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보 목사 설교 네 편에 관한 총회 결정을 지켜보며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담임)
제76회 총회는 손현보 목사 설교 네 편에 관한 총회 신학부의 보고를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보고서를 총회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자는 보고)를 “참고만 하기로” 결정했다. 1년의 연구와 토론 끝에 총회 신학부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보고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손현보 목사의 네 편 설교는 내용, 방식, 목적 전반에 걸쳐 고신 총회가 채택한 신앙고백 문서의 설교 이해와 구조적으로 충돌한다. 손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서 성경은 설교의 중심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을 보조하는 수단 정도로 사용되고, 성경의 올바른 해석의 기초 가운데 적용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설교의 목적은 회심과 성화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함이 아니라 정치적 각성과 행동 촉구에 놓여 있다. 고신 목사들은 강단이 정치적 목적에 종속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교회 헌법과 그 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설교해야 한다.”
나는 총대로 참석해서 이번 결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괴감이 들었다. 이번 안건의 본질은 결국 교회 강단과 교인을 지키는 설교에 관한 중요한 문제고,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시비가 명료한 문제인데도 보고서의 내용을 그냥 “참고만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한 자신의 비겁한 모습이 미웠다.
고신총회가 내린 이번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한다.
기존의 회의 질서 관행을 무시했다
총회는 이번 안건을 다룰 때 유(留)안건의 경우 토론 없이 가부를 묻는 기존 관례를 무시했다. 고신 총회는 유안건을 다룰 때는 토론 없이 가부를 묻는 것이 지금껏 일관되게 지켜온 회의 질서의 관례였다. 그런데 그 관례가 이번 손현보 목사 설교 네 편에 관한 총회 신학부의 보고 건을 다룰 때 깨지고 말았다.
한 총대가 의사 진행 발언을 통해 이 안건을 교수회 보고서 그대로 받거나 받지 않거나 전국교회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함으로 제3의 안을 결정하면 좋겠다고 했다. 또 다른 한 총대는 이 안건을 보고서대로 받으면 앞으로 모든 목사의 설교를 그렇게 해야 하는 문제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자문위원을 대표한 한 은퇴목사는 역사적으로 보면 신학대학원 교수회가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고 교회분열을 초래한 경우도 있음을 지적했다. 결국 교수회 보고서를 그대로 받기보다 참고하자는 의견이 있었고, “교수회 보고서는 참고만 하기로”가 최종안으로 제시되어 가부를 물은 결과 찬성 281표, 반대 69표로, “손현보 목사 설교 네 편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는 참고만 하기로 하다”로 최종 결정됐다.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권위와 총회 신학부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이번 결정으로 총회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1년 동안 연구하고 토론하며 작성한 보고서를 그대로 받지 않고 참고만 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권위를 크게 손상시켰다.
총회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보고서를 받지 않은 것에 그치지 않았다. 나아가 이 보고서를 다시 신중히 검토하고 교수회와 토론하며 최종적으로 결론 내린 총회 신학부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이번 결정이 남긴 후유증은 심각하다. 총회의 두 기관,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회와 총회 신학부의 권위가 크게 훼손되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들은 고신교회의 선생들이다. 고신교회의 신학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이단과 잘못된 교리를 막아낼 직무를 가진 이들이다. 이 보고서는 한 명이 아니라 교수 여러 명이 작성하고, 또 교수들 전체가 교수회로 모여 여러 차례 모여서 이 문제로 토론하며 검증하여 최종 작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총회가 그냥 참고만 하기로 했다는 것은 고신교회에서 고려신학대학원과 교수들의 권위와 위상을 크게 훼손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수회가 제출한 보고서는 직접적으로는 설교학 과목과 관련된 것이지만, 보고서를 읽어보면 성경신학 조직신학 교회역사 등의 분과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총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교수들이 앞으로 목사후보생인 신학생들에게 과연 어떤 권위로 어떻게 성경과 신학과 설교를 가르칠 수 있을지, 나아가 신학적인 문제로 전국교회를 어떻게 지도할 수 있을지 심히 우려된다. 그냥 “참고만” 하라고 가르쳐야 할까?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들은 고신교회 안에서 지금까지 늘 존경을 받고 권위를 인정받았다. 총회가 의뢰한 교수회의 연구보고서는 총회로부터 거의 채택되었다. 이 점은 다른 교파와 교단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늘 자랑스러웠다. 따라서 이번에 총회가 교수회의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고신교회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총회 신학부의 권위 또한 크게 손상되었다. 총회 신학부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와 더불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올바른 신학적 해석과 판단을 내리며, 특히 곧 목사가 될 강도사 교육과 고시를 주관하고 목사 연장 교육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 총회 신학부의 권위가 크게 손상된 만큼 앞으로 총회 신학부가 무슨 권위로 어떻게 강도사를 교육하며 고시를 시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번 사안의 본질은 교회 강단에서 ‘정치적 설교’가 과연 가능한가라는 것이었다
손현보 목사의 네 편 설교를 둘러싼 세 노회의 질의와 교수회와 신학부 보고의 본질은 설교와 정치의 관계, 소위 ‘정치적 설교’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였다.
이번 사안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 전반을 평가한 것이 아니고, 그분의 인격과 사역, 그분의 정치적 성향을 판단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따라서 총회가 총회 신학부의 보고를 “참고만 하기로” 한 결정은 총회가 과연 교회의 강단을 지킬 수 있는지에 관해 의구심이 들도록 했다. 이 점에서 이번 문제는 고신교회의 목사와 교인은 물론 교파와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였다. 또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치 이념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또 정치 이념이 극도로 분열된 현실에서 ‘정치적 설교’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며 혼란에 빠진 목사와 교인들이 무엇이 옳은 길인지를 묻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설교와 정치가 서로 배타적일 수 없고 설교에서 정치적 영역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설교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설교는 교회의 청중을 향하고 청중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 목사가 가진 특정한 정치적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설교하기까지는 지혜와 분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하는 순간 설교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런데 총회는 그럴듯한 여러 이유를 들며 ‘정치적 설교’에 관해 성경적인 입장을 잘 정리한 신학부와 교수회의 보고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판단을 분명하게 내리지 못하고 참고만 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이번 결정은 이제 강단에서 얼마든지 정치적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신호를 주고, 정치적 설교에 강단을 활짝 열어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총회가 고신교회의 강단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한편으론 총회가 교수회의 보고서를 부결하지 않은 점에서는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민감한 사안이라 할지라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몰라 혼란에 빠져 있는 교회, 목사와 교인이 맞닥뜨린 영적인 혼란을 도외시하고, 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 중심을 잃지 않고 교수들과 신학부가 용기 있게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받지 않고 참고만 하기로 했다는 것은 교회 강단이 혼탁해지고 있음에도 방관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사안은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그만인 그런 성격이 결코 아니다.
제시한 여러 논리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
총회가 “참고만 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친 논리를 살펴보면 첫째, 교수회 보고서 그대로 받거나 받지 않거나 전국교회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함으로 제3의 안을 결정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둘째, 보고서대로 받으면 앞으로 모든 목사의 설교를 이런 식으로 평가해야 하는 문제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논리다. 셋째, 역사적으로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보고서에 문제가 될 때가 있었고 이를 근거로 심지어 교회분열을 초래한 경우도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와 논리와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총회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의 강단을 지키고, 교회와 교인을 지켜야 했다. 강단을 지키고 교회와 교인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목사의 설교가 평가받고 교회가 분열되는 것보다 강단에서 바른 교훈을 지킴으로 강단과 교회, 교인을 보호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는 하나님이 자기 교회에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지 않는가. 그런데 소위 ‘정치적 설교’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병들고 허약해진다면 이 모든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질 것인가.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창기 고신교회는 강단을 지키는 일에 엄격했다. 제21회 총회(1971년 9월)는 강단교류에 관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본 교단의 신앙 신학 생활에 맞지 않는 교단은 거부하기로 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제35회 총회(1985년 9월)는 강단교류 문제와 관련하여 몇 년간의 연구와 유보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종전의 입장에서 후퇴하여 각 교회 당회의 재량에 위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때부터 당회만 결정하면 타 교단 출신의 강사를 얼마든지 고신교회의 강단에 세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때부터 강단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고신교회의 입장은 느슨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후 약 40년이 지난 지금, 강단에서 정치적 설교를 과연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까.
총회의 결정은 고신교회의 신앙 유산과 신앙 전통에 배치된다
고신교회의 신학교인 고려신학대학원은 올해 개교 80주년을 맞았다. 80년 전 1946년 9월에 고려신학교는 진리 운동을 위해 문을 열었다.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황국신민으로서 마땅한 국민의례임을 결정하였다. 옳고 그름의 분별이 명확함에도 당시 총회는 이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해방되어 출옥한 일부 교역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재건하고자 할 때 올바른 신학의 중요성을 알고, 여전히 교회에서 활약하는 일부 교권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서울이 아니라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웠다. 이들은 돈과 건물과 인물 대신 진리를 선택했다. 진리 운동을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한 것이 바로 고신교회의 신앙 유산이자 신앙 전통이다.
1949년 8월 28-29일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 신도들이 마산문창교회당에 모여 대회를 열고 입장을 밝혔다. 다음은 그 일부다:
“우리는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라 무엇이든지 이에 지나면 악으로 쫓아 나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진리는 유구하고 명료하며 회색적인 사이비 평화, 합동, 공작을 표명하는 소위 중간파 운동을 배격함(4항)
이번 결정으로 우리는 진리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고신교회의 신앙 유산을 스스로 차 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총회의 이번 결정에 대해 낙심하지 말자.
정치적 설교로부터 교회 강단을 지키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이를 고신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총회에 제출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와 총회 신학부의 수고와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역사를 보면 총회의 결정은 항상 옳지는 않았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은 역사적으로 많은 공회가 오류를 범했으니 그 결정을 믿음과 생활 법칙으로 삼지 말고 믿음과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총회의 결정을 존중하되, 이번 기회에 총회만 너무 의존하지 말고, 뜻이 있는 교회와 목사, 교인이 주축이 되어서 참고만 하기로 한 교수회의 보고서를 토대로 과연 설교와 정치의 관계가 어떠하며, 설교에서 정치적 적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강단에서 과연 정치적 설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기도하며 또 심도 있게 차분하게 토론하며 이 시대에 우리가 강단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를 서로 이야기하며 특별히 정치적 이념으로부터 교회 강단을 지킬 수 있을지를 모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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