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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6 09:39

고통의 신약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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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9일(금) 오전 11시 천안교회당에서 미래교회포럼(위원장 오병욱 목사)이 열렸다. 권수경, 최승락 교수가 고통을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본지는 두 교수의 논문 전문을 각각 연재한다.


 

 

고통의 신약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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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락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 고통이 보편성을 가지고 우리 곁에 찾아와 있는 한 시점을 지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의 만연으로 인해 전 세계가 팬데믹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 우리는 직접 간접으로 이 일에 연루되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분들의 아픔도 있고, 임종의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아야 하는 분들이나,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분들의 아픔도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삶의 다양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아픔이나, 극도로 조심하며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아픔도 크다. 감염을 피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다양한 불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더 나아가서 실직의 아픔, 매출의 감소에 따른 파산이나 경제적 손실의 아픔 등, 사회경제적 차원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고 할 만큼 우리는 보편적인 고통의 시대를 맞고 있다.

 

   고통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고통의 현실을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신약 속에 나타나는 네 개의 키 워드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채찍(병)과 가시와 눈물과 본이 그것이다. 이 네 개의 단어들은 고통을 집약하면서 동시에 고통의 다각적인 측면들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고통의 현상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고통을 극복하는 길이 담겨 있기도 하다. 우리는 고통이 그 자체로 전부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고통이 들려 있다. 오늘의 아픔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함께 아픔의 현실을 넘어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모색해보고자 한다.

 

 

2. 채찍(또는 병, 막 5:34)

 

   사람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가장 보편적인 통로는 병이다. 병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며 비참하게 만든다. 질병의 고통이 크고 보편적인 만큼 치유의 소망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한 축을 이룬다. 이사야의 구원의 노래 속에는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라는 항목이 포함된다(사 35:5-6, cf. 눅 7:22).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의 비전 속에도 만국의 “치료”가 포함되어 있다(계 22:2).

   복음서에서 병을 지칭할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노소스이다. 마태는 이사야 53:4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고 말한다(마 8:17).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는 자리에서도 그가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말한다(마 9:35). 마태는 병을 지칭할 때 일관되게 노소스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에 비해 마가가 선호하는 단어는 마스팈스라는 단어이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막 3:10)을 가리킬 때 마스팈스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혈루증 가진 여인의 병을 지칭할 때도 동일하게 마스팈스를 사용한다(막 5:29, 34). 이 용어는 마가의 특징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많은 “질병과 고통”을 고쳐주셨다고 이야기할 때 노소스와 마스팈스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눅 7:21). 복음서 밖에서는 질병의 고통을 가리키는 포노스라는 단어가 주로 계시록에서 사용되고 있다(계 16:11, 21:4의 “아픈 것”).

 

   우리는 여기서 마가의 마스팈스 용어에 좀 더 집중해보고자 한다. 이 용어의 일차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는 채찍(whip 또는 scourge)이다. 리델-스콧 사전은 대부분의 용례를 채찍(질)에 집중하고 있고, 은유적 차원에서 병의 용례(막 5:34)를 소개한다.1) 마가가 병을 지칭하기 위해 마스팈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람이 당하는 질병의 고통을 생생히 전달해주는 기능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마스팈스는 하나의 체감 언어이다. 살을 파고드는 채찍의 아픔처럼 병의 고통은 우리의 신체와 영혼에 잊을 수 없는 고통의 각인을 남긴다.

 

   마가의 마스팈스 용어의 사용은 현장감을 생생히 전달하기를 힘쓰는 그의 이야기 방식과도 직결된다. 마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역사적 현재 시제의 동사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사에서 마가는 5:21의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과 5:24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에서는 단순과거 시제의 동사를 사용하여 이야기의 큰 줄거리를 잡는다. 그러나 세부적인 부분에 들어와서는 시제를 현재 시제로 전환한다. 이를 살려서 5:22-23을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회당장들 중의 하나요, 이름이 야이로인 사람이 예수께로 온다. 그리고 그를 보고 그의 발 아래 엎드린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간곡히 간청한다.” 이처럼 마가가 역사적 현재 시제를 빈번히(누가의 11회에 비해 약 151회) 사용하는 이유는 사건의 현장감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서다. 독자들을 이야기의 현장 속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다.

 

   또 하나 그의 이야기의 특징은 끼워넣기 방식(intercalation, 소위 “샌드위치 기법”)이다. 벤 위더링턴(Ben Witherington III)은 마가복음 속에 최소한 7번 이상 이런 기법이 사용된다고 말한다.2)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사의 경우, 이 이야기의 중간에 혈루증 가진 여인의 이야기가 끼어들어 있다. 이 부분에 의해 이야기가 끊어진 것은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처음 야이로가 예수님께 아뢰었던 말은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이다. 끼어든 이야기 이후에 이어지는 후반부의 상황은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라는 보고이다. 죽음에 가까웠던 딸이 죽어버림으로 인해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더 이상 손 쓸 일 없이 상황 종료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급변한 상황을 보지 말고 변하지 않는 예수님 자신을 계속해서 믿으라(keep believing)는 요구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조건이나 외적 상황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조건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다.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가변적인 상황을 초월하시는 예수님 자신에게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모든 상황을 초월하시는 이 예수님이 우리의 아픔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오시는 분이라는 것을 혈루증 가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여인은 12년의 세월 동안 혈루증의 채찍 아래 신음하며 살아왔다. 혈루증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피의 유출”이다. 동일한 표현을 우리는 레위기 15:25(LXX)에서 발견한다. 이 경우 “피의 유출”은 여성의 월경 주기를 넘어서도 그 유출이 멈추지 않는 증상을 가리킨다. 이런 상황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나 불편에 그 아픔이 한정되지 않는다. 레위기 15:25에 따르면 이런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며, 그 침상이나 앉은 자리나 접촉한 것 모두가 부정을 유발한다. 이런 부정한 상태가 12년이나 지속되었다. 여기에는 육체적 고통을 넘어 심리적 불안과 사회적 단절, 영적 단절의 고통이 동반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믿었고,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으며, 마침내 고침을 받았다. 이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는 그 짧은 한 순간의 터치에는 12년 동안 응축된 눈물이 담겨 있다. 이 여인은 그 짧은 순간에 본문 속에는 표현되지 않은 응축된 절규와 간구를 속으로 토해내었을 것이다. “주여, 지난날들의 나의 눈물과 고통을 돌아보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소서!”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순간 피의 유출이 멈추었다. 아무도 모르는 기적을 홀로 맛보게 되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종결될 법하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돌아보며 물으신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질문이 꼭 필요했을까? 예수님은 혼자 속으로 “아, 한 여인이 고침을 받았구나, 평안히 가라!” 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가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굳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그가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포인트는 제자들의 대답과 여인의 대답의 차이에서 잘 드러난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는 제자들의 대답은 철저히 제3자의 대답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여인은 제3자일 수 없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었다”고 말한다(5:33). 이 “모든 사실”은 곧 1인칭 자기 이야기다. “제가 12년 동안 이런 고통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한 채 홀로 아픔을 지고 살아왔습니다. 어느날 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감히 앞으로 오지 못하고 뒤로 와서 주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1인칭, 나의 이야기다.

 

   고통의 언어와 믿음의 언어는 3인칭 진술과 1인칭 진술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티슬턴(Anthony C. Thiselton)은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명제 “내 말에 대한 나 자신의 관계는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3)라는 명제를 신앙 언어의 3인칭 발화와 1인칭 발화의 구분에 적용하고 있다.4) “그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라는 말과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라는 말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가능할 수도 있는 진술이지만, 후자는 성립될 수 없는 진술이다. 그러나 그레데 섬의 거짓 교사들의 자기궤멸적 화행(self-defeating speech-act, 딛 1:16처럼)의 예에서 보는 것과 같이 후자와 같은 차원의 진술이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 속에 난무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고통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여인의 아픔의 깊이를 아시며, 그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서서 고통이 무엇이며, 나아가 믿음의 고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 하신다. 이는 제3자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결여된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부족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드신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고통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고통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끄는 기능을 가진다. 우리는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벨기에 출신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F.G. Magritte)는 파이프 하나를 그려 놓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을 써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5) 분명히 파이프인데 왜 파이프가 아니라는 것일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른 물건으로 보이기 때문인가? 화가가 의도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이프의 그림(이미지)일 뿐이지 실물 파이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그림으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이라고 적어 놓은 종이를 꼬집어도 거기에서는 아야!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고통은 실제로 느껴야 고통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처럼 “아픔을 표현하는 것은 아파하는 사람이다.”6) 아픔은 그것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고유하다.7)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더 잘 다가갈 수 있다.

 

   혈루증 가진 여인은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만의 깊은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자신의 고통을 헤아리고 어루만져 주신다는 사실이 놀라움 자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소중한 분일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이 깊었던 만큼 그것을 넘어갈 수 있게 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또한 귀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그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게 하셨고, 또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게 하셨다. 고통의 언어와 믿음의 언어는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으로 표현될 때 가장 진정한 것이 된다.

 

   마가의 마스틱스 용어는 질병이 가지는 고통의 체감성을 잘 전달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고통을 제3자처럼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아픔이 무엇인지를 체감적으로 아신다. 그것이 채찍질과 같은 아픔이라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채찍과 같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온다.

 

 

3. 가시(고후 12:7)

 

   우리는 고통을 가리키는 또 다른 용어 하나를 바울에게서 발견한다. 바울은 남이 알지 못하는 “가시” 하나를 품고 살았다. 스콜롶스는 “아무것이나 뾰족한 것”(anything pointed)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일반적으로 막대기나 가시가 여기에 해당한다.8) 막대기가 되었든 가시가 되었든 그것이 찌를 때는 상당한 고통이 일어나게 된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가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두고서는 예로부터 논란이 많이 있어 왔다. 오래전 크리소스톰은 이 가시가 바울이 직접 이름을 거론하는 알렉산더나 후메내오, 빌레도 같은 대적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9) 하지만 칼빈은 이런 견해를 논박하면서 이를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가시’ 표현은 “육체를 따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충분히 영적이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10)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자신 속의 거듭나지 않은 어떤 한 부분과 계속해서 투쟁하며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다 현대에 와서 학자들의 견해는 이를 육체의 문제로 보는 관점과 관계의 문제로 보는 관점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폴 바네트(Paul Barnett)는 “사탄의 사자”라는 말과 “사탄의 일꾼들”(11:15) 사이의 유사성에 큰 무게를 두면서 이를 관계의 문제로, 다시 말해서 바울의 대적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고 있다.11) 거쓰리(George H. Guthrie) 역시 이 문제가 쉽게 결정하기는 어려운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민수기 33:55이나 에스겔 28:24의 칠십인역(LXX)에서 이 단어가 대적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전례를 바탕으로 바울에게서도 이를 관계의 문제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12)

 

   그러나 불트만이 잘 지적하는 것처럼 “주셨으니”(원문에는 ‘그것이 주어졌다’)라는 동사와의 연관성을 생각할 때 “육체에”의 여격은 장소적 여격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13) 바네트나 거쓰리의 경우처럼 관계적 문제로 ‘가시’를 이해하게 되면 이 여격을 이익의 여격 또는 불이익의 여격으로(for the flesh) 읽어야 할 텐데, 이 경우 대적자들의 괴롭힘이 육체에 한정해서만 가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육체적 고통을 안고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바레트(C.K. Barrett)는 이를 10:10 등과 연관시켜서 바울의 “언어장애”라고 추정하지만, 이는 개연성이 떨어진다.14) 히스테리, 안질, 간질, 편두통, 말라리아, 좌골 신경통, 류마티즘 등이 많이 거론되는 병명이다.15) 무엇이 되었든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그를 간헐적으로 괴롭히던 모종의 질병을 안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16) 바울은 이것이 ‘주어졌다’고 말하는데, 정체를 밝히지 않은 주심의 주체는 분명 하나님이다(theological passive).

 

   바울은 관점을 조금 바꾸어서 이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주어졌다’의 숨은 주체가 사탄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동사에 연결되는 목적을 나타내는 문구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내가 스스로를 과도하게 높이지 못하도록’)는 계시를 주신 분과 가시를 주신 분이 다 동일한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탄의 사자”로서 가시가 하는 역할은 바울을 치는 것이다. 콜라피조 동사는 ‘주먹으로 치다’의 의미를 가지는데,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그 치는 공격이 지속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바울의 육체적인 질병이 자주 그를 엄습하였던 상황을 암시한다. 이를 “사탄의 사자”가 하는 일로 돌리는 것은 육체에 대한 사탄의 제한된 작용을 가리킨다. 사탄은 그 자신의 목적대로 우리의 약함과 고통을 사용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한 면에서는 남다른 계시적 경험을 그에게 주시는 것이며, 동시에 그 때문에 그가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가시를 견제 장치로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같은 절 안에서 이 문구를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17)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는 이와 같이 인간의 약함을 상기시키는 브레이크 장치가 첨부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이 “가시”가 자신에게서 떠나기를 위하여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하였다고 밝힌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시의 제거보다 이것을 남겨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 있는 이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신 속에 머물게 하는 통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 깨달음을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는 압축적인 문구로 표현하고 있다. 원문에는 “내”에 해당하는 말은 없고 단순히 ‘능력은 약함 속에서 완성된다’라고만 되어 있어서 이 문구가 하나의 경구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작용하는 장소 또는 조건은 “약함 속”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약함이 있는 곳에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작용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바울은 약함이나 고통 그 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약함은 약함 자체보다는 약함의 인정을 가리킨다.18)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는 모든 자세를 버리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약함을 제거한 능력이 아니라 약함 속에서의 능력이요 약함을 통한 능력(power-through-weakness)이다. 바울은 12:9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 속에 “머물게 하려”(i[na evpiskhnw,sh|)고 자신의 모든 약한 것들을 기뻐한다고 밝힌다. ‘머문다’고 할 때 바울이 사용하는 동사 에피스케노오(evpiskhno,w)는 ‘~위에 장막을 치다’ 또는 ‘장막에 거주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이 장막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를 덮는 포근한 안식처와 같다는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비록 삶의 현실 속에서는 자신의 약함과 고통을 곱씹게 만드는 다양한 상황들이 끊이지 않지만, 바울은 그 속에서도 비참의 집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로의 장막 속에 거하는 것을 본다.

   바울이 경험하는 약함의 현실들이 어떤 것인지를 12:10은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 등은 다 몸과 마음에 엄청난 고통과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상황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들을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취하고 있으며, 괴로워하는 대신 오히려 기뻐하고 있다. 그 이유를 바울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o[tan ga.r avsqenw/( to,te dunato,j eivmi)는 말로 표현한다. 이는 하나의 역설이다. 일반적으로 약함은 강함이 결핍된 상태요, 강함은 약함이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 양자는 병립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약함이 강함의 통로라는 것을 밝힌다. 그에게 있어서 약함과 강함은 서로를 껴안는다. 약함은 강함의 조건이다. 약함 없이 강함이 경험될 수 없다. 강함은 또한 약함 속으로 깊이 침투한다. 이런 능력의 비결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기꺼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시의 고통이 없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축복은 가시의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고통의 상황을 다르게 보게 만든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시자인 빅터 프랑클(Viktor E. Frankl)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던 날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외투 안에 숨겨진 내 첫 번째 책의 원고를 구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따라서 나는 내 정신적 자식을 잃는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해야 했다. ...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내 삶이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 그때까지도 나는 ... 곧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내게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그 대신 아우슈비츠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곧 가스실로 보내진 수감자의 누더기 옷을 물려받았을 때였다. 그 동안 써놓았던 책의 원고를 빼앗긴 대신 나는 물려받은 그 외투에서 히브리 기도책에서 찢어낸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대교의 기도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셰마 이스라엘이었다. 나는 이렇게 기막힌 ‘우연의 일치’를, 단지 종이에 적지만 말고 그대로 ‘살라고’ 하는 신의 계시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런 가혹한 상황에서 내 관심은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 하지만 당시 내가 갖고 있었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과연 이 모든 시련,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런 상황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19)

 

   프랑클은 인간이 맞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의 상황을 맞이했지만, 그 속에서도 그는 그가 믿는 바를 종이가 아니라 삶의 캔버스에 ‘살아내라’는 하나님의 계시와도 같은 말씀을 붙잡고 수용소의 삶을 이겨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보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인간의 정신이나 ‘삶의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고후 1:9)에게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고, 또한 하나님의 건지심을 경험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 분이다(고후 1:3).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가시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동일하게 이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 가시는 나를 낮추심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다. 그 가시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위로할 줄 아는 위로의 사람들이 되게 만든다.

 

 

4. 눈물(히 5:7)

 

고통은 눈물을 수반한다. 눈물은 고통의 표현이며, 동시에 공감의 통로이다. 우리의 아픔은 우리의 눈물을 통해 표현되는데, 그 눈물은 또한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함께 아픔을 느끼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히브리서 5:7은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을 이야기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5:5-10은 하나의 긴 연결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락은 5:5의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Ou[twj kai. o` Cristo,j)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라야만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임명에 따라 된 일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임명의 말씀(시 2:7, 시 110:4)을 먼저 인용한 후에 7절에서는 관계대명사 호스(o]j)로 그리스도를 받아 그가 대제사장의 직무를 맡으실 때, 한 면에서는 그가 어떻게 연약한 인간을 능히 대변할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는가 하는 점을, 또 다른 한 면에서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 세우심을 받은 대제사장이 되셨는가 하는 점을 밝히고 있다. 첫 번째 측면과 관련해서는, 그가 “육체에 계실 때” 곧 이 세상에서의 그의 생애 동안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고 또한 들으심을 받은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고난 받으심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두 번째 측면과 관련해서는, 그가 하나님에 의해 멜기세덱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세워지셨으므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윌리엄 레인(William L. Lane)도 인정하는 것처럼, 5:7은 “순전히 언어적이거나 문장론적인 근거 하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애매한 진술 때문에 난해하다.”20) 그 어려움은 이런 것이다. “경건하심”으로 번역된 율라베이아(euvla,beia)는 경외나 두려움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이를 두려움으로 읽는다면 아포 테스 율라베이아스(avpo. th/j euvlabei,aj)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가 된다. 곧 예수님께서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의 들으심을 통해 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Calvin의 견해). 그러나 율라베이아가 12:28에서 경외(“경건함”)의 의미로 사용된 것을 감안할 때 여기서도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블라스와 드브룬너는 이곳에 사용된 전치사 아포가 이유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데, 그렇게 볼 때 이 문구는 ‘그의 경외 때문에 들으심을 받았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21)

그러면서도 블라스와 드브룬너는 아포 테스 율라베이아스를 ‘들으심을 받았다’는 동사가 아니라, 8절의 ‘배웠다’(e;maqen)와 연결시키는 또 다른 독법을 제안한다. 그렇게 읽으면 7절은 ‘기도를 드렸고 또한 들으심을 받았다’는 것으로 그 내용이 일단락되고, 이어서 그는 경외함 때문에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순종을 배웠다는 방식의 독법을 취한다.22) 이런 독법은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내용상 ‘경외함 때문에’라는 문구와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이 어떻게 조합을 이루는지 명료하지 않은 또 다른 어려움을 낳는다.

우리의 입장은 율라베이아를 두려움보다는 경외(경건)의 의미로 읽고, 아포 테스 율라베이아스를 ‘들으심을 받았다’와 연결시켜서, ‘그의 경외(경건) 때문에 들으심을 받았다’로 읽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는 이를 어떤 상황과 연결시킬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나 골고다에서의 부르짖음과 연결시키지만, 레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잘라서 말한다.23) 7절의 문맥은 “그가 인간의 조건에 온전하게 참여했고, 모든 면에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24) 오토 미헬(Otto Michel) 역시 동일하게 7절의 강조점이 “예수의 메시아성이 진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성과 시련을 입증하는 데 있다”고 바르게 지적한다.25)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존재론적인 차원의 진술이 아니라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자격과 관련된 표현이다.26) 그는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처럼 무엇인가를 배워야 점차적으로 온전하게 되는 분이 아니다. 다만 그가 우리를 온전히 대변하는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통곡과 눈물을 함께 겪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또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신 분이다. 우리가 혈과 육에 속한 존재인 것처럼 그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취하셨다(2:14).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능히 동정하신다(4:15).

 

   히브리서는 공감의 능력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 대제사장의 장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그가 다른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다는 점이다(5:1). ‘용납한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 메트리오파떼인(metriopaqei/n)은 ‘(화와 같은) 감정을 조절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27) 이것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 다른 실수하는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이다. 다른 사람의 어이없는 실수를 보면 당연히 화가 나겠지만, 나 역시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런 공감의 자질을 가질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해 훨씬 더 포용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4:15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동정한다’(sumpaqh/sai)고 말하는 것은 이와 유사한 측면도 가지지만, 동시에 본질적인 차이도 가진다. 예수님은 자신의 약함(소극적 차원)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능력(적극적 차원) 속에서 우리의 처지를 공감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통곡과 눈물을 아시는 분이다. 물론 그의 눈물은 우리의 눈물과 많은 차이를 가진다. 우리는 회한과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때가 많다. 예수님께는 이런 눈물이 있을 수 없다. 그의 눈물은 참여와 연대의 눈물이며 동정의 눈물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자리에 서서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는 분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찾는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와 함께 울기 위해 오셨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계 7:17, 21:4)께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우리 곁에 오셨다.

 

   존 파인버그(John S. Feinberg)는 그의 아내가 헌팅턴 무도병(Huntington’s chorea) 발병이 생기기 전까지는 매우 자신만만한 신학자였다. 고통이나 악의 문제에 대해 지적인 답을 제공해주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유전적 퇴행성 신경질환인 헌팅턴 무도병으로 운동 기능을 상실하고 치매까지 얻게 되었으며, 그의 자녀들도 이 병이 발병할 50 대 50의 확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이 모든 지적인 대답들을 가졌지만, 이것들이 내가 느끼는 일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차이를 주지 못했다”고 말한다.28)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to believe in God)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to trust God) 사이의 차이이다. 머리와 가슴의 거리이기도 하다. 파인버그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신학적, 지적 답을 주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섯 살 어린 딸이 차에 치어 죽은 젊은 부모에게 “이것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변화를 원하시는지 돌아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기에 우리에게 ‘영적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죄 없는 어린 딸을 희생시킨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29)

 

   팀 켈러는 세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찢어지는 슬픔에 잠겨 나는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무덤 너머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나는 그것이 참인 줄 안다. 감동이 되지 않았다. 얼른 그가 가버리기만을 원했다. 다른 사람이 와서 내 곁에 앉았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문을 여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그저 내 곁에 앉아 있었고, 내가 뭔가 말을 하면 들어 주었고, 짧게 대답을 하고, 단순하게 기도하고, 그리고 떠났다. 감동이 되었다. 위로를 느꼈다. 그가 가는 것이 싫었다.”30)

 

   예수님의 눈물만큼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없다. 그의 눈물은 그가 우리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을 말한다. 나의 가슴 속에는 “오늘 집에 가는 거야?”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가 눈물로 박혀 있다. 파킨슨증과 치매를 동시에 가진 아내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지 벌써 7년째다. 처음 한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 데리고 와서 내 손으로 밥 먹이고 목욕시키고 간병도 해보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목욕시켜서 침대에 눕히면 눕자마자 시원하게 소변을 본다. 그러면 다시 씻기고 이불을 걷어서 세탁하고, 일이 끝이 없다. 치매 환자 가족의 하루가 36시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1) 집에 있어도 눈물이요 병원에서 “오늘 집에 가는 거야?”라는 말을 들을 때도 눈물이다. 끝없이 일어나는 왜?에 대한 답은 없다. 아니, 있어도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 주님께서 함께 눈물 지으시는 분이라는 것이 무한한 위로이다.

 

 

5. 본(벧전 2:21)

 

   베드로전서는 신약의 책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서신 중의 하나다. 하워드 마샬(I. Haword Marshall)이 잘 소개하는 것처럼, ‘고난 받다’라는 동사가 신약 전체의 41회 중 12회, ‘고난’이라는 명사가 신약 전체의 16회 중 4회가 이 짧은 서신 속에 나타난다.32) 고난은 고통과 연관되는 대표적인 신약의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이 단어군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유용한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어군보다는 오히려 이 서신에 나오는 “본”이라는 독특한 단어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휘포그라모스라는 단어 자체는 사실 고통과는 무관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아이들이 알파벳이나 그림을 배우기 위해 따라 쓰도록 만든 글본(writing-copy)을 가리킨다.33) 비유적으로는 사람이 따라야 할 하나의 행위 모델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비유적 차원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이 단어에 집중하는 이유는 베드로가 이 용어를 우리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결짓는 매개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용어는 고난이나 고통의 현실을 넘어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이 용어와 함께 우리는 베드로가 사용하는 특징적인 문구 가운데 하나인 o[ti kai. Cristo.j(‘왜냐하면 그리스도도’ 벧전 2:21, 3:18)라는 문구에도 관심을 기울여보고자 한다. 이 문구를 담고 있는 베드로전서 2:18-25, 3:18-22은 또 다른 기독론적 진술인 1:20과 함께 양식비평 방법을 취하는 학자들이 세례와 관련된 고백문(또는 찬양문) 양식으로 분류하기를 좋아하던 본문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더 이상 이런 접근을 따르지 않는다.34] 이런 방법 자체가 한계를 가지는 것을 넘어서, 세례에 대한 가르침이 베드로전서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세례를 언급하는 사례도 단 1회(벧전 3:21)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위의 본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고난이 밀려오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이 본문들에 나타나는 관심은 일차적으로 목회적 관심이다.

 

   베드로전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고백과 권면의 교차적 배치이다.35) 이 서신이 담고 있는 기독론적 고백은 고난의 현실을 살아내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베드로 서신 연구의 권위자인 존 엘리엇(John H. Elliott)은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권면과 기독론적 진술의 풍부한 결합을 통해 [이 본문은] 이 서신 전체 가운데서 가장 수사학적으로 강력한 진술을 만들어 내고 있다.”36)

 

   베드로전서 2:18-25은 소위 ‘가정법규’(Haustafeln)에 속에는 부분이다. 이 가정법규는 악트마이어(Paul J. Achtemeier)가 잘 지적하는 것처럼, 단지 주변사회의 호의를 사기 위한 유화적 목적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 변혁의 지위가 어떤 것인지를 당대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던 종들이나 아내들을 통해 예시하는 기능을 가진다.37) 그러므로 가정법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2:16)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베드로는 21절의 o를 축으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실제적인 고난의 현실(18-20절)과 그리스도의 고난(22-25절) 부분을 하나의 짝으로 구성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특히 사환들은 부당한 고난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길을 걷도록 권면한다. “선을 행함”으로 번역된 아가또포이에오 동사는 셀윈(Edward G. Selwyn)이 잘 지적하는 것처럼 베드로서신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이며,38] 베드로전서에 명사형으로 한 번(4:19), 동사형으로 5번(2:14, 15, 20, 3:6, 17), 총 6회의 용례가 나타난다. 이는 “행실”로 번역된 아나스트로페라는 단어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관련하여 베드로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특징적인 용어 중의 하나이다.39)

 

   베드로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함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당위의 “본”과 “자취”(발자국)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는 죄가 없고 거짓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고난을 당하셨다.40) 그러나 그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2:23-24).

 

   베드로가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은 고난과 고통의 현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고통과 슬픔의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우리의 존엄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나아가서 그 고통의 현실을 어떻게 선행의 기회로 바꾸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본”은 고난에의 참여인 동시에 고난 극복에의 참여라는 포괄성을 보여준다.

 

   베드로전서 3:18에서 다시 한 번 o를 사용하기 전에 3:13-17에서는 집중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그 고난이 악을 행함 때문이 아니라 선을 행함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특히 3:17은 악을 행함과 선을 행함을 대비시키고 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4:12-16).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선을 행함을 계속해야 하는 근거를 3:18의 “그리스도께서도”라는 전환 문구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부당한 고난을 당하여 죽기까지 하셨다. 그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가장 고귀한 결과를 낳았다. 이어지는 난해한 본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 글에서의 우리의 관심 범위를 넘어간다. 간단히 핵심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의 영역 차원에서는 부당한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의 영역 차원에서는 살리심을 받았고, 그의 부활의 승리 소식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까지도 선포되었다.41) 나아가 그리스도의 승귀의 결과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게 되었고, 이제 그 어떤 영역이라도 그리스도의 통치와 권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비록 부당한 고난의 현실이 있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이사야 8:12의 말씀을 기독론적으로 변용하여 적용하는 것처럼,42)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벧전 3:15) 결단코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이다. 이는 죽음을 이기시고 모든 권세와 능력들 위에 주권을 가지신 그분이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복된 일이기 때문이다(벧전 3:14, 마 5:10).

 

   여기서도 동일하게 성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중첩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본”이다. 나아가서 고난과 슬픔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우리의 본분인 선행을 계속함으로써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도 “본”이신 그리스도와의 동화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가장 친밀하게 된다. 루이스(C.S. Lewis)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즐거움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삭이신다. ... 그러나 우리의 고통 속에서는 그는 고함치신다.”43) 고통의 순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 깊어지고 진정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 속에서도 그가 걸으신 길을 따를 때보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는 순간은 없다. 조지 맥도날드(George MacDonald)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까지 고난 당하심은 우리가 고난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고난이 그의 것과 같게 하기 위해서다.”44)

 

   중요한 것은 고난 또는 고통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 그 현실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를 사로잡고 삼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고통은 고통의 현상 자체만 홀로 떨어져서 오지 않는다. 그것과 함께 오는 것들이 사실은 더 고통스럽다.

제럴드 싯처(Gerald L. Sittser)는 중앙선을 넘어 온 한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그 어머니와 아내와 딸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당하였다. 아들 하나도 중상을 입었고, 자신과 다른 두 아이도 큰 부상을 당하였다. 이런 아픔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을 쓰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관과 고난에 부딪치면,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고는 남은 인생을 ‘그때 다른 길을 택했어야 되는데’ 하고 한탄하며 보낸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 그 상황이 아무리 힘겨운 것일지라도 –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세워 나갈 기회를 허송하는 것이다.”45)

고통의 현실 속에서 흔히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후회나 회한이다. 싯처가 말하는 것처럼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이라는 회한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자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남 탓을 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도 아내가 당한 고통의 현실 이상으로 더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탓하는 말이다. ‘이게 너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냐’라는 식의 탓이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며 견딜 수 없이 마음을 괴롭게 한다. 아픔은 결코 단독으로 오지 않는다. 이것은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고난의 현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그의 가슴을 깊게 찌르는 ‘말들’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복합적인 현상들이 고통의 상황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고통은 다양한 실로 짜인 촘촘한 그물로 우리를 가두어버린다. 여기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고, 때로는 파괴적이 된다. 마음에는 미움과 분노가 가득하게 되고 바깥으로는 세상에 화풀이를 하고 싶어 폭발 직전의 화약처럼 변해간다. 고통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은 참 어렵다.

 

   베드로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줄과 같은 돌파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이 그것이다.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그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선한 길을 따랐던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글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악이나 악행에 사로잡히지 않고 선행에 사로잡히는 길이다. 두려움의 상황들보다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는 일이다(벧전 3:15). 이 ‘글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 속에서 따라살아낼 때, 우리는 이 고통의 세상 속에 또 하나의 살아 있는 ‘글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고통의 세상 속에 남기는 우리의 희망의 발자취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 그런 존재로 살아 있기를 원하신다.

 

 

6. 나가는 말

 

우리는 위에서 신약성경 속에 나타나는 네 가지 키 워드를 중심으로 신약이 말하는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보았다. 채찍(병), 가시, 눈물, 본은 신약의 고통과 관련된 핵심 단어들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단순히 고통의 현상들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의 극복의 가능성까지 함께 아우를 수 있는 개념들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고통의 개별성에만 머물지 않고 보편적 측면을 보여줄 수 있는 보다 통합적인 개념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른 많은 단어들 중에서도 특별히 이 네 가지 단어에 우리의 관심을 모아 보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채찍은 고통을 일으키는 질병의 체감성을 담아내는 말이다. 가시는 아픔과 약함이 오히려 능력의 통로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역설적 진리의 대변어이다. 눈물은 깊은 고통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고통 속에 있는 자들과의 공감의 통로가 된다. 글본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게 만드는 영적 틀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형성시키는 훈육의 틀로 작용한다.

 

   우리는 이 용어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이 시대에 교회가 감당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키 워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일이다. 영국 요크대학교 역학과 교수인 케이트 피킷(Kate Pickett)은 사회적 불평등이 현대 사회의 가장 심각한 기저 질환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감염병이 팬데믹으로 확산되는 상황을 막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사회 구성원들이 회복 탄력성을 갖추도록 사회 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46)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모두가 겪는 아픔이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이 더 크고 가혹하다는 것을 본다. 고통이 더 큰 곳에 더 큰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야 회복 탄력성이 더 커진다. 이 탄력성이 낮거나 없으면 사회는 침몰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보편적 고통의 현상은 단순히 사회적, 물질적 차원의 대처만으로 치유되지는 않는다. 보다 깊은 영적 차원의 대처가 필요하다. 영적 돌봄과 영적 차원의 공감이 필요하다. 탄식과 눈물의 자리에 함께해 줌이 필요하다. 함께 울고 함께 손잡아 주는 연대의 마음과 실천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계 7:17, 21:4) 하나님을 함께 바라봄이 필요하다. 이는 치유 받은 치유자인 교회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현금의 보편적 고통의 사태가 오히려 기회가 되어, 교회가 교회의 본분을 회복하고, 목회 사역의 초점이 더 분명해지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이 고통의 세상 속에 더욱 편만하게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 미주

1) Liddell & Scott, Greek-English Lexicon, 1083.

2) Ben Witherington, “마가복음의 관점과 구조”, 『마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서울: 두란노, 2007), 36.

3) L.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Oxford: Blackwell, 1967), II.x, 192e.

4) A.C. Thiselton, “The Logical Role of the Liar Paradox in Titus 1:12, 13” in Thiselton on Hermeneutics: Collected Works with New Essays (Grand Rapids: Eerdmans, 2006), 225. 티슬턴은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명제 “만일 ‘거짓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가 있다면, 믿는다는 발화의 1인칭 현재 직설법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등을 사용하여 “믿음의 성향 이론”을 더 발전시키고 있다. 참조, A.C. Thiselton,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 김귀탁 역(서울: 새물결플러스, 2007), 64-65.

5) 이와 관련된 미학적 해설로는 참조, 박정자,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서울: 기파랑, 2011).

6)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302.

7) 팀 켈러도 이것을 강조한다. 젊은 목회자 시절, 유사한 슬픔을 당한 두 여인에게 꼭 같은 책을 선물했지만 그 반응은 상반되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는 중요한 목회적 교훈을 배웠다고 말한다. 참조, Timothy Keller,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New York: Riverhead Books, 2013), 206.

8) Liddell & Scott, Greek-English Lexicon, 1613.

9) John Chrysostom, The Homilies of S. John Chrysostom on the Second Epistle of St.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Oxford: John Henry Parker, 1848), 293.

10) John Calvin, The Second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and the Epistles to Timothy, Titus and Philemon (Grand Rapids: Eerdmans, 1964), 159.

11) Paul Barnett,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7), 569.

12) George H. Guthrie, 2 Corinthians (BEC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5), 592.

13) Rudolf Bultmann, The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 (Minneapolis: Augsburg, 1985), 224.

14) Barrett, 『고린도후서』, 393.

15) 참조, Bultmann, The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 224. 보다 넓은 논의는 참조,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858-59; Martin, 2 Corinthians, 413-16.

16) 참조, Martin, 『고린도후서』, 783.

17) 사본상 두 번째의 히나 부분이 빠진 사본들이 있지만(א* A D 등), 이를 가진 사본들에 더 무게가 있다(P46 B syr cop 등). 참조, Bruce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n; United Bible Societies and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4), 517.

18) 참조,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865.

19) Viktor E. Frankl,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역(파주: 청아출판사, 2005), 189-90.

20) William L. Lane, 『히브리서 상』, 채천석 역(서울: 솔로몬, 2006), 401.

21) F. Blass and A. Debrunner,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1), 113(§ 210). 이를 수용하는 입장으로는 참조, Otto Michel, 『히브리서』, 강원돈 역(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7), 306-8.

22) Blass and Debrunner, A Greek Grammar, § 211.

23) Lane, 『히브리서 상』, 403.

24) Lane, 『히브리서 상』, 401.

25) Michel, 『히브리서』, 306.

26) 참조, Michel, 『히브리서』, 310-16; Attridge, Hebrews, 83-87; O’Brien, The Letter to the Hebrews, 202.

27) 이에 관해서는 참조, Attridge, Hebrews, 143-44; Lane, 『히브리서 상』, 398; Schreiner, 『히브리서 주석』, 249.

28) Keller,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201에서 재인용.

29) Keller,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219.

30) Keller,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245에서 재인용.

31) 참조, Nancy Mace and Peter Rabins, 『36시간, 길고도 아픈 치매가족의 하루』, 안명옥 역(서울: 조윤커뮤니케이션, 2012).

32) I.H. Marshall, 1 Peter (IVPNTC;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1), 89.

33) Liddell and Scott, Greek-English Lexicon, 1877.

34) 참조, Martin, The Theology of the Letters of James, Peter, and Jude, 95 등.

35) 이에 대해서는 참조, John H. Elliott, I Peter (AB; New York: Doubleday, 2000), 73.

36) Elliott, I Peter, 692; 참조, David L. Baker, "Typology and the Christian Use of the Old Testament," in G.K. Beale ed, The Right Doctrine from the Wrong Tex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1994), 313-330 (330).

37) Paul J. Achtemeier, 1 Peter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52-55.

38) E.G. Selwyn, The First Epistle of St. Peter (London: Macmillan, 1947), 89; Achtemeier, 1 Peter, 184.

39) 이 용어는 신약성경 전체 속에 명사형으로 13회, 동사형으로 9회가 나타나는데, 다른 곳에서는 산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비해 베드로서신 속에서는 명사형으로 8회, 동사형으로 2회가 집중적이고도 일관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40) 베드로전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대속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을 위한 모범의 측면에서도 두드러지게 강조가 되고 있다. 참조, Martin, The Theology of the Letters of James, Peter, and Jude, 110; Jobes, 1 Peter, 47.

41) 이 영들을 죽은 사람의 영혼들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벧후 2:4, 유 6의 경우처럼 심판을 받기 위하여 감옥에 가두어져 있는 천사적 존재들로 보는 것이 좋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육신으로 죽은 상태에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다는 것은 이들의 구원을 위한 활동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주권의 선포를 위한 활동으로 보는 것이 좋다. 참조, France, "Exegesis in Practice", 271; Elliott, I Peter, 690.

42) 베드로의 구약 사용에 대해서는 참조, Elliott, I Peter, 12-17; Jobes, 1 Peter, 229-30.

43) C.S. Lewis, The Problem of Pain (London: HarperCollins, 2001), 94.

44) Keller,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 193에서 재인용.

45) Gerald L. Sittser, 『하나님의 뜻』, 윤종석 역(서울: 성서유니온, 2020), 32-33.

46) 안희경, 『오늘부터의 세계: 세계 석학 7인에게 코로나 이후 인류의 미래를 묻다』(서울: 메디치, 2020),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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