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청년의 교회생활'입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봉사에 지쳐 떠나기도 하고, 교회 직분자들과의 다툼을 일으켜 떠나기도 합니다. 추측컨대 이런 추세는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소리높여본들 소용없습니다. 너무나 부족하고 문제많은 교회에 남아있는 청년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과연 청년들이 돌아올까요? 교회에 있는 청년들이 기죽지 않고, 교회를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청년들을 생각하며 기획기사를 엽니다. - 편집자 주 |
청년들의 경건 생활,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최정복 목사
(세종시장로교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1. 경건이란 무엇인가?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할 때 ‘경건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경건(godliness)’에 이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훈련’ 혹은 ‘연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훈련의 목표가 되는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경건의 일반적인 의미는 ‘신적 존재를 숭배하는 태도나 행동’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이 단어는 신에게 보여야 할 합당한 태도를 의미했습니다. 이 단어가 신적 존재가 아닌 사람에게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4절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부모님께 마땅히 가져야 할 ‘공경심’을 의미합니다(개역 개정은 이를 ‘효를 행하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혼의 상태를 ‘경건’으로 번역한 것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잠 1:7).1)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릴 때 예배자의 내면에 당위적으로 있어야 할 긍정적 의미의 ‘두려움’과 거기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을 ‘경건’으로 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좀 더 의미의 확장이 일어납니다. ‘경건’이라는 단어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곳이 목회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 3:16 상반절)’라고 감격적으로 고백합니다. ‘경건’을 ‘큰 비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경건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샘솟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딤전 3:16 하반절 참조).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비밀’입니다(롬 16:26, 에베소서 1:9, 3:3-4, 5:32, 골 1:27, 2:2 등).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비밀인 이유는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은 역사 속에서 감춰진 것이었으나, 지금은 계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지식입니다(마 16:17). 이 지식은 가장 고상한 지식이면서(빌 3:8),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풍성한 것입니다(골 1:27).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밀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엡 2:20)’위에서 계시하십니다. 외적으로 사도가 전한 복음을 통해 비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롬 16:26, 엡 3:4).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다른 교리(딤전 1: 3, 개역 개정은 ‘다른 교훈’으로 번역함)’가 아닌 삼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따라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랍도록 풍성한 구원에 적합한 고백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적 반응은 범위에 있어서 종교적, 일상적 영역을 모두 포괄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것 위에 높이 올라가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한 것입니다(딤전 4:8). 특별히 ‘모든’ 관계(딤전 2:2)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는 자들의 태도, 혹은 믿음의 비밀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태도가 디모데전서 6장 4-5절과 디모데후서 3장 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여 다투는 자들입니다. 또한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기적이며,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성도의 고백적 반응은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 고백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세우는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개인적이고 파편화된 훈련으로부터
오늘날 우리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면 어떻습니까? 오늘날 이루어지는 훈련의 문제를 지적하자면, 경건 훈련이 너무 개인적이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 훈련, 기도 훈련, 묵상 훈련 등등 각종 훈련은 넘쳐나지만, 하나로 통합된 공동체적 훈련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와 훈련이 따로 따로, 설교와 심방이 따로 따로, 어른과 아이들도 따로 따로. 심지어 신앙과 삶도 따로 따로.
교회와 훈련이 따로 따로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형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청년들을 위한 별도의 경건 훈련이 없습니다. 필자 혼자 사역하면서 교회를 돌보다보니, 청년들의 관심과 수준에 딱 맞는 경건 훈련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교단체에서 하는 집회에 참석하도록 장려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선교단체가 청년들의 경건 훈련을 주도하면서, 교회가 청년의 경건을 지도하는 일에 소외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선교단체 간사와 지역교회 목사 사이에 소통이 없을 때, 경건 훈련이 너무나 쉽게 교회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교회는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교단체의 훈련비를 지원하기도 하고, 집회에 함께 참석하거나, 집회를 다녀온 후에 보고를 하도록 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노회와 총회, 총회 산하 기관인 신학교가 적극적으로 선교단체와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대형 교회는 이런 문제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 교회는 좀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설교와 심방을 따로 따로 분리시키고 말았습니다. 가장 먼저 설교자와 심방자 사이에 분리가 생겼습니다. 담임 목사는 주로 설교 사역을 감당하고, 심방은 주로 부목사들이 담당합니다. 담임 목사는 강단에서 조명을 받고, 부목사는 행정과 잡무를 맡으면서도, 인사권을 쥐고 있는 담임 목사의 눈치를 봅니다. 교회가 권력이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심방을 통해 설교가 구체성을 띄고, 설교가 심방에서도 지속되어야 하는데, 담임 목사와 부목사가 각각 사역을 감당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높은 담장이 생겨났습니다. 이 문제점을 인식하고 지금이라도 담임 목사와 부목사 사이에 담장을 허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대형화에 따른 또 다른 분리 현상은 말씀을 받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어른과 아이, 즉 세대간에 다른 예배를 드리면서 생겨난 단절입니다. 물론 세대간에 단절은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대간의 단절이 매우 고착화되어 버렸습니다. 유치부, 유년부, 중고등부 설교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은 따로 분리된 성년 예배와 장년 구역에 편입되기가 어렵습니다. 어른과 아이, 청년과 주부 모두를 아우르는 설교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대간의 담장은 더 높아만 가는 것입니다. 이 세대간의 담장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따로 따로 경건은 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훈련이 이처럼 따로 따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작은 교회는 대형 교회를 따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훈련의 목표가 개개인의 영적 성장에 있지 않고, 전도나 선교로 치우치기도 했습니다. 프로그램 위주의 훈련은 빨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도 않았습니다. 특히 성도들의 일상의 영역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가정, 직장, 사회문제, 정치 영역 등에서 어떻게 경건하게 말하고 행동할까 하는 문제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훈련을 통해 통합되어야 할 신앙과 삶이 도리어 분리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삶의 모든 영역에 파고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앙과 삶이 따로 따로 분리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경건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3. 공동체적이고 통합적인 훈련으로.
참된 경건을 회복하기 위해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예배 중심의 통합적인 경건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서 예배가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야말로 진정한 경건 훈련의 장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공동체에게 주신 ‘말씀’이 개개인의 성도의 삶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청년들이 한 주간 동안 설교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QT를 한다해도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면, 이런 경건은 파편화된 경건 훈련으로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경건 서적을 많이 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안에서 여러 가지 경건 훈련이 통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중심의 경건 생활이 잘 안되는 이유는 성례가 본래의 자리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례가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권징과 심방 역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배의 모든 요소가 하나로 통합될 때, 파편화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통합적인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됩니다. 모든 세대가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교제하면서 하나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아니라면 어디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반드시 예배의 중심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가 경건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꼭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바른 교리에 기초할 때, 비로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갑니다. 참된 비밀로서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반드시 사도와 선지자들이 전한 ‘바르고 건전한’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파한 종교개혁가들은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배우도록 하고, 장년들은 대요리문답을 공부하도록 한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교리를 서로 다른 눈높이로 가르치면서, 각자의 삶에 적용하게 하면서도 한 신앙 안에서 온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예배 중심의 경건 훈련이 중요하다는 점을 누가 모를까마는, 여전히 경시되고 있고, 여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제자 훈련이나, 단기 선교나 비전트립이 훨씬 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경건을 단기간에 세우면, 다시 단기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세대와 더불어 걷는, 공동체적이고 통합적인 경건 훈련에 힘써야 합니다. 청년들의 경건훈련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와 괴리된 경건 훈련이 되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랜 시간 인내하고 서로 깍이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열매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교회 안에서, 온 세대가 함께 드리는 예배 안에서, 너와 나 사이에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