런 고통은 사실 성도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불신자의 경우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고통에 대해서도 굳이 자연적 인과론을 뛰어넘는 이유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까닭 모를 고통은 대부분 남 아닌 자신의 문제다. 남이 고통을 왜 겪는지는 우리로서 알 도리가 없지만 나 자신의 경우는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큰 재난을 겪는다. 불치의 병에 걸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갑자기 죽기도 한다. 일단 말씀을 순종해 겪는 고난은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지은 데 대한 벌로 보기도 어렵다. 물론 어떤 고통이든 가장 먼저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만들지만 내가 겪는 고통의 크기가 내가 지은 죄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경우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가장 작은 죄라도 영원한 멸망을 부를 수 있지만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죄와 벌의 상관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훔친 것은 네 배로 갚는 것 등이다. 그런데 지금 내 고통은 내가 한 일에 비해 너무나 크다. 그럴 때는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유라도 알면 좋겠는데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그런 고난은 성도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성경은 이런 종류의 고통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은 주지 않는다. 대신 구약 욥기가 이런 고통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뛰어난 지혜를 제공한다. 욥은 완벽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고난을 받았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없다. 사탄이 장난을 쳤다. 사실 하나님을 너무나 완벽하게 섬긴 그게 이유라면 이유다 (욥 1:8-12; 2:3-6). 그런데도 욥은 참았다. 재산을 하나하나 다 날리고 열 명의 자녀까지 한 순간 다 잃고 심지어 온 몸에 병까지 걸린 뒤에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는 그런 주권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러면서 욥은 자신에게 왜 그런 고통이 왔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한 가슴을 쳤다. 고통 자체도 엄청났지만 욥으로서는 그 고통의 이유를 모르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다 (욥 10:1-3).

 

   욥의 친구들은 죄와 벌의 원리만 알았다. 그래서 욥이 겪는 극도의 불행은 욥이 은밀하게 지은 극악한 죄악 때문이라고 믿고 그 죄를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욥을 위로하자고 시작된 친구들의 조언은 결국 욥의 상처에다 죄인이라는 오명까지 씌워 욥의 고통만 키우고 말았다. 욥기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논리가 틀렸음을 확인해 주신다 (욥 42:7). 쉽게 말해 이 세상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욥기를 읽었기 때문에 욥의 고통이 그저 사탄의 장난질 때문이었음을 안다. 욥이 아무 잘못이 없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욥기를 찬찬히 읽어보면 욥 자신은 나중에 다시 복을 받고 난 뒤에도 자기가 왜 그런 고난을 겪었는지 이유를 몰랐다.

 

   까닭 모를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 주님도 몇 번 말씀하셨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일까 물었을 때 주님은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요 9:1-3). 그렇다고 그 사람이나 부모가 주님을 잘 섬겼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장애인이 된 것도 아닐 터이니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물론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지만 그것은 이후의 일이지 원인은 아니다. 또 빌라도의 정치 탄압으로 억울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나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 역시 그들이 남보다 죄가 더 많아 그런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눅 13:1-5). 여기서도 주님은 고통을 죄와 연결시켜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지만 그 역시 미래의 일로서 그들이 남다른 고난을 겪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까닭 모를 고통이 우리에게 당혹감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외면 때문이다. 욥의 경험 그대로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이라도 해 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파스칼은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 부른다.25) 씨 에스 루이스도 아내의 죽음 이후 경험한 그런 답답함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건 정말 불안한 조짐이다. 우리가 행복할 때는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느낌조차 없다........ 하지만 상황이 정말 절박할 때, 다른 그 무엇도 도움이 안 될 때 하나님께 가 보면 어떻게 되던가? 면전에서 문이 쾅 닫히고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다음에는 침묵이다.”26)

 

   일이 잘 풀릴 때는 하나님이 늘 가까이 계시는 것 같다. 그럴 땐 사실 하나님을 잘 찾지도 않는다. 혹 고통을 당해도 내 죄 때문이라면 얼른 하나님께 회개하면 된다. 의를 위해 받는 고난이라면 하나님께 찬양도 드릴 수 있다. 그렇지만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 하나님이 정말 필요할 때, 다른 방법은 도무지 도움이 안 될 때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면전에서 문을 쾅 닫고 사라지시는 것 같다.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른 다음 끝없는 침묵이 이어진다. 루이스는 그럴 때는 오래 기다릴수록 괴로워질 것이라 했다. 믿음마저 흔들릴 수 있다. 까닭 모를 고통은 성도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가장 좋은 것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마저 갑자기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롬 8:28).

 

 

 

마.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

 

1. 문제의 해결

 

고통은 문제다. 성경을 알고 난 다음에도 문제다. 아프기 때문이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 의롭지 못한 고통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고통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든 고통 곧 보편적 고통에 대한 해결이다. 죄로 인한 고통도 아프다. 말씀대로 살다가 겪는 고통도 비록 영광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것이다.27)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라면 더 그렇다. 안 믿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도 고통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것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유를 알든 모르든 모든 종류의 고통에 대한 성경의 답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에셔 건지신다는 약속이다. 보편적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이요 위로다. 사람은 죄를 지어 고통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위해 그 고통을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다시금 고통 없는 상태를 약속하신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구원론이다. 복음의 핵심이다.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하는데 그 구원의 방법이 놀랍다. 하나님 당신이 피조 세계로 들어오셔서 인간이 초래한 모든 고통을 친히 겪으시는 방법이었다.

 

   기독교 복음만이 고통을 해결한다. 자연종교는 보편적 고통을 몰랐고 고통의 참 원인도 몰랐다. 혹 알았다 해도 피상적인 해결방법 외에는 제시하지 못한다. 복음이 가르치는 것처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친히 피조 세계로 들어오셔서 그 고통을 직접 겪으심으로써 해결하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복음이 가르치는 것을 듣고난 다음에도 납득하거나 수용하지 못한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 아니면 어리석음일 뿐이다 (고전 1:18, 23). 자연의 한계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피조물의 “환난에 동참”하시는 창조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 63:9).

 

   사람이 죄와 고통으로 죽었을 때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사람이 죄를 지은 순간 여자의 씨를 약속하셨고 (창 3:16) 그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셨다. 그리고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을 똑같이 맛보시고 우리 고통의 정점인 십자가 죽음까지 죽어 주셨다. 주님이 겪으신 고통은 가장 부당하고 억울한 고통이었다 (벧전 2:22-25). 하나님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 당신이 몸소 그 고통을 겪으시는 방법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고통을 겪으신 그 일이 고통에게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눌러 이긴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고전 1:18; 골 2:15). 십자가 고통은 고통의 원인인 죄를 없애 (요일 3:5) 우리를 고통 그 자체에서 해방시켰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주님을 믿은 우리 모두의 죄가 씻겼고 우리 고통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주님의 생애 전체가 고난의 생애였고 마지막 한 주간은 그 고난이 더욱 집약되었지만 그 고난의 핵심은 십자가 죽음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절정은 아버지 하나님의 침묵이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신다 거듭 말씀하시던 주님은 (요 8:29; 16:32)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 이렇게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막 15:34).

 

   가장 어려운 고난 곧 까닭 모를 고통의 정점이다. 우리 주님은 철저한 침묵 가운데 버림을 받으셨다. 그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거듭 간구하셨지만 결국 그 고난을 수용하셨고 마지막에는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셨다. 왜? 우리 대부분이 경험하는 고통이 바로 그런 종류의 고통인 까닭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죽어가는 아들 코앞에서 문을 쾅 닫으시고 빗장을 지르셨다. 아들의 단말마적 절규를 끝까지 외면하셨다. 그런 버림의 결과 우리 주님은 우리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건져주셨다.

 

   전통 신학은 하나님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의 고통 가운데 들어오신 하나님보다 저 멀리 높은 곳에 계셔서 구원 계획을 진두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이 새로운 계기를 제공했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셸의 영향이 컸고 각종 차별로 고통받던 이들의 경험도 힘을 보탰다. 그래서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이라는 것도 등장했다.28) 물론 경험이 계시를 앞서간 것이 아니라 계시를 보는 눈을 열어 준 셈이다. 성경이 그리는 하나님은 스콜라 신학의 가르침처럼 조금의 동요도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동참하시는 하나님임을 다시금 보게 된 것이다.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한 마디로 사랑이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세계로 몸소 들어오셔서 그들의 고통을 직접 짊어 지심으로써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시는 사랑이다. 고통은 죄의 결과요 구원의 부르심이요 훈련의 방법이지만 고통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본디 사랑이시기에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방법이 되었다. 부당한 고통도 까닭 모를 고통도 하나님의 사랑의 계기다. 고통과 사랑이 뒤엉킨 인간 세상은 고통을 사랑의 계기로 이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희미하게 반영한다. 결국 고통은 어느 것이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고통을 받는다면 고통은 어느 것이든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이 된다.29)

 

 

2. 고통으로 나누는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이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고통의 엄중함을 알려주고 이 땅에서 고통이 갖는 가치를 깨우쳐주고 또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까지 보여주었다. 이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의 계기가 된 것처럼 우리의 고통을 서로를 사랑하는 계기로 삼을 책임이 있다. 처음에는 주님이 우리의 고난에 오셔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 주님의 고난은 온 인류의 고난을 대표하는 고난이 되었고 주님의 제자들이 겪는 고난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이 되었다 (벧전 2:21; 4:13). 우리가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중요한 한 증거가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의 삶이다. 고난을 함께 겪을 때 왕노릇도 함께 할 수 있다 (딤후 2:12).30)

고통은 성도들 사이에서 큰 뜻을 갖는다. 우리가 한 성령을 마셔 한 몸이 되었음을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멋진 계기가 고통이다 (고전 12:12-26).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에 속한다 (마 11:17; 롬 12:15; 히 13:3). 성도는 고난이 올 때 기도한다 (약 5:13). 그와 더불어 질병은 성도의 교제를 위한 좋은 계기로 제시한다 (약 5:14-15).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가 아픈데 내가 함께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한 몸이 아니다. 참된 교회가 경험하는 고통은 언제나 모두가 함께 느끼는 보편적 고통이어야 한다.

 

   성도들 사이에 고통을 주고받을 때 고통의 실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인 조언이 있다. 칼뱅은 감정을 숨기려 애쓴 스토아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슬픔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31) 천국 소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와 고통의 실체를 알기 때문이다. 씨 에스 루이스도 비슷한 조언을 준다.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셨다든지 주님과 함께 있을 거라든지 하는 덕담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 맞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지금의 아픔은 그걸 몰라 겪은 아픔이 아니므로 소망으로 위로를 주고받을 때에도 지금 겪는 아픔이 정말로 아프고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이, 고통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계기로 불신자들에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최고봉은 복음의 변증이다. 그러자면 개별적 고통을 보편적 고통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개별 고통의 원인을 찾아 그것을 근거로 위로하는 일을 넘어 그 고통이 보편적 고통의 한 사례임을 일깨우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서둘러 진통제를 줌으로써 증세 자체만 완화시키려 하지 말고 조금 아프더라도 그 증세가 죄라는 이름의 보편적 질병에서 오는 것임을 알려주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가장 큰 복을 받게 도와야 한다. 루이스의 표현을 빌면 고통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확성기 소리를 듣게 도와 주어야 한다.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아파서 우는 사람에게 어떻게 감히 그것이 복이라고 대놓고 말하겠는가. 그것이 죄 때문이라고 어떻게 함부로 말하겠는가. 주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그 사람의 고통이 그 사람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 고통을 기억하고 보편적 죄를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벌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주는 위로가 먼저 필요하다. 내가 겪은 아픔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사람의 고통을 나도 함께 느껴 적어도 너와 나의 보편적 고통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아픔을 전체 인류의 보편적 고통으로 연결하여 모든 고통의 원인인 죄를 말해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없애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타락한 본성이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어 진정한 공감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픔을 대신 지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하신 말씀의 중요성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 마음가짐은 온유함과 두려움이어야 한다 (벧전 3:15). 앨리스터 맥스래스의 말처럼 복음 자체가 이미 사람들 마음에 거부감을 주는 것인데 전하는 내가 거만하거나 무례하여 거부감을 준다면 복음을 변증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32) 온유함은 내가 없어지고 온유하신 그리스도만 남는 것이다. 내 자존심, 내 권리, 내 잘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낮아져야 하고 나를 비워야 한다. 두 번이나 땅에 엎드렸던 아브라함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또 두려움도 가져야 한다. 내가 복음을 변증하는 이 순간은 그 사람의 영원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고통을 사랑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의 많은 부분이 고통이 있기 때문에 뜻을 갖는다. 사랑하기에 고통이 있지만 고통이 있기에 우리 사랑은 더 커지고 깊어진다. 고통은 어느 것이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고통은 주님과 우리가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사랑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고통은 우리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이 되어야 한다.

 

 

3. 눈물 가운데 실천할 사랑

 

   성경이 말하는 고통은 기원을 볼 때 죄와 밀접하게 이어 있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사랑과 깊이 이어져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고통의 자리로 내려와 우리의 고통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 주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을 없앴다. 이제 주님의 고난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영광스러운 의무가 주어진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연종교가 가르치는 그런 고행을 하는 것과 다르다. 주님의 고난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우리를 살리신 일이다. 우리가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 역시 우리의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어 주셨지만 우리는 이웃 대신 죽을 수 없고 다만 재물로 이웃을 도우라 명령한다 (요일 3:16-18). 그것이 제자로 살며 겪는 고난의 중요한 일부다.

 

   고통 가운데 우리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계속하여 선을 행하는 일이다. 이는 자연종교는 절대 줄 수 없는 복음만의 가르침이다. 고통이 올 때 참는 일은 소중하다. 분노하지 않고 하나님이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훌륭하다. 하지만 이런 중립적 태도, 마음 다스림은 자연의 종교도 가르친다. 불교나 스토아 사상도 비슷한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그 어느 자연 종교도 우리가 아픔 가운데 있을 때에도 선 행하기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오직 성경만이 그런 가르침, 그런 명령을 우리 성도들에게 준다.

 

   욥기에도 그런 가르침이 담겼다. 욥기는 욥의 인내를 전한다. 인내(忍耐)는 말 그대로 참고 견디는 것인데33) 욥은 이 두 가지에서 본을 보였다. 참은 것은 극도의 불행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것이다. 욥기 첫 두 장이 가르치는 교훈이다. 그런데 욥기는 참음보다 견딤을 더 강조한다. 욥기 3장부터 마지막 42장까지가 사실 이 견딤에 관한 것이다. 견딤은 자신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바로 살면 복 주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든 것이다. 욥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한 자신의 삶을 길게 언급하였다 (욥 29:1-25; 31:1-40). 욥이 죄를 자백하라는 친구의 강요를 끝까지 거부한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온 그런 책임 있는 인생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짓지 않은 죄를 자백해 문제를 쉽게 풀려 할 경우 지금껏 바로 살아온 그 삶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살아 가야 할 삶의 책임 역시 의미를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욥기 끝까지 자백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야고보 사도가 본으로 제시하는 욥의 인내 역시 참음보다 견딤에 비중을 둔다 (약 5:11). 견디는 것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는 일인데 그 정체성의 핵심이 바로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시편 기자는 씨를 뿌리는 이의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씨를 뿌리는 일은 고통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선의 씨앗이다. 선을 행하는 일은 눈물이 날 정도로 괴롭다. 그렇지만 고통이라고 해서 중단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울면서도 씨를 뿌려야 한다. 하나님이 풍성한 열매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시 126:5-6). 바울도 같은 권면을 준다 (갈 6:9). 선을 행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낙심하기 쉽다. 그렇지만 포기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견디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거둘 때가 온다. 주님과 함께 견디는 자만이 주님과 함께 다스린다 (딤후 2:12). 베드로 사도도 같은 권면을 준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uJpomenei'te, 견디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 (벧전 2:20).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받는 고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람의 책임, 더 나아가 성도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 고난 가운데 오셨으니 그 사랑을 입은 우리도 기꺼이 고난의 자리로 나아간다. 히브리서는 이 고난을 가리켜 영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라 표현한다 (히 13:13).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가 본받아 동참해야 할 고난이다. 그 고난에 동참하는 삶은 고통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고난을 견딘다는 것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이를 악물고 사랑의 실천을 계속하는 일이다.

 

   선을 행하는 일은 사회의 악이나 부조리를 제거하는 일도 포함한다. 자유의지 변론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이 인간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그 변론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호하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스스로 초래하는 악을 줄이고 그 악으로 인한 고통을 분담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하나님께 왜 보고만 계시느냐 따지기에 앞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입으로 말한 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책임을 행동으로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어떤 법이 어떻게 정해져 어떻게 시행되는지 알아야 하고 우리의 의견도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부당한 이익을 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으로 고통을 줄이는 사람이어야지 이웃의 고통을 증대시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삶은 한 마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하박국은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 하나로 산다는 말씀을 들었다 (합 2:4).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 하나를 원칙으로 세상을 산다 (롬 1:17).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달렸다.

 

 

4. 코로나19 범유행과 고통

 

올해 미래포럼은 코로나19 범유행이라는 보편적 고통의 한 사례를 근거로 삼아 우리 인류가 함께 겪고 있는 보편적 고통에 대해 접근하게 된다. 그런 탐구를 통해 코로나19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교회의 올바른 순종을 도모할 것으로 기대한다. 올 한 해 우리가 제기하게 될 질문 가운데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볼 수 있겠다.

 

   첫째, 한국교회는 복음을 가진 자답게 코로나19 범유행 상황을 보편적 고통으로 바로 인식하고 있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진 자로서 개연적인 보편적 고통에서 출발하여 필연적인 보편적 고통으로 담론을 이어가 복음의 진리와 능력을 사람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개별 사건이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의견 차이가 이런 중차대한 사명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개별적 고통인 코로나를 보편적 고통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경적 탐구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는가? 대면예배를 못 드리고 온라인으로 대체한 일은 교회사에 기록될 엄청난 사건이다. 코로나19는 분명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건이므로 코로나가 우리 삶에 가져온 여러 가지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일은 이 고통을 통해 우리가 실천할 사랑의 방향을 정해 줄 것이다.

 

   셋째, 코로나19 범유행에 대응하는 교회의 태도는 고통에 대한 성경의 원리에 맞게, 성경적 세계관에 맞게 나타나고 있는가? 성경적 원리의 문제, 올바른 세계관의 문제, 일관성의 문제는 종교의 자유나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넘어 사랑의 실천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책임으로 이어진다. 방역과 관련하여 교회가 받는 오해와 비난을 받게 된 사실이 안타깝지만 그것을 해명하고 풀어가는 방법도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한 일관성을 필요로 한다.

 

   넷째,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교회는 온유함과 두려움이라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우리에게 예배가 소중한 만큼 사람들에게는 경제와 생업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가치는 그것을 뛰어넘는 영원한 것이다. 이 차이를 갈등이나 분쟁의 계기가 아닌 사랑의 계기로 삼는 지혜를 강구해야 한다. 가진 자의 여유, 사랑을 받은 자의 희생이 필요하다.

 

   다섯째, 코로나19라는 보편적 고통 가운데 교회가 이를 악물고 실천해야 할 사랑은 무엇인가? 코로나 상황은 교회에도 크나큰 고통이다. 가장 중요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에 세상의 오해와 비난까지 받는 고통스러운 상황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세상을 향한 사랑의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 사랑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코로나19 범유행은 고통이다. 지구촌의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성기일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다. 세상은 들을 수 없는 그 음성을 교회는 듣고 순종해야 한다. 복음과 보편적 고통을 연구하는 2021년의 미래포럼이 그런 노력의 중심에 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미주

1) 이 단락에서는 미래포럼 카톡방에 실린 곽창대 목사의 설명을 자료로 활용하였다.

2) 동물도 고통을 겪는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겪는 고통만 다루겠다.

3) 한글, 영어 등 대부분의 사전이 이렇게 순환식으로 풀고 있다.

4) C. S. Lewis, The Problem of Pain, (Quebec: Samizdat University Press, 2016), 15, 55. (첫 발행 연도는 1940년)

5) C. S. Lewis, The Problem of Pain, 55f. 고통 자체를 즐기는 피학대음란증 환자의 경우에는 고통이 없는 상태가 오히려 고통이 될 것이다. Lewis, The Problem of Pain, 57.

6) 미국에서는 아무 수식어가 붙지 않은 ‘신학 (Theology)’이라는 말이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또는 구성신학 (Constructive Theology)을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사용된다.

7) ≪기독교 강요≫ III, iv, 33; III, viii, 7-8.

8) Louis K.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 Eerdmans, 1932) 336-8.

9) 지난 세기 들어 소위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이 본격 발전되었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셸 (Abraham J. Heschel, 1907-1972)의 글이 이 신학의 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0) Virgil, Aeneid, VI, 264-901행. 천병희 역 ≪아이네이스≫ 196-222쪽.

11) 단테의 ≪신곡≫ 첫 부분인 지옥편은 베르길리우스의 저승 방문 이야기를 기독교 관점에서 비판하고 죽음의 참 원인이 죄에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변증하는 작품이다.

12) 폴 틸리히는 동양종교의 이런 한계를 잘 지적하였다. 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 70. 김대식도 이런 한계를 언급하지만 기독교와의 차이점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식 183-6.

13)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의 신정론에도 스토아 사상의 영향이 남아 있다. 물론 칼뱅은 스토아 세계관의 근본적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경계하였다. ≪기독교 강요≫ III, viii, 9.

14)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필자의 책 ≪질그릇에 담은 보배 (SFC)≫ 91-103을 참고하라.

15)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VIII, 47.

16) 여자에게는 임신 및 출산의 고통이, 남자에게는 힘든 노동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 하셨다.

17) 구약성경도 아담이 지은 죄에 대해 언급하지만 유대인들은 온 인류가 겪는 보편적 고난보다 자기 민족이 겪는 고난에 치중하였고 구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한 경향이 강하다.

18) 창세기 첫 석 장의 역사성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이 석 장의 의미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바울 자신이 주께 받았다 한 것처럼 (고전 11:23; 15:3; 갈 1:11-12) 기본적인 구원론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창세기 첫 부분의 역사성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진화론을 아무 거리낌없이 수용한다.

19) 기독교 복음을 성공학으로 타락시킨 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조용기 등 소위 번영복음 전도사들은 기독교 복음을 자연종교 수준으로 타락시켰다. 필자의 책 ≪번영복음의 속임수 (SFC)≫ 202-214를 보라.

20) C. S. Lewis, The Problem of Pain, (Quebec: Samizdat University Press, 2016) 57f. (첫 발행 연도는 1940년) 루이스가 말하는 확성기는 자연상태에서 도덕적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만드시는 일반은혜의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김대식의 설명이 이 점을 염두에 둔 것도 같다. 김대식, 195.

21) 칼뱅은 고통의 이런 유익을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소스토무스 등을 인용하며 강조한다. ≪기독교 강요≫ III, iv, 33.

22)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812, 1068.

23) 그래서 씨 에스 루이스는 고통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 제목을 ≪고통의 문제 (The Problem of Pain)≫라 붙였다. 고통은 정말 문제다.

24) 자유의지 변론은 죄가 있는 세상에서는 고통이 긍정적인 뜻을 가질 수 있으므로 고통의 존재가 신의 무능력이라는 전제도 잘못임을 지적한다. 또 씨 에스 루이스는 불신자들의 논리에 전제된 악 개념이 오히려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순전한 기독교≫ 73-4. (Mere Christianity, 22)

25) 팡세 242/449. 이사야 45:15.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이유는 죄 때문이며 이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종교는 다 거짓이라고 파스칼은 말한다. ≪파스칼 평전≫ 262-3.

26) C. S. Lewis, A Grief Observed (New York: Bantam, 1961), 4. (pdf version, pp. 5-6)

27) ≪기독교 강요≫ III, viii, 9.

28)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에는 상황적 모순도 담겼다. 유대인이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받고 깨달은 하나님의 고통이 기독교 신학에 수용된 점도 역설이지만 일본의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의 책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이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도 모순이다. 기타모리는 전쟁말기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일본 청년들의 고통을 보고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 이전 오랫동안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힌 아시아인들의 고통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가운데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 히로시마를 이용해 피해자 이미지를 확산시킨 일본 정부의 방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죄와 악이 뒤엉킨 한 보기다.

29)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아버지의 통곡≫

30) “참으면 또한.....” 원문은 uJpomevnomen, 견디면......

31) ≪기독교 강요≫ III, viii, 9.

32) 맥그래스 ≪기독교 변증≫ 24.

33) 헬라어로 참음은 ‘makroqumiva’ 견딤은 ‘uJpomonh’가 된다. 골 1:11.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설교 “욥의 참음과 견딤”을 보라. 물론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참고자료

 

Marcus Aurelius, Meditations, pdf.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Louis K.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 Eerdmans, 1932, 1941 (벌코프 ≪조직신학≫ 권수경 이상원 역,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PA: Westminster, 1960. (장 칼뱅 ≪기독교 강요≫)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4

C. S. Lewis, A Grief Observed, New York: Bantam, 1961 (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 강유나 역. 홍성사)

C. S. Lewis, Mere Christianity, pdf. (≪순전한 기독교≫ 장경철 역. 홍성사)

C. S. Lewis, The Problem of Pain, Quebec: Samizdat University Press, 2016 (첫 발행 연도는 1940년) (루이스 ≪고통의 문제≫ 이종태 역. 홍성사)

Alister McGrath, Mere Apologetics, Grand Rapids, MI: Baker, 2012 (맥그래스 ≪기독교 변증≫ 국제제자훈련원, 전의우 역)

Blaise Pascal. Pensees, pdf. (파스칼 ≪팡세≫ 현미애 역. 을유문화사)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Chicago: Uni. of Chicago Press, 1961-3

Virgil Aeneid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Nicholas Wolterstorff, Lament for a Son, Grand Rapids, MI: Eerdmans, 1987 (월터스토프 ≪아버지의 통곡≫ 또는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김대식 “인간의 욕망과 고통에 대한 종교, 생태학적 인식” ≪종교학 연구≫ Vol. 2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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