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코로나19와 목회입니다. 코로나19는 예배와 교회생활을 너무나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목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존재감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교인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다른 측면으로는 옛적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물러나더라도 변화된 심성과 환경으로 인해 우리는 더 큰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직분자들의 직무수행이 더 구체적이고 세밀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편집장 주
코로나와 교회모임
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코로나 사태 이후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교회모임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일 오전예배뿐만 아니라, 오후 혹은 저녁 예배, 교육기관예배, 구역예배, 각종 기도회 등의 모임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를 맞아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한국교회가 수많은 다양한 소모임으로 유지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을 권장하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모임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히 10:25)을 따르지 않도록 엄중하게 경고하기 때문에 교회는 모이는 일을 사명으로 여긴다. 그래서 교회모임을 자제하자거나 줄이자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모임은 교회의 본질과도 같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모임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모이지 않는 교회는 사실상 교회라 보기 어렵다. 그런데 언제 모여야 하는지,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 것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교회가 일주일 가운데 일요일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오랜 교회역사를 통해 형성된 기독교 관습이다. 성경에는 반드시 주일에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명시적 구절이 없다. 기독교의 주일예배는 유대교의 회당예배 전통을 따른 것이다.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중세에 정착된 매일 드리는 예배인 성무일도도 사실상 유대교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대교 전통은 이슬람교, 즉 회교에서도 발견된다. 사도시대의 교회는 매일 성전과 집에서 모이다가 나중에는 안식일과 주일에만 모였다.
일주일에 두 번 즉 안식일과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예배일로 지키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2세기부터 유대교와의 구별을 위해 안식일 모임을 폐하고 주일에만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주일예배의 역사적 기원이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주일예배란 같은 마을이나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그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약속된 장소에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모임을 의미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다. 이 모임을 통해 기독교 예배가 성립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공간 개념이 사도시대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사도시대에는 처녀가 아이를 낳는 일이 기적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인공수정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다. 기적의 개념처럼 공간의 개념도 사도시대와 아주 많이 다르다.
극동이나 대서양 너머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 지중해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지금 우리는 하루에 태평양을 건널 수도 있고 그곳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화상으로 통화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이미 공간의 개념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물론 실제 공간은 화상 공간, 즉 영상과 다르다. 영상은 실제가 아닌 허구지만 또한 실제 공간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영상은 상상의 허구가 아니다. 영상은 둘 이상의 다른 현실을 동시에 하나의 가상공간으로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상상은 불가능하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교회들이 영상예배를 드린다. 영상예배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예배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신자들도 있겠지만 예배가 아니라 보기는 어렵다. 영상예배를 통해 신자 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가능하지만 성도 간의 교제가 불가능하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인 교제와 신자와 신자 사이의 수평적인 교제가 공존하는 것이 예배다. 영상예배를 통해서도 신자들이 그 두 가지 교제를 공유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 예배에는 처음부터 말씀과 성찬이 필수였으나 지금은 말씀예배 중심이다.
한국교회는 성찬을 매주 시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 1년에 2-4번 시행한다. 그렇다면 성찬을 영상이라는 수단을 통해 시행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찬예배는, 모이기 어려운 특별한 환경의 신자들을 제외하면, 공동의 한 실제 공간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교회가 예배를 위해서만 모이는 것은 아니다. 예배 외에도 수많은 기도회와 친목과 교육을 위한 모임이 있다. 코로나 사태는 이런 다양한 교회모임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과연 이런 수많은 모임이 없으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일까?
교회는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이는 것 자체가 교회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성경 말씀이 무조건 자주 모이라는 것을 의미할까? 확실히 아니다. 많이 자주 모이도록 제도화했던 것은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다. 수많은 교회모임을 줄인 것이 종교개혁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모임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아닐까? 배금주의와 성공제일주의에 물든 지금의 한국교회의 타락상은 결코 중세교회 못지않다. 돈과 권력과 성공을 추구하는 모습이 매우 닮아 있다. 중세교회의 타락은 숫자놀음의 결과다. 숫자가 좋은 교회의 시금석은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떤가? 중세교회처럼 숫자놀음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도수가 얼마인가? 헌금액수는 얼마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 새벽기도에 나오는 교인 수는 얼마나 되는가? 과연 이런 숫자놀음이 믿음의 척도일까?
교회의 여러 기관들도 서로 비교한다. 우리 기관의 구성원이 더 많고 우리 구역이 더 많이 모이고 더 많이 헌금하며 우리 팀이 더 잘 모인다 등등. 오늘날 개체교회의 다양한 행사와 수많은 모임은 다른 사회적 모임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족모임조차도 희생하도록 강요한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가 모이는 이유는 흩어져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시어 구별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성도라 부른다. 교회는 그런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도뿐만 아니라, 성도의 모임인 교회에 주신 사명은 이 세상에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세상으로 가지 않고는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성도들이 흩어질 때 가능하다.
모이는 교회는 공동의 예배와 나눔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고 재충전함으로써 다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성도를 교회로 불러 모으시는 목적은 세상에 흩어져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다.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교회 안에 갇힐 수 없고 반드시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서 그 영역을 넓혀야 하며 종국에는 온 세상이 그분의 나라로 변할 것이다. 많이 모이고 자주 모인다고 잘 모이는 교회라 보기도, 다양한 모임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교회라 보기도 어렵다.
물론 먼저 잘 모이는 교회가 되지 않고는 결코 잘 흩어지는 교회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잘 모인다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처럼 자주 모이고 많이 모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국교회의 다양하고 복잡한 모임을 확 줄이는 것이 교회의 건강지수를 높이는 길이 아닐까?
모이는 교회는 성도들이 세상에 흩어져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하도록 도와야 한다. 모이는 교회가 흩어질 때 세상의 희망이 된다. 모이는 교회가 생명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세상에 흩어져 어둠의 권세를 대항하여 싸울 때 살리시는 성령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교회가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코로나 정국을 선용하길 바란다. 또한 교회의 내부적인 모임을 효율적으로 재정비하여 줄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모든 교회행사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인이 곧 경건한 신자라는 잘못된 공식을 과감히 포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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