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자 허순길 박사님을 회고하며
유해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허순길 박사님께서 2017년 1월 10일 오전 3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작년 6월 말 폐 기능이 약화되면서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시던 중 성탄 직전에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응급실을 거쳐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으나 회복되지 못한 채 결국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가족장을 하되 한국의 일반적이거나 교회적인 장례 절차를 원치 않고, 당신이 경험하고 이 땅에 펼치기를 원하셨던 개혁교회의 관례대로 가족들이 조문은 받되 발인도 간단한 성경 봉독과 기도만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를 앞서 보낸 사모님과 자녀, 손자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를 기원 드린다. 교회의 선생 허순길 박사님을 앞서 보낸 고신교회와 호주교회에도 하나님의 위로를 기원한다.
1. 허 박사님의 복된 인생 여정
허 박사님은 1933년 2월 13일, 경남 함양군 수동면 옥매리에서 허현 선생과 성소심 여사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셨다. 1940년에 지곡초등학교에 입학하셨고, 서당에서 명심보감도 읽으셨다. 1948년에는 부친의 반대로 가출을 감행하면서까지 함양중학교에 입학하였고, 늘 우등생의 자리를 지켰다. 미리 전도를 받은 모친의 권유로 1947년 여름부터 고신교회인 개평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그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경험을 한다. 1951년에는 공산주의의 실제적인 위협 하에 중학교를 졸업한다. 이어서 함양농업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는 고신교회인 함양중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그 당시 공비의 공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1953년부터는 그때까지 목표로 했던 법학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기로 하고 학생신앙운동(SFC)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던 1954년에는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하고 교회 건축 일에 적극 봉사하다 같은 해 9월 부산 고려신학교 예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진주에서 황철도 목사가 구호병원 성격으로 운영하던 진주의 복음병원에서 경건회를 인도하면서 동시에 서기로 일하기도 하였다.
1958년부터는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교수의 개인 비서로 일하면서 그분의 주석 간행 작업을 돕기 시작한다. 이 일을 1960년 10월까지 했는데 허 박사는 자신이 복음주의적인 근본주의 신학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을 바로 배운 것이 그때였다고 회고한다. 196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서문로교회 전도사로서 교육을 담당한다. 1964년에는 서문로교회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하다가 담임목사 황철도 목사님이 병으로 이듬해 4월에 사임하자 홀로 교회를 섬겼다.
1959년 3월 황철도 목사의 따님 황영희 여사와 혼인하여 2남 2녀(성국, 성미, 성은, 성진)를 두었다. 1966년에는 홀로 곧 고신교회의 자매교회가 될 네덜란드 개혁교회(이른바 31조파)의 캄펜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이때 동사 목사 제도나 가정 심방을 하는 장로, 집사가 소수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직분제도를 보고 큰 감명을 받고 직분론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지도 교수 캄파이어스(J. Kamphuis) 교수로부터 개혁교회의 신학적 신앙고백 전통과 교회 사랑을 배웠다. 1969년 6월에 “찰스 핫지와 쏘넬의 장로직 논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해 8월 일시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하고 대학 인가를 위하여 전임 강사로 교육부에 등록하였다. 1970년 3월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가서 박사 논문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9월에 다시 네덜란드로 복귀해서 석사 논문을 확대 발전시킨 “장로의 완전한 권한”으로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목사는 말씀과 치리를 담당하고 장로는 치리만을 담당하는 장로라는 입장은 미국 남장로교회의 영향이며, 칼빈에게서 나온 개혁교회의 공통된 입장이기도 하다. 허 박사는 논문에서 목사와 장로가 기능적으로 구별되지만 권리의 면에서는 동등하므로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사 논문을 쓰는 중에 네덜란드 교회에 한상동 목사를 초청하도록 요청하여 교회간의 친교의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에 한 목사는 1972년 3월에 네덜란드 교회를 방문하여 부산 송도 고려신학교의 신축 필요성을 알리고 상당한 액수의 재정을 지원 받았다. 당신은 그해 6월 2일에 박사 학위 논문을 공개적으로 방어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그해 8월에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에서 교수로 사역하면서 여러 보직을 맡았다. 모금을 도왔던 신축 교사는 1975년 8월 15일에 준공되었다.
1976년에는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그 곳의 개혁교회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는데, 그 해 11월에 호주자유개혁교회(Fre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의 한 교회(Armadale 소재)로부터 목회 청빙을 받는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어려움을 예상하면서도 목회로 개혁교회를 직접 섬기고 체험하겠다는 일념으로 청빙을 수락하고 1978년 1월에 호주로 떠난다. 호주교회의 환대를 받아 환영식을 마친 다음 날 주일에 목사로 취임하였다. 성도가 950명이나 되어 목사 한 사람이 목회하기에는 버거워서 청빙된 터라 당장 일을 시작해야 했다. 취임예배는 그 교회를 목회하고 있던 목사가 설교하고, 허 박사는 개혁교회가 받은 삼대신조(벨직고백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도르트신경)를 받아 따르겠다고 서약하는 것으로 마쳤고, 오후에는 허 박사가 직접 취임설교를 하였다. 월요일에 당회에서 삼대신조에 서명하고 동사 목사로서 당회 사회권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언어와 상황 파악을 위하여 5개월간은 기존 목사가 사회하기로 요청하여 양해를 얻었다. 그리고 교회의 확장을 염두에 두고 매입한 새 부지가 있는 곳을 자신의 교구로 정하였다. 두 목사는 교대로 성경본문 설교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설교를 하였다. 한 건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설교를 한번만 준비하면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호주 목회는 1987년 8월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복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허 박사는 호주에서 목회하면서 얻은 유익이 아주 많았다고 말한다. 이런 유익들은 아래에 별도로 정리하려고 한다.
귀국과 더불어 송도 교정에서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의 소요를 목도하면서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영역주권’을 따라 신대원을 대학교로부터 독립시키는 일에 몰두한다. 이를 위하여 1988년 9월부터 신대원장에 취임하여 이사회와 총회에서 발언하고 설득하며 여러 곳에 많은 글도 썼다. 그간 고신대학교와 이사회와 총회 등 고신교회 안에 나타난 속화의 현실을 한탄하면서 참 교회의 회복을 염원하고 호소하였다. 허 박사는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고려신학대학원’으로 회복하기를 원하였고, 그 결실로 1998년 9월부터 신대원의 천안시대가 열렸다. 1999년 4월에 은퇴하였다. 후임 원장이 속히 선임되지 않은 관계로 은퇴가 원래 예정되었던 시기보다 5개월 정도 늦춰졌다. 은퇴 이후에는 매해 호주와 한국을 오가면서 한국에서 개혁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힘쓰셨다. 여러 교회들과 후배들을 지도하시다가 이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2. 허 박사님의 개혁교회를 향한 열정
허 박사님은 가난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고 유독 삶의 의미에 관심이 많았다. 이때 받은 복음은 당신의 삶의 여정을 결정하였고, 그때부터 이 길을 꼿꼿하게 걸어오셨다.
박윤선 목사님을 만난 뒤에 신학과 목회에서 더 구체적인 길을 정하고 한결같이 그 길로만 걸었다. 바로 개혁교회에 대한 열정이었다. 이후 석사와 박사 논문의 주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교회를 성경적이고 바른 신학으로 세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 연구로 당신은 성경적으로 목사와 장로의 동등성과 세부적으로 장로직의 참된 회복을 주장하였다. 각 직분이 가진 고유성 때문에 직분 간의 동등성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당신은 이 주장을 한국이 아니라 호주에서 실제적으로 실천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 호주로부터 청빙을 받았을 때, 그는 주님께서 개혁교회를 깊이 알고 배울 기회를 주신 줄 알고 승낙하였다.
먼저 목사의 주된 사명을 보자면, 첫째가 설교, 둘째가 청소년 교리문답 교육, 셋째가 심방과 영적 관리이다. 당신은 호주에서 목회하면서 늘 자정을 넘겨가면서 설교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한 언약이요 언약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언약이다. 따라서 설교는 언제나 언약적이며 구속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당신은 설교에서 적용을 언급하지만 말씀의 가치를 흐리게 하는 예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신은 각고의 노력으로 장로교 목사로서 젖었던 설교 양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개혁교회는 영적인 편식을 없애기 위해 매주일 성경 말씀을 잘 요약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설교하고, 주중에는 청소년에게 가르친다. 당신은 유아세례를 받은 12-15세 이상의 청소년들을 다섯 반으로 나누어 매주 다섯 번 요리문답을 가르쳤다. 청소년들은 이 과정을 마쳐야 공적 신앙고백을 하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청소년들을 영어로 가르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여 가르쳤고, 이후에 반듯한 신앙생활을 하는 훌륭한 언약의 후예들을 길러냈다.
당신에게 유학 시절에 받은 장로의 첫 심방은 기이한 경험이었다. 장로의 심방은 목사의 설교에 기초한 영적 양육이며 목자적인 보살핌이라 할 수 있다. 장로들은 교인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설교의 열매를 살피고 영적으로 지도하고 돌본다. 특히 자녀들을 성경으로 교육하며 언약에 기초한 기독교학교에서 배우게 하는지를 확인하고 지도한다. 장로들의 심방 보고를 들은 뒤 목사는 자기 설교와 요리문답 설교를 스스로 점검한다. 목사는 이런 정규 심방보다는 특별히 노약자, 독신자, 장애인이나 병자들을 심방한다. 장로나 목사는 이런 심방을 당회에 보고한다.
허 박사는 개혁교회에서 얻은 이런 값진 경험을 가지고 귀국하여 목회할 생각도 가졌으나 한국에서는 목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런 개혁교회를 이 땅에 세울 기회를 주시지 않은 것이 아쉬운 일이다. 다만 다시 신학교수로 일하면서 실천을 겸비한 신학을 후배들에게 전수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
1987년에 귀국한 뒤 당신은 호주에서 실천한 개혁교회의 믿음과 삶을 전수하려고 애를 썼다. 특히 목사후보생들에게 교회사와 봉사신학(실천신학)을 강의하셨다. 이 강의를 정리하여 기고하고 책으로 출판하였다. 교회사 분야에는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한국장로교회사」, 「큰 사건, 큰 인물을 따라 교회사 산책」, 「어둠 후에 빛: 세계교회 역사 이야기」와 영어로 출판한 한국교회사가 있다. 봉사신학 분야에는 「봉사신학 개론」과 「개혁주의 설교: 원리와 시행」에 이어 설교집으로는 「교회 절기 설교」, 「구속자적 신약 설교」, 「구속사적 구약 설교」, 「개혁해가는 교회」,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 「잘 다스리는 장로」, 「개혁주의의 진리와 생활」이 있다. 교리문답 설교집으로는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 해설 설교집」, 「교리문답 해설 설교 1-2」가 있다. 이런 저서들은 개혁교회를 향한 당신의 열망을 담은 귀한 유산으로써 이후 한국 개혁교회 건설에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3. 허 박사가 남긴 개혁신학의 요점
위에서 정리한 내용을 포함하여 허 박사님이 남긴 개혁신학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목사의 동등성
당신이 목회한 호주 교회에는 이미 13세 연상의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목사는 교구를 나누어 목회하고 번갈아 가면서 당회 사회도 하였지만 자주 만나 의논함으로 어떤 긴장이나 충돌도 없었다고 한다. 당신은 서문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할 때 부목사는 행정상 전도사와 같은 위치에 있었음을 회고하면서 개혁교회에서는 목사들이 경력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동사목사로서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직분의 동등성은 목사, 장로와 집사직에 다 해당한다. “어느 교회도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교회들 위에, 어떤 직분도 다른 직분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개혁교회법, 74조)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은퇴하면 평생 섬겼던 교회의 교인으로 출석하는 것이 아주 당연시된다.
2) 집사보다 많은 장로
집사는 자비와 구제 사역을 행하며 이를 위한 헌금을 관리하고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한 교인들을 찾아 돕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수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장로는 가정을 규칙적으로 심방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수가 많아야 한다. 아래 3)에서 보겠지만, 한국교회의 관행처럼 많은 직분자, 특히 많은 집사를 둘 필요가 없다.
3) 당회와 설교 토론, 직분자들 상호 권면
개혁교회는 월요일 저녁마다 당회로 모인다. 두 번은 심방 보고를 다룬다. 두 번은 집사도 참석하는 광의 당회로 모인다. 또 주기적으로 당회에서 설교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 서기 장로가 이를 예고하면 목사들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렇다고 해서 거부감을 갖지는 않는다. 목사가 설교마다 최선으로 준비하기 때문이다. 당회에서 목사는 설교 내용에 대해 해명을 요구 받거나 장로의 심방에서 교인들이 설교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를 듣는다. 그러나 대개는 그 자리에서 장로와 집사가 설교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며 심방에서 교인들에게 들은 감사와 격려를 전달받는다. 당신은 설교 토론의 기회를 늘 감사하게 대하였고, 당신의 설교 사역을 주께서 복 주셨다고 고백한다.
개혁교회의 세 직분을 맡은 직분자들은 일 년에 몇 차례 상호 권면한다. 동역자로서 상호 부족한 점을 지적하여 상대방이 직분 수행에서 회중의 비난을 받거나 짐이 되지 않게 하며, 동역자에게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 없는지, 직분 수행을 소홀하게 한 경우는 없는지를 권면하고 전달하고 점검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직분자가 서로를 감독하고 사랑으로 권고하고 도움으로써 당회는 하나가 되어 교회를 기쁘고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다.
4) 관리 위원회
위의 사안에 따라 목사와 장로 때로는 집사까지 당회에 참석한다. 당회는 치리회이다. 이런 치리의 일들 외에 가령 교회 운영 관리는 당회가 위임하는 관리위원회가 담당한다. 이 위원회는 당회가 아니며, 장로나 집사 한두 사람이 참여할 수 있지만 이들은 당회와 위원회를 상호 연결하는 역할만을 한다. 즉 치리와 여타 교회 관리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5) 성찬
교회가 커지면 개혁교회는 분립한다. 큰 교회를 목회한다는 것이 목사에게 버겁기도 하거니와 성찬의 의미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도 교회 규모가 너무 크면 어려움이 있다. 성찬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동시에 성찬상에 둘러앉은 형제자매들과의 교제이기도 하다. 개혁교회는 성찬상을 예배당 앞쪽에 배치하고 30-60명씩 둘러앉아 참여한다. 그래서 교인수가 4-500명을 넘으면 분립한다. 성찬 참여에는 권징이 선행한다. 권징은 시벌 자체의 시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성도의 삶을 두루 살펴 성찬상을 성결하게 지키는 일이다. 따라서 이 기능을 행사하는 장로의 심방은 중요하다.
6) 권징
개혁교회에서는 권징이 회중의 암묵적 동의 없이 시행되지 않는다. 당회는 회중에게 범죄한 성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을 알린다. 두 번째는 이름을 공개하고 십계명에서 죄목을 밝히고 기도 요청과 동시에 그에게 권면할 것도 요청한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권징, 이런 경우 대개 출교할 것도 언급한다. 세 번째 광고는 출교를 공포하고 당사자에게 출교 날짜도 알린다. 당신은 다른 여인과 관계를 가진 40대 가장을 출교시킨 후에 그에게 총격의 위협까지 당한 경험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가 출교당한 후에 다시 돌아와 재영입하였다고 한다.
7) 유아세례
4-500명의 교인이라면 거의 매주 혹은 두 주마다 유아세례가 있기 마련이다. 개혁교회 교인들은 언약을 고백하면서 가능하면 속히 혼인하게 하고, 산아제한을 하지 않고 자녀를 낳아 기른다. 언약의 표인 유아세례는 할례의 예를 따라 가능하면 일찍 받게 한다. 유아로 세례를 받은 자녀들은 청소년 교리 교육반을 수년간 마치고 공적 신앙고백을 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온전한 의무를 수행한다.
8) 시찰
개혁교회는 매년 목회 경험이 많은 목사 두 분을 지명하여 노회 소속 교회를 방문하여 시찰하게 한다. 시찰은 노회 내의 자매교회가 상호 형편을 알리며 감독하고 돕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시찰하는 목사는 각 당회에 참석하여 직분 시행을 세밀하게 살피며 당회가 노회에게 청할 도움이 있는지도 확인하여 노회에 보고한다. 한국교회도 시찰회가 이런 기능을 가지지만 지금은 시찰회는 있지만 유명무실한 형편이다.
9) 가정생활
가장 기본적인 언약 공동체가 가정이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식사 기도를 하며 부모가 식탁에서 자녀에게 성경을 읽고 간단하게 가르친다. 이렇게 영육의 양식을 함께 섭취한다. 주일에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에 참석한다.
10) 기독교 학교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기독교학교를 세운다. 교육은 부모의 몫이기 때문에 이 학교는 영역주권을 따라 교회가 아니라 부모들이 협의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영한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도 직분이 아니라 부모로서 여기에 참여한다. 학령기에 있는 자녀들을 둔 부모들의 재정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미 자녀들을 성가시킨 교인들도 협의회의 회원으로 기부하기도 한다.
11) 기독교 문화 창달
당신이 목회한 호주교회는 네덜란드에서 그곳으로 이주한 교인들이 세운 교민교회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에서 서약한 대로 언약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기독교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당시에 대학은 청년문화와 이교문화가 지배하였기 때문에 자녀들을 대개 직업학교나 사범학교로 보내었다. 이런 반문화적인 경향을 직시한 당신은 청소년 교리 교육반에서 신자의 문화적 사명과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결과로 상당수의 자녀들이 목사,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12) 개혁신자들과 노동, 노동운동
개혁교회 신자들은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교장으로 퇴직한 이도 정원을 관리하고 때로는 자원 봉사를 하거나 병원 청소를 하여 교회 장로로 섬기기도 한다.
개혁 신자들은 아무리 대우가 좋아도 신앙생활에 장애가 될 때에는 그 직장을 포기한다. 호주 개혁교회 교인의 경우, 노조 가입을 강제하는 직장은 아무리 좋아도 취업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노조의 집행부가 과격한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며 혁명적인 행동 강령을 취하고 노조원들에게 강압적인 행동 통일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13) 기독교 고등교육과 신학교육의 책임자
당신이 말하는 기독교교육과 문화는 교회가 아니라 교인의 의무이다. 당신은 이를 영역주권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런데 당신이 1987년에 귀국하였을 때 목도한 고신대학교의 형편은 많이 달랐다. 기독교 고등교육은 교회가 직영할 영역이 아니다. 교회가 직영한다면 이는 교회 치리회가 대학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면 여러 면에서 부작용과 문제가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속화(俗化)의 문을 열게 된다. 이사 상당수와 이사장직을 목사가 맡게 되면서 목사직의 속화를 불러온다. 개혁교회에서는 목사가 교회라는 영적 영역 외의 다른 영역의 임원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이런 과정에서 옛 고려신학교가 고신대학교 휘하에 들어가면서 목사 양성에 위협을 받는다고 본다. 신학교는 목사와 장로가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사로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신학교 이사회의 가장 큰 사명은 재정적 관리보다는 신학교육을 감독하는 일이다. 당신은 이런 신학교육의 확립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14) 개혁교회 국제협의회
개혁교회는 세상에서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소수세력이다. 호주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제안으로 네덜란드에서 개혁교회 국제협의회가 1982년에 창립될 때 당신은 호주교회의 대표로 참가한다. 이 협의회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정통적 칼빈주의 신학 노선을 걷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들의 국제적 교제와 협력을 위한 모임이다. 우리 고신교회와 마찬가지로 미국 정통장로교회, 남아공개혁교회도 회원교회이다. 당신은 1993년 3차 협의회에도 고신교회의 대표로 참석하여 부회장으로 피선된다. 1997년 4차 협의회가 서울 서문교회당에서 열릴 때에는 회장으로 피선되어 봉사하였다.
4. 인간 허순길, 개혁신학자 허순길 박사
인간 허순길 박사는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평소에 냉수마찰로 몸을 단련하는 등 늘 건강을 잘 유지하셨다. 당신의 얼굴은 한국인으로서는 유독 붉은 빛을 띠었는데 이 얼굴빛과 관련해서 한 번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무개 교수, 난 주말이나 연말에 음주단속이 있으면 여지없이 걸린다네. 경찰이 창문을 열게 하고 내 모습을 보다가 ”아, 어르신!” 하면서 그냥 보내 준다네!” 당신은 남을 쉽게 비난하지 않았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경우에는 ‘참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으로 시작하여 안타까움을 표하는 데서 그쳤다. 자서전인 「은혜로만 걸어온 길」을 읽어보면, 서너 군데 이런 경우가 나오는데, 평소에 그 일을 알고 있는 이만이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완곡한 말로 표현한다. 필자가 2016년 12월 27일에 문병을 갔을 때에, 당신은 삶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불원간에 부르시면 기쁘게 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내신 자서전의 제목을 생각나게 하신 말씀이었다.
인간 허순길 박사는 성품이 담백하셨다. 어떤 직분을 탐한 적도, 누구에게 어떤 자리를 위해 암시한 적도 없다고 하셨다. 원장으로 봉사하시면서 회식비를 5,000원 전후로 정하여 절약하시면서 여분의 재정은 신대원을 대학원대학교로 신청할 때 필요한 적립금으로 돌리셨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평생 개혁신학과 개혁교회를 위하여 사심 없이 사신 분이다. 그러나 당신의 길은 고신교회 안에서 외로웠다. 위에서 거론한 영역주권에 대해서 “나도 개혁교회 목사로 봉사하면서 개혁교회 생활에 깊이 관련을 하지 않았다면 다른 분들과 똑같이 영적 영역과 세상 영역을 구별하는 문제에 대해 무감각했을 것이다.”라고 썼다. 당신이 나그네로서 호주에서 경험하고 실천하였던 개혁교회의 신앙과 삶을 모교에서 가르치고 모교회에서 실천하려고 할 때 그는 다시 나그네의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2016년 10월 27일 고려신학대학원 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고려신학대학원 70년 역사의 회고와 기대”를 발표하셨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야 하는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떼버리시고 그 긴 발제문을 또박또박 읽어 가시면서 필요한 부분에서는 짧은 호흡에도 불구하고 고함을 치면서 강조에 강조를 하셨다. 곧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장면이 여러 번 재현되었다. 그분이 힘주어 외치셨던 것은 신학대학원의 독립이었다. 당신은 이 독립이 개혁교회를 세우기 위한 초석이라고 여기셨다. 당신이 네덜란드와 호주에서 생경하게 배우고 체험하고 실천한 개혁신학과 개혁교회를 향한 염원이 이 땅과 교회에서도 자리 잡을 날을 소망한다.
주님께서 이제 개혁신학자 허순길 박사가 이곳과 저곳 이 땅에서 순종하면서 행한 수고를 그치게 하시고 쉬게 하셨다. “주님 안에서 죽은 허순길 박사는 복 되도다!” 후학과 후배들도 당신의 길을 따라 복된 삶을 살면서 복 된 날을 고대하기 바란다.
<이 글은 개혁정론의 요청으로 고 허순길 박사님의 자서전인 「은혜로만 걸어온 길」을 기초로 하여 작성하였음.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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