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순길 교수님을 추모하며
이상규 교수
(고신대 신학과)
방금 허순길 교수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또 한 사람의 고신교회 지도자를 잃게 되었고, 필자 개인으로는 또 한 사람의 은사를 잃게 되었다. 일생동안 고신교회와 고신대학 혹은 고려신학대학원을 위한 소임을 감당하시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허순길 박사님, 모든 세상사 뒤로하고 이제 주님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리실 것이다. 유족들에게 위로의 인사를 드리며 허 박사님을 기억하고자 한다.
허 박사님은 1933년 12월 15일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출생하셨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2월에는 함양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 졸업하던 그해 3월에 고려신학교 예과(후에 칼빈학원)에 입학하여 4년 간 수학 한 후 1958년 3월에는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1961년 2월 제15회로 졸업하셨다. 김장수, 이삼열, 임종만, 전은상, 정판술, 차영배 등이 동기들이었다.
그 후 대구 서문로교회 전도사로 부임하면서 계명대학교 교육학과에 편입하여 1963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10월에는 서문로교회의 청빙을 받고 담임목사로 일하던 중인 1966년 9월 네덜란드 캄펜신학교로 유학하여 캄파이어스 교수 휘하에서 수학하고 1969년에는 신학석사(Drs)를, 1972년에는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으셨다. 이미 1969년 7월부터 고려신학교 전임강사로 가르치기 시작하신 허 박사님은 최종학위를 수득한 이후 8월에는 고려신학대학 조교수로 부임하셔 1978년까지 가르치셨다. 약 9년 간 교수하신 그는 1978년 1월부터 1987년 7월까지 9년 동안 호주 퍼스(Perth)에 위치한 네덜란드인들의 후예들이 중심이 된 호주자유개혁교회(Free Reformed Church of Australia)에서 목회자로 활동하셨다. 그러든 중 다시 고려신학대학원의 부름을 받고 1987년 8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부임하셨고, 이때부터 1999년 2월 정년으로 은퇴하기까지 12년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혹은 원장(1988.9-1994. 3, 1997.1-1999.2)으로 봉사하셨다. 따라서 그가 교수 혹은 원장으로 고려신학대학을 위해 20여 년 간 봉사한 셈이다.
필자가 허 교수님을 처음 만나게 된 때가 1973년 신학과 3학년 때였다. 그때 처음으로 그 분께 서양교회사를 배우게 되었고, 학생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당시 교무과장이셨던 교수님을 수업 이외의 일로 뵙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의 군 입대로 그 이후 그 분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군 복무 후 신학대학원에 복학했을 때는 대학을 사임하시고 호주에서 목회자로 활동하고 계셨다. 그 분께 더 많은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그러나 필기를 잘했던 고영희 학우의 강의 노트를 빌려 허 박사님의 강의 내용을 공부할 수 있었던 일은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필자가 1987년 2월 유학 차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쓴 편지가 퍼스에 계신 허 박사님께 쓴 편지였다. 그때 인사드리러 한번 가겠다고 했더니 먼 길 오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던 허 박사님의 엽서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멜버른에서 퍼스까지는 3,410 Km 인데, 자동차로 이삼일을 쉼 없이 가도 가기 어려운 먼 거리였고 비행기로는 4시간 소요되는 거리였다. 그래서 허 박사님은 경비도 많이 드니 오지 말라 하셨구나 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1990년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고 그 때부터는 부족한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허 박사님의 동료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과 신학대학원의 지리적 그리고 심리적 격리 때문에 가까이에서 뵙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화와 글을 통해 그 분의 생각과 신학, 혹은 삶의 방식을 보고 알게 되었다.
우선 허 박사님은 ‘개혁교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가르치신 학자였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허 박사님의 기여로 인정한다. 필자가 학부학생 때였지만 허 박사님께서 「교회생활」, 「개혁주의」 같은 고신의 간행물에 쓰신 교회지남(敎會指南)에 관련된 글을 애독했고, 이런 글을 보면 허 박사님에게는 신학적으로 미숙한 한국교회 현실에서 개혁교회의 신학과 전통을 소개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교회 특히 고신교회에 바른 교회생활 지침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런 그의 일관된 노력은 후일 『개혁해가는 교회』(총회출판국)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둘째, 그는 교회는 오직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 교육만을 수행해야지 대학을 경영하거나 병원을 경영하는 등은 개혁주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이런 생각에서는 오병세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으나 한명동, 이근삼 교수와는 다른 관점이었다. 허순길 교수님은 이런 자신의 분명한 견해를 공사석에서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고 공감 하는 바 적지 않았다.
셋째, 허 박사님은 신학대학원에 대한 상당한 애정을 가진 분이었다. 신학교육에 대한 애정만이 아니라, 신학대학원의 행정 구조에 대해서도 분명한 자기 입장을 피력했다. 즉 신학대학원이 대학의 지휘체계 하에 있다는 점은 매우 부당하다고 보았고 단설대학원 운동을 추진했다. 또 교단 정치로부터 자유 하도록 신학대학원의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셨다. 비록 단설대학원이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신학대학원이 나아가야 할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필자는 동감하는 바 없지 않다. 흔히 은퇴하면 영향을 행사할 수도 없고 책임도 없으므로 침묵하고 있을 수 있지만 신학대학원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의견을 말하고 자신이 믿는 바를 강조해왔다. 그 일예가 신대원의 부산 이전 건이 제기되었을 대 이를 강하게 반대하고 기독교보에 의견을 개신한 일을 기억한다. 지난해 고려신학대학원 70주년 행사에서도 상한 육신의 불편에도 불구하고 신대원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신 것으로 듣고 있다. 또 이 때 과거 고신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을 강하게 책하고 경계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그런 측면에서 고신의 지난 역사를 점검하고 평가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허 박사님은 1954년 이래로 60여 년 간 고신의 울타리에서 사시고 그 현장에서 신학적 나침반의 역할을 하셨다. 교단의 동료, 혹은 학교의 동료들 간의 인간관계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으셨다. 그러나 자신의 길을 걸아 갔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했다.
필자는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오후 3시 30분부터 두 시간 가량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갑오마을 부영아파트 708동 1204호의 허 박사님 자택을 방문하여 성희찬, 김흥식 목사와 함께 허 박사님의 삶의 여정과 신학, 교회 생활 등 전반에 대한 인터뷰를 한 바 있고, 그 일부는 기독교보에 게재된 바 있다. 또 그 때 필자와 별도의 대화를 나눈 바 있다. 필자에게 주는 후일을 위한 증거였다. 우리 교회의 교사였던 허순길 박사님을 앞서 보낸 유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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