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선교적’ 신학인가?[1]
저자: 존 볼트 (John Bolt,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오늘날 우리는 교회는 반드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주장을 정기적으로 듣는다. 이 주장은 종종 새로운 선교적 신학에 대한 요구와 동반되는데 이는 과거의 신학들이 기독교국(Christendom)에 매여 있고 우리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보다는 이미 고수하고 있는 것을 방어하는데 매여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으로부터 백 여년 전에 쓰여진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과 같은 책은 선교적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할 것 같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런 가정을 논박하고 개혁교의학은 아직도 계속해서 가치 있는 선교적 작품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우선, 신학이 선교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는 선교적 신학은 무엇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미리 정해진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을 것이고 바빙크가 그 관념에 들어맞는 지의 여부를 묻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신학적 작품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있는 첫 번째 질문은 “그것은 참인가?”이다. 그 작품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와 실제적으로 어울리는가? 다른 필요들로 다른 청중들에게 말하기 때문에 서로 매우 다르게 보이는 신학들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수 있다.우리가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16세기, 제네바)를 찰스 하지의 조직신학(1871-72, 미국)과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초판, 1895-1901, 네덜란드)과 비교할 때, 우리는 매우 유사한 내용이지만 다른 형식들을 가진 세 가지 개혁주의 작품들을 본다. 일단 우리가 진리 문제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신학의 선교적 특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참된 신학이 의도적으로 교회의 선교를 촉진하지 않았다면, 그 신학을 가리켜 선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다른 작품은 매우 의도적으로 선교적일 수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과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 수 있다. 필자는 오늘날의 좋은 조직신학은 선교적일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들의 역사적 상황이 이를 요구한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려본다: 선교적 신학은 우리시대에 지상명령을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해서 교회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진리의 포괄적이고 현대적인 요약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신학적 과업을 인식한다. 필자가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뿌리 깊이 선교적 신학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필자의 생각 속에 있는 이러한 정의와 함께 한다. 문화적 경계선들에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드는 것은, 성경의 세계에 대한 이미지와 전혀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의 복음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선교사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도전들 가운데 하나다. 매우 초보적 수준에서, 선교사들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라는 말씀이 북극 지방, 멕시코시티(멕시코의 수도)의 한 구역, 상파울루(브라질 남부의 도시)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혹은 전혀 양을 본적이 없고 목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 의미 있는 진술인가 하고 생각한다. 개념상으로 볼 때,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개인의 자율성이 체질화되어 있는 현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개념을 방어하는 것도 하나의 도전이다. 그리고 선교사는 그들의 세계관에 괴로운 짐으로 여겨지는 환생의 지속적 순환에 대한 관념들을 담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생에 대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복음”은 우리가 영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관한 교리가 아닐까?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가장 깊은 갈망들과 염원들에 대한 면밀하고 실존적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경의 ‘진리’를 성경 자체의 용어들과 언어(언약; 하나님의 왕국; 칭의, 등)로 요약하는 단순한 성경신학은 이 선교적 과업에는 부적절하다. 선교사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질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오해 받고 복음 자체를 손상시킬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 오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인도네시아의 뉴기니섬 서반부의 부족민들 속에서 사역을 했던 캐나다 선교사 돈 리차드슨(Don Richardson)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가 사위(Sawi)족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산에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을 때, 교활함과 속임수를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었던 그들이 가룟 유다를 그 이야기의 진정한 영웅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했다. 그러한 세계관 속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현실적 도전을 야기시켰다. 리차드슨은 예기치 못했던 어떤 의식을 목격함으로 방법을 발견했다. 사위족 사람들은 끊임없는 전쟁의 상황에 놓여 있었고 각 마을은 그들의 적들과 “평화의 아이(peace child)”로 한 유아를 선사하는 “평화의 아이 의식(peace child ceremony)”을 통해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아이가 살아있는 한, 그 마을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리차드슨은 돌파구를 발견했고 그 평화의 아이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대한 유비(analogy)로 사용했다. 신학적으로, 무슨 일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스스로를 계시하시기에 그들의 종교들, 신화들, 전설들, 그리고 의례들(ritual practices)은 이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에 대한 반응이라고 가르친다. 만약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해야 한다면, 이스라엘 속에서의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 즉 복음의 진리(혹은 기독교 교리)가 반드시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바와 연결되어야 한다. 좋은 선교적 신학은 성경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우리의 나머지 지식에 연결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성경의 진리를 보편적 인간의 경험에 관련시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정확히 바빙크가 행하고 있는 바이고 성경 자체에 대한 그의 이해와 함께 출발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관례들이 – 언약, 할례, 희생제사들, 그리고 제사장직– 그들의 이웃 나라들의 종교적 관례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가운데 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들로서 그들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을 회피할 수 없다. 성경의 계시는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유대 총독 구레뇨의 시대에 살 던 바벨론 유수 이후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인들에게, 야만인들에게, 네덜란드 북부 지역에 거주하던 프리지아인들에게, 그리고 세계 곳곳의 원주민들에게 찾아 오셔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을 자신께로 부르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반응해야 한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이 일반계시를 억누르고 그것을 우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심지어 우상숭배적 반응들조차도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갈망에 대한 어떤 것을 가르친다. 세계의 종교적 전통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어떤 지식을 갖고 있고, 그들이 따라 살아야 하면서도 그들 모두가 그 의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어떤 규범이 있다는 것과 우리는 구원자, 등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이 복음을 소통하는 것과 관련된 선교적 과업을 위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가 규칙적으로 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이 ‘하나님의 일반계시에 대한 반응의 보편적 표현들’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소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Christ’s exaltation)에 관한 장으로부터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그리스도의 죽음, 즉 그분의 낮아지심의 끝은 동시에 그분의 높아지심으로의 길이었다. 우리는 모든 종교들과 철학 체계들 가운데서 죽음은 삶으로의 길이라는 다소 자각하여 표현된 관념을 만난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낮이 밤에 이어서 오고 봄의 깨어남이 겨울의 동면 후에 일어나는, 자연에서 보았다. (개혁교의학 [영문판] 3권, 421쪽) 여기서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단지 봄에 땅을 뚫고 나오는 나팔수선화와 같은 새로운 삶의 표식으로 다루어 져야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경계 문제들(boundary issues)과 씨름하면서 그들이 종교적으로 죽는 것과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한 신화들 – 선교사들이 복음을 위한 진입점들(entry points)로 활용할 수 있는 것들 – 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바빙크의 이 진술은 그 신화들이 복음을 위한 진입점들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의미의 전부이고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진입점들은 모든 선교 사역에 필수적이고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선교사들에게 그들의 신학적 체계와 그들의 사역을 돕는 풍부한 예들을 제공해 준다. 바빙크가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다루는 지는 그러한 진입점들보다 한층 더 중요하다. 이 주장은 최근 ‘중국에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돕는 데 있어서의 기독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중국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세미나를 통해 필자에게 강화되었다.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만다린어(Mandarin)로 번역하고 있는 칼빈 신학교 학생들인 진 리(Jin Li)와 마리아 마(Mary Ma)는 나에게 ‘개혁교의학의 중국 사회를 위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위한 가능한 관련성’이란 제목의 강의안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필자가 말한 바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필자는 바빙크에게 있어서 모든 기독교적 사고는 삼위일체와 함께 시작해야하고 창조 그 자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들(marks)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흔적들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는 “육신이 된 그 말씀 (Logos [Word])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지니고 있는 우리는 이 흔적들을 볼 수 있는 능력(capacity)를 가지고 있다. 실재(Reality)는 하나님의 생각의 성육신이고 우리 안의 논리적 추론의 원칙을 창조하신 바로 그 말씀(Logos)에 의해 창조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 하나이시고 위격들에 있어 구별되시는 것과 같이, 창조의 사역 또한 하나이고 분리되지 않지만 그 창조사역은 그것의 통일성 가운데서도 다양성이 풍부하다”는 중요한 통찰로 인도한다. 마지막으로, 이 기독교 세계관은, ‘하늘의 명령과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Heaven’s Mandate and Dao)’에 관한 중국 전통들 속으로 탁월하게 해석되어 들어 갈 수 있고,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일성을 존중하면서도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계관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선교적 신학은 반드시 올바른 신학이어야 하고 교회의 선교사역에 유익해야 한다.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이 두 가지 시금석을 통과한다. [1]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16년 봄 호에 “Bavinck’s
Reformed Dogmatics, A ‘Missional’ Theology?”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Forum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