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족식(洗足式), 어떻게 보아야 하나?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교파와 교단을 불문하고 직원 임직식을 할 때 임직하는 직원의 발을 씻어주는 의식인 세족식(洗足式)을 하는 교회를 종종 볼 수 있다. 선배 직분자들이 임직하는 후배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은 교회에서 직원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임을 이제 갓 임직하는 후배들에게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장로 임직식에서 담임목사가 직접 장로 임직자의 발을 씻는 장면은 진짜 감동적이다. 목사와 장로 사이에 갈등이 많은 이때 이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준다.
이러한 세족식은 본래 고난 주간 목요일,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을 제정하신 그날 예수님께서 한 명 한 명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족식이 교회를 넘어 사회의 일반 기관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어느 보훈단체에서 국가유공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들의 발을 씻는 의식을 통해 작으나마 그들을 위로하려고 했을 것이다. 특히 학교에서 스승의 은혜를 기리고 감사하는 스승의 날에 학생이 스승의 발을 씻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학생의 발을 씻어주는 모습은 스승이 이런 분임을 학생들에게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같이 사회에서도 널리 감동적으로 통용되는 세족식, 이 세족식을 교회에서 임직식이나 혹은 주일의 특별한 행사에서, 아니 심지어 성찬과 함께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세족식이라는 의식은 과연 예수님이 우리가 그대로 따라 하도록 본을 보여주신 행동일까?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라는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기에 유아 시에 세례를 받았지만 성인이 되어서 다시 재 세례를 받는다는 뜻에서 이 이름이 부쳐졌다. 그런데 이들은 특별히 ‘화평’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면서 세족식을 시행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세족식이 성찬이나 세례처럼 ‘성례’라고 보았다.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일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가 닮고 따라야 할 ‘본’(모범)인데, 세족식은 바로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신자들이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시행해야 할 의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오늘날 이들의 후예 중에 ‘아미시’(Amish)라 불리는 자들이 미국 등에 흩어져 사는데 지금도 이들은 그들의 선조인 재세례파의 전통을 따라 성찬식이 있는 주일에는 성찬식 마친 후에 세족식을 시행한다고 한다. 이들은 평화주의자로서 반전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고신 교회는 일찍이 제53회 총회(2003년 9월)에서 목사 위임식이나 직원 임직식에 총회 예전예식서를 따라서 세족행위를 하지 않도록 결정한 바가 있다. 어느 노회에서 직원 임직식에 세족식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천주교의 의식이라는 판단으로 총회에 질의를 하게 되었고 총회는 신학위원회의 해석을 받아서 이렇게 결정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상당수의 교회에서 세족식이 여러 형태로 시행되고 있었고, 또 이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교회도 몇몇 있다는 이야기가 회자 되었다.
세족식을 성례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과연 교회에서 그냥 편안하게 시행할 수 없는 의식일까? 과연 교회의 좋은 전통으로 교회생활에서 자리 잡을 수는 없는 것일까? 사회에서도 통용될 만큼 사랑과 섬김이라는 정신을 고취 시키는 좋은 도구이며, 오히려 이러한 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감동을 주는 의식으로 받으면 되지 않을까? 이 세족식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다음 몇 가지로 이 세족식의 문제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고난주간 목요일에 일어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행위, 즉 세족 행위는 성경 요한복음 13장에 나온다. 이 성경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행위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행동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 아니라 예수님이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시고 지상에서 자기를 낮추신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제사장, 제사장, 왕의 직분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낮아지신 지위와 신분에서, 특히 성육신, 고난, 십자가의 죽음, 장사지내심, 음부 하강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위하셨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은 것은 무엇보다 베드로의 구원을 위해 극도로 자기를 낮추신 구원의 행위였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행동을 알지 못하였기에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장 8절)고 하셨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상관없는 자가 되고 구원의 복에도 상관없는 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발 씻으심, 사랑과 섬김에 상관없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 구원은 여기서 시작 한다. 아니, 이것으로 내 구원이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섬김과 사랑으로 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 역사를 보면 세족식을 두고 진짜 위험한 극단적인 경향이 항상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세족식을 우리 구원과 무관하게 순전히 도덕적인 ‘본’으로만 삼는 것이다! 내 구원과 상관없이 그냥 사랑과 섬김과 희생이라는 도덕적인 덕목을 실천하는 상징으로만 보는 것이다. 교회에서 세족식을 할 때 우리가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우리는 교회 역사가 주는 경고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 곳곳에서 도덕적 실천을 목표로 이 의식을 시행한다고 할지라도 신자들은 교회에서 세족식을 나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구원의 행위로 먼저 깊이 알고 잠잠해야 한다.
오늘 우리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직원 임직식에서 세족식을 못해서 우리에게 과연 섬김과 희생이 없는 것일까? 나의 구원을 위해 발 씻으시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신 이 최고의 사랑 앞에서 오만한 자기를 깊이 그리고 충분히 성찰하지 않은 것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는 대로 곧 있을 베드로의 자만과 실패는 바로 이 성찰의 부재에서 나왔다.
둘째, 세족식을 둘러싸고 교회역사에 나타난 두 번째 극단적인 경향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너희도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한복음 13장 14-15, 17)을 경시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우리가 행하도록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본’이라고 하신 점을 도외시한 것이다. 이 본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그래서 이 본을 따라갈 때 주시는 복과 능력을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교회 역사가 우리 교회에 주는 경고다.
오늘날 주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열심과 열정, 헌신은 있는데, 베드로처럼 주와 함께 죽고자 하는 자들은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아지신 이 사랑을 충분히 알고 이를 본으로 여기고 알고 행하는 이가 적다(베드로전서 2장 21절, 빌립보서 2장 5-8절). 오늘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이 우리가 그대로 행하도록 본을 보여주신 섬김과 사랑에 죄를 짓고 얼마나 우리가 이 거룩한 부르심에 초라하게 반응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요한복음 13장 말씀에서 멀리 떠나있는지,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말로 우리가 얼마나 변명하며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로 정당화시키는지...
따라서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세족 행위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장면이 나오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말씀하신 ‘새 계명’과 연관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족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본은 바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새 계명을 가리키고 있다. 이 새 계명을 우리가 실천하도록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것이다. 세족식이나 세족 행위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셋째, 따라서 문제는 세족식이라는 의식은 흉내 내면서도 이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과 연관시키지 않는 자세와 행위에 있다. 이 점에서 세족식을 세례와 성찬처럼 성례라고 보는 것은 나가도 너무 잘못 한참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신 교회가 총회에서 직원 임직식에서 세족 행위를 금한 것도 바로 이 문맥에서였을 것이다. 세족식이라는 의식을 자칫 성례로 보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이 의식 자체를 시행하는 것에 너무 역점을 두는 현 풍조를 경계하라는 취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족식이나 세족 행위를 우리의 구원과 무관하게 보고 그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예수님의 행위로 본다든지 그래서 이를 우리가 모방해야 한다는 생각과 거리를 둘뿐 아니라, 이를 지나치게 성례로 보는 것은 물론, 이를 하나의 깜짝 쇼처럼 보여주기식이나, 혹은 한순간의 감동을 주는 것으로만 대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