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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9일 서울포럼에서 발표된 논문을 아래와 같이 싣습니다. 총 3회에 나눠서 싣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 편집장 주

 

 

장로교회에서의 목사와 장로, 그 역할과 관계와 갈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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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덕현 목사

(서울보은교회)

 

 

들어가면서

 

‘장로교회에서의 목사와 장로’라는 주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식상할 만큼 많이 다루어져 왔다. 필자가 찾아보니 그 정보가 가히 홍수와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도 계속 이 주제를 연구하고 다루고 있다는 것은 세 가지 분명한 반증을 보게 한다. 첫째, 그 많은 연구와 주장과 제안들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여전히 긍정적인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목사와 장로들이 웬만해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는 점이다. 목사와 장로 모두가 어느 정도의 의인 의식을 갖고 있어서, 어디선가 뜻 있는 말을 들으면 자신에게 적용하기 보다는 대개 상대에게 적용을 촉구한다. 목사는 장로를 향해, 장로는 목사를 향해 “당신이 먼저 새로워지라.”고 요구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연구들도 훌륭하고 주장들과 제안들도 탁월한데, 적용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동기 유발의 힘이 조금은 약하다는 점이다.

 

물론 책이나 논문이나 여타 글들이 적용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의 역할, 관계, 갈등’등을 다루는 글이라면 기본적으로 목사와 장로의 변화를 촉구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적용에 대한 제안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제시하는 적용의 수준과 차원이 지나치게 높거나, 그 내용이 다소 관념적이거나, 혹은 늘 들어왔던 뻔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함으로써, 쉽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정말 중요하지만, 오히려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식적이라서 그 가치를 가볍게 여기게 되어버린, 그 소중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실천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또 그 실천을 통해 목사와 장로의 삶과 사역에 어떤 변화가 가능할 수 있는 지, 목사와 장로 간의 관계가 어떻게 신앙적으로 잘 정립될 수 있는 지를 실제적으로 말해보려고 한다. 단 하나, 필자는 학자가 아니라 일선 목회자이기에 필연적으로 목회 경험 중심의 논증을 할 수밖에 없음을 밝혀 둔다.

 

 

Ⅰ. 목사와 장로, 그 역할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현실 인식

 

1. 기존의 글들을 통해 보는 현실 인식

 

1) 정주채 목사의 현실 인식

 

‘목사와 장로’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탁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정주채 목사가 쓴 ‘장로직(목사와 장로)의 목회론적 연구 - 목사와 장로의 목회적 협력과 균형 -’이라는 소논문1)에는 목사와 장로의 역할과 관계에 대한 현실 인식이 이렇게 드러나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목사와 장로가 회개하고 깨어 일어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목사와 장로는 교회직분의 중심축이다. 목사와 장로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이며,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직분의 성격과 자격과 그 직무를 확실하게 알고, 이를 향하여 진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 직분의 지상과제는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으면 세속주의로 흐르게 되고, 직분은 책임과 헌신이 아니라 권세와 명예로 변질되고 만다. 회개와 갱신운동이 일어나야 한다.2)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시대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지 않은가? 한 마디로 목사와 장로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회개할 것이 많다는 말이다. 이 분석에 공감한다.

 

2) 김병태 목사의 현실 인식

 

‘교회를 섬기는 행복한 장로’라는 책을 쓴 김병태 목사의 현실 인식을 보자.3)

“잔꾀가 탁월한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교회의 리더십을 공략하라!’ 리더십이 흔들리면 교회는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더구나 사탄은 더 교묘하게 일한다. ‘교회의 지도자들끼리 싸움을 붙여 분열시켜라!’ 그런데 현대 교회가 사탄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는가?4)

 

아주 적나라한 현실 인식이다. ‘아니다. 결코 그 정도 수준은 아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항변할 수 없는 필자의 마음도 아프다.

 

3) 이경욱 목사의 현실 인식

 

백석교단 이경욱 목사가 기독교한국신문(2015.9.28.)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그의 현실 인식을 보자.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과 대립의 원인은 청지기의 본질적 사명을 잃어버릴 때 시작 된다. 목사든 장로든 영적 직분을 받은 모든 청지기의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고,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 행정도, 치리도, 정치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명을 잃어버리고 오랫동안 교회의 치리와 행정을 맡아왔던 몇몇 목사와 장로들이 마치 그 직분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잘못 인식하면서 교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할 뿐 아니라 서로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데 있다.”5)

 

청지기의 본질적 사명, 영혼을 구원하고 영혼을 살리는 그 일, 주님께서 제일 간절히 원하시는 그 일,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며 기대하시는 그 일, 목사와 장로의 삶에 첫째가 되어야 할 그 일, 바로 그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음을 탄식하는 선지자적인 애통이 느껴진다.

4) 이승철 기자회원의 현실 인식

 

별로 인용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증편향’은 되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뉴스엔조이’ 이승철 기자회원이 기고하여 2006년 10월 18일에 ‘뉴스엔조이’에 실린 후 2019년 현재까지 많은 매체에서 인용되고 있는, ‘목사와 장로, 동역자인가 경쟁자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드러난 현실 인식도 살펴보자.

 

“목사와 장로가 갈등하는 내막을 들여다보면, 상대를 보는 시각과 의식이 상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목사들을 견제하지 않으면 독선과 전횡을 하게 된다’는 장로들의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목사가 심사숙고하고 오랜 기도 끝에 추진하는 목회비전을 장로들이 가로막으려 한다.’는 목사의 시각이다.”6)

 

뻔한 얘기일 수도 있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속마음을 들켜버린 당황스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조금만 더 보자.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의 이면에 감춰진 권위의식이다. 언젠가 만난 어느 목사는 ‘장로들은 목사를 잘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흥회나 교회 행사에 초빙된 강사목사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담임목사님을 잘 섬겨야 복 받는다’는 말이다. 목사가 스스로 목사를 섬기라고 하는 것은 권위의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면이다.”7)

 

“그런가 하면 장로들의 모임에서 가끔 듣는 말 중에 ‘새로 온 목사 길 잘 들여야 돼. 나중에 골탕 먹지 말고’ 하는 말이 있다. 그리고 어떤 장로는 무용담을 펼치기도 한다. ‘지난주 당회에서 목사가 갑자기 안건을 제출하기에 사전 통보와 귀띔도 없이 불쑥 그런 안건을 내밀면 어떻게 하느냐’고 혼쭐을 내줬다는 것이다. 역시 젊은 목사나 신임목사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이다.”8)

 

누군가는 이렇게 보고 있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2. 설문조사의 결과와 분석을 통해 보는 현실 인식

 

1) 이상용 목사, 김정복 목사의 설문조사 결과 비교를 통해 보는 현실 인식

 

통합측 이상용 목사가 1988년에 쓴 논문 ‘지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 간에 상호이해와 협력과 갈등에 관한 연구’9)와, 고신 남부산교회 김정복 원로목사가 1999년에 쓴 논문 ‘목사, 장로의 갈등 연구’10)에는 공교롭게도 거의 흡사한 방식으로 시행 된 설문조사와 그 결과가 나와 있다. 장로와의 갈등에 대한 목사들의 인식, 목사와의 갈등에 대한 장로들의 인식에 대한 것이다. 11년의 간격 속에서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에 어떤 흐름과 어떤 변화가 있었던 지를 살펴볼 수 있다. 설문조사는 1987년과 1998년에 각각 실시되었다.

 

‘목사와 장로의 갈등’에 관련된 글들은 최근에도 넘쳐나지만, 이와 관련된 최근의 설문조사 자료는 대단히 희귀하다. 2014년 3월 24일 한국교회지도자센터(대표:박종순 목사)가 '따뜻한 소통 행복한 동역'을 주제로 개최한 '제3회 바른신학 균형목회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발표됐던 설문조사 결과11)가 그나마 최근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앞의 두 조사와 연결해보면 유의미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7년에 이상용 목사가 실시한 설문조사는 목사 224명, 장로 234명(1987년 통합측 총회 총대 목사 및 장로)에게, 1998년에 김정복 목사가 실시한 설문조사는 목사 230명, 장로 196명(통합, 합동, 고신,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목사 및 장로)에게 이루어졌다. 수많은 문항들 중에서 대표적이면서도 비교에 적합한 문항들을 인용했고 필자 나름의 간략한 분석을 덧붙였다. 

 

먼저 목사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의 내용과 결과를 살펴보자.

 

1) (87년) 장로들과 갈등 때문에 목회지를 옮겨 본적 있는가?12)  그렇다 29%

   (98년) 장로들과 갈등 때문에 목회지를 옮기려고 시도한 적 있는가?13)  그렇다 55.1%

질문의 내용이 조금 달라서 단순 비교는 큰 의미가 없다. 다만 80년대나 90년대나 지금이나,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은 양자 모두가 교회 이동을 시도 혹은 실행해야 할 만큼 심각한 정도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2) 장로들이 교인들에게 신앙의 본이 된다고 보는가?14)15)

   (87년) 그렇다 40.2%  아니다 59.8%   

   (98년) 그렇다 24.7%  아니다 74.9% (유사 문항들 평균)

장로들에 대한 목사의 인식이 11년 사이에 상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설교 때문에 장로와 갈등을 느낀 적이 있는가?16)17)

   (87년) 있다 21.4%  없다 72.3%    

   (98년) 있다 69.7%  없다 26.9%

11년 사이에 목사의 설교에 대한 장로의 반응이 많이 나빠진 것도 사실이겠지만, 목사의 설교에 대해 장로가 이전 시대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혹은 87년은 목사들이 자신의 설교에 대한 비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시대였고, 98년은 자신의 설교를 평가하는 장로들에 대한 목사들 나름의 문제의식을 공론화 하려는 시도를 했던 시점이라는 측면도 있는 듯하다.

 

4) 인사, 행정 때문에 장로와 갈등을 느낀 적이 있는가?18)19)

   (87년) 있다 32.2%   없다 59.8%  

   (98년) 있다 67.9%   없다 32.1%

 

5) 재정문제 때문에 장로와 갈등을 느낀 적이 있는가?20)21)

   (87년) 있다 36.2%   없다 63.8%   

   (98년) 있다 74%     없다 26%

11년 사이에 인사 행정, 재정 문제에 있어서도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의 폭이 아주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6) (98년에만 있는 문항) 목회의 갈등 중 장로와의 갈등 비중은 얼마나 되는가?22)  79.6%

목회의 스트레스 중 약 80%가 장로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장로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의 내용과 결과를 살펴보자.

 

1) 목사의 목회와 목회방침에 만족하는가?23)24)

   (87년) 만족 38%  그저 그렇다 47%  불만족 15%

   (98년) 만족 24%  그저 그렇다 39%  불만족 37%  (유사 문항들 평균)

목회에 대한 장로들의 만족도는 11년 사이에 상당히 떨어졌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2) 목사의 독단적인 직무 수행 때문에 갈등을 느낀 적이 있는가?25)26)

   (87년) 있다 43.6%  없다 54.4%  

   (98년) 있다 89.8%  없다 10.2%  (유사 문항들 평균)

목사의 직무 수행에 대한 장로들의 불만이 11년 사이에 현저하게 높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목회에 대한 장로들의 요구나 잣대도 상당히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3) 목사의 설교 때문에 갈등을 느낀 적이 있는가?27)28)

   (87년) 있다 41.4%  없다 56.8%   

   (98년) 있다 72.5%  없다 27.5%

 

87년에 목사들은 자신의 설교로 인한 장로들과의 갈등이 크지 않다고 답변했다. 21.4% 만이 갈등이 있다고 했다.29) 그런데 같은 시점에 장로들은 41.4%가 목사의 설교로 인해 갈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설교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안에서, 목사와 장로 간에는 인식의 차이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목사의 인사 행정 때문에 갈등을 느낀 적이 있는가?30)31)

   (87년) 있다 32.1%  없다 63.2%  

   (98년) 있다 67.5%  없다 28.5%

 

5) 재정문제 때문에 목사와 갈등을 느낀 적이 있는가?32)33)

   (87년) 있다 30.8%  없다 64.5%  

   (98년) 있다 71.6%  없다 24.4%

목사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와 거의 비슷하다. 갈등의 폭이 현저하게 커졌다.

 

6) (98년에만 있는 문항) 장로사역의 갈등 중 목사와의 갈등 비중은 얼마나 되는가?34) 77.4%

장로의 제반 사역의 스트레스 중 거의 80%가 목사와 관련이 있다는 대답이다.

 

2) ‘당회 리더십’과 관련된 설문조사의 결과를 통해 보는 현실 인식

 

비교적 최근의 자료를 보자. 앞서 말한 대로 '제3회 바른신학 균형목회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발표됐던 ‘당회 리더십’과 관련된 설문조사의 내용과 결과이다.35) 국제선교협력협의회와 대한기독서회에서 발행한 ‘한국교회연합주소록’(2012년)과 예장 통합총회 2013년 ‘교회주소록’에 게재된 교회들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담임목사 180명, 부목사 119명, 장로 178명, 안수집사 99명, 권사 100명, 평신도 43명 총 719명이 제출한 설문지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1) 당회갈등의 요인은 무엇인가?

담임목사의 55.6%는 목회자와 장로들 간의 ‘불충분한 의사소통’이라고 응답했다. 장로의 41.2% 역시 ‘의사소통의 불충분’을 꼽으면서도 32.8%는 ‘목회자의 독단’이라고 응답했다. 안수집사의 경우에는 24.7%가 ‘당회와 일반 성도 간의 소통 부재’를, 26.8%는 ‘목회자와 장로 간의 의사소통 불충분’이었다.

2) 당회갈등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모든 직분자의 70% 이상이 ‘담임목사와 장로 모두’라고 답했다. 이 외에 담임목사 12.2%, 장로 8.4%의 순이었다.

 

3) 당회분쟁의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담임목사의 94.3%, 장로의 75.1%,는 ‘상호대화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응답했다. 권사의 17.2%, 안수집사의 31.3%, 평신도의 30.0%는 ‘제직회와 공동의회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체적으로 70.8%는 상호대화의 폭을 넓히는 것을, 14.0%는 제직회와 공동의회를 활용하는 것이 분쟁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4) 당회가 건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담임목사의 71.9%, 장로의 62.4%가 ‘목회자와 장로 상호 간의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안수집사의 경우 ‘장로들의 헌신과 리더십 향상’이 20.4%, ‘목회자와 장로 사이의 존중과 배려’가 37.8%였다. 다른 직분과는 다르게 안수집사와 권사들은 당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당회 개방’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전체적으로 ‘목회자와 장로들 상호 간의 존중과 배려’가 62.2%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목회자의 헌신과 리더십 향상’이 13.5%, ‘장로들의 헌신과 리더십’ 향상이 10.5%의 순이었다.

 

5) 당회를 건설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당회원들의 영성 및 자질 향상’이 42.4%로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으며, ‘합리적 의견수렵 절차의 강화’가 24.7%, ‘담임목사의 열린 자세’가 13.6%로 나타났다.

 

설문 조사의 결과를 보면 ‘목사와 장로 간의 가장 큰 갈등요인’에 대해, 목사들은 ‘불충분한 의사소통’을 꼽고 있지만, 장로들은 상대적으로 ‘목사의 독단’을 꼽고 있다. 언뜻 보면 목사들은 ‘소통만 잘 되면 별 문제 없을 것’이라는 다소 안이한 인식을 가진 듯이 보이고, 반면 장로들은 ‘목사의 독단이 없어지지 않으면 갈등의 해결이 안 될 것’이라는 다소 경직된 인식을 가진 듯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보면, 목사들이 소통의 불충분을 말하는 것은 상호 간의 소통 부재를 말하기 보다는, 장로들의 수구성과 폐쇄성이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갈등의 1차 원인이 장로에게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장로들도 마찬가지이다. 갈등의 1차 원인이 목사에게 있다고 본다. 목사의 우월의식과 특별의식이 독단으로 표출되고 있고, 그 독단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목사와 장로, 우리 모두는 이 설문 결과에서 한 가지 현실만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당회와의 소통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당회에 갈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도들은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을 이제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건한 성도들이 계속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두 가지 분명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교회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이다. 교회 안에 있는 갈등에 대해서도, 그 해결의 시간과 방법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는다. 또 갈등은 있어도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로 넉넉히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목사와 장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목사와 장로를 하나님이 세우셨기에 하나님이 개입해주시는 한, 목사와 장로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믿음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경우, 정작 목사와 장로 당사자들이 서로를 향해 이런 수준의 믿음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뼈아픈 현실이다.

 

 

Ⅱ. 목사와 장로, 그 역할의 성경적 변화와 갈등의 해소를 위한 다양한 제안들

 

1. 정주채 목사의 제안

 

앞서 1p에서 소개한 ‘장로직(목사와 장로)의 목회론적 연구- 목사와 장로의 목회적 협력과 균형 -’이라는 논문을 통해 ‘목사와 장로가 회개하고 깨어 일어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주장했던 정주채 목사는, 자신이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바른교회아카데미(원장 김동호)가 정리한 ‘한국교회 직제의 개선을 위한 제안문’을 논문의 결론으로 삼으면서, 한국교회와 특히 한국교회의 목사와 장로를 향해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36)

 

“하나, 우리는 경직화된 제도(직제)로부터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초역사적인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회복함으로써 타 교파의 직제를 인식하며, 나아가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 차원에서 연대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구현해야 할 것을 제안한다.

 

둘,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사도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교회의 모든 일반사역이 이와 같은 교회의 사도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교회의 전문사역들이 사도들의 ‘신분(person)’이 아니라 그들의 ‘사역(ministry)' 혹은 ‘직무(office)’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을 제안한다.

 

셋, 우리는 세례 받은 모든 교인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교회와 세상에서 교회의 사명과 하나님나라를 이루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교회 안의 모든 직제와 사역은 단지 직무와 기능면에서만 다르며, 일반사역직(장로, 집사 등)을 계발하고 전문사역직(목사와 감독)과 일반사역직이 함께 책임과 권한을 나누어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유산 중 하나임을 확인하며, 이 원리를 굳게 붙들 것을 제안한다.

 

넷, 우리는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성령 안에서 은사와 부르심에 따라 다양한 사역자를 양성, 계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특히 앞으로는 교회 안에서의 활동과 기능과 직무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직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며,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돌보고,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해 힘쓰도록 교회는 적극적으로 사역과 은사를 계발하고, 교인들을 훈련하고, 양육하며 파송하도록 노력할 것을 제안한다.

 

다섯, 우리는 많은 교회에 공통적인 장로와 집사(권사) 제도가 그 본연의 직무를 회복하도록 노력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장로가 치리와 행정과 함께 교회의 영적 관계를 살피고 교인을 심방, 위로, 교훈, 권면하는 목양의 직무를 담당하고, 집사(권사)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궁핍한 자, 병든 자, 곤경에 처한 자를 돕는 사랑과 긍휼의 사역에 힘쓸 것을 제안한다.

 

여섯, 우리는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개인의 임의적인 결정보다는 집단적인 협의와 합의를 통한 결정(집단지도 원리)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하는 것보다는 이미 합의되고 세워진 규범에 따라 결정하고 행하려고(법치주의) 노력해왔다고 확인하며, 교회가 이 두 원리를 굳건히 붙들 것을 제안하다.

 

일곱, 우리는 당회나 운영위원회 등 교회 안의 대의기구가 참다운 의미에서 대의기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제안한다. 교회는 여성과 젊은이, 사회적 소수자가 교회의 결정과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교회와 직분자들의 변화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과 기도의 울림이 담겨 있다. 그런데 실천적으로 적용을 하기에는 제안의 수준과 차원이 꽤 높아 보인다.

 

2. 김병태 목사의 제안

 

앞서 2p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탄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는가?’라고 적나라하게 질문했던 김병태 목사의 제안을 보자.

 

“사탄의 흔듦으로부터 교회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자격을 갖춘 장로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장로를 세워놓고 후회하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교회로부터 세움을 받은 장로 역시 자신을 점검하면서 교회에 유익한 일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37)

 

이 책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장로들을 위해 쓴 책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장로 자신을 위해, 장로가 노력하고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사는 미리미리 장로가 될 일꾼들을 잘 가르쳐 장로의 수준을 높이고, 장로로 세운 후에도 훈련을 계속 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진심으로 장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제안이다. 하지만 기저에 목사 우위 의식이 깔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3. 이경욱 목사의 제안

 

앞서 2p에서 보았던 대로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과 대립의 원인은 목사와 장로들이 마치 그 직분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잘못 인식하면서 교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할 뿐 아니라 서로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데 있다.’고 외쳤던 대신교단 이경욱 목사의 제안을 보자.

 

“교회의 주인은 오직 그리스도이고, 목사도 장로도 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종의 사명은 영혼을 돌보는 것이다. 이 본질적인 사명 앞에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봉사해야 한다. 이 사명을 잃어버리면 목사든 장로든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장로제도의 도입자인 칼뱅이 말한 대로 ‘목사는 설교와 치리를 겸한 장로이고 장로는 목사를 돕는 장로로서 서로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자가 아니고 서로 협력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38)

 

균형적인 감각이 있는 따뜻한 제안이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무엇을 시작해보자는 말이 없다. 대부분의 제안들이 이렇다. 적용과 실천에 대한 구체성이 없다. 때로 감동도 있고 동의도 되는데 동력이 없다.

 

4. 이승철 기자회원의 제안

 

앞서 3p에서 보았던 대로 ‘목사와 장로가 상대를 보는 시각과 의식이 상충하고 있다.’고 했던 ‘뉴스엔조이’ 이승철 기자회원의 제안을 들어보자.

 

“동역자 관계인 목사와 장로가 화합하여 교회를 이끌어갈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먼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상대는 곧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지혜가 양쪽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39)

 

“그러면 바람직한 화합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장로들은 젊은 목사들의 변화 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너그럽게 수용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변해 가는데 교회만 옛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지향하는 목표가 같다면 작은 제도나 형식과 방법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40)

 

“목사들도 장로들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움을 향한 개혁과 비전에 걸림돌이 된다 해도 실존하는 현실을 무시하거나 한꺼번에 뛰어넘으려고 하면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장로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삶의 대부분이 교회 안에 머무는 목사와 현실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장로는 현상을 보는 시각도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서로의 입장과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만 하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훨씬 어렵다는 말이 있다. 결코 급히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41)

 

문제가 생겼을 때는 항상 먼저 자신을 성찰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만 탓하면 분쟁은 끝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을까봐 걱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무엇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주님을 위하는 것인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42)

 

“요즘처럼 사회적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극심할 때,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은 못할지언정 내부분쟁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오래 전에 우리 기독교 사회에서 유행하였었던 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우리들 마음에 새기고 있으면 분쟁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43)

 

좀 놀랍지 않은가? 물론 이 글의 본론에 있는 지나치게 편향적인 말이나 과격한 표현은 옮기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가 인용한 부분은 이 글의 결론 부분 전체이다.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았다. 목사와 장로, 우리의 자세를 새롭게 함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무엇인가를 즉시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제안은 없다.

 

5. ‘당회 리더십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한 장신대 임성빈 교수의 제안

 

앞서 6p에서 보았던 ‘당회 리더십과 관련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한 임성빈 교수의 제안을 보자.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소통에 대한 신학적 토대확인과 함께 소통의 기본구조인 교회정치의 정신과 체계에 대한 공감대가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성육신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 통로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커뮤니케이션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44)

 

이론적으로는 덧붙일 말이 없다. 중요한 것은 실천적인 측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현재 상호 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목사와 장로는 현실에서 지금 어떻게 적용해야 한 것인가?

 

 

Ⅲ. 목사와 장로, 그 역할의 성경적 변화와 갈등의 관리를 위한 필자의 제안

 

1. 단어에 대한 개념의 전환이 필요하다.

 

흔히들 딤전5:1745)에 근거하여 목사를 ‘가르치는 장로’, 장로를 ‘다스리는 장로’라고 칭한다. ‘가르치는 자’ ‘다스리는 자’, 이 이름 자체가 벌써 우월감과 명예를 선사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장로는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진다. 목사는 ‘그 다스리는 자(장로)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우월의식을 가진다.

 

하지만 신약 성경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다스리다’는 말에 대해 필자가 신약 성경의 모든 용례를 살펴 본 결과, 성경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세상 통치자의 다스림’ 그리고 ‘교회 지도자의 다스림’을 상당히 구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주로 βασιλεύω인데 ‘왕권으로 다스리다’ ‘왕으로서 통치하다’는 뜻이다.(눅1:33, 계19:6, 딤전6:15) ‘세상 통치자의 다스림’은 주로 ἀρχω인데 ‘권력으로 지배하다’ ‘권세를 부리다’는 뜻이다(롬13:3, 막10:42). 이 단어의 명사형 ἀρχον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서 ‘권세 잡은 자’의 원어이다.(엡2:2) ‘교회 지도자의 다스림과 가정의 가장의 다스림’은 προΐστημι인데 προ(앞에)와 ΐστημι(서다, 두다)가 합친 단어로서 ‘앞에서 이끌다, 앞에서 시범을 보이다, 앞장서서 힘을 쓰다.’는 뜻이다. 즉 ‘섬김의 선도자’란 의미로 사용되었다(롬12:8, 살전5:12, 딤전3:4, 딛3:8). 딤전5:17의 ‘잘 다스리는 장로’에서 ‘다스리는’도 προΐστημι 분사형 προεστωτες’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야말로 ‘통치’이고 ‘교회의 지도자 및 가정의 가장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행위로써의 섬김’이다.

 

신약 성경에서 ‘가르치다’는 말의 대표적인 헬라어는 διδάσκω, κατηχέω이다. 이 중 διδάσκω는 예수님의 가르침,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 랍비들의 가르침 등에 보편적으로 쓰였다. 그런데 kathcevw는 필자가 모든 용례를 살펴 본 결과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국한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κατηχέωκατα(‘아래로’)와 ηχέω(‘소리를 내다’)가 합친 단어로서 ‘위에서 들은 것을 아래로 소리 내어(말로써) 전달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갈6:6을 보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밑줄 친 두 단어 모두 헬라어 κατηχέω’의 분사형인데, 전자는 수동태 분사형 ‘κατηχούμενος이고 후자는 능동태 분사형 κατηχοῦντι’이다. 원어의 의미를 따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전달 받는 자’이고, ‘가르치는 자’는 ‘위로부터 받은 말씀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바울은 스스로 혹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를 통해, 갈6:6 이외에도 여러 구절에서 자신과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 말할 때, 비록 한글은 ‘가르치는 자’로 번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κατηχέω 즉 ‘말씀의 전달자’라고 표현함으로써, 필요한 경우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람의 가르침’의 의미를 뚜렷하게 구별했다.(눅1:4, 행18:25, 고전14:19)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교육’이고, 교회 지도자의 가르침은 ‘주님의 가르침을 대행하는 행위로써의 전달, 나눔’을 의미한다.

 

장로의 ‘다스림’이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행위로써의 섬김’이라면, 장로는 통치자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목사의 ‘가르침’이 ‘교육’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대행하는 행위로써의 전달, 나눔’을 의미한다면 목사는 ‘전지자(全知者)’처럼 행세해서는 안 된다. 목사도 장로도 통치자(ruler)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리더(leader) 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목사는 ‘나눔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2. ‘갈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갈등 없는 관계, 갈등 없는 사회가 존재하는가? 아니 존재했던 적이 있는가? 갈등 자체보다 ‘갈등을 나쁜 것이라 규정하는 인식’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갈등을 ‘나쁜 것’이 아니라 ‘여러 문제들 중 하나’ 더 나아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필요하다.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우리가 ‘부부 간의 갈등,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을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조금 어려운 문제들 중의 하나’로 여겨야하지 않을까?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 ‘불 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듯이, 또한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이 해결과 극복의 시작이듯이, ‘갈등의 현실’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고, 또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해결과 극복의 시작이 아닐까? 동의하기 싫은 마음이 불쑥 솟아오르더라도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갈등의 온전한 해결이 나의 힘으로 가능한가? ‘갈등 해결’에 대한 사람들의 온갖 제안과 방법 중에 진짜 온전히 효력을 발휘한 것이 있는가? 목사와 장로,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종류의 갈등이라도 기어이 해결해내야 하는 ‘갈등 해결의 최후 책임자’인가?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종류의 갈등이라도 기어이 해결해내는 ‘전지전능한 능력자’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정녕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 문제’도 우리 손에 넘기신 것인가? 그리고는 ‘그렇게 큰 은혜를 주었건만 그런 갈등 하나도 해결 못하느냐?’고 매일 우리를 다그치고 계신 것인가?

 

목사와 장로, 우리는 사실상 세상의 어떤 종류의 갈등에 대해서도,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종류의 갈등에 대해서도 결코 ‘전지전능한 해결자’일 수 없다. 이 점을 처절하게 인정해야 한다. 단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교회 안의 갈등을 관리하는 자’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에 있어서, 갈등 당사자들인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착각이다. 해결할 능력도 없는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해 왔던 해결책들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방을 향한 윽박지름’이 아니었을까?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나의 사전에 갈등이란 말은 없다.’ ‘갈등이라는 이름의 죄악을 도말하자.’ ‘내 갈등은 내 손으로 해결한다.’는 식의 ‘갈등 해결에 대한 집착’에서 좀 벗어나자는 것이다. ‘갈등 해결에 대한 무례한(?) 책임감’도 좀 내려놓자는 것이다. 우리는 청지기이다. 해결의 주도권과 방법과 때를 주인이신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택하시고 주님이 세우신 저 목사, 저 장로, 주님이 개입해주시고 주님이 책임져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로 갈등을 관리하면서, 조금도 멈출 수 없는 본질적인 사명의 걸음을 계속 걸어가자는 것이다.

 

'Solvitur Ambulando'(라틴어)란 말이 있다. Solvitur 영어로 ‘solution’, 우리말로 ‘해결’이고, Ambulando 영어로 ‘walking’, 우리말로 '걷기’이다. ‘걷기만하면(걷다보면) 해결된다.’라는 뜻이다. 암부로시우스와 어거스틴은 ‘주님과 함께 걷기만하면(걷다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라는 의미로서 이 말을 강력하게 활용했다. “사람에게 매이지 말고, 상황에 함몰 되지 말고, 그럴수록 주님과의 동행에 집중하십시오. 주님과 걷다보면 모든 것은 해결됩니다.”

 

3. 지도자 이전에 성도로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부족하지만 필자는 여러 교회의 집회와 여러 공동체의 행사에서, 말씀의 전달자로서 섬길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집회나 행사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전달했던 말씀들이 어떻게 역사하고 얼마만큼 열매 맺는지를 살펴볼 기회도 있었다. 또한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 십  수 년 간을 섬기면서 전달한 말씀 중 어떤 말씀이 성도들에게 잘 적용되고 실천되는지, 어떤 적용과 실천이 큰 효력을 나타내고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는 지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하나님이 부족한 종에게 보여주신 이러한 장면들은 ‘목사와 장로, 그 역할의 성경적 변화와 갈등의 관리’라는 부분에서도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 오늘부터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목사 장로’가 되자.

 

초대교회의 신앙 선배들, 종교개혁의 신앙 선배들, 고신의 신앙 선배들에게 진짜 부러운 것이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14:7) 신앙 선배들의 삶의 목적이 적어도 ‘자기’는 아니었다는 것, 죽음의 목적도 ‘자기’는 아니었다는 것, 그게 참 부럽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의 목적, 죽음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목적이 존귀하면 인생도 존귀해지고, 목적이 천박하면 인생도 천박해진다. 신앙의 선배들에게는 삶의 목적도 ‘주님’, 죽음의 목적도 ‘주님’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아름다웠고 그들의 죽음은 존귀했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 ‘삶의 목적도 주님, 죽음의 목적도 주님’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가끔이라도 되는 듯한데, 주님을 위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영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롬14:8을 설교하는 것도 꺼렸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도들에게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로마서 14장을 읽으면서 이런 감동이 왔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사는 것,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 그것은 믿어도 주를 위하여 믿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믿음의 목적이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면 되겠구나! 주님을 위해 믿다보면 주님을 위해 살게 되고, 그렇게 살다가 또 살다가 마침내 주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 때의 환희를 잊을 수가 없다. 믿음의 목적을 정립한 후, 삶에도 목회에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지금은 롬14:8을 마음껏 선포하고 있다. 목사와 장로가 ‘믿음의 목적’만 분명히 해도 훨씬 달라질 수 있다.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목사 장로’가 되자.

 

2) 오늘부터 ‘내 감정의 지배권을 성령님께 드리는 목사 장로’가 되자.

 

어떤 한 사람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고 감정이 상하는 일은 우리 삶에 비일비재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다. 그 기분 그 감정이 오래가면 갈수록 손해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람 때문만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상황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고 감정이 상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벗어나고 싶지만 잘 안 된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나쁜 기분은 점점 더 커지고, 상한 감정은 점점 더 자라서 자신의 통제 선을 넘어버린다. 필자는 이런 사태를 초기에 진압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먼저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한다. “저 사람이, 저 사람의 말이, 저 사람의 행동이, 내 감정을 계속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저 사건이, 저 상황이 내 감정을 계속 장악하도록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이대로 내 감정의 지배권을 저 사람에게, 저 상황에게 넘겨버릴 것인가?” 그리고 성령님께 요청한다. “성령님! 제 감정의 지배권을 성령님께 드립니다. 지금 제 감정을 성령님께서 장악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나 자신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친히 행하신다는 사실을 넘치도록 경험했다.

필자의 경우 결정적인 순간에 ‘성령님께 감정의 지배를 부탁하는 기도’를 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가 달라졌는데, 당회를 진행할 때도 그 효력은 많이 나타났다. 때로 필자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을 때, 특히 다수결에 의해 부결 될 기미가 보일 때, 전에는 그 상한 감정과 분노를 기어이 표현하거나 혹은 이를 악물고 억제하면서, 소위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기어이 필자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필자의 의견과 상당히 다른 의견이 채택될 때도 ‘수동적 동의’는 가능해졌고, 자존심이 상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야 할 경우에도 ‘평화적 철수’는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교회 안에서 목사는 자주 장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장로는 목사의 마음을 자주 아프게 한다. 당회라는 이름의 회의는 때때로 상처를 생산하는 공장과도 같다. 당회의 현장은 종종 분노를 촉발하는 자리이다. 감정은 그 침투 속도가 워낙 빨라서, 마음에 확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비교적 초기에 진압할 수는 있다. 즉시 성령님께 부탁하면 된다. “성령님! 제 감정의 지배권을 성령님께 드립니다. 지금 제 감정을 성령님께서 장악하여 주십시오.” 목사와 장로가 이 정도만 할 수 있어도 서로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당회가 나아질 수 있다. 성도들이 목사와 장로에 대해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게 된다.

 

3. 내일부터 매일 ‘기본 중의 기본 세 가지만 실천하는 목사 장로’가 되자.

 

1) 매일 첫 시간에 꼭 ‘주님께 사랑고백’을 드리자.

 

다윗처럼 매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라고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하자. 이 작은 실천이 얼마나 큰 역사를 일으키는지, 필자는 그 역사를 감히 ‘오병이어의 역사’에 비견하고 싶을 정도이다. 성도들이 ‘첫 시간에 주님께 사랑고백 드리기’를 실천했을 때, 교회 안에 나타난 실제적인 결과를 보고하겠다. 첫째, 성도들이 ‘주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며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둘째, 성도들이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하루’ ‘예수님과 동행하는 하루’를 살게 되는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되었다. 셋째, 날이 갈수록 성도들의 신앙인격이 좋아졌다. 넷째,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주님을, 교회를, 자신을, 동역자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목사와 장로가 이 기본 중의 기본을 실천하면, 주님도, 성도들도, 가족들도, 동역자들도 점점 목사와 장로를 더 좋아하게 된다. 다윗은 주님을 향한 사랑고백으로 시작하는 하루하루를 이렇게 표현했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65:8b~9)

 

2) 매일 첫 시간에 꼭 ‘교회사랑 5분기도’를 드리자.

 

첫 시간에 ‘주님께 사랑고백’을 드리고 연이어 ‘교회사랑 5분기도’를 드리는 일은 웬만한 성도들도 다 한다. 교회를 더 사랑하기 위해 주님의 사랑을 매일 구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내 수준의 사랑 정도가 아니라 주님 수준의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는가? 어찌 그 ‘교회사랑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목사는 교회사랑 기도 속에 장로사랑 기도를 더해 보자. 장로는 교회사랑 기도 속에 목사사랑 기도를 더해 보자. 내 수준의 사랑으로는 사랑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매일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희망이 있다.

 

어쩌면 목사와 장로 간의 모든 문제는 딱 하나 ‘서로를 위해 매일 진심으로 기도해주지 않는 것’ 아닐까? 성도들은 기도하면 모든 것이 된다고 믿고 있는데... 성도들은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래서 목사와 장로를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있는데... 성도들은 목사와 장로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데... 성도들은 목사와 장로의 기도가 효력이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데... 성도들은 목사와 장로가 ‘교회의 병거와 마병이 되어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장로를 위한 목사의 매일 기도, 목사를 위한 장로의 매일 기도, 그것만으로도 정말 소망이 있다.

 

3) 목사는 장로의 의견을 ‘목회기도의 제목’이 되게 하고, 장로는 목사가 전하는 주일 말씀을 ‘대표기도의 내용’이 되게 하자.

 

목사와 장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복과 복음의 통로’이다. 목사와 장로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복과 복음을 성도들과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먼저다. 복과 복음의 기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목사는 ‘설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달한다. 장로는 목사를 통해 이미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대표기도 속에 녹여서’ 전달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 헌법에 나와 있는 장로의 직무 여덟 가지 전부와 관련이 있다.(헌법 6장 66조) 특히 5항 ‘교인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여부를 살피는 일’과는 직접적 연결된다. 장로가 설교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성도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 하는 지를 살필 수 있다. 장로가 설교 내용을 제대로 알려면 그때그때 전달되는 말씀이 자신의 기도 제목이 되고 평소 자신의 기도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막4:15처럼 될 지도 모른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성도가 설교의 내용대로 살려면 주일 설교 내용의 핵심이 한 주간 동안 반복되어 전달되어야 한다. 그 반복 중 제일 중요한 한 번이 장로의 대표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장로가 자신의 대표기도 속에 지난 주일에 들었던 말씀을 녹여낸다면 목사가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설교를 더욱 잘 준비하고 잘 전할 것이다. 장로도 자신의 대표기도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매주 새롭고 복음적이며 생명력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표기도도 이렇게 감동과 감격이 될 수 있구나’하는 울림들이 교회를 채울 것이다. 장로가 적어도 목사를 통해 전달된 그 말씀을 자신의 대표기도 속에서 표현할 정도만큼만 존중해도, 목사와 장로의 관계가 극한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 이것은 결코 이론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증명되고 증명된 실제이다.

 

이제 목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목사는 장로의 어떤 의견이나 주장에 대해, 그것에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반드시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목회기도의 제목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목사의 기도와 질문에 대한 응답의 통로 중, 아주 가깝고도 중요한 한 통로로서 장로를 세우시고 또 동역하게 하셨다. 적어도 그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장로의 의견이나 주장에 대해 충분한 기도를 통과하지 않은 채, 신중한 생각과 고민을 거치지 않은 채 섣불리 판단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목사 스스로 막아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목사가 장로의 의견이나 주장에 대해 충분한 기도를 했는지는 하나님이 알고 장로도 알고 성도들도 안다. 때때로 목사 자신은 제일 나중에 후회와 아픔을 동반한 채로 알게 된다. 목사가 장로의 의견, 때로는 동의할 수 없거나 동의하기 싫은 의견조차 목회기도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는다면, 딱 그 만큼만 존중해도 목사와 장로의 관계가 벼랑 끝으로 달려가게 되는 일은 분명히 적어질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 이것은 결코 이론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증명되고 증명된 실제이다.

 

 

나오면서

 

필자가 나름 많은 고민을 하며 또 많은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쓰는 내내, 도무지 몸에 맞지 않는 어색한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가 있었다.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주님은 나의 이 작은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도무지 학자일 수 없는 작은 한 목회자로서, 목회자답게 마지막 말을 하려 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주님! 목사와 장로가 ‘매일 첫 시간에 주님께 사랑고백을 드리는’ 이 작은 실천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목사와 장로가 매일 드리는 ‘교회사랑 기도’ 속에 ‘목사는 장로사랑 기도를, 장로는 목사사랑 기도를 더하는’ 이 작은 실천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목사는 장로의 의견을 목회의 기도 제목이 되게 하고, 장로는 목사가 전하는 주일 말씀을 대표기도의 내용이 되게 하는’ 이 작은 실천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참고 문헌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 ‘장로교회의 정치원리’, 윤재석 역,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14.

숀 마이클 루카스,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찬영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심창섭 외 2명, ‘한국 장로교 정치제도 이대로 좋은가?’,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4.

이윤근, ‘목사, 장로 이래도 되는가?’, 서울: 성광문화사, 1988

손병호, ‘목사직과 장로직의 역사적 신학적 본질과 교회와 장로교회의 교회정치 원리,

                                                       서울: 한국복음신학연구원, 1993

김정복, 'A STUDY OF THE CONFLICT BETWEEN THE PASTOR AND THE ELDER IN THE CHURCH',

        International Christian University & Reformed Presbyterian Seminary, 1999.

이상용, ‘지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 간에 상호이해와 협력과 갈등에 관한 연구’,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1988.
 


논찬: 손덕현 목사의 ‘장로교회에서의 목사와 장로,

그 역할과 관계와 갈등에 관하여’ 논찬

 

박익천 장로

(온생명교회)

 

손목사께서는 글의 서두에서 “필자는 학자가 아니라 일선 목회자이기에 필연적으로 목회 경험 중심의 논증을 할 수 밖에 없다“라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셨다. 하지만 학자 이상으로 묵직하고 목회자이기에 실천적이어서 글을 받는 입장에서는 어설픈 논평 이전에 찬사와 함께 감사함이 먼저이다. 교회가 쇠퇴하는 시대에 교회를 여실히 세워가야 하는 목사로서 처신하며 행보하기도 벅찰 터인데, 개혁신학과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며 목회하기가 그리 간단치가 않은  수도권에서 고신 목사로서의 자긍심에서 나오는 견실한 목회와 바른 강설로 주목이 됨에 고신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는 그저 기쁘고 고마울 뿐이다.

 

 논찬자는 장로이다. 장로가 목사의 글(논문)을 논평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할 수가 있겠다. 그렇지만 평소에도 속한 교회의 당회에서나 성도의 가정을 목사와 함께 심방할 때에 장로가 목사의 설교나 글들을 성도들과 즐거이 나누고 있는 일상이기에 논찬자로서는 그다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이는 신학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며, 신학함은 말씀 상고(詳考)와 열복(悅服)이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함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목사만이 아니라 장로도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신학함이 옳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래서 부족한 장로일지라도 ‘신학’과 ‘목회’에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뚝 서게 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동되는 거룩한 공교회의 ‘교회정치’에 관심과 열의가 있어 신앙하고 신행(信行)하는 가운데 이 논찬에도 기대함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 논문의 요약

 

 ‘장로교회에서의 목사와 장로’ 이 문제(?)는 오래되고 어렵다. 포럼에서 계획한 발제 문구를 보면, 이 발제가 장로교회가 배타적으로 견지하는 직분론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목사와 장로의 구별된 직무에 관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목사와 장로의 시대적 과제 풀기인지 등이 명확하지가 않다. 그런데 제안한 문구를 잠시만 생각한다면 이는 ‘역할과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갈등 해결’에 관한 것일 거라고 당연 짐작하게 된다. 그러기에 손목사께서도 ‘그 역할과 관계와 갈등에 관하여’라고 친절한 부제를 붙이셨다. 이 문제는 아무리 수준 높게 연구하고 반복하여 다루어도 좀처럼 쉽사리 명쾌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지극히 기본적이고 일상적이며 성경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실천을 제안한다고 하고 있다. 이는 평소 손목사의 울림 있는 설교와 적용 지향적인 권면 그리고 교회와 직분자를 바라보는 살가운 시선과도 맞닿아 있음을 다분히 느끼게 해준다.     

 

 발제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목사와 장로, 그 역할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현실 인식 2. 목사와 장로, 그 역할의 성경적 변화와 갈등 해소를 위한 다양한 제안들 3. 발제자의 제안과 당부이다.

 

 첫째로, 현실 인식에서는 먼저 이 주제와 관련한 기존의 글들의 핵심 내용을 언급하고 분석하면서, 목사와 장로의 역할과 관계에 대한 위기적인 진단과 인식에 자신도 공감한다고 하고 있다. 목사와 장로가 감춰진 권위의식과 경쟁 그리고 상충된 시각으로 서로를 지배하며 통제하려 함으로써 주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동역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전략과 공격에 교회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애통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지도자들의 책임이기에 목사와 장로가 먼저 회개하고 깨어 일어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회개와 갱신운동이 목사와 장로로부터 일어나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에 발제자는 동의하고 있다.

 

 이어서 기존의 설문조사들의 결과와 유의미한 분석을 통하여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 요인을 찾고 있다. ‘장로의 수구성과 폐쇄성으로 인한 소통 부재’와 ‘목사의 우월 특별 의식으로 인한 독단’이 갈등의 1차 원인이라고 서로가 어긋나게 보고 있는데, 이는 안이하고 경직된 인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당회와의 소통에 만족하지 못하고 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를 걱정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목사와 장로가 서로를 향해 경건한 성도들이 보여주는 분명한 믿음의 수준조차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가장 뼈아프다 탄식하고 있다.

 

 둘째로, 다양한 제안들에서는 기존의 제안들이 대부분 편향적이며 과격하거나, 이론적으로는 수긍이 되나 적용과 실천에 대해서는 구체성이 떨어져서 현재적으로 상호 갈등을 겪고 있는 목사와 장로에게는 지금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가 의문이라며 평가하고 있다. 그중에서 정주채 목사의 제안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교회와 말씀의 직분자들의 변화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과 기도의 울림이 담겨 있다 보면서 이를 실천적으로 적용하기를 소망하고 있다. 다만 수준과 차원이 높아 적용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다.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 사도성에 근거한 사역과 직무 필요, 전문사역직과 일반사역직의 부름과 사명의 원리 이해, 사역과 은사 계발, 장로와 집사의 바른 직무 회복, 집단지도원리와 법치주의 준수, 진정한 대의기구로의 모색 등이 그 내용이다.

 

 셋째로, 발제자의 제안이다. 먼저 익숙한 단어에 대한 개념 전환이 필요하다면서, 목사와 장로가 그에 따른 참되고 바른 역할과 자세로의 인식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가르치는 자’(목사)와 ‘다스리는 자’(장로)라고 구별하여 표현한 단어 자체가 벌써 명예와 우월 의식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발제자가 이에 대한 신약 성경의 모든 용례들을 살펴본 결과는 엄연히 구별되고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야말로 ‘통치’이고, 교회의 지도자 및 가정의 가장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행위로써의 ‘섬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교육’이고, 교회 지도자의 가르침은 위로부터 말씀을 전달 받은 자로서 주님의 가르침을 대행하는 행위로써의 전달, 즉 ‘나눔’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자기가 통치자인양 굴어서는 안 되며, 목사는 전지자(全知者)처럼 행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통치자(ruler)가 아니라 리더(leader)이다. 따라서 장로는 ‘섬김의 리더십’을, 목사는 ‘나눔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어서 ‘갈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세상의 어떤 사회나 관계든 갈등이 없을 수 없으므로 이상히 여기지 말고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갈등 극복의 시작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갈등의 온전한 해결도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와 장로는 상호 간이나 교회 안에서의 어떤 종류의 갈등에 대해서도 결코 ‘전지전능한 해결자’일 수가 없으므로 갈등 해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무례한 ‘책임감’도 내려놓자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그야말로 청지기이므로 해결의 주도권과 방법과 때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로 갈등을 관리하면서, 조금도 멈출 수 없는 본질적인 사명에 매진하자는 것이다. 즉 갈등의 해결은 ‘주님과의 동행’에 맡기자고 권면하고 있다.

 

 목사와 장로가 지도자로서 이전에 성도로서 ‘주님과의 동행’은 마땅한 바이므로, 어찌 보면 기본적이지만 큰 효력을 나타내며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낸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적용과 실천으로 두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목적이 주님이라는 길이 결코 만만치 않지만 말씀(롬14:8)에 의지하여 그 목적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고, 때로는 상처를 생산해내고 분노를 촉발시키는 자리에서 감정을 제어하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즉시 성령님께서 자신의 감정을 장악하시도록 의탁하자는 것이다. 당장 오늘부터! 예수님 위해 예수님을 믿는 목사 장로가 되자는 것이고, 그리고 오늘부터! 내 감정의 지배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리는 목사 장로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발제자는 목회자답게 말씀(고전 15:58)을 읊조리며 내일부터 매일 기본 중의 기본 세 가지를 꼭 실천하는 목사 장로가 되자며, 이 작은 실천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기도의 형식으로 글을 마치고 있다.           

 

2. 찬사와 비평

 

1) 찬사

 

 아무리 좋고 건강한 교회라 자부할지라도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가 없고 부족할 수밖에 없듯이, 아무리 탁월하고 고고한 말씀의 직분자라 할지라도 관계에서의 고민과 어려움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토로해보지 않은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으로도 확연히 증명되는 일이다. 다만 역할과 관계의 문제로 인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고 관리하여, 교회답게 세워지고 그리고 직분자답게 처신하였는지가 우리 모두의 궁금함이요 관심사이다. 사실 목사와 장로로 연륜을 더해갈수록 이 문제는 줄어들거나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거나 그 양상이나 내용만 다를 뿐이지 결코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랜 세월에 걸쳐 식상할 만큼 많이 다루어져 왔어도 진전되고 있다는 판단을 도무지 할 수가 없는 점이 현실이고 안타까움이다.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이 문제로 인하여 소진되는 영육간의 에너지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가히 짐작하기가 어렵다. 이런 고민에서 예외 된 자가 있을까? 또 이런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처방이나 확실한 중재자나 만능키가 있을까?

 

 발제자는 보편적인 현실인식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설문조사들의 결과와 분석에 근거한 제안들에 과도하게 몰입되지 않고, 자신 특유의 본문 연구와 목회 경험을 통한 제안을 내어놓고 있다. 목사는 이렇게 해야 하고 장로는 저렇게 해야 함이 옳다거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을 제대로 깨끗이 해소하라고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우리는 사실상 어떤 종류의 갈등에 대해서도 결코 전지전능한 해결자일 수가 없음을 처절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관리’하는 자로서 주님의 개입을 촉구하자고 겸손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관리’ 조차도 가장 기본적인 것,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 아니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으로 돌아감이 무엇인지를 친절하고 강력하게 설득하고 있다.

 

 이는 아마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장로와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들에서 숱한 갈등으로 인한 고통과 고난으로 하나님 앞에서 꽤나 몸부림쳐 본 이력과 경험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그의 평소 설교에서도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쉬운 설교,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성령 충만한 설교, 그러면서 고신스러운 설교에 더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진격하며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힘 있는 설교와 판박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기존의 글들이나 책은 다분히 한쪽의 입장에서 그리고 복음주의적인 해석과 적용이 주류를 이루어 두둔하거나 지도하려고만 하는 경향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직분을 좁게 그리고 왜곡되게 가두어 놓고 있다는 인상을 진하게 받게 하는데, 발제자의 인식과 고민과 제안은 그런 선입견을 넘는다. 그것은 우직한 정공법이기에 의외로 강력하고 강렬하다.

 

 예수 잘 믿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하여 기도하자는데 이보다 더 절절한 제안이 있겠나 싶다. 갈등의 문제를 해소하거나 관리하기 위하여 어떤 제도와 원리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며 상대방에게 먼저 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부터 실천하여 변화되는 ‘자기로부터의 혁신’을 결단하도록 함이 참 좋다. 목사와 장로가 많이 알아 말은 잘 하고 성공하여 부자인 것처럼은 보이는데, 예수님을 잘 믿는지는 모르겠다는 참으로 기가 막힌 아이러니에 ‘예수 잘 믿는 목사 장로가 되자!’는 발제자의 정신 차리게 하는 뜨끔한 찌름에 비평은 설 자리가 없다. 그저 겸손히 받고 감사할 따름이다.             

  

2) 비평

 

 설 자리가 없는 비평이기에 어설픈 논박보다는 조금 아쉽고 궁금한 점으로 대체할까 한다. 하나는, 이번 포럼의 전체 주제가 ‘장로교회 교회정치 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하여 ‘장로교회에서의 목사와 장로’라는 부분 주제는 핵심적이고 묵직한 거여서 간단치가 않겠다고 여겼다. 뭐니 뭐니 해도 장로교회의 정치는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직분, 그 직분 중에서도 직분의 꽃인 목사와 장로를 빼놓고서는 논할 수가 없다. 장로교회의 독특성과 호방성은 성경에서 교리와 신조와 고백이, 교리와 신조와 고백에서 예배가, 예배에서 직분과 교회정치가, 교회정치에서 권징이 파생되어 그러한 것을 다루면서 교회를 세워가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바르게 알고 실천해야 하는 장로회(목사, 장로)의 사명과 역할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가 무엇을 알고 어떤 역할로써 그 바른 직분됨을 찾아야 할런지와 그리고 교회를 어찌 보호하며 보전할 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시대를 따라 계속 궁구하여도 오래된 새것처럼 항상 새로울 수가 있다.

 

 따라서 ‘장로교회에서’라는 수식어와 전제가 있으므로 이 주제를 목사와 장로 간의 관계와 갈등의 문제로만 한정하여 다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특히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장로교회가 쇠락과 분열의 길로 치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더러는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멈추고 사탄의 회가 된 이단도 많이 생겨나고 있는 이 위기적인 상황 가운데 목사와 장로가 이러한 포럼의 말씀 연구에서 듣는 경고는 성령님을 통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여기며 함께 받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혼합과 여러 오류로 교회의 참됨과 거룩함이 크게 상실되면서 목사와 장로로 인하여 배태 발현되어 교회를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한 번의 상고로는 정리될 수가 없기에, 발제자는 고민하면서 부제를 달아 한정하여 생각한 것으로 여긴다.

 

 다른 하나는, 발제자의 고상한 제안에는 전혀 논박할 거리가 없으니 깊이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글 전체의 구조 속에서 아쉬움을 찾으려 한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적절치 않아서 그도 아니면 글의 분량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제안에 이르기 전에 ‘소통부재’와 ‘독단’ 정도로만 간단하게 언급한 갈등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양상 그리고 원인에 대하여 다양하고 깊이 다루었다면 조금이라도 서로 간에 이해의 폭이 넓어지지 않았을까 여긴다. 즉 목사와 장로가 어떤 부분에서 갈등하는지가 그려졌다면 서로가 놓치고 있는 것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 발제자는 갈등은 없을 수 없고 갈등은 이상한 것도 아니니, 이 부분을 굳이 언급하지 않은 듯싶다. 그런 차원에서 갈등 ‘해소’ 대신에 갈등 ‘관리’라고 변치하면서 주님께로만 소망을 두고 있다.  

 

3. 소망과 제안

 

 혹자는 말한다. “장로가 너무 알고 똑똑하면 주인 행세하고 목사를 가르치려 한다. 그래서 장로가 적당히(?) 알도록 하는 것이 목사로서 목회하기가 편하다.” 또 다른 혹자는 말한다. “목사가 돈을 알고 풍족하면 기도 안하고 장로를 물질로 평가하려 한다. 그래서 목사가 빠듯이(?) 받도록 하는 것이 장로로서 견제하기가 편하다.” 둘 다 아주 틀렸다. 고약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자존감을 상하게 하는 언사이다. 목사와 장로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한 번에 다 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웃자고 하는 얘기로 열었다.

 

장로는 제대로 알아야, 목사는 가난한 풍족함으로

 

 장로는 오히려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장로가 어설프게 알고, 부분적으로 알고, 지속적으로 배우지 않으니, 선무당 사람 잡는 꼴로 목사를 잡고 성도를 잡고 나아가 교회마저 잡는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말함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의 충만함(행 6:1-7)에서 나오는 신행(信行)이요 섬김이다. 그 핵심에는 말씀이 있다. 장로가 말씀으로 말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으로 교제하지 않으니, 다시 말해 말씀에 목숨을 걸지 않으니 교회를 향한 영적인 지도와 다스림이 헛도는 것은 물론이요 동역하는 목사와도 갈등하며 척을 진다. 장로가 제대로 알면 목사를 제대로 보고 구별되게 여기며 말씀과 성령 안에서 진실한 교통이 제대로 증진된다. 언약공동체인 교회와 거기에 속한 성도의 삶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개혁신앙고백적인 원리가 무엇이고, 그에 따른 섬김과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천착하여 다른 것 궁구하지 않고 복음을 유능하게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장로다움이며 장로로 여김을 받는 일이고, 목사를 가장 잘 돕는 일이 될 수 있다. 교회를 위하여 또 목사를 위하여 자기 본위에 빠지지 않고, 공교회적인 시각과 책무를 늘 고민하면서 신학하고 신앙하는 장로들의 분발이 촉구된다.

 

 목사는 가난한 풍족함에 이골이 나야 한다. 목사가 교인들을 향하여는 청빈하고 절제되고 정직하게 살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관대하여 향유하니, 말씀이 효력 있게 전달되지 못하고 경건의 모양과 능력이 가벼워져서, 많이 하고 오래 하고 쉬지 말아야 할 기도와 말씀 연구와 심방이 갈수록 버겁다. 목사도 이제는 시무 이동이나 은퇴 후를 위해서도 경제를 알고 심지어는 재테크도 잘해야 한다. 목사가 주님의 목회에 전념토록 하는 경제적 지지는 오롯이 장로의 몫이지만, 목사는 그마저도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히 하나님의 돌보심과 긍휼히 여기심에 전적으로 기대어야 한다. 목사는 무엇보다 자기 교회를 잘 목회하는 것이 중요하다. 끊임없이 더 크고 주목받기 위하여 장로의 직분을 좁게 그리고 왜곡되게 가두어 단지 교회성장과 부흥만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만 여기지 말고, 목회 파트너로서 함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것에 진정한 동역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존중해주어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목사를 위한 교회’로 전락하거나 장로교회가 아니라 ‘목사교회’로 치부되는 되는 위기적 상황 속에서, 그래도 장로들과 함께 좋은 장로교회를 만들려는 목사들의 분발이 촉구된다.

 

좋은 장로교회에는 좋은 목사가 있고, 좋은 장로가 있다!

 

 좋은 장로가 좋은 목사를 만들고, 좋은 목사가 좋은 장로를 만든다. 이를 위해 장로는 목사를 기다려주고, 목사는 장로를 알아주어야 한다. 기다려주면 견실한 목사 되고, 알아주면 서로 힘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한 일을 알아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여 상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목사와 장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근신하여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원망 없이 대접하고, 은사대로 봉사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고 하셨다(벧전4:7~11). 장로교회가 흔히 내세우는 영혼구원으로 제자 삼는 사역은 건강한 교회의 표제요 목표이지만, 건강함에만 머물지 않는 참되고 거룩한 공교회로의 소망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언약백성이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여 누리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송영(계7:12)하는 일이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참여함이다.

 

 목사와 장로는 이 존귀한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소명)과 보내심(사명)에 동원된 말씀의 직분자이며 고백자이다. 그런데 서로 갈등하고 반목한다는 것은 그 본질을 망각하고, 상대적 우월과 견제 의식이 곁들어진 직분적 이데올로기에 매몰됨이다. 여기에 매몰되면 편견과 고집과 꼰대가 자리하게 되어 이해와 소통과 화목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더 큰 잘못은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은혜와 교통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멸시함이다. 말씀과 신앙고백을 거스르는 것이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교회건설을 위해 부름 받은 종들이 사치함을 넘은 방자함이요 배교함인 것을 깨달아, 서로의 갈등과 분열을 거침없이 등 뒤로 돌리고, 진실하고 화목한 동역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에 거침없이(행 28:31) 매진할 일이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수하게 선포하며 자신도 그 말씀대로 사는 목사와, 함께 말씀을 받아 말씀으로 기도하고 돌아보며 살피는 장로가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하나 됨으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뚝 세워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그러면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질서가 위반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사와 교회의 장로들을 그들의 사역으로 인해 특별히 존경해야 하며, 가능한 한 다툼과 논쟁이 없이 그들과 화목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벨기에 신앙고백서 제31항)”라는 고백을 진실로 하게 되고, 그들을 통하여 주시는 설교와 치리와 권징을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다스리심으로 여기며 기쁘게 순복할 것이다. 목사와 장로의 선하고 화목한 동역은 교인들의 이런 고백과 함께 좋은 장로교회를 세워가는 초석이 됨을 목사와 장로는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1) rckc.tistory.com/attachment/cfile24.uf@1833E8504F55B709270C84.pdf

2) Ibid., 32

3) 김병태, ‘교회를 섬기는 행복한 장로’, 브니엘 출판사, 2011

4)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036149

5) http://www.c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76

6)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4631

7) Ibid

8) Ibid

9) 이상용, ‘지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 간에 상호이해와 협력과 갈등에 관한 연구’, 장신대학원, 1988

10) 김정복, ‘목사, 장로의 갈등 연구’, Reformed Presbyterian Seminary, 1999

11) http://www.theosnlogos.com/166

12) 이상용, op. cit., 54.

13) 김정복, op. cit., 11.

14) 이상용, op. cit., 54.

15) 김정복, op. cit., 13.

16) 이상용, op. cit., 54.

17) 김정복, op. cit., 11.

18) 이상용, op. cit., 54.

19) 김정복, op. cit., 11.

20) 이상용, op. cit., 55.

21) 김정복, op. cit., 12.

22) 김정복, op. cit., 11.

23) 이상용, op. cit., 55.

24) 김정복, op. cit., 24.

25) 이상용, op. cit., 55.

26) 김정복, op. cit., 25.

27) 이상용, op. cit., 55.

28) 김정복, op. cit., 32.

29) 이상용, op. cit., 54.

30) 이상용, op. cit., 56.

31) 김정복, op. cit., 22.

32) 이상용, op. cit., 56.

33) 김정복, op. cit., 11.

34) Ibid., 21.

35) https://www.theosnlogos.com/166

36) rckc.tistory.com/attachment/cfile24.uf@1833E8504F55B709270C84.pdf

37)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036149

38) http://www.c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76

39)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4631

40) Ibid

41) Ibid

42) Ibid

43) Ibid

44) http://www.theosnlogos.com/166

45)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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