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교회의 정치화, 위험하다'라는 주제입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든지 소위 말하는 정교분리문제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교회의 욕망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했고요. 성경과 현실 양자에 촉수를 예민하게 들이대고 있을 때 제대로 발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다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기에 교회가 제대로 정치화되기를 바라면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 편집자 주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비추어 본 교회와 정치의 관계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최근 일련의 교회 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면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한 고신교회의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세상 정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일절 금기시하였다. 심지어 80년 광주에서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었을 때에도 여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목사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볼 때 고신교회는 정치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침묵하는 교회였다.
정치와 관련하여 고신교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정자들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비판하면 안 된다는 식의 설교가 강단에서 자주 강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집권자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정치적인 발언으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집권자에게 저항하라는 말은 정치적인 발언으로 간주되었고 이것은 신자가 해서는 안 될 행위로 취급받았다.
이와 같은 신앙교육을 받은 필자로서는 최근 목사들의 행태들이 매우 당황스럽다. 특정 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기도 하고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예전에는 사석에서도 그런 발언을 듣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공석에서도 심지어는 설교시간에도 종종 그런 정치적인 발언을 자주 듣게 된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교회와 정치에 대한 목사들의 이해가 그동안 어떤 식으로든 큰 변화가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부터 교회와 정치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왕은 교회의 원수로 간주되었지만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때에는 교회의 보호자로 간주되었다. 중세 천년 동안 위정자, 특히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직분으로 이해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에도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으며 개혁파 신앙고백서에 적절하게 정리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2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위정자를 자신의 아래에 그리고 백성들 위에 세우셨다. 그를 세운 목적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벌하기 위해서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은 칼의 권세를 그에게 주셨다. 심지어 공직자는 필요한 경우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기에 신자가 공직을 맡는 것은 정당하다. 이 점에 있어서 신앙고백서는 공직 참여를 금지하는 재세례파 입장을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위정자를 이와 같은 목적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은 세금이나 병역을 포함한 모든 의무를 행해야 한다. 이 점에서 있어서는 성직자는 물론이고 교황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위정자가 이단으로 판정난다 하더라도 위정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통치권은 빼앗길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위정자에 대해서 위정자 자체를 악으로 보는 재세례파도 정죄하고 위정자의 권세를 무시하는 로마교회의 정죄한다. 적어도 장로교회 목사는 정치를 바라보는 입장에 있어서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회가 정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는 31장 5절에 잘 나타나 있다. 교회의 회의는 교회적인 사안만을 다루어야 하며 세상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명서를 발표할 때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적인 일에 완전히 입을 닫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는 세상적인 일을 다룰 수 있으나 그 방식은 겸손한 청원(humble petition)의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위정자의 요청에 의해서도 세상적인 일을 다룰 수 있는데 그 때에도 조언의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말을 할 때에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상이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교훈이다.
1) 교회는 자신의 영역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와 관계없는 정치성명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오늘날 교회는 정치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지금은 우리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 내야 할 때다. 교회가 정치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교회 안에 있는 죄들을 먼저 척결해야 할 것이다.
2)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 하더라도 아주 겸손한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아무리 옳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방법이 과격하거나 극단적이거나 일방적이거나 권위적이면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교회에 큰 해가 될 뿐이다.
3) 세상의 요청이 있을 때 교회의 발언은 아주 큰 힘을 발휘한다. 요청도 없는데 문제 해결사로 나서는 것은 꼰대로 비춰질 뿐이다. 지금 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이 부탁할 정도로 교회가 신뢰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신자들은 정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신자 개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신자가 공직에 참여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따라서 신자 개인은 기회와 형편에 따라 정치에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한다. 정당에 가입하든지, 언론사에 후원금을 내든지, 시민 단체에 가입하든지... 방법은 매우 많다.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달리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왜 정치적인 발언들을 거침없이 과도하게 쏟아 내고 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에게 정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참과 거짓의 진리 문제로 바뀐다. 심지어 교회의 존망이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른 의견을 가진 자는 경쟁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될 사단으로 간주된다. 심지어 교회 안의 수많은 청년들이 그런 사고방식에 염증이 나서 떠나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청년들은 계몽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다. 신앙고백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있어도 장로교회 신자들은 훨씬 더 큰 평화를 누릴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고신교회의 총회장을 비롯하여 교단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두 가지를 요청하였다. 하나는 남북 간의 동질성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통합이다. 이것이 정치인의 힘만으로 되지 않으니 교회가 노력해달라고 부탁을 한 셈이다. 교회가 국가에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교회도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이바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는 평화와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혹시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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