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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뱅주의”가 가능한가?

―구원에 대한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

 

 

우병훈.jpg

 

우병훈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의학)

 

 

아르뱅주의?

 

칼뱅주의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구원 받기 때문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가르친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한번 구원에 참여한 자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삶이 없고 타락한 자는 최종적인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르뱅주의(Ar[minian+Cal]vinism)”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결합시켜, 성경이 그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가르친다면서, 우리는 두 견해 모두를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 두 가지 모두가 사실일 수 있는가?

모순되는 두 가지를 함께 붙잡으면 된다는 말이 과연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

 

 

계시를 모순으로 만드는 무책임한 신학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모순에 만족하고 넘어가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이번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둘 모두를 다 믿고 붙잡아야 한다.”는 식의 궤변과도 진배없는 것이다.

 

신학은 그렇게 무책임해서는 안 된다.

 

아르뱅주의자들은 성령의 영감 받은 책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성경에 대한 올바른 고백인가?

 

성경은 모순적인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모순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성경이 만일 이 중차대한 구원 문제에 있어서 모순적인 책이라면, 과연 다른 문제에 있어서 또한 모순과 오류가 없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아르뱅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 계시에 대한 신뢰성을 무참히 떨어뜨리는 무책임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얼핏 보기에 모순 같은 상황을 만나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진리의 하나님은 원만한 이해의 모든 풍요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참된 신자는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말씀들

 

우선 우리는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키신다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말씀들은 너무나 많고 또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갈 1:4; 벧전 1:18; 마 20:28; 딤전 2:6). 그런 분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방관자요, 구경꾼으로 남아계시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히 7:22). 우리를 구원에서 끝까지 지키신다.

 

둘째,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결코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반드시 지키신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요 6:37-40). 또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요 10:28-30). 너무나 유명한 로마서 말씀에서,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롬 8:28-39). 우리 안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빌 1:6; 살전 5:24).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으로 사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사셨다고 한다(행 20:28, 고전 6:19-20, 고전 7:23, 벧후 2:1, 계 5:9).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신 것은 단지 구원을 위한 가능성만을 제공할 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최종 심판대까지 통과하게 하는 완벽한 구원이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양녀 삼으셨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양자양녀가 된다고 가르친다(롬 8:15, 갈 4:6, 엡 1:5). 세상 사람들도 양자로 삼은 이를 중간에 버린다는 것에 대해 옳지 않게 여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양자양녀로 삼은 우리를 최후 심판대에서 버리시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다섯째,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로마서 6:1-14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6-7절), 최후 심판 때까지 확실하게 보호 받을 것을 가르친다(8-9절).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가 과연 그 연합 관계가 깨어질 수가 있는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다시 그것에서부터 분리된다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가르치는 바가 전혀 없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왜 성경은 연합 교리를 가지고 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힘주어 말하겠는가?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파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연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겠는가?

 

여섯째, 신자가 가진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3:16).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가 다시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겨지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 요일 2:25, 요일 5:11-13). 주님과 믿음의 성례 통해 결합한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반드시 주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다(요 6:53-55). 주님께서 주신 영생은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는 생명이며, 그것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요 10:28).

 

일곱째, 그리스도를 믿어서 칭의 받은 사람은 반드시 최종 심판에서 구원 받는다.

로마서 5장 9절에서 사도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은 곧 최후심판에서 구원을 받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칭의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최후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칭의는 최후심판의 판결에 대한 현재적 선언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구원에서 탈락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듯한 구절들에 대한 설명

 

우리가 구원에 대해 이해할 때 이런 분명한 가르침들이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얼핏 보기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구절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최종 심판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때문에 그때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구절들(마 25:31-46; 롬 2:6-11)은 참된 신자의 경우에는 최종 심판에서 결코 정죄 당하지 않으며 반대로 참된 신자가 아닌 경우에 반드시 정죄 당함을 가르치는 구절로 해석해야 한다.

 

최종 심판은 행위에 대한 물음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최종 심판에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성령 안에서 행한 행위들”이다(갈 5:5 참조). 그렇기에 그 행위들은 믿음의 표징으로서의 행위이지, 믿음에 뭔가를 더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위에 근거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최후 심판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최종 심판에서 정죄 당하지 않는 근거를 “행위”에 잡는다면 “어떤 행위를 얼마나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불거지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 구원 받는 자가 생기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 첫째 경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최대한 낮추는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최종 심판대에서 결코 낮아질 수 없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경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어떻게든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족한 공로적 선행을 위해 별별 짓을 다 하는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그런 신학에 빠져서 면죄부 장사나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자들을 의롭다 여기신다고 단순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서 쌓아간 “행위에 근거하여” 판단하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의 엄위로운 의의 기준은 신자라 할지라도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사 64:6, 슥 3:3-4 참조).

 

최종 심판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행위”의 분량이나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행위”는 무엇인가? 신자의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참됨을 보여주는 “징표요 보증이요 열매”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행위의 양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행위가 공로가 될 수도 없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자들은 최종 심판대에 섰을 때에 비록 행위에 있어서 부족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해 주실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최종 심판대에서의 차등적인 판결이 있음을 가르치는 구절들(고전 3:10-15)은 구원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해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상급의 형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토의할 문제이다. 차등상급이 계급적 위계질서를 낳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상급이 물질적인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일단 알아야 한다. 영원한 천국은 완성이요 충만이기 때문에 위계질서를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마도 상급은 서로를 더 섬길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신자가 이 땅에서 살면서 구원의 길에서 도중에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구절들(갈 3:3, 딤전 1:19)은 참된 믿음이 있는 자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들 본문이 말하는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참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마 25:31-46에서도 마찬가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는 경고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최후 심판 때에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으나, 신앙생활에서 행위가 부족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하셨다. 여기서 “도무지(헬라어, 우데포테)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전혀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최후 심판 때에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6장에서, 구원의 길에서 탈락할 가능성에 대한 언급들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성”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히 6:4-9). 히브리서 기자가 그런 경고 뒤에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 6:9)”라고 덧붙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라고 질문한 것은, 아직까지 그들이 믿음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므로 아직은 기회가 있는 상태에서 경고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그 구원의 길에서 결코 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은 위와 같은 설명으로 여전히 견지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 길에서 멀어져 버린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만일 그들이 그 상태로 세상을 떠난다면, 처음부터 바른 믿음을 안 가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정말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지금은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져 있어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종종 죽음의 자리(death bed)에서도 역사하사 구원을 이루신다.

 

셋째, 신자가 구원을 열심히 이뤄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은 구원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화의 삶을 권면하는 구절로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그런 구절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도우심을 함께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빌립보서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라는 말씀은 곧 이어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신앙의 길은 인간의 책임성 있는 반응이 요청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주심 속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보다 확실한 구절에서 시작하는 성경해석

 

이처럼,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영원히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구절들(“A그룹 구절”이라 부름)에서부터 출발하면, 구원의 길에서 현재든 최종심판대에서든 탈락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구절들(“B그룹 구절”이라 부름)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성경에서 보다 명확한 구절들을 중심으로 보다 불명확한 구절들로 접근하는 성경 해석의 원칙을 지키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만일 B그룹 구절들에서부터 시작하면 A그룹 구절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구원에서부터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된 신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요 5:24, 6:40),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자가 되었고(고전 6:20), 그리스도와 죽음과 부활에서 연합했으며(롬 6:5), 하나님의 양자양녀가 되었고(롬 8:14-15),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이 되시며(고후 1:22, 5:5),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으며(롬 8:1), 장차 진노에서 구원 받는다(롬 5:9)는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모순이 없다는 것을 믿고,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도 최대한 원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인간의 이해력이 가진 한계 상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다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이해력의 한계이지 성경이 모순을 가진 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결론: 가망성 없는 아르뱅주의

 

나는 A그룹에서 출발하여 B그룹을 이해하려는 입장이 정통 기독교를 따르며 종교개혁의 신학에 부합하는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B그룹에서 출발하여 A그룹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입장은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며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입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성경의 일관성은 믿고 있다.

 

하지만 A그룹과 B그룹을 동시에 인정하려고 하는 입장은 겉으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모순을 그냥 품고 가자는 입장으로서, 건전한 인간의 지성이 받아들일 수 없고 계시의 온전성을 믿는 신자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교회사를 통해서도 가망성 없는 입장으로 판명이 난 견해라 생각한다. 아르뱅주의자들의 입장이 지금 이 마지막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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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SFC동문영역포럼”(2016.4.1.대구명덕교회)에서 발표한 글로, 우병훈교수(고신대)의 “개혁파신조에서 읽어낸 공공신학”에 대한 논찬이었음을 밝힙니다. 대교리문답과 통일 김동춘 대표간사 (전국 SFC)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이웃사랑의 실천과 통일 ...
    Date2016.04.15 By개혁정론 Views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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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신학과와 신대원의 6년 연계 교과과정 실천으로 신학교육의 비정상화를 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이 글은 2016년 4월 9일(토)에 있었던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송영목 교수가 발표한 논문의 요약본입니다. 신학대학원과 신학대학의 교육과정의 연계를 통해 신학교육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논지입니다. 교단의 신학교육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
    Date2016.04.14 By개혁정론 Views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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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부활 주일을 기다리며, 기독교인들은 사순절을 지켜야 하는가?

    부활 주일을 기다리며, 기독교인들은 사순절을 지켜야 하는가?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 들어가며 부활 주일이 다가왔다. 부활 주일 이전 40일을 많은 교회들의 교회력에서는 “사순절”(四旬節, 헬라어-“테사라코스테이”)이라고 하여 절기로서 지킨다. 그...
    Date2016.03.23 By개혁정론 Views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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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네덜란드 캄펀신학교 방문기

    고려신학대학원 학생들이 네덜란드 캄펀신학교와의 양해각서에 의해 지난 2016년 2월에 네덜란드 캄펀신학교에 방문한 것을 기행문 형식으로 적은 글입니다. 네덜란드 캄펀신학교 방문기 임모세 (고려신학대학원 제70회 졸업생) 2014년 6월에 고려신학대학원...
    Date2016.03.02 By개혁정론 Views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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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설] 성찬상을 모독하지 마라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제74회 고신총회를 결산한다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1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1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