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역사,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전통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예비군 훈련에서 있었던 일
신학대학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예비군 훈련을 갔다. 고려신학대학원생만이 참여하는 훈련이었다. 입소식과 함께 국민의례가 있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이 구호가 울릴 때 당시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놀랬다. 내 눈에 보이는 학생들은 전부 다 국기를 향해 경례를 했다. 적어도 내 눈에 안 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됐다. 몇몇은 할 수 있다 쳐도, 어떻게 거의 대부분이 하고 있을까?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고신의 전통을 모른단 말인가? 이 모든 사람들이 고신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전도사들이며, 고신교회의 목사가 될 사람들인데 말이다.
마침 그 일이 있기 한 달 전 개강집회 때 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 주광조 장로의 간증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일본 경찰들이 주기철 목사에게 요구하기를 “택시를 타고 신사(神社) 앞을 지날 때 잠시 고개만 끄덕하시오”라고 했지만, 주 목사님은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거부하시고 고문당하셨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 간증의 감동은 그냥 감동뿐이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반대하던 역사가 우리에게 이미 잊혀진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30년 정도 된 역사인데 말이다.
국기에 대한 주목
나는 경남 최초 기독 사학인 창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모교에선 국민의례 때 특이한 표현을 사용했다. “국기에 대한 주목(注目)”
“국기에 대한 경례(敬禮)”가 익숙했던 내겐 매우 생소했다. 그런데 그 표현은 학교의 역사와 관련된다. 창신고등학교는 1908년 호주 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9년 7월에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폐교되었다가 광복 후 1948년에 재 개교한 학교다. 그런 역사가 있기에 국기에 대한 경례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냥 국기를 바라보기만 하는 ‘주목’을 하는 것이다.1)
▲ 마산 창신고등학교
김해여고 사건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문제에 있어서 고신 교단은 깊은 관련이 있다. 바로 1973년 9월에 있었던 ‘김해여고 사건’이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3년 9월 18일 김해여고에서 큰일이 발생한다. 어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 대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도록 지시한다. 당시 학생 한 명이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며 거부했고, 학생과 선생 사이에는 심한 논쟁이 벌어진다. 마침 교련 검열대회를 앞두고 예행 연습이 한참이던 민감한 시기였다. 이번에는 제식훈련을 하던 중 35명의 학생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다. 그들은 모두 대저제일교회, 김해중앙교회, 조눌교회, 가락교회 등에 다니던 김해지역 SFC 학생들이었다.
이 장면을 직접 목격한 김해여고 교장은 “내 목이 달아나나 너희들이 쫓겨나나 보자”며 노발대발한다. 선생 중에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너희를 구해주는지 두고 보겠다”며 기독교를 비방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 이도 있었다. 게다가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목사 한 분이 다음 날 학교를 방문해 “교장 모가지가 얼마나 두꺼운지 보자”라는 식의 과격한 표현을 하는 바람에, 이 사건은 심각한 사태로 번진다. 이 사건은 국가 주도하에 한창 애국심을 고취하던 당시 분위기와 맞물려 전국 주요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기까지 한다.
당시 학교는 격하게 대응하였고, 사건 발생 후 13일째인 1973년 10월 1일, 학교 측은 교사의 지도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6명의 학생들을 제적 처분한다. 제적된 학생들은 유영화(당시 3학년, 가락교회), 백순옥(당시 2학년, 대저제일교회), 이화영(1학년, 대저제일교회), 문은미(1학년, 대저제일교회), 김영혜(1학년, 활천중앙교회) 박명순(1학년, 조눌교회) 등이다. 당시 고3이었던 유영화는 훗날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의 아내가 된다. 그들은 고교 중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했다.
▲ 김해여고
비단 김해여고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내가 다닌 교회에는 그 사태 당시 초등학교를 중퇴한 분이 계셨었다. 나는 어린 시절, 그분의 열심 있는 교회 섬김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존경심을 가졌었다.
나는 해군에서 복무했다. 해군은 함정에 오를 때마다 함미(艦尾) 갑판에 있는 태극기를 향해 경례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복무 중에 경례를 하지 않았다. 우리 교단에 그러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있었던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문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신사참배 가결’과 ‘신사참배 반대’라는 큰일을 모두 경험한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국기를 바라보며 경례를 하고, 그와 동시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 하여 일본 제국이 1937년에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다.
▲ 조회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어린이들
▲ 인권운동사랑방,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등 85개 인권사회단체들은 11일 오전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 폐지를 촉구하며 국기법 시행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래서일까? 김해여고 사건이 있기 훨씬 전에도 이런 문제는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국기(國旗)가 얼마든지 우상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험한 이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하게 반대했다. 부산 금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손양원 목사와 손명복 목사의 자녀들은 학교 조례 시간에 국기 배례를 거부했다.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부산 좌천동 일신여학교 2층을 빌려 개교할 당시, 여학교 학생들이 국기 배례를 하는 모습을 본 신학생들이 이에 항의한 사례도 있다.
▲ 손양원 목사와 두 아들
학교 교육 현장의 국기 배례를 둘러싼 갈등이 처음으로 지역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시점은 1947년 3월 즈음이었다. 안동농림중학교(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에서 국기 배례를 거부한 학생 5명이 정학 처분을 당했다. 같은 해 11월 16일 주일예배에서 손양원 목사는 사도행전 14장 8~18절,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본문 삼아 ‘국기 경배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 일부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국기를 보고 경배하는 것은 망국지본(亡國之本)입니다. 국기 경배하는 나라는 다 망합니다. 국기 경배는 우상입니다. 예수의 사진에도 경배하지 않습니다. 저도 태극기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절은 아니합니다.”2) 참고로 손양원 목사는 1948년에 고려신학교 총무를 지낸 바 있다.
1949년 4월 28일 경기도 파주 조리면 죽원리교회(현 대원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초등학생 수십 명이 국기 배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이 학교 교장이 기독교인 학생 42명을 퇴학 처분하는 사건도 있었다.3) 그 교회에는 지금도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 대원교회에 있는 기념비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문제의 본질
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을까? 어떤 신념 때문일까? 하나님 한 분 외에 그 어떠한 존재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아야 한다. 이 일에 그 어떤 대상과도 타협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경례’란 인격적 대상에게만 가능하다. 높은 사람에게 절하고 인사할 수 있지만, 비인격적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경례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동물이나 물건에게 경례하지 않는다. 국기 역시 마찬가지다. 국기는 무생물이다. 국기는 그저 국가를 상징하는 상징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인격이 없으니 경례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는 경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은 국기가 우상이 아니지만, 충분히 우상화될 수 있으며,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굳이 할 이유가 없는 국가주의의 망령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국기만 아니다. 우리는 그 어떤 우상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와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길 수 없으며,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것을 섬길 수 없다(마 6:24). 오직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도 우리의 경배를 받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그냥 단순한 국가의식이 아닙니까?”라고. “국기나 국가에 대해 가볍게 경의를 표하는 예로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그러나 한국교회가 거대한 배교를 할 때도 논리는 그러했다.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自覺)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率先) 이행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던 1938년 27회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발언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단순히 국민의례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래서 그런 문제로 굳이 신앙이니 타협이니 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한다면, 신사참배 거부도 의미 없는 일이고, 주기철 목사의 순교도 헛된 고집이며, 고신교회의 설립도 분리주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선배들은 자그마한 타협이 결국 큰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잘 알았고, 국기에 대한 경례조차 거부했고, 그 거부로 인한 대가(代價)도 기꺼이 감당했다.
▲ 2014년에 개봉한 국제시장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옛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이들을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과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모습은 우리 모두가 경험한 일이다.
우리에게 잊혀진 역사, 그러나 지켜져야 할 전통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읽고 굉장히 낯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반대했던 이들을 기록으로 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기독 정치인을 비롯해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아무 고민 없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문제는 어쩌면 우리에게 잊혀진 역사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타협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저런 상황윤리가 널려 있다. 이 문제는 단순히 국기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심코 하고 있는 수많은 잘못들까지도 포함하는 주제다.
신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법과 명령에 순종해야 하지만, 모든 법과 명령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일에 있어서는 단호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듯, 우리의 정신도 희미해져 간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정치에 대한 과몰입으로 인한 국가주의가 교회 안에 퍼져 간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의 선배들이 이 문제로 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배교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타협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얼마나 경계했는지를 알리고 가르쳐야 한다. 우상숭배에 대해 이렇게까지 경계했던 신앙이 우리가 상속해 가야 할 신앙이다.
1) 이는 1950년 3월 ‘국기에 대한 배례(拜禮)’를 ‘주목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한국기독교연합회(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공개청원에 대해 이승만 정부가 받아들인 결과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2) 손양원, ‘국기 경배에 대하여’, 1947년 11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손양원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 설교 6)』 (서울: 홍성사, 2009), 55-56.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