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지난 10월 27일 고려신학대학원 대강당에서 있었던 신대원 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고신교회와 신학 70년의 회고와 전망
유해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1938년 제 27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적 의무라는 이름으로 통과시켰다. 총회 임원들은 곧 신사를 참배하고, 급기야는 ‘암데라스 오미가미’에 완전 귀의한다는 예식으로 7번 물에 담그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재세례까지 받는다. 선교사들이 설립하고 운영하던 중등, 고등교육 기관들은 참배를 거부하다가 강제로 폐교를 당하고,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도 폐교 당한다. 참배를 거부한 많은 이들이 만주나 일본으로 피신하거나 구금 또는 투옥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친일적 인물들이 서울에 조선신학교, 평양에 후(後)평양신학교를 연달아 개교한다. 옥중에 있던 몇 목사들은 신학의 정화를 통한 목사 양성을 꿈꾸면서 평양신학교를 이어 정통신학을 가르칠 신학교의 설립을 구상한다. 이런 구상에 기초하여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가 개교하였다. 이 신학교는 총회가 아닌 경남노회의 결정으로 설립되었으나, 그 노회와 총회에서 교권을 장악한 친일적 인사들의 농락으로 총회와 무관한 학교라는 총회의 결정으로 설립자들과 지지자들은 총회로부터 축출되어 무원지대로 쫓겨났다.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은 불가피하게 1952년에 총노회를 조직하고 총회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다. 총회는 아무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1956년에 총노회는 총회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올해는 고려신학교 개교 70주년이다. 고신교회의 역사는 이보다는 짧지만, 고려신학교의 역사를 떠나서 고신교회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이점을 고려하면서 공히 70주년을 적용한다. 그간 한국사회와 교회에는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한국은 제 2차 대전 이후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유일한 피식민국가이다. 이런 급격한 경제 성장에 한국교회도 교회사에서 전무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현재 한국은 저출산의 여파로 급속한 인구 노령화를 겪는데, 교회 또한 이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구에서 경제적 안정은 교회의 세속화와 공동화를 가져왔듯이 한국교회 역시 이런 형편에 처해있다. 고신교회와 신학도 이런 큰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의 다른 교회와는 달리 성장에서 느렸지만, 쇠퇴의 속도도 느리고 유년주일학교가 다른 교회들에 비해 상대적이긴 하지만 건재하다. 고신교회의 신학과 설교도 독특성을 지니면서 한국교회에서 때때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본고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잘 표현하는 ‘항상 개혁해야 하는 교회’를 모토로 삼아 고신교회와 고신신학을 회고하고 전망하려고 한다. 회고의 내용은 회개와 개혁이며, 전망의 내용도 회개와 개혁이다.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1946)와 ‘대한예수고 장로회 총로회 발회식 선언문’(1952)를 기초로 지난 70년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교회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장래를 향하여 나아가려고 한다.
1.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 회개의 역사
지난 70년간의 고려신학교-고려신학대학-고신대학-고신대학교의 역사를 개괄하여야 고신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고신교회는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 중심으로 불가피하게 형성된 교회이다. 고려신학교를 시발로 한 고신신학을 알아야 고신교회를 이해할 수 있고, 고신교회의 현재를 알면 고신신학과 고신대학교/고려신학대학원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고려신학교는 해방 후 출옥한 한상동(1901-76), 주남선 목사(1888-1951)가 설립하였고, 박윤선 목사(1905-1988)와 한부선 선교사(Bruce F. Hunt; 1903-92)가 초기 신학 교육과 형성을 담당하였다.거창교회에서 목회하던 주 목사와는 달리 한상동 목사는 제씨 한명동 목사(1909-2001)와 함께 현재의 고신대학교와 고신교회의 형성에 지대한 역할과 영향을 미쳤다. 한상동 목사는 옥중에서 한국교회 재건 방안을 구상하였다. 신학교를 설립하여 진리를 위해 싸울 참된 교역자를 양성하며,전도인을 길러 교회를 개척하고, 수양원을 설립하여 신앙 양심을 더럽힌 교역자들을 재출발하게 한다는 세부 사항도 마련하였다.
3항으로 구성된 고려신학교설립취지서(1946년)는 개혁의 여망을 담고 있다. 신학교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1항에 간접적으로 나온다. 정통신학운동, 곧 진리운동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상황에서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αὐτοπιστία)을 믿는 개혁교신학, 곧 칼빈주의 신학의 수립이다. 2항은 보통은혜(일반은총)원리의 영역에서 우리나라를 주님의 진리에 기초한 국가로 수립해야 함을 선언하고, 천국을 구하는 진리운동으로 建國에 협력하겠다는 원대한 입장을 천명한다. 3항은 신학운동은 문화운동이며, 켐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이 교회대학으로 출발한 것을 언급하면서 기독교대학교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창세기 1:28, 2:19절에 기초하여 인생을 자연정복자로 정의하면서 자연 숭배를 거부한다. 대학교를 설립하여 천국을 구하는 문화운동도 정통신학운동에 수반된다는 점을 내세운다. 해방 직후에 이런 취지서를 작성하고 신학과 건국과 문화에서 진리운동을 내세운 고신교회의 선배들의 웅대한 선언은 지금 보아도 위대하다. 이후 고신교회는 고려신학교를 폐지하고 고려신학대학의 설립을 교육부로 인가 받았고, 계속 고신대학과 고신대학교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올해 제 66회 고신총회는 고려신학대학원의 이름의 사용을 중지시키고,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이름을 고정시켰다. 모름지기 역사를 알아야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이후 세대는 마치 고신교회의 초기부터 ‘고신대학교’가 있었고 그 한 특수대학원으로서 신학대학원이 있었다라고 알 것이다.
그렇지만 고신신학과 고신교회의 역사 70년 동안 설립취지서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어두운 면도 있다. 사조이사회 사건, 세속 법정 소송, 김해복음병원, 관선이사 파송, 리베이트에 의한 의대 소속 교수의 구속/불구속 기소 등은 설립취지서와는 무관한 다른 대학교나 불신 사회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무엇보다도 고신대학교(복음병원 포함)가 취지서에 합당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토론이나 반성은 찾기 어렵다. 해방 직후에 돋보였던 취지서의 내용대로 현재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에 고신교회의 자녀들을 보내는 것을 권장해야 하지는 않을까?
이처럼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와 고신교회는 특이한 역사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교회가 신학교나 대학교를 세우는 일반적 순서가 아니라, 그 반대의 순서로 설립되고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따라서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가 고신교회의 역사와 정신 형성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는 1952년의 ‘대한예수고 장로회 총로회 발회식 선언문’의 내용과 방향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 그 이후 지금까지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와 이사회는 총회에서도 항상 중요한 안건으로 상정되며, 때로는 논쟁과 심지어 무력시위(가령 부속 복음병원 노조 등)까지 동반되기도 한다.
역사에서 나타난 이런 관계는 그리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출옥성도가 목표로 삼았던 신학교육을 통한 진리운동은 대학교와 이후에 복음병원을 관장하는 학교법인 이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권주의로 고신교회는 개혁교회의 모습에서 멀어진다.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역사는 회개로 시작하여 여전히 회개해야 하는 역사이다.
2. 고신신학과 고신교회: 개혁
고신신학은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의 일반적 경향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다른편으로는 개혁주의라는 독특성을 지닌다. 한상동 목사로 대변되는 복음주의적 신앙과 목회는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후 고신교회 안에는 복음주의적인 목회가 지속되었으며, 출옥성도들과 고려신학교 출신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목회자 일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목회한다고 볼 수 있다.
부산과 경남은 1890년대부터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 지역이었지만, 줄곧 호주선교부가 주로 선교를 담당하였다. 1889년에 첫 선교사 데이비스(J.H. Davies)가 그의 누나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나 6개월 후에 사망한다. 1891년에 5명이 다시 입국한다. 1905년에 진주, 1911년에 마산, 1913년에 통영과 거창에 선교지부를 개설하여, 의료와 교육선교를 병행한다. 첫 세례는 1894년 4월에 북장로교 파송 배위량(W.M. Baird) 선교사가 호주 여선교사들에게 배웠던 3명에게 베풀었다. 호주장로교회(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미국이나 캐나다장로교회 선교보다 덜 관심을 받았다(145).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교리적 표준으로 받았지만 1920년 이후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초기 선교사들보다 진보적이었다. 이들은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말하였다. 결국 신사참배 반대와 일본 제국주의의 추방 정책으로 1941년에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거나 철수함으로써 호주선교는 막을 내린다.
고신교회 안에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경향과 맥을 달리 하는 신학 전통이 있다면, 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이다. 이 노선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어려움을 당하였던 한상동 목사와 연관된 한부선 선교사와 박윤선 목사에게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선교사는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이다(1924-1928년). 이때는 이른바 구(舊)프린스턴신학의 마지막 시절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청주에서 사역하다가 첫 안식년을 맞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1935-36)한 뒤에, 1936년에는 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미국장로교회(이후에 정통장로교회)의 창립 회원으로 가입하고, 장로교 독립선교부의 선교사로 파송받아 만주 봉천노회와 협력하였다. 1938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27회 총회가 부당하게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항의하였다. 1940년에는“장로교 언약”(The Presbyterian Covenant)을 만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과 작성하였고, 1941-42년에는 옥고를 치른다. 1942년에 강제 추방당하였다가 1946년 10월 18일에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부의 파송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11월 13일부터 1960년까지 고려신학교에서 실천신학과 선교학 등을 강의하였다.
한 선교사는 구프린스턴 신학과 메이첸의 영향을 받는다. 구프린스턴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며, 신앙적 체험을 강조하고, 장로교 신조를 철저하게 수용하며, 17세기 개혁파 정통신학을 따르되 신학방법론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 발흥한 상식철학에 의존한다. 이 학교는 1892년부터 연례 선교 특강을 개설하여 학생들이 선교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에 성경 비평과 신조에 대한 경시, 경건과 학문의 분리가 자리를 잡자, 메이첸은 1929년에 신조에 대한 신봉을 표방하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고, 1933년에 독립선교부를 창설로 제명 당한 다음1936년에 미국장로교회(정통장로교회로 개명)를 세운다. 이 교회 안에서 1937년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흡연과 음주를 반대하는 이들이 맥킨타이어를 중심으로 따로 성경장로교회를 설립한다. 그는 이후에 WCC를 대항하는 ICCC를 창설한다. 한 선교사는 여러 면에서 메이첸의 영향을 받고 따른다.
한 선교사는 고려신학교의 초기부터 협력한다. 여기에는 만주에서 겪었던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옥고를 치른 공통점, 그리고 박윤선 목사와의 학연과 신학적 연대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장로교 언약’이 부산과 경남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을 알고, 한상동 목사와 친밀감을 가지고 협력한다.박 목사는 한 선교사와 봉천노회에서 같이 사역하였고, 1934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1935-36년에는 함께 수학하였다. 한 선교사는 고려신학교가 개혁신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을 본국 교회 선교부에게 알렸다. 박 목사는 그를 자기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한 분으로, 신실과 정직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라고 존경하였다. 한 선교사는 미국 장로교회의 전통을 따라 웨스트민스터신조를 신봉하고 타국에서도 믿음의 지조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고려신학교의 교수로서 개혁신학의 틀을 놓았으며, 열악한 재정을 위하여 주말 설교로 받은 사례를 신학교에 헌금하였다. 그를 위시하여 초기 교수들이었던 박형룡(1887-1978), 박윤선, 김진홍(1906-1988), 이상근(1911-2011), 김철현, 안용준 목사 등과 하도례 선교사(1925-2009)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거나 수학하였으니, 초기 고려신학교는 ‘한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같은 분위기였다. 한 선교사는 재건교회의 분리주의적인 교회론이 아니라 참 믿음과 회개로 개혁하는 장로교회의 회복을 추구하였다. 그의 의견을 따라 한상동 목사는 장로교회의 신조와 정치를 따라 신사참배를 회개하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하는 새로운 총노회의 결성안을 1947년 초 총회에 제출한다(355). 그러나 1949년 제 35회 총회는 메이첸파 선교사와 상관하지 말라는 결정을 내린다. 이렇게 한국교회 70년사에서 이때처럼 교권이 행세된 때는 없었다.
1947년 9월에 박형룡 박사가 가담하여 10월에 고려신학교 교장취임식과 더불어 한 선교사와 박윤선 목사도 교수로 정식 취임한다. 이것은 마치 구프린스턴을 잇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처럼, 고려신학교를 옛 평양신학교를 잇는 행사였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교회의 회개와 권징시행보다는 자유주의 신학의 척결에 주안점을 두었고, 이 때문에 그는 1년 후에 고려신학교를 떠난다. 그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이며 교회의 점진적인 개조가 가능하다고 여겼던 반면, 고려파 인사들은 신앙의 개혁과 정화로 이어지지 아니하는 신학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교회의 회개보다는 신학적인 자유주의 척결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두고두고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 유감으로 남는다. 우리는 여기서 박형룡 박사가 아니라 고려파 선배들의 입장이 옳다고 확신한다. 박 박사의 결별은 결국 당시 장로회 총회가 고신을 분리주의로 보고 축출시키는 데에도 상당하게 기여하였다. 고려파의 축출로 인한 한국장로교회의 첫 분열로 고려파 선배들은 교회개혁이라는 정당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사랑이 부족하고 정죄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나,신사참배에 적극 참여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교권을 잡았던 이른바 지도자들과 그들이 장악한 노회와 총회의 교권주의적 오만의 결과이다. “신사 참배 반대자들이 시도한 당시의 교회 운동을 가리켜 교회를 나누는 분리주의 운동이라고 규정하는 평가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 왔거나 혹은 그런 말에는 무감각함을 보여 온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이후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의 과정에서 고신교회는 씻지 못할 잘못을 범하였다. 한 선교사와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부는 성급한 합동에도 반대하였지만, 성급한 환원에 반대하여 이후 합동측과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한 선교사는 개혁신학의 확장을 위하여 고신교회와도 협력한다. 그러나 환원 이후 협력 관계는 이전만큼 회복되지 못하였다.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와 고신신학의 지평을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장로교 전통으로부터 네덜란드 개혁신학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1930년대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을 배우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박형룡 박사의 추천으로 1934년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가서 공부하면서 개혁신학을 접하였고, 1938-39년에 두 번째로 유학하였다. 이 공부를 통하여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 가서 공부하려는 의욕을 가졌다. 비록 화란 유학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였지만, 1930년대에 화란어를 공부하고 화란 신학자 바빙크를 공부하고 화란 주석을 읽고 강의하고 주석을 저술하였다. 그의 활동으로 한국교회는 독자적인 첫 주석가를 통하여 개혁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박 목사가 고려신학교 초기부터 고려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을 성경 주해와 변증학, 신학 일반에서 가르쳤고 이후 고신교회 안에서 그의 제자들이 그의 경건회 설교를 전국교회로 가서 전하는 방식으로 개혁신학과 설교가 고신교회로 퍼져갔다. 그렇지만 그의 활동은 고려신학교 개교 이후10년만에 중단되었다가 복귀하지만 1960년 9월 승동측과 합동 직전에 그가 교장직 수행을 제지당하면서 종결된다.
박 목사는 당시 장로회총회의 교회정치 혼탁과 권력 투쟁을 비판하였다. 즉 제 15회 총회가 적절한 조사도 하지 않고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교회회의도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신자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 잘못된 결정에 항거할 수 있음을 칼빈과 여러 신조들을 인용하면서 옹호한다. 총회파가 마산 문창교회의 예배당을 차지하려고 세속 법정에 고소하자 고신교회에 속한 목사(송상석)도 맞대응하였다. 총회가 소송 가능성을 열어두자, 박 목사가 이것이 고려파 정신인 초기의 개혁과 회개 정신이 퇴색이라고 지적하고 남을 소외시키는 편협함도 비판하였다. 즉 고려파는 모든 한국교회를 회개케 하는 선택된 집단이기 때문에 소송에 휘말리면 고려파의 권위가 상실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1957년 초에 자기의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을 떠난다. 다시 복귀하나 주일성수문제로 1960년 9월 고려신학교를 완전히 떠난다. 박 목사는 교회 내에 권력을 쥔 이들의 강요였다.
박 목사는 1948년 「파수군」 창간부터 편집장으로서 1960년 합동까지 129호를 발간하였고, 많은 설교 요약과 200편이 넘는 소논문을 기고하였다. 주제는 다양하여 매호 권두언에 이어 성경 주해, 조직신학, 교리사, 현대신학 비평, 교회의 제문제 평가, 동양철학, 목회학, 비교종교학, 칼빈주의 문화관, 기독교와 국가 관계 등을 다루었다.
박 목사는 초기 고신교회의 신학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동란 당시에 피난지 부산에는 온갖 신비주의와 방언을 포함한 은사운동 그리고 이단이 창궐하였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사경회나 부흥회를 개최하지만 개혁교회의 특징인 성경교육을 교인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였다. 박 목사는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전도관, 나운몽의 용문산 운동 등을 비판하면서 고신교회의 신앙을 굳건하게 확립하였다. 이후 고신교회는 한국의 어떤 교회보다 불건전한 집회나 은사운동과는 늘 거리를 두게 되었다.
박 목사는 WCC도 비판하면서 근본주의자인 맥킨타이어(Carl Curtis McIntire; 1906-2002)가 1948년 주도한 국제기독교연합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를 지지한다. 맥킨타이어는 1934년 메첸의 요청으로 독립선교부를 창설한다. 박윤선 목사는 1954년에 제 2차 국제기독교연합회에 참석하고 페이스신학교(The Faith Seminary)로부터 한상동 목사와 함께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러나 맥킨타이어의 신학적 입장은 박 목사가 동의하기 어려우며, 특히 한국의 불건전한 은사 운동이 스코필드관주성경이나 전천년설의 영향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이런 관계는 그리 건설적이지 못하였다.
박 목사를 이어 이근삼 박사(1923-2007)가 고신교회 안에서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계속 강의하고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 교수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신봉하면서 이 용어가 그의 입술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장로교 신조인 웨스트민스터고백서와 요리문답을 해설하였고,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가 장로교 전통 위에 서도록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칼빈주의 문화관에 입각한 기독교대학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컸고, 현재의 고신대학교는 그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근삼 박사는 박윤선 목사에게 직접 배웠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멘토가 있다. 한 명동 목사이다. 한 목사는 고려신학교 초기에 살림을 맡았고, 광복동·감천·암남동으로 이어지는 교지(校地)와 교사(校舍) 매입과 건축을 책임졌다. 그는 1955년부터 1965년까지 고려신학교 예과에서 독립한, 이후 고신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칼빈학원을 맡아 교장과 교수로 사역하였다.
한 목사는 일본고베중앙신학교에서 유학하면서 미국남장로교 선교사였던 풀턴(Samuel P. Fulton, 1938)의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유학을 시작한 1935년부터 첫 두 해 동안은 칼빈주의를 싫어하였지만, 곧 칼빈주의를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풀턴의 칼빈주의는 웨스트민스터신조에 기초한 장로교적 개혁신학 전통을 말한다. 그래서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에 나오는 문화운동인 기독교대학 언급은 한명동 목사가 기여한 바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박윤선 목사가 기독교대학교에 대하여 언급하거나 어떤 열망을 갖고 있었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만약 박 목사가 유일한 작성자라면, 그가 유학하였던 화란 자유대학교도 언급되었을 것이다.
박윤선, 한명동 목사가 말하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은 한 편으로는 장로교 전통이요 다른 편으로는 화란 전통이다. 이근삼 박사는 이 두 전통을 연결한다. 고신교회는 1969년에 웨스트민스터고백서와 대교리문답서를 채택한다. 이때는 화란개혁교회와 자매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그 교회의 요청으로 이것들을 채택하였다고 볼 수 있으니, 그때부터 화란교회와 그 개혁신학의 영향이 고신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암남동 교사를 신축할 때 화란개혁교회가 건축비의 절반을 모금하였고, 고려신학교 출신 교수 요원들을 받아 교육시킴으로 화란개혁교회와 그 신학의 영향은 1970년대 이후부터 고신교회 안에서 더욱 뚜렷하였다.
그렇다면 화란개혁신학이 고신교회의 내면에까지 영향을 미쳤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 화란교회를 따라 굳이 시편을 부르거나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를 가르치거나 설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리문답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이런 전통을 따라 웨스트민스터소교리문답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전통이 그 전과 후에도 고신교회 안에 정착하지는 않았다. 한 동안 SFC가 이런 전통을 지킨 적은 있지만, 고신교회 안에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대하는 태도는 화란개혁교회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현 고신교회 안에서 신조에 있어서 개혁신학을 따르는 교회는 많지 않다.
이근삼 박사가 한명동 목사를 이어 기독교대학인 고신대학교에 미친 기여와 영향이 지대하지만,그가 가진 기독교대학에 대한 관심은 칼빈주의 문화관에서 왔으며, 설립취지서에 나오는 대로 일반은총론에서 출발한다. 이 박사는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기독교교육의 기초와 출발점인 언약과(유아)세례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기독교교육은 문화운동이기에 앞서 신자인 부모들의 언약적 책임이며, 부모들은 기독교교육을 실행하기 위하여 자발적인 교육위원회를 조직하고 재정을 책임지며, 신앙고백적으로 교사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자녀 교육을 위임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기독교교육을 위임 받은 교사 또는 교수는 신조에 서명하고 부모의 위임에 따라 교육하며, 교육과 제반 업무 전반에 대해서 부모에게 동의를 얻고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다. 이 경우 교리문답은 교회와 학교와 가정에서 중요한 교육 교재가 될 것이며, 세 영역을 연결하는 좋은 고리 역할을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신교회 안에서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은 거론되고는 있지만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1970년대부터 강하게 불었던 교회성장운동의 여파도 이런 분위기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 운동을 여러 면에서 평가할 수 있겠지만, 교회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은 화란 개혁신학은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경원시 당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교인의 수가 감소하고 있는 현재에서 보자면, 이 현상의 책임은 교회성장론자의 신학이나 입장에 있지 개혁신학이 교회 성장에 어떤 부정적 영향이라도 미쳤다는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화란교회가 출산에 의한 수적 성장만 한다고 비판을 받던 시절을 돌아보면, 격세지감이 든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저조한 출산율로 인하여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한국교회도 역시 급격한 교회 공동화를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있다. 언약을 가르치고 언약백성의 사명을 기독교교육과 문화적 사명으로 확장시켜 가르치지 못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신교회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신봉하는 독특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느 교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현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을 지닌 한국 유일의 교파라는 자부심도 따지고 보면 칼빈주의와 개혁신학과는 별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제는 고신대학교 의과대학/복음병원과 다른 분야의 역사를 살펴서 개혁교회의 면모를 점검해야 할 때가 되었다.
3. 고신교회와 고신신학: 회개의 영성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이 가히 구호에만 머문다는 사실의 저변에는 고신신학의 영성의 쇠약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고신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측면이 있다면 이 영성이지만, 이것은 논문의 형식으로 담기에는 애매하다는 이유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박윤선 목사의 신학은 주남선/한상동 목사의 회개의 영성 위에 서있었다.
고신교회는 처음부터 회개운동에서 출발하였다. 1946년 4월 마산 문창교회와 이약신 목사는 한상동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회개하였다. 이런 회개운동은 박윤선 목사가 인도한 경건회에서 계속 불이 붙었다.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말경 경건회에서 박윤선 목사는 요한복음 21:15-27절을 읽고 설교하였다. 설교 후 자원하여 기도할 것을 제안하니, 한 학생이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하였고,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기도하였다. 학생들이 한 사람씩 나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수업을 중단하고 기도회가 계속되었다. 성령님의 역사로 기도회는 회개운동으로 눈물과 감격으로 충만하였다. 이 기도회는 고려고등성경학교로 번져갔고 급기야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전국교회로까지 파급되었다. 설립자이지만 건강과 거리 관계로 부산에 자주 오지 않았던 주남선 목사도 이 회개운동의 소식을 듣고 신학교롤 방문하여 회개 운동에 동참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초량교회에서 박형룡, 김치선, 박윤선 목사가 하루 세 번 집회를 인도하였다.박윤선 목사는 한부선 선교사가 참배를 거부하고 당한 고난을 언급하다가 자신이 단 한 번이지만 신사를 참배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하였다. 이런 집회는 울산과 온산에서도 열렸고 제주도에서도 한 주간 열려 인도하였다. 그는 교역자들의 이런 회개 이후에 서울 수복이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회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 발회식 선언문(1952,10,16)의 초석이다. 당시 장로회남부총회는 경남노회에서 교권을 장악한 친일세력의 충동을 수용하여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에게 총회 회원권을 박탈하고 축출하였다. 지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우주 통일 원리를 따라 한국의 정치적 통일과 한국장로회 종파 단일성과 한국장로회 임시행정기관 단일화를 위하여 최후까지 합동을 노력하였으나,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에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통탄하였다. 자신들은 단일화운동을 회개운동과 신학사상에 치중하였으나, 교권주의로 인하여 좌절당하였음도 고한다. “성경에 신앙생활의 삼대요소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참 믿음이 있을 수 없고, 참 믿음이 없는 자에게 소망이 있을 수도 없고, 하늘에 소망을 두지 아니한 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 그러나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십자가의 승리가 있을 없고,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하늘의 소망이 있을 수 없고,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언문은 회개를 이렇게 많이 언급하면서 한국교회에 회개가 없음을 한탄한다. 회개가 없는 곳에는 진리도 없으니, “우리의 선배 칼빈 선생께서도 그 시대의 암흑면을 깨치고 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개혁주의(복음화)운동을 시작한 것이 곧 우리 장로교회파의 창시였습니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칼빈 선생의 개혁주의로 이루어진 교파이니 만큼, 우리들은 이 개혁주의 진리노선을 떠나서는 장로파 교회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들의 신앙에 만족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선언문은 회개를 막무가내 요구하고 명령하지 않는다.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교회사에서 성도들은 순교의 피를 흘렸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일제의 탄압과 총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옥중에서, 산과 굴에서 모진 생활 혹은 유린당한 신앙지조를 회복하기 위하여 통회의 눈물바다에 잠긴 자들이라는 삼인칭 표현으로 선언에 참여한 자신들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고신교회는 그 태동부터 회개운동이었고 진리를 지키기 위한 개혁운동이었다.
4. 신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봉사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 현장에서 나와 교회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신학을 지원하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근대학문이 발흥한 이후, 대학교가 연구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신학도 대학에서 자기의 자리를 잡고 현장인 교회와는 동떨어져 활동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바람직한지는 고려할 사안이다. 교회 역시 현장성만을 강조하면서 신학과의 협력을 주도하지 않고 신학과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는 것도 유익하지 않다.
고신교회는 초기부터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계기가 된 신학강좌에서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목사로 대표되는 초기 10년의 개혁신학은 회개와 개혁을 주도하였다. 한 목사는 회개를 주도하였고, 박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석을 집필하였다. 박 목사는 미국 정통장로교회와 독립신학교이긴 하지만 그 교회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두 차례 유학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 자유대학교에서 개혁신학을 연구하여 영어권 장로교회와 화란 개혁교회 신학을 한국교회에 소개하였다. 이는 1940-50년대 한국에서는 상당히 참신한 시도였다. 당시의 장로교회는 교권주의를 휘두르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던 출옥성도와 고려신학교를 축출하였지만, 고려신학교와 이 학교를 지지한 부산과 경남 지방의 교회들은 건강한 신학을 배워 목회와 삶에 적용하였다. 따라서 교회들은 고려신학교를 재정적으로 돕고 공기도와 사적 기도에서 신학교를 기억하였다. 초기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관계는 아주 바람직하였다.
그러나 박 목사가 어떤 주일 아침에 미국 선교사의 출국을 전송하기 위하여 택시를 타고 부두에 갔다가 주일 오전예배를 선상에서 드린 일로 인하여 신학교 교장직에서 파면당하고 교수직까지 정직 당하는 일로 인하여 그는 고려신학교를 영구히 떠나고 만다. 이후 박 목사의 제자들로서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공부한 홍반식(1918-1992), 이근삼, 오병세 박사(1926-2016)가 그를 계승한다.이들은 196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고신교회의 신학의 얼굴이었다. 이들이 귀국한1960년대 초기에 한국교회에는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이 많지 않았다. 이들은 각각 구약, 신약과 조직신학을 교수하였으며, 지역교회의 집회나 연합집회 등을 인도하였고, 여러 저작들을 남겼다. 현재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50-60대 목회자들은 이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세 박사들을 이은 신학교수들도 다 은퇴하였다. 허순길(교회사와 봉사신학), 박성복(신약), 전호진(선교학), 안영복(히브리어), 박종칠(구약), 이승미(신약), 황창기(신약), 이보민(윤리학) 교수들은 아직 생존해 있다.
그 다음 세대도 은퇴를 시작하였거나 목회 등으로 학교를 떠났으며, 80주년이 되기 전에 다 은퇴할 것이다. 한정건(구약), 이복수(선교학), 최덕성(교회사), 이환봉(교의학), 현유광(기독교교육), 이상규(교회사), 이성구(구약), 임영효(선교학), 한진환(설교학), 이신철(선교학), 김순성(실천신학), 박영돈(교의학), 유해무(교의학), 양낙흥(교회사), 변종길(신약), 이병수(선교학), 길성남(신약), 신득일(구약), 조성국(기독교교육), 신원하(윤리학), 최승낙(신약) 등이다.
현재 신학교수로 신학과와 신대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나머지 교수들은 80주년을 맞을 것이며, 이들에게 앞으로 고신교회의 신학의 짐이 맡겨져 있다고 하겠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들은 초기부터 정통신학인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표방하고서 진리운동을 펼쳤다. 교회의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어리고 경건이 야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을 믿는 개혁교신학의 원칙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박윤선 목사를 필두로 모든 고신교수들을 통하여 고신교회는 성경관에서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톨릭이 말하는 전통을 거부하고, 계몽 이후 현대신학이 채택하는 성경 비평을 거부하였다. 이 성경관은 앞으로도 굳게 고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신학운동은 항상 회개와 개혁을 목표로 삼았다. 박형룡 박사와의 결별에서 보았듯이, 고신신학과 교회는 개혁신학을 백과사전식 종교적 지식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교회와 교인의 실제적인 회개와 개혁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와의 결별이 보여주듯이 신학과 교회가 회개와 개혁을 향한 경건을 잃어버릴 때 교권의 희생자였던 고신교회 안에도 교권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의 이사회를 중심으로 교회정치의 온갖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알려진 바이다. 박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주석」에서 회중을 최고 권위로 보는 교회법적 입장은 고신교회 안에 정착된 적은 없으며, 현재의 총회 운영 방식도 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앞으로 고신신학은 교회를 위하여 이런 교회법을 소개하고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박 목사가 고신교회와 고려신학교를 떠남과 동시에 신학이 교회를 개혁하고 선도하려는 설립 취지를 고수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특히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의 원칙이 목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실제로 고신신학이 말하는 개혁신학은 상당히 구호에 가깝다고 하겠다. 외국의 개혁신학을 번역하고 강의하지만, 과연 개혁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강의하고 교회에 전달하는 일관적인 작업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개혁주의가 단순히 보수주의나 복음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정도를 넘어 개혁주의와 보수주의,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박윤선 목사의 경고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장로교의 교역자들로서도 무의식적으로 알미니안 신학 사상을 가진 실례가 많으니 통탄할만하다.” 특이한 것은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 신학을 깨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언약신햑)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 신앙은 안 가진다.” 고신신학은 설립취지서가 분명하게 밝히는 정통신학인 개혁신학을 제대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전파해야 할 것이다. 지난 70년 동안 고신신학은 이 일에 천착하지 못하였는데, 앞으로 고신신학의 사명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이다.
1960년대부터 일어난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 운동은 교회의 신조나 신학교의 공식적인 신학적 입장과는 관계없이 전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신학교도 이런 운동에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만을 개진하였을 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다. 이때부터 ‘신학 따로 목회 따로’라는 괴리와 대치 형국은 공개적인 비밀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이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제한되고 말았다. 신학은 성장 운동에 대해서 기여한 바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학은 점차 교회의 현장에서 멀어지면서 또 다시 학문이라는 이름의 신학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길에 들어섰다. “심령부흥이나 교회부흥을 지향하는 교회는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물론 칼빈주의 교회까지도 신학적으로는 보수파 칼빈주의의 수정파인 18세기의 아르메니안주의 신학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부흥신학은 구원의 주체적 체험 획득과 그것을 위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동원과 그 효과를 신학적으로 인정하는 소위 신인협동설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주의적, 경건주의적 신앙 체질을 가진 한국 개신교회들은 교파는 달라도 결국은 한 가지 신학, 즉 아르메니안주의의 신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혁신학을 표방하던 신학자들은 이 점을 보다 더 분명하게 지적하였어야 했다. 우리가 교회 성장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다만 교회 성장의 근저에 깔려 있는 목회자의 성취욕이나 교인들의 기복 사상 또는 예언에 대한 사모 등을 이제는 올바르게 폭로하고 말씀으로 세례를 주는 신학적 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고려신학교의 개혁신학은 책과 전통의 신학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그리하여 현장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현금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제치고 많은 목회 관련 세미나를 주최하고 실제로 강사로 활동하며 목회 현장인 교회의 여론을 장악하고 있다. 지금 신학과 신학교는 제한된 영향력만을 겨우 간직하고 있다.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가 첫 항에서 밝힌 취지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정통신학운동, 진리운동을 위하여 계속 개혁하는 개혁신학, 곧 칼빈주의 신학을 수립하여 교회를 개혁하고 회개하게 하려는 목표로 시작한 고려신학교가 오히려 교권의 중심에 서고, 교회의 염려와 근심거리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신학교수들이 교회의 교사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연고로 교회로부터 불신을 당하거나 교사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교회의 교사인 신학교수들이 먼저 회개하여야 개혁의 선봉이 될 것이다.
또한 신학교에서 배출한 목사들이 지역교회에서 장로교회의 신조에서 벗어나는 설교와 목회를 하며 장로교의 교회정치와는 달리 감독인양 교권을 행사하고 각종 계명을 어기는 일탈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목사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부름을 받아 지역교회에 파송받았으니 교인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개혁하는 정통신학을 강력하게 펼쳐야 한다. 안타깝게도 목회에서 은사운동이나 불건전한 집단의 영향이 고신교회 안에도 많이 들어왔다. 개혁교회가 주장하는 대로 은혜의 주요 방편인 말씀과 성례로 예배 집례를 수종되는 종으로서 목사는 매주일 공예배에서 교인들을 은혜의 방편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의 치유를 받고 무장하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으로 파송해야 한다. 나아가 지역교회의 당회 위주의 교회정치를 정착시키면서 광의회의인 노회와 총회에서 교권이 형성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여 한국교회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보통은혜원리를 따라 국가와 사회에서도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려는 두 번째 항목에 대해서도 신학은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두 번째 항목은 썩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SFC(학생신앙운동)가 하나의 좋은 예일 수 있다. SFC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기초로 삼아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목적으로 삼는다. 나아가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를 사명으로 제시한다. 이 강령은 정말로 개혁신학의 요체를 멋지게 담아 목적과 사명까지 적시한다. 문제는 최근의 SFC 사태에서 보듯이, 고신신학이 SFC 강령의 실현을 위하여 어떤 역할을 지금까지 감당하였는지 반성할 때가 되었다. 취지서의 두 번째 항은 개혁주의적인 기독교 정당이나 기독교 노동운동, 기독교 언론 등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겠다. 결국 신학이 이 일에서 계속 맡아야 하는 역할도 있겠지만, 개혁신학에 뿌리를 내린 목회와 설교 사역으로 무장한 교인들이 각계각층에서 이런 일을 모범적으로 하여,진정한 기독교 국가를 이 땅에 건설하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다.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은 신학운동을 참된 문화운동에서도 구현하려는 취지서의 세 번째 항목에서 접근하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대학교와 신학교(신학대학원)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신학교수들이 시작한 신학교가 대학의 인가를 위하여 법적인 과오를 범하였고, 그렇게 확장되기 시작한 대학은 병원을 포함하는 대학교로 성장하면서 고신교회의 관심은 신학대학원에서 대학교로 옮겨졌다. 2014년 관선이사의 파송으로 병원을 분리하여 매각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득세하였지만, 이것은 교육법상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라 할 정도로 복잡한 사안이기 때문에 결국은 다시 수면 아래로 잠적한 상태이다.
설립취지서에 등장하는 영국의 최고 대학교와 고신대학교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고신대학교가 지난 세월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전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사회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지만, 개혁신학에 입각한 방향성과 대학 사회가 지향하는 수월성(excellency)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많지 않았다. 한국 대학의 위기 속에서 수월성이라는 주제를 논하는 것이 어쩌면 지나친 사치일지 모르지만, 방향성에 대해서는 반드시 토론해야 할 사안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대학병원인 복음병원이 의술의 연구나 시술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어떤 대학병원이나 다른 병원과는 달리 복음 전파를 위하여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초기의 고신은 회개운동을 원동력으로 삼았다. 박 목사는 고려신학교 설립의 유일한 목적이 회개운동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런데 이런 회개운동은 고신교회가 정착하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대원, 대학과 복음병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은 신사참배에 해당하지 않을지 모르나 여전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한 사안들이다. 2016년도 현재까지 병원 의사(임상 교수 겸임)가 의약품 리베이트에 관련되어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되는 일은 누구의 책임인가? 교권에 대한 집착이나 이사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교회정치의 부정적 현장은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가? 고신교회의 면모가 지난 70년 동안 마모되고 상실되고 있다.
개교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은 마치 별개의 학교인 양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신대원이 1998년 2학기에 천안으로 이전한 뒤, 두 기관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신학교로 시작한 대학교 안에 신대원 소속 신학교수들이 그 방향성이나 수월성 논의에 기여한 바가 많지 않고, 대학교와 병원이 개혁신학에 입각하여 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교정하는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현재 신대원은 목사 후보생을 양성하기 때문에 교단이나 목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대학교가 주는 학문적 유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목사는 다방면의 학문적 자극과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학문 분야들이 개혁전통에서 더 발전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다른 분야와의 관계는 그렇다 하더라도 신대원과 대학교의 신학과와는 지금과는 다른 진정한 협력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대학의 위기는 동시에 신대원의 위기이다. 앞으로 대학에 등록하는 학생만 감소할 뿐만 아니라 신대원에 와서 공부하는 목사 후보생도 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신대학교 신학과와의 신학 연계 교육도 중요한 사안이다. 무엇보다도 신학과 교수들과 신대원 교수들이 함께 고신교회를 위하여 부름 받은 사명을 협력하여 수행해야 한다. 특히 신학서론을 위시하여 신학과 목회에 연관된 많은 주제들을 공동으로 연구하여 신학의 통일성을 교회를 위하여 제시할 때에, 설립취지서가 밝힌 취지를 살려 이 땅에 개혁신학에 입각한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5. 고신신학의 전망
지난 70년 동안 고신교회와 신학은 분명 고유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재는 그 고유성이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고신신학은 고신교회를 개혁신학으로 바로 세우는 사명을 지닌다. 이때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전통 특히 칼빈주의 신학을 말한다. 이 신학은 칼빈 신학을 이은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기초한 신학이며, 이후에는 네덜란드 개혁신학까지 포함한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고신신학은 종교개혁 전통과 개혁교회 전통을 잘 배워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고신교회라는 신학의 현장도 폭 넓게 이해해야 한다. 신학은 현장에서 나와 현장을 향한다. 고신신학은 고신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필요하고 유익한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쳐야 하며, 현장에 들어가 신학을 전하고 현장의 질문과 문제를 안고 돌아와 새롭게 연구하고 신학을 정립하는 자립적이고 토착적인 신학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나아가 취지서도 밝히고 있는 대로 고신신학의 사명은 한국교회 전체를 향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신학의 공교회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간 이런 고유성을 발휘하거나 발휘하지 못한 지난 70년을 거울로 삼아 개혁주의 한국교회 건설과 세계교회 건설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고신신학은 이처럼 현장에서 나와 현장을 향하면서 반성적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하여 기독교고전을 연구해야 한다.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부르짖지만, 총노회발회식 선언문에서 언급한“우리의 선배 칼빈”도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였다. 고신신학이 자립하려면 종교개혁자는 물론 고대교회의 교부까지 연구하는 공교회성을 확보해야 한다. 부흥한 교회가 기독교고전을 생산하였다.그런데 이런 교회도 쇠퇴하고 교회당은 비어갔던 역사적 교훈을 직시하면서 현재의 한국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신학적인 경고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역성장하는 시점에서 이전의 성장과 부흥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담은 신학적 분석과 대안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고신신학은 이 점에서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개혁신학의 면모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고신신학은 이 땅에서 교회가 서구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고 건강하게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개혁신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이런 신학만이 아르미니안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흐름을 비판하고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고전연구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연구 및 교육도 포함한다.
이제는 이런 신학을 확립하여 우리에게 신학적,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서구교회에게 진 빚을 갚을 때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신교회에 개혁신학을 전해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및 정통장로교회와의 관계는 일찍 요원해지고 말았다. 송도의 신학교 첫 교사 건축에 재정적 도움을 준 미국 기독개혁교회, 두 번째 교사 건축에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신학교수 요원들을 훈련시켜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가고 있다. 이제는 이 교회들과 신학교에게 빚을 갚을 보은의 때이다. 이미 세속화된 서구 세계에서 외로운 믿음의 투쟁을 하고 있는 이들이 이렇게 성숙한 고신신학과 고신교회의 보은과 도움을 받으면 크게 힘을 얻을 것이다. 자유자만이 종이 될 수 있듯(고전 9:19), 신학적 자립을 한 교회만이 이웃 교회들을 섬길 수 있다. 이것은 개혁주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의 중요한 방편이기도 하다.
건강한 개혁신학은 진정한 회개 위에 가능하다.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에서 고신교회가 개혁하려고 했던 점들이 이제는 고신교회 안에서도 다반사가 되어버렸고,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사이비한 복음주의, 허울 좋은 보수주의,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까지 사랑하여 달라는 화평론과 타협정신이 교권을 타고서 (고신)교회 속에 들어왔고, 교회를 현세생활처세의 도구로 삼고 말았다.” 이처럼 괄호 속에 ‘고신’을 넣을 정도가 되었다면, 과연 고신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고신교회를 축출하였던 당시의 한국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면 고신교회가 굳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있겠는가? 고신교회의 존속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려면, 목회에서부터 개혁하고 인간의 욕심과 죄로 물든 현실을 수용하는 타협을 거부해야 하며, 교권을 애초부터 형성하지 말아야 하고, 목사든 교인이든 교회를 처세의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 고신교회는 한국교회를 개혁하도록 주께서 이땅에 베푸신 선물이다. 이 원래 사명과 목적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때로는 바리새주의나 분리주의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고신교회는 교회와 세상을 개혁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이런 비난이 사실무근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키우고 인재를 중시하여 편협함을 극복해야 한다.이것이 고신교회의 전망이다.
우리에게 텍스트는 성경뿐이다. 우리의 콘텍스트는 지금 이 한국땅이다. 지난 세월 2천년의 교회사는 우리에게 참고일 따름이다. 오직 성경에서 고신교회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것이 고신신학과 교회의 첫 고백이다. 주께서 우리를 파송하여 세우신 이 땅에서 지금 우리는 교회사를 참고하면서 새로운 기독교고전을 창출하자. “한국인들은 철학할 때는 불교인이 되고, 예를 갖출 때는 유교인이 되며, 생의 위기가 올 때는 샤머니스트가 된다.” 이렇게 오염되고 타락한 한국인의 심성을 고치는 고신교회의 개혁신앙과 개혁신학이야말로 이 땅의 참 소망이요 진정한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