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정론이 새롭게 시작하는 기획기사 ‘김 집사가 알아야 할 교회법’은 교회법의 전반적 내용을 쉽게 해설하는 시리즈입니다. 기독교보와 함께 진행하는 시리즈로서 여기에 싣는 것은 기독교보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글 내용은 기독교보에 실린 그대로인 경우도 있으며, 오프라인 신문 지면의 한계상 다 싣지 못한 내용을 여기에는 그대로 싣습니다. - 편집자 주
죽은 신자에게 벌을 내릴 수 있나요?
조재필
(새언약교회)
김집사님. 죽은 신자에게 벌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신자는 권징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헌법은 권징의 대상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권징하는 대상은 교회의 교인명부에 등록되어 있는 세례교인(입교인), 교회의 직원, 총회를 제외한 각급 치리회(노회, 당회)로 규정되어 있습니다(권징. 제4조). 추가적으로 치리회가 설치한 소속회나 기관도 권징의 대상이 됩니다. 즉 치리회가 설치한 소속회나 기관의 대표자에 대한 권고와 직무정지, 그리고 단체의 해산을 명할 수 있습니다(정치, 제153조). 이상의 헌법 규정에서 벌을 내릴 수 있는 권징의 대상으로 죽은 신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권징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징의 목적은 “진리를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옹호하며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의 정결과 덕을 세우며 범죄자의 영적 유익을 도모하는데 있”습니다(권징. 제2조). 특히 범죄자의 영적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권징의 중요한 목적인데 교회의 권징으로 죽은 자의 영적 유익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의인들의 영혼은 온전히 거룩하여져서 지극히 높은 하늘로 영접되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악인들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져 완전한 흑암 가운데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회개하여 교정할 기회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상 교회 역시 죽은 자들을 훈련하거나 교정하거나 양육하여서 영적 유익을 도모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소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여 죽은 자들의 영적 유익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죽은 자의 영적 유익을 도모하는 것은 로마교의 왜곡된 신앙입니다. 이는 연옥(煉獄)이라는 성경과 상관 없는 교리를 창안하여 가르친 것에 상당한 원인이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지옥의 영구한 벌을 받을 정도는 아닌 죄인이 천국에 적합한 상태로 정화되기 위해 잠시 거치는 과정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 교리로부터 면벌부(免罰符) 판매와 같은 해괴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건물, 책, 교구에 대해서까지 권징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생명 없는 대상과 죽은 자에 대한 권징은 영적 유익이 아니라 도리어 숱한 영적 손해를 야기합니다. 이교도들과 같이 삶과 죽음에 대한 미신과 잘못된 내세관을 조장합니다. 무엇보다 신자들의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을 방해합니다. 사후에도 모종의 기회가 있다고 여기게 만들어 완고해질 수 있도록 용기(?)를 제공합니다.
더불어 교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치리를 형식주의로 화석화시켜버립니다. 사후 세계를 교회의 관할과 치리 영역을 삼으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무적인 절차와 행정적인 결정 뿐입니다. 치리회가 권징을 시행한 이후 범죄한 신자를 심방하고 지속적으로 권면하는 것이 책임입니다.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이 책임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책임을 이어갈 수 없는 대상이 죽은 자들입니다. 심방과 권면이 사라진 권징은 결국 죽은 자는 고사하고 살아 있는 교인들의 영적 유익 마저 방해합니다. 교회의 권징을 영적 유익의 기회로 삼지 않고 단순한 행정절차로 여기게 만들어버립니다. 경건의 능력과 활력은 사라지고 화석처럼 굳어버린 경건의 모먕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죽은 자를 권징의 대상으로 삼을 때 교회가 입을 손해가 크기 때문에 성경적인 교회는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이런 무지한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죽은 자의 권징과 관련해서 우려스러운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죽은 신자를 벌하는 문제(시벌)가 아니라 벌을 취소하는 문제(해벌)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해벌 역시 교회의 권징에 해당합니다. 특히 면직의 벌을 받은 목사를 그의 사후에 치리회가 해벌하는 결정을 내리고, 나아가 복직, 복권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고 주기철 목사가 해당합니다. 주기철 목사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므로 총회가 면직의 시벌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벌 후 67년 만인 2006년에 예장통합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의 복직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예장합동 교단의 몇 노회가 또 다시 주기철 목사의 복권, 복적을 결정하고, 2016년도에는 총회가 나서서 주기철 목사의 복권, 복적 결정을 하였습니다. 내쳐서 총신대학교도 학적부에 복적했습니다. 유사한 사례가 우리 교단에도 있었습니다. 2008년도에 총회 운영위원회를 통해 고 송상석 목사를 해벌하고 사면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결정은 행정 절차의 부적절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원리에 맞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동기를 따져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 의도가 관철된 결과로 보입니다. 첫째로는 과거 교회가 행한 오류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 둘째로는 해벌 당사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유족들이나 신자들을 위한 의도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범한 과거의 오류 자체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거기에 그치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에 맞습니다. 성경과 신앙고백서들은 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항상 가라지가 섞여 있고, 자칫하면 연약해지기 일수입니다. 이를 부인하는 것이 중세 로마교회의 오류였습니다. 교황을 필두로 교회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필시 교권주의로 기울어집니다. 죽은 자를 권징하는 권한을 가진 교회는 필연 교권주의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또한 과거에 범한 교회의 오류를 번복하는 과정에서 외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해벌과 복권이 자칫 회칠한 무덤같이 진정한 회개 없이 교회의 과오를 덮으려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참된 겸손이며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동기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행정 절차가 유족과 성도들에게 위로와 유익을 주는 것은 한계가 큽니다. 도리어 성경적인 원리에 충실하게 권징을 시행하는 편이 현재와 장래에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