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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지난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틴 가자지구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수백명을 죽이고 백 수십명을 인질로 잡아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온 세계가 전쟁통을 겪고 있는데, 중동에 새로운 전쟁이 발생할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곧장 대대적 반격을 가했고,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곧 지상군을 가자지구로 투입할 기세다. 개혁정론은 오랜 갈등과 전쟁의 진원지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지 집중해서 살펴볼 계획이다. - 편집장 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어떻게 볼 것인가? 2]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나니 (이사야 5:1-7)

(2023년 10월 15일 온생명교회 주일 설교문)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

 


   지난 7일 가자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규모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사방으로 봉쇄되어 있었는데 분리장벽을 뚫고 나와 이스라엘에 대규모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수천 발의 로켓을 쏘고 이스라엘로 치고 들어가 사람들을 살해하고 1백 여명을 인질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전투기를 보내서 가자지구를 맹폭하고 있습니다. 지상전이 임박했습니다. 벌써 양쪽에서 사상자가 1만명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정치인들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중동전쟁으로 확산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사실, 이 싸움은 오래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전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 전쟁이 종말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이것이 중동전쟁으로 비화되고, 전 세계가 참전하여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에 나오듯이 유프라테스강이 마르고 동방에서 군대가 오고, 므깃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아마겟돈 전쟁이 최후의 전쟁이라는 생각입니다.

   미국을 포함하여 기독교인들은 대개 이스라엘 편을 듭니다.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핍박한 역사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 이유입니다. 나치의 유대인 600만명 학살도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합니까?

   이번에 하마스가 먼저 공격하고 인명을 살상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사람들을 더 많이 짓밟고 살해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교회인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잘 가꾸어 좋은 포도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정작 맺힌 것은 좋은 포도가 아니라 나쁜 포도, 들포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노력을 다 경주하셔서 포도원을 가꾸셨는데 들포도가 왠 말입니까?

   모든 유대인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자신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팔레스틴 사람들은 무슨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맺기를 원하신다’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째, 좋은 포도 대신 폭력의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둘째. 좋은 포도 대신 두려움의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셋째, 좋은 포도 대신 차별의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1. 폭력의 들포도를 맺었다

 

   7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맺은 들포도, 먹지 못할 들포도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다.”

   하나님이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에게 바라신 것이 무엇입니까? 정의와 공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그의 후손에게 처음부터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소돔을 멸하기 위해 오셨다가 아브라함을 만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소돔 같은 나라와 달리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입니다.

   창세기 18장 18절, 19절을 찾아서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죠?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면 공의와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맺어야 하는 좋은 포도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신 공의는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입니까? 공의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기에 그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의로움을 말합니다. 정의는 공의에 의해 의로워진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의로움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공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대해 주시는 것이고, 정의는 다른 사람을 의롭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면서 바로 이 공의도, 정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공의 대신에 포학, 정의 대신에 울부짖음이 가득했습니다. 그 들포도는 바로 살육이요, 그것으로 인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폭행하고 살해하고, 심지어 법정에서도 거짓증언을 합니다. 약한 자들의 눈물과 탄식과 울부짖음이 하늘에까지 사무칩니다.

   지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기 때문에 본문을 가지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맺은 들포도, 지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맺은 들포도를 통해 우리 교회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문화화 된 것 같지만 사실은 늘 피에 굶주려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력충돌을 보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마치 불 난 곳에 부채질을 하는 것 같은 모습도 있습니다. 더 큰 전쟁으로 비화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무고한 양쪽의 시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분노와 보복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응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예 싹수를 잘라 버리겠다고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도가 아닙니다. 눈이 상했으면 상대방의 두 눈을 확 뽑아 버리겠다고 합니다. 이 하나가 부러졌으면 이빨 전체를 송두리째 다 뽑아버리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보복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피가 피를 부르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완전히 멸절해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포도입니다. 유대인 중에도, 팔레스타인 사람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국민들에게 분노와 보복에 굴복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 주셨음을 알리고, 자신들을 먼저 내어놓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2. 두려움의 들포도를 맺었다

 

   이스라엘이 분노와 폭력과 보복의 들포도를 맺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의 극단적인 보복과 폭력의 배후가 누구일까요? 배후가 다름 아닌 나 자신입니다. 폭력의 배후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바로 배후입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있어서 이렇게 살해하는 폭력과 보복이 자행합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두려움 때문입니다. 모든 폭력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상한 말입니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무자비한 사람인데, 힘 자랑하는 사람인데 무슨 두려움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두려움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폭력을 행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두려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안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에는 기독교가 큰 책임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위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죽일만한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예수에게서 죽일 죄를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손을 씻자 유대인들이 외칩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그 죄값을 고스란히 치루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산업을 일구면 다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돈장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세계금융을 장악하게 된 비결이라고 말하기조차 합니다.

   영국이 1948년 팔레스틴에 이스라엘이라는 독립국을 세워 주었지만 유대인들의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멀쩡히 잘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으니 그들이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동일하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두려움일까요?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자기들이 계속 내몰리고 쫓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두려움이 더 크겠습니까? 자기들 땅인데, 그 땅에서 강제로 쫓겨나가는 두려움이 더 크겠습니까? 남의 땅에 밀고 들어갔기에 자기들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두려움이 더 크겠습니까? 과연 팔레스타인은 누구의 땅입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주셨기에 그 땅이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맞습니까? 신약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은 유대인들의 땅이라고 해야 합니까?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유대인들이 차지해야 합니까? 지금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참 후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혈통상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아브라함의 참 후손입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 전부가 다 자기들 소유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이야말로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모든 폭력과 보복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가장 나쁜 들포도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벌 받을까 하는 두려움을 말합니다. 우리는 벌 받을까 겁이 나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 한 두 번 참석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벌 내리지 않습니다. 천벌이 내리지 않습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벌 받을까 겁이 나서 무언가를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다면 두려움이라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겁낼 줄 모르면 끝입니다. 그러나 겁이 나서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여 예배합니다. 모든 종교는 겁을 주어서 신을 따르게 합니다. 기독교는 오직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게 합니다.

   벌받지 않을까 겁내는 것은,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겁을 집어먹는 것은 나쁜 열매입니다.

 

 

3. 차별의 들포도를 맺었다

 

   사람들이 왜 폭력을 행사합니까? 센 척 하지만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폭력을 행사하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차별의식 때문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왜 폭력을 행사합니까? 폭력을 행사해서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굴복시키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와 다르기 때문에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타인을 자기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같은 편에게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같은 편도 어느 순간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갈라치기하면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국가가 자국민에게 폭력을 종종 행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국민을 편가르기 하기도 합니다. 국민들을 나누어서 한쪽에 힘을 실어주고, 다른 쪽을 굴복시킵니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십시오. 오늘 본문 바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런 이런 사람은 화가 있다고, 저주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처음으로 언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혼자 살려고 하는 사람이 저주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을 화 있을진저.”

빈틈이 없도록 하는 사람이 화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동산에 집착하여 빈틈을 놓아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빈 공간이 없이 빽빽하게 집을 짓고 이익을 내려고 합니다. 집을 한두 채를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땅을 1, 2백평 가진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집과 땅에서 나오는 이익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혼자 살겠다는 듯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웁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다른 그 어떤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어느 누구도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이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이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원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강대국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밀고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압박하고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이 흔하다고 합니다. 자기들도 2천여 년 동안 쫓겨나 방황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을 쫓아내고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포도를 맺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왜 그렇게 적대적일까요? 이슬람이 기독교를 적대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적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까? 사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은 가난합니다. 그들의 사회가 민주화되어야 하고, 경제부흥을 꾀해야 합니다. 이렇게 가난하니까 힘겨우니까 그 책임을 기독교에 떠넘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기독교 국가들 때문에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거룩한 문화가 할리우드를 포함한 퇴폐적인 기독교 문화 때문에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자기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와 다르면 적대시합니다.

   그중에서도 피부색이 다른 것 때문에 사람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것은 가장 야만적인 것입니다. 나와 다르면 심지어 사람을 악마화시킵니다. 우리가 이슬람을 악마화하지 않습니까? 한국 기독교가 최근 십여 년 동안 동성애, 차별금지법, 이슬람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도덕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기독교가 그것들을 공격하는 것은 겁이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혐오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반대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반대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되요’라고 호소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무엇보다 은혜를 강조합니다. 은혜 없이 우리가 없지 않습니까?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잘해서 받는 게 아닙니다. 남들과 차이가 나서 받는 게 아닙니다. 은혜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데 베풀어 주는 선물입니다. 은혜를 아는 기독교인은,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차이에 대해 너그러워야 합니다. 진리를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 다른 생각과 문화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조롱하는 들포도를 맺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포도원을 가꾸십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가꾸시는 농부입니다. 그곳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고는 정성껏 가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선교하셨던 분의 말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해 선교하는 분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엄청나게 욕한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가 지독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해 선교하는 분들은 유대인들을 엄청나게 욕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소위 말해서 개 돼지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입장이 다릅니다.

   이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영 호남 간의 알력과 다툼은 어린아이 장난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팔레스틴 땅에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의 절반씩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만 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낸 구약시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잘못을 서로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기독교회도 먹을 수 없는 독하고 쓴 열매를 맺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시고는 좋은 열매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입에 넣으면 바로 뱉을 수밖에 없는 들포도가 맺혔습니다. 폭력의 들포도, 두려움의 들포도, 차별의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보다 못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품종, 좋은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바로 좋은 포도나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합니다. 아버지는 농부요,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좋은 열매를 맺는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을 찾아서 읽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유대인들은 자기들 형제인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자기들 형제인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형제로 삼는다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직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도 모든 복수심과 두려움과 차별을 딛고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받으셨듯이 예수님께 붙어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과 팔레스틴 사람들이 서로 팔레스틴 땅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땅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예루살렘이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팔레스틴은 유대인들만의 땅도, 팔레스타인들만의 땅도 아닙니다. 유대인도 팔레스타인사람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둘 다 그 땅을 포기할 수 없겠지만 함께 살아가야 할 땅입니다. 주님, 구하오니 유대인과 팔레스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그 땅에 피 흘리는 일이 계속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악한 이들의 선동에 놀아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가 모든 장벽을 허물고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 주옵소서. 이스라엘이 좀 더 좋은 나라가 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좀 더 좋은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무엇보다 교회가 좋은 열매를 맺어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그분께 붙어있기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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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의 주제는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입니다. 우리는 현재 교회 위기의 시대를 넘어 생존을 걱정해야할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저출산 문제와 고령화 사회, 그리고 복음전도의 위축은 교회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
    Date2024.07.09 By개혁정론 Views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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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2] 건물과 장소에 관하여

    이번 기획기사의 주제는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입니다. 우리는 현재 교회 위기의 시대를 넘어 생존을 걱정해야할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저출산 문제와 고령화 사회, 그리고 복음전도의 위축은 교회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
    Date2024.07.02 By개혁정론 Views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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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1] 교회의 잉태와 출생

    이번 기획기사의 주제는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입니다. 우리는 현재 교회 위기의 시대를 넘어 생존을 걱정해야할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저출산 문제와 고령화 사회, 그리고 복음전도의 위축은 교회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
    Date2024.06.25 By개혁정론 Views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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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장로교회를 소개합니다 6] 은혜의 방편: 성찬 제대로 누리기

    이번 기획기사는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입니다.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인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 현장에 잘 적용할 때 건강한 장로교회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신학 이론을 목회 현장에 접목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듭니다. 여기에는...
    Date2024.06.08 By개혁정론 Views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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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장로교회를 소개합니다 5] 성도생활지침

    이번 기획기사는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입니다.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인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 현장에 잘 적용할 때 건강한 장로교회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신학 이론을 목회 현장에 접목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듭니다. 여기에는...
    Date2024.05.25 By개혁정론 Views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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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장로교회를 소개합니다 4] 양육 사십주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이번 기획기사는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입니다.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인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 현장에 잘 적용할 때 건강한 장로교회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신학 이론을 목회 현장에 접목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듭니다. 여기에는...
    Date2024.05.21 By개혁정론 Views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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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장로교회를 소개합니다 3] 공예배, 삼위 하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대화

    이번 기획기사는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입니다.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인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 현장에 잘 적용할 때 건강한 장로교회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신학 이론을 목회 현장에 접목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듭니다. 여기에는...
    Date2024.05.08 By개혁정론 Views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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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장로교회를 소개합니다 2] 교리교육의 실제

    이번 기획기사는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입니다.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인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 현장에 잘 적용할 때 건강한 장로교회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신학 이론을 목회 현장에 접목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듭니다. 여기에는...
    Date2024.04.29 By개혁정론 Views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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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장로교회를 소개합니다 1] 장로교회의 교육

    이번 기획기사는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입니다.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인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 현장에 잘 적용할 때 건강한 장로교회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신학 이론을 목회 현장에 접목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듭니다. 여기에는...
    Date2024.04.23 By개혁정론 Views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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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교회법에 대해 알아야 할 7가지] 교회법의 나아갈 길: 교회법과 교인의 권리

    교회법의 나아갈 길: 교회법과 교인의 권리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회복한 이신칭의(以信稱義) 복음은 바른 교훈의 회복을 넘어 교회정치에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각성시켰다. 특히, 교회에서 교인이 갖는 ...
    Date2024.04.02 By개혁정론 Views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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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기독교인과 선거 5] 네덜란드 교회 교인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까?

    제22대 총선이 다가왔습니다. 국회(의원)는 민의를 대변하는 입법부 역할을 하기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독교 정당을 표방하는 곳도 선거에 나섭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선거승리를 위해 불법에 가담해서는 안되겠고, 교회도 선거법을 제대로 지켜야 하...
    Date2024.03.20 By개혁정론 Views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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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기독교인과 선거 4] 설교학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정치 설교하기

    제22대 총선이 다가왔습니다. 국회(의원)는 민의를 대변하는 입법부 역할을 하기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독교 정당을 표방하는 곳도 선거에 나섭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선거승리를 위해 불법에 가담해서는 안되겠고, 교회도 선거법을 제대로 지켜야 하...
    Date2024.03.18 By개혁정론 Views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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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기독교인과 선거 3] 기독교인은 기독교 정당을 지지해야 하는가?

    제22대 총선이 다가왔습니다. 국회(의원)는 민의를 대변하는 입법부 역할을 하기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독교 정당을 표방하는 곳도 선거에 나섭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선거승리를 위해 불법에 가담해서는 안되겠고, 교회도 선거법을 제대로 지켜야 하...
    Date2024.03.15 By개혁정론 Views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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