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수 교수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읽고
조재필 목사
(새언약교회 담임)
‘구속사적 설교’란 표현을 다른 설교방식, 혹은 성경해석에 대별되는 또 다른 유(類)의 설교 방법으로 쉽게 단정해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지 설교, 주제 설교, 귀납적 성경연구, 인물 중심 성경연구와 같이 나름대로 성경을 잘 이해하거나 설교하기 위한 하나의 기술 혹은 방법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오해다. 구속사적 설교는 단순히 다양한 설교 ‘방법론’ 중에 또 다른 방법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구속사적 설교’라는 말은 성경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해하고 설교하는 것인데, 그 역사적 독특성을 배경으로 가진 표현이다. 트림프 교수(C. Trimp)는 구속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는 구속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사랑의 교제가운데서 살고자 하는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는 역사적 사건의 전체로 이해한다’.
우리는 성경을 윤리 교과서나 사람의 일상사에 대한 처세술, 혹은 심리적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책쯤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이 구속사를 계시하고 있음을 믿는다. 성경과 성경의 내용이 다름 아닌 오직 구속사라면, 구속사적 설교란 성경의 유일한 주제인 구속사를 설교하는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다양성이나 선택의 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성과 책임의 선에 있다. 즉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설교해야 하는 성경적인 설교를 포괄하는 표현으로 인정한다.
간혹 구속사적 설교가 몇몇 이유 때문에 반대에 부딪힌다. 그 이유로 대략 두 가지 정도 들 수 있다.
첫째, 이 설교(해석)는 결과적으로 다른 설교 법(해석법)을 공격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특히 교회 속에서 오래도록 아무런 의심 없이 행해져 왔던 도덕적, 심리적인 성경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나치게 배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한 가지 정도만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양보할 것이 없다. 즉 성경의 어떤 본문에 대해서는 정당한 주석적 원리 하에서 모범적으로 해석 및 적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에 대한 일상적인 도덕적, 심리적 해석과 적용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구속사적 설교가 성경의 통일성을 그리스도에서 찾고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끊임없이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적인 주장은 옳다. 문제는 이 원리의 구체적인 적용에서 정당한 비판을 받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구속사적 성경 이해를 표면적으로 지지하는 분들 가운데 정당한 성경해석의 원리를 무시한 채 모든 성경 본문을 일차원적으로 그리스도에 대입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본다. 즉 성경 본문에 나타난 어떤 사건의 요소를 사건 전체로부터 분리시켜 그리스도와 관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성경을 지나치게 모범적, 교훈적, 심리적, 도덕적으로만 해석해온 풍토에 대한 반성적인 노력이었다고 인정할지라도 성경을 정당하게 석의 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다.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서 이 정도 고려를 한다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굳이 ‘구속사적’이라는 언표 자체를 고수할 필요는 없다. ‘계시사적 설교’, ‘기독론적 설교’와 같이 달리 표현해도 무방하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구원 역사와 그 경륜을 옳게 해석하고 설교하고자 하는 방향과 의지가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하나의 일관된 성경 해석과 설교적용의 원리로 체계화되어 있는 ‘구속사적 설교(해석)’는 포기할 수 없는 유익을 제공해 준다.
고재수 교수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는 우리에게 성경 본문(특히 역사적인 본문)을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따라 해석하고 설교하는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충분히 보여준다. 고재수 교수는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다양한 본문으로 24편의 설교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 각 설교를 논하거나 개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설교집이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보여주는 특징을 몇 가지로 간추려보는 것은 가능하고 또 유익하다. 그것은 이 책의 특징이나 유익을 발견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이 책이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에 충실하게 구성된 것이므로 구속사적 설교의 강조점을 엿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로 간추려 보았다.
(1) 이 설교들에는 구속사적인 통일성이 있다. 모든 각각의 설교 가운데 설교자 개인의 ‘창조성’이 개입된데 연유한 괴리감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모든 설교는 주제 면에서나 해석 원리 면에서 통일을 보여준다. 그 통일성은 일단 한 하나님을 통하여 나타난다. 구속은 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왔고(제1장 적개심),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제9장 성탄), 하나님께서 성취하신다(제10장 즐거운 삶). 또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경륜의 비밀이요 핵심으로서 통일성을 제공한다(제2장 적개심, 제7장 예언의 영, 제13장 초청과 선택). 구약이나 신약의 성도든 오늘의 우리든 모두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일관되게 설교한다. 나아가 성경 해석과 설교에 나타나는 또 하나 중요한 통일성은 구속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사실이다(제5장 구원과 율법, 제6장 순종).
(2)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역사성을 가지고 변한다는 것을 잘 고려하고 있다. 제2장 아브람의 거짓말(창 12장), 제3장 이삭의 거짓말(창 26장)은 이러한 진전과 발전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 설교들은 성경에 대한 윤리/심리적인 해석이 얼마나 말씀의 풍성한 교훈을 가리우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 제14장 사십 일의 금식(눅 4장)과 제17장 예수님의 일보다 더 큰 일(요 14장) 등을 통하여서도 계시의 발전에 따라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기초적인 원리를 제공하는데,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과 그에 대한 성도의 위치를 옳게 정립하도록 도와준다. 이 설교집의 24편의 설교를 읽는 것만으로도 성경 계시의 발전과 역사성을 가진 변화의 굵은 맥을 잡을 수 있다.
(3) 이 설교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성경의 핵심적이며 유일한 주제임을 드러낸다. 창세기 3장으로부터(제1장 적개심) 마지막 계시록 3장까지(제 24장 적은 능력의 교회) 이 핵심은 일관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이 습관적으로 구원을 언급한다든지, 억지 춘향 격으로 각 본문마다 구원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계시의 구원이 그저 죄의 용서와 영생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구원받은 성도의 구체적인 생활 가운데도 적용되어야 하고, 성경도 그것을 교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제8장 값없이, 제10장 즐거운 삶, 제11장 기도, 제12장 십자가를 짊, 제15장 누가 크냐). 성도의 삶에 관한 모든 적용은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설교집의 단점을 굳이 지적해야 한다면, 우리가 익숙한 설교 풍토와 정서에서는 부합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즉 감정적이고 즉각적인 적용과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설교 방식에 익숙해 온 한국 성도들에게는 건조하다는 느낌을 준다. 청중의 정서에 대한 고려가 성경 이해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정서의 소외는 안타까움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설교자의 생래적 차이(화란인)에 기인한 것을 안다면 이것은 단점이 아니고 차이점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고재수 교수의 구속사적 설교가 혹 지나치게 경직된 체계를 구축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구속사적 설교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지평을 넓게 열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굳어진 틀이 되어버릴 때에는 성경의 더욱 풍성한 계시를 가리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 이미 필자는 서두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고체화된 설교 방법론으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성경을 성경이 말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방향과 의지를 강조했다. 고재수 교수가 제시하는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이 설교집만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할 정도로 굳어진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어렴풋한 생각이 든다. 만일 사실이라면 그 체계 속에 제시하지 않는 성경해석의 접근은 원천 봉쇄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풍유적 해석이나 상징적 해석의 가능성이 성경의 계시 방법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고려조차 할 수 없다. 모범의 기능이 필요 이상 제한될 수 있다. 청교도 설교자들과 같은 풍성한 인문학적 소양은 구속사적 설교에서는 무익한 것 같다. 체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체계가 주도면밀한 틀이 되어버릴 때에는 더 풍성한 성경 이해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손 닿는 곳에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이런 설교집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출판된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사람이 탐독한 이 책을 다시 서평하는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이후로도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성도들에게 이 책이 읽혀져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설교의 풍토가 우리 교회 안에 이루어지는데 이 책이 끼칠 수 있는 유익을 강조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