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는 개신교의 교리적 면죄부인가?
황대우 교수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결정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이후 모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를 성경 해석의 열쇠로 삼았다. 그래서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에 도전하거나 이 교리를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개신교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 건전한 이신칭의 교리가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new doctrinal indulgence of the Protestant Churches)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너무나도 안타깝다.
혹자는 이러한 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를 개인주의의 천국으로 이해한다. 이유는 이 교리가 개인의 신앙고백인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적 가운데 하나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본래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조장할 의도를 가지도 있었던 아니다. 더욱이 개혁주의 교리에서 보자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더더욱 그와 같은 개인주의로 왜곡될 가능성은 희박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교단 교회들에 그러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사실이다.
“예수천당”이란 구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개인주의화하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한 때 대학선교단체인 CCC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를 강타했는데 이 질문 역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이란 구호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이 모든 교리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전도 전략의 모티브로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그것은 전도전략의 부동의 모티브로 활용되었고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 알을 낳았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부흥이란 황금 알은 형태상 성경공부,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 전도 집회, 다양한 수련회 등을 통해 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 부흥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통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소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이웃교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요 현주소이다. 때때로 교회들 사이의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교회와의 연합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장 가까운 이웃 개척교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나, 상가의 조그마한 교회가 이웃을 덩치 큰 교회와 연합 사업을 했다는 소식들은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천상적이든 지상적이든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는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즉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분리된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은 한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기형적인 양상이 단지 교단과 교단 사이에만 상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단 안의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상존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어서 서로가 갈 천국이 다른 것처럼 이웃교회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적대적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인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듯 외치는 각 교회 강단의 소리에 청중들은 너무나도 쉽게 감염되어 왔다. 어쩌면 교인을 빼앗기지 않고 뺏어오는 일이 전도라는 미명에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각 교회들은 이웃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행사에 대해 민감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 인접한 교회일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은 더욱 심각하게 증폭되어 왔다.
물론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연합과 교회 연합 사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교회연합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분명 옳지만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개 교회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물량주의의 목표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럴 경우 교회연합은 연합 사업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교회연합이란 그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요 목표이지 결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각 교회의 개인주의화와 이로 인한 지역 교회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고 반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 간의 갈등의 주원인은 어쩌면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의 초심, 즉 “교회는 하나이며 그 머리도 하나”라는 성경의 근원적 교회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철부지 아이들의 명분 없는 아집으로 인해 벌어지는 싸움과도 같은 지역교회들 사이의 아귀다툼은 분명 해소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교리를 우리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을 옹호하는 도구로,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이신칭의를 가르치지만 성경의 교회론은 결코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따로 국밥이 아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룬 “더불어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몸의 한 지체가 된다.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몸에서 한 지체는 다른 지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교회의 성도 없이 우리 교회의 성도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이다. 천국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다. 이 지상의 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 한 몸이다.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있다면 모든 지체가 함께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지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도움의 필요는 더욱 긴박하고 절실하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한국의 지역교회들이 “우리 교회” 내지는 “내 교회”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보다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에 사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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