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예정론과 그에 대한 오해와 실상
(“칼빈과 일반은총”[1] 에서 발췌 (3))
저자: 헤르만 바빙크 (Herman Bavinck)
영문번역: 게할더스 보스 (Geerhardus Vos, 미국 구 프린스턴 신학교 성경신학 교수)
한글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신학과 철학이 하나님의 뜻을 의뢰하고 안식을 찾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그래서 그것들은 플라톤과 헤겔의 방식을 따라 세상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려고 애쓴다. 혹은 신학과 철학은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면서도 이 [하나님의] 뜻에서 영지주의 (Gnosticism) 가 그랬듯이 알 수 없는 심원함 (βυθοσ ‘αγνωστοσ, unknown depth) 이나,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가 그랬듯이 맹목적이고 불합리하며 불운한 뜻이나, 폰 하르트만 (von Hartmann) 과 스펜서 (Spencer) 가 그랬듯이 무의식적이고 불가해한 힘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아 칼빈은 이런 다양한 형태의 범신론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칼빈은 모든 인간의 논리를 능가하고 맞서는 하나님의 의지의 주권을 최대한의 힘으로 지지한다. 예정 (predestination) 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의 지성소들 (divinae sapientiae adyta) 에 속하고 사람의 호기심은 만족스럽지 않게 남아 있어야한다; 이는 그것들이 그 누구도 출구를 발견할 수 없는 미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비밀로 지키려 하신 것들을 능히 조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지혜의 위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하기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법하지 (exlex) 않으시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이들에게 그들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심으로 충분히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절대권력이 아니라 모든 악으로부터 순전하고, 최고의 완전한 규칙이며, 또한 모든 법들의 법이다 (ab omni vitio pura, summa perfectionis regula, etiam legum omnium lex). 그리고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이 이 [하나님의] 뜻의 내용이고 심장이며 핵심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는 이유는 인간의 타락 이후 자연이 더 이상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호의를 우리에게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측면에서 자연은 죄책감에 빠진 우리 영혼을 절망으로 채울 뿐인 신적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세상에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Ex mundi conspectus Patrem colligere non licet).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별계시 외에 인간은 하늘의 것들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분의 아버지이심에 대하여, 그리고 삶의 규칙으로서의 그분의 율법에 대하여 무지하고 무감각하다. 특별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확실성 (divinae erga nos benevolentiae certitudo) 에 관하여 사람은 어떤 희미한 의식도 없는데 이는 사람의 이성이 이 진리를 얻을 수도 없고 얻으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따라서 누가 참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길 원하시는지 (quis sit verus Deus, qualisve erga nos esse velit)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본질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며, 복음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의 창조자 (Creator) 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구속자 (Redemptor) 로서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사색 (speculation) 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참으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이 그분의 본성에 어울리는 지 (qualis sit et quid ejus naturae conveniat)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해 주신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약속 (gratuita promissio), 자비의 약속 (promissio misericordiae), 하나님이 스스로를 세상과 화해시키시는 방법으로서의 고귀한 특사 (特使) (liberalis legatio qua sibi Deus mundum reconciliat) - 이것들은 복음의 본질과 믿음의 굳건한 토대를 형성한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롭고 사랑 깊은 아버지이심을 굳게 확신하기에 그분의 애정 깊은 호의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자이다. 신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구원의 안전성을 신뢰하고 사탄과 죽음에 용감히 맞서는 자이다 (Fidelis non est, nisi qui suae salutis securitati innixus, diabolo et morti confidenter insultet).
하나님의 자비로운 약속으로서의 복음의 이러한 초점은 칼빈에게 그의 시대의 변화무쌍한 견해들 가운데 확고한 기반을 제공해 줬을 뿐 아니라 그의 전망을 넓혀 주었고 그의 공감대를 확장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결연하게 자신의 신앙고백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모든 후손들 사이의 일치와 평화에 효력이 있는 것들을 그들 가운데서 중재했다. 일반적으로 칼빈에 대해 형성된 생각은 이것과는 분명히 크게 다르다. 통상적으로 묘사되는 그의 이미지는 잔인한 엄격성과 독단적인 편협함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제네바 종교개혁가에게 중대한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칼빈은 비록 세르베투스 (Servetus) 의 죽음과 관련해서 단지 다른 종교개혁자들 – 이들 중 누구도 전적으로 그들 시대의 모든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과 같은 수준에 서 있었지만, 그는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르베투스의 처형을 승인한 칼빈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칼빈은 아니다. 아주 다른 칼빈도 있는데, 그는 부드러운 우정의 결속으로 자신의 친구들과 연합하였고, 그의 마음은 신앙으로 인하여 고난받고 분투하는 형제들을 동정함으로 나아갔으며, 그는 그들과 일체감을 가졌고 가장 혹독한 고난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갈채를 보냈다. 우리는 갈라진 개신교도들의 연합을 위해 가장 열심히 끊임없이 애쓴 칼빈을 알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에서만 찾았고 심지어 “삼위일체”나 “위격’과 같은 용어들에도 자신이 매이기를 꺼려했다. 그는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지지하기를 거부했고 교리상의 사소한 불순물을 바탕으로 한 교회의 모든 분열을 반대했다. 그는 예배의 형식에 관한 모든 현안에 있어 형제의 관용을 소중히 여겼다. 다양한 견해차이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멜랑히톤과 츠빙글리에게 최고의 존경심을 가졌고 그들을 하나님의 종들로 인정했던 칼빈이 있었다. 그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지지했고, 개인의 성경해석 권리를 확보했으며 성경을 해석하여 스스로의 신앙을 표현함으로 그 권리를 표명했다. 그는 자유의지와 예정론의 요점에서 멜랑히톤과 의견이 달랐지만 멜랑히톤의 『신학강요 (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 를 추천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어떤 특정한 신앙고백에 제한시키길 거부했고,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실재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또 다른 부당한 비난이 칼빈에게 가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마치 칼빈이 선택과 유기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예정의 작정을 설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것처럼 말한다. 사실은, 그 어떤 복음 설교자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관한 자유롭고 풍부한 선포에 있어 칼빈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는 예정 (predestination) 을 결코 앞쪽에 두지 않았기에 『기독교 강요』 에서 그 주제는 믿음의 삶에 대한 논의가 끝난 후 제 3권에서야 다뤄진다. 1536년 [칼빈의] 『제네바 신앙고백 (Geneva Confession of Faith)』 에서 그 주제는 전혀 다뤄지지 않고 1545년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 (Geneva Catechism)』 에서는 교회와 관련하여 단지 지나치듯 언급된다. 그리고 유기 (reprobation) 와 관련해서는, 칼빈을 힐난하기 이전에 그 비난은 성경에 반하여(against), 삶의 현실에 반하여, 양심의 증언에 반하여 놓여져야 한다. 이는 이 모든 것이 세상에는 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것은 무서운 현실이고 이 두려운 작정 (decretum horribile, ※ 역자주: 칼빈이 유기 교리를 가리켜 한 말) 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그것의 가장 깊은 원인을 둘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가 요구되는 유기에 대한 칼빈의 교리에는 아직 다른 특징들이 있다. 그가 유기에 관한 일에 대해 매우 적게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우선적으로 놓여진 사실이다. 『기독교 강요』는 대단히 절제된 특성을 지닌 작품으로 학자연하는 난해함이 전혀 없다; 그것은 곳곳마다 종교적 실천과 가장 긴밀한 관계 속에서 신앙의 교리들을 다룬다. 이것은 특히 종말론의 경우에 해당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칼빈은 결코 요한계시록에 관한 주석을 쓰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의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단지 몇 문단으로만 언급한다. 그는 영화 (the state of glory) 의 상태와 관련된 모든 곤란한 질문들 (spinosae quaestiones) 을 피하고, 멸망 받은 이들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묘사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어둠, 욺, 이를 갊, 꺼지지 않는 불, 죽지 않는 구더기 – 이 모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에 들지 못하는 것이 심히 큰 재앙이다 (quam sit calamitosum alienari ab omni Dei societate) 라는 인상을 주는 역할을 하고, 하나님의 위엄을 당신이 그렇게 깨달아 더 이상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재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majestatem Dei ita sentire tibi adversam ut effugere nequeas quin ab ipsa urgearis). 지옥의 형벌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의 단절에 있고 경중의 정도의 여지가 있다. 최후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실 것이고, 마귀와 불경한 이들의 복종에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기에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금지되지 않는다.
[1] 바빙크는 이 글을 칼빈 출생 400주년을 기념해서 썼다. 게할더스 보스에 의해 이 글은 화란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 번역된 글(영문제목:“Calvin and Common Grace”)은 1909년 프린스턴 신학 리뷰(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실렸다. 그 페이지는 437쪽에서 465쪽까지이다. 거기엔 65개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그의 성경주석들과 관련된) 각주들이 달려 있지만, 이 한글 번역에서는 그것들을 생략한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