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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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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후보자 개인의 면면보다는 정당이 선출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보다 더 정의로워지고 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할 이들이 당선되기를 바란다. 이번 기획이 유권자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바른 선택을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거짓에 휘둘리지 않고 바르게 투표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가장 분명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 편집장 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상상과 정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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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성 목사

(광교산울교회 협동목사, 고신대학교 윤리학 박사 과정 중)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Ἀριστοτέλης, B.C. 384 – B.C. 322)는 인간에게 “정치적 동물”이란 수식어를 썼다. 이는 우리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았을지라도 중학교의 윤리나 도덕 시간에 한 번쯤 들어봤을 내용이다. 요즘에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그 이론과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운다. 초등 교육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민주시민 교육’이다. 민주시민 교육이란 시민으로서 어떻게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그 권리를 행사하는지 배우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현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정치의 대중화가 실현되고 있다.

 

 

1.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

정치란 무엇일까? 영어로 정치라는 단어인 Politics는 그리스의 도시(πόλις)라는 단어에 기원하고 있다. 그리스의 도시(πόλις)란 ‘시민들의 연합’, ‘시민들이 사는 땅’, ‘시민’, ‘모국’ 등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의미들을 관통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단어이다. 또한 현대의 정치와 유사한 의미의 그리스어는 politeria(πολῑτεία)로써, ‘시민권’, ‘시민의 조건’, ‘시민의 권리’, ‘권력을 획득하는 것’, ‘정부’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다. That man is by nature a political animal”이라고 할 때, ‘정치적’의 그리스어가 politeria(πολῑτεία)다(The Brill Dictionary of Ancient Greek).

   이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Politico)』에서 이 문장의 앞뒤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사람(good man)’이 되는 것과 ‘훌륭한 시민(worthy citizen)’이 되는 것이 같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하였다. 그는 이 둘은 같으면서도 서로 다르다고 말하였다. 선한 사람(good man)은 훌륭한 시민이지만, 훌륭한 시민이라고 모두 선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사람만이 시민을 다스릴 수 있고, 도시를 바르게 이끌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소수의 선한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을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정부(government)라고 하였다. 또한 정부를 구성하는 선한 사람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는 훌륭한 시민들의 집합인 국민(people)만이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민은 궁극적인 최고 권위를 지닌다고 하였다. 이것이 현대의 ‘국민주권주의’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시민들의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선한 사람들을 뽑는 것을 민주주의(democratic system)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시민들이 이런 선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하는 데, 그 이유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근거로써(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은 남자 성인을 의미한다), 가족인 여자와 아이들과 노예를 다스리는 남성 주인, 곧 시민의 행위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시민은 주변의 다른 시민의 어떤 간섭 없이 자기의 아내와 자녀, 남녀 노예들을 다스릴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권위를 행사하고 유지하는 것이 가치 있는 시민의 권리를 부여해 주는 조건이었다. 만약 노예를 학대하면 노예는 주인에게 원한을 품고 결국 주인을 해칠 것이며, 폭군이라면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만약 이런 폭군으로서의 행위를 지속한다면 결국 그 시민은 가장과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였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이 주인과 가장으로서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훌륭한 시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이 뽑은 정부는 시민의 힘과 권리를 위임받은 최고의 권력 기관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주장의 의미는 이러한 맥락 가운데 이해되었다.

 

 

2. 힘의 역학으로서의 정치

그렇다면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란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란 의미는 다스릴 힘과 능력이 본래적으로 주어진 자들만이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시 그리스에서 다스림과 돌봄의 능력이 주어진 자들은 그리스에서 태어난 자유인 성인 남자에게만 해당하였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 아이, 여자, 노예, 장애인, 이방인 등에게는 이런 힘을 주지 않았다. 오이코스(οἶκος)라는 집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존재에게만 시민의 권리가 주어지며, 이를 잘 유지하는 자들에게만 훌륭한 시민이라는 명예가 부여되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식 교육을 받은 성인 남성들, 곧 자유인들이었다. 정치적 동물이란 그 사회에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을 다스릴 잠정적 권위와 힘을 지닌 자들에게 해당하는 명예로운 수식어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고대 사회에서 정치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누가 타인을 통제하고 다스릴 힘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며, 단순하게 이해하면 힘을 지닌 인간들 사이의 힘의 역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힘 있는 자들 간의 힘의 역학 관계가 정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생각은 단지 고대 그리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와 현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근대의 정치이론서라 할 수 있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저자인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철저한 유물론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의 모든 관계를 힘의 원리로 설명하려 했다. 그는 물리 법칙인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힘의 원리로 모든 인간관계를 설명했다. 이러한 그에게 정치 또한 힘의 역학관계로 이해되었다. 그는 가장 강력한 존재만이 그 힘의 역학 관계를 통제할 수 있는 포식자의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포식자들의 조직은 바로 ‘정부’ 또는 ‘국가’였다. 더하여 그는 국가의 포식자의 지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이 일종의 ‘종교심’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홉스는 이것을 ‘애국심’이라고 주장하였다. 언뜻 보면 그의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근대국가의 탄생 과정에서 나타난 제국주의 국가들인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국가 숭배주의 요소들은 이것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로버트 벨라(Robert Neelly Bellah, 1927-2013)와 같은 현대의 종교사회학자들도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벨라는 미국의 국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실제로는 기독교의 형식을 지닌 시민종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면 다시 본 질문으로 돌아가 정치란 무엇인가? 아쉽게도 정치는 단순한 관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란 정확히는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힘의 원리, 힘 자체이다. 정치란 과거에는 가족의 대표자, 후에는 부족의 부족장, 더 넓게는 같은 언어나 문화 그룹의 지도자, 민족의 대표자, 왕, 군주, 의회, 정부, 대통령 등의 다양한 형태와 인물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본질은 이들에게 주어진 힘, 권력과 관련되어 있다.

 

 

3. 힘과 예수의 정치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는 힘의 역학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정치란 어떤 의미였을까? 예수는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권에 살고 있었던 식민지의 한 남성 청년이었다. 한 가족을 책임지는 남자 성인이었지만 그는 식민지의 이름 없는 한 존재일 뿐 어떤 정치적 야망을 지닐 만한 힘이 전혀 없었다. 예수는 태생부터 아무런 권위 없는 자였다. 예수는 비록 다윗 왕의 후손이었지만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하여 어느 정도 자란 후에 돌아와 유대 사회에서도 변방이었던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 또한, 그의 공적 활동 기간에는 그를 정치적으로 옹립하여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들의 요구를 피해 도망하였으며, 제자들이 정치적 야망을 위해 예수를 이용하고자 할 때도 자신은 죽어야 한다고 말하여 가장 가까운 제자 베드로에게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결국, 예수는 가까운 제자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임당하면서도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철저히 비정치적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빌립보 성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왜 지방의 종교 권력자인 바리새인과 당시 중앙 종교 권력을 잡고 있었던 제사장 그룹의 사두개인과 서기관, 로마의 권력의 하수인인 헤롯 왕,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 모두 힘을 합하여 아무런 권력 의지도 없는 비정치적 예수를 죽였을까? 이는 이들이 예수가 권력 의지를 지닌 정치적 인물이라고 오판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이었지만 다른 권력자에게는 위협적인 말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준비가 이미 되었으니 이제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행동하라’는 강력한 촉구였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는 자신이 그 왕이라고 거침없이 답하였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인대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막 15:2)

 

   이런 일련의 예수의 답은 예수가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있으며, 권력의지로 자신들의 정치적 힘에 도전하는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예수를 죽이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다면 예수의 정치적 언어는 과연 세속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가 외친 나라는 그의 삶이 보여주듯 세속의 나라나 정치가 아니었다. 예수의 정치는 세속이 정의하는 힘의 역학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영적 힘의 원리에 따른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를 의미하였다. 영적 힘의 원리는 강한 자가 가장 힘없는 자가 되고 가장 약한 자가 가장 높은 자가 되는 원리이다. 루이스(C.S. Lewis)는 이것을 그의 어린이 판타지 소설인 『나니아 연대기』의 제4권인 『캐스피언 왕자』에서 사자 아슬란의 말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너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니라.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라도 머리를 꼿꼿이 세우기에 충분한 명예이며 또한 위대한 황제라 하더라도 어깨를 움추리기에 충분한 수치이니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정치란 세상의 나라는 상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캐나다의 기독교 정치 철학자인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는 이를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이라고 하였다[(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이상길 옮김(서울: 이음, 2010)]. 테일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상상이 세속의 정치에서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고 지적한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세속의 권력과 힘의 의지가 가장 강력했던 시절, 교황의 절대 권위와 힘에 도전하여 그 힘을 일반 대중에게 돌려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테일러는 이 역사적 사건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상상을 낳았는데, 이것이 근대의 민주주의 근간이 되는 경제, 공론장, 주권을 가진 국민의 탄생 등 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절대 권력인 교황을 무너뜨림으로써 소수 공동체의 권위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개인이 사제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만인 제사장 교리를 통해 개인의 중요성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소명론을 통해 종교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 모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고 선언하였으며, 이를 통해 세속을 교회로부터 분리하였다. 이것은 정치, 경제 활동이 교회의 종속으로부터 독립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미국의 정치 신학자 윌리엄 캐버너(William T. Cavanaugh, 1962-)는 소명론과 두 왕국론을 통해 루터가 의도했던 정치적 의미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윌리엄 캐버너,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 손민석 옮김(서울: 비아, 2019); “Torture and the Eucharist: Challenges in Contemporary Theology." (Oxford: Blackwell, 1998); “The myth of religious violence: Secular ideology and the roots of modern conflict”(USA: OUP, 2009)] 캐버너는 루터는 종교 권력과 일반 권력을 나누어 한 쪽 편이 절대 권력을 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소명론과 두 왕국론을 주장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칼빈도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와 세속 국가의 통치가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4권 20장). 이는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을 모두 탐한 로마 교황의 타락을 목격한 종교 개혁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터나 칼빈 모두 두 왕국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비록 종말의 때에는 세속 나라는 하나님 나라로 대치되겠지만 지금도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에 침투하고 있다고 하였다. 칼빈 또한 기독교 강요에서 사실 “영적인 통치는 이미 이 땅에 있는 우리 속에서 하늘나라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개혁자는 세속 나라 속에 언제나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개혁자들의 거룩한 전제는 후에 철저히 무시되고 세속 권력에 의해서 교회는 이용당하게 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캐버너는 종교개혁 이후에 유럽에서 있었던 교회의 이름으로 발발한 여러 차례의 종교전쟁은 당시 군주들이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탐욕과 정복전쟁을 정당화하고 절대 권력을 만들기 위한 사악한 전쟁이었다고 밝힌다. 현대에 일어난 가장 비참한 전쟁인 제2차 세계 대전 또한 히틀러와 나치를 지지한 교회가 부여해준 절대 권력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러기에 역사는 종교가 세속 국가의 권력을 탐하였던 중세의 교회와 국가가 교회의 영적이며 도덕적 권력을 탐하였던 근대 모두 비극적 결말에 이르렀다는 것을 교훈으로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치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4. 교회의 정치

필자는 교회의 정치에 대한 긍정적 예는 종교 개혁자들이 보여준 거룩한 사회적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1970- )는 이 사회적 상상을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이 보여준 사회적 상상이란 당시에는 꿈꿀 수 없었던 것이지만 결국 이들의 꿈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세계 가운데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상상은 성경의 저자인 바울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개혁자들보다 더 먼 미래를 향한 사회적 상상을 품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빌레몬의 도망한 노예인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바울 자신의 형제로 소개하였고, 빌레몬도 그를 그렇게 대하도록 요청하였다. 바울은 인간을 신분이나 성별, 교육 격차, 다양한 인종이나 사회적 이유로 차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노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정치적으로 주장하거나 이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거룩한 사회적 상상을 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중해 주변 나라들에 전하였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바울이 품은 사회적 상상을 통해 약 1800년이 지난 후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직접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가부장제를 무가치하다고 비판하지 않았으며, 국가 권력에 저항하고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들이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으며, 아내는 남편의 소유라고 했으며, 국가에 복종하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반대로 주인은 종을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자녀로 여겨야 하며,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해야 하며, 국가는 시민의 안녕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양면성을 통해 사회의 제도 이전에 각각의 올바른 태도의 변화를 촉구했고, 더 나아가 거룩한 사회적 상상을 품을 수 있도록 기독교 공동체를 격려 하였다. 교회가 품은 이러한 ‘사회적 상상’ 혹은 ‘기독교 세계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세상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세상의 권력 구조인 정치를 개혁하고 변화시켰다. 이것이 세속에 침투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정치원리이다.

 

 

5. 오늘 한국 사회에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직업 정치인으로서 정치에 참여 할 수도 있으며, 정당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거나, 바른 정치인을 선출하는 선거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또한, 시민 단체나, 민원 활동을 통해서도 정치에 참여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고대 그리스 사회와 달리 모든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 뽑은 대표자들로 구성된 정부는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 권력은 반드시 다양한 형태로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속의 현실 정치는 여전히 힘에 대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권력은 반드시 절대적 권력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절대 권력은 필히 썩게 되며, 인간을 파괴한다는 교훈을 역사는 인류에게 남겼다. 또한 역사는 절대 권력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종교를 탐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때, 종교는 절대 권력의 하수인을 자청하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종교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순간 국가와 정치는 우상이 되고 교회는 국가와 세속 정치의 시녀와 시민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회의 신앙은 애국심으로 변질하였다. 이는 토머스 홉스가 말한 절대 권력을 지닌 견제 받지 않는 괴물 리바이어던인 제국과 독재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정당하지 않은 절대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 세력으로 남아야 한다. 이것이 세계 속에서 일반은총과 특별한 은총을 모두 담고 있는 공동체인 교회의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역할일 것이다. 세속 안에 하나님 나라가 침투하는 통로로서의 공동체, 더 나아가 예수의 정치로써 세상과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를 추구하는 사회적 상상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세속의 사회적 상상과 구별된 거룩한 사회적 상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인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사회적 상상은 ‘힘’이 아니라, ‘희생’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기회가 된다면 정치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인 공공선과 교회의 사회적 상상의 구체적 관계에 대해서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굳이 말하자면 교회의 정치는 ‘힘의 정치’가 아닌 ‘희생의 정치’이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좌우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치와 정부를 숭배하는 수준은 아닐지라도 이와 거의 맞먹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서로 하나님이 좌파의 하나님, 우파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의 액세서리로 만들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에 개혁자들의 거룩한 사회적 상상을 근대에 탄생한 절대 군주들과 제국의 전리품으로 바친 교회들처럼 말이다.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가 지닌 정치 과잉의 풍속 속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정치를 보호하고 그 독특함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교회는 한발 물러나 성경에 기초한 거룩한 사회적 상상을 키울 필요가 있다. 사회의 변화는 거룩한 사회적 상상을 통해 ‘차근차근 이루어진다’는 것이 종교개혁이 가르쳐준 사실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그러나 거룩한 사회적 상상의 빈곤 속에서 사회를 변혁하려는 조급함과 조바심에 빠진다면 오히려 세속의 정치에 휘둘리어 교회와 신자는 이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조바심과 힘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상상력과 인내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을 통해 변화는 시작된다. 이는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는 그리스도인의 적극성에 대해서 “수동성 속에 있는 적극성(an Activeness in our Passivity)”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정치를 상상하는 것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품은 거룩한 사회적 상상이 자연스럽게 성취되었듯, 성령은 교회와 신자들을 그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 매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또한, 교회가 거룩한 상상의 길로 다 함께 나아갈 때, 사회는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지금 우리는 거룩한 소망, 거룩한 사회적 상상을 품고 있는가? 누군가 그것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답할 것이 없다면 어느 정치 진영에 참여하기 전에 잠시 침묵하고 스스로에게 묻기 바란다. 나는 어떤 정치를 하길 원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회적 상상을 가지고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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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기획-청년멘토] 개혁주의 교회와 목회를 소개한 허순길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6.06 By개혁정론 Views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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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기획-청년멘토] C. S. 루이스 같은 변증가가 나오기를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6.01 By개혁정론 Views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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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기획-청년멘토] 영원한 청년 렘브란트에게 배운다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25 By개혁정론 Views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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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기획-청년멘토] 팡세에 나타난 파스칼의 고민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8 By개혁정론 Views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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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기획-청년멘토] 불굴의 용사 아타나시우스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3 By개혁정론 Views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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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기획-청년 멘토] 청년 아우구스티누스

    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
    Date2020.05.11 By개혁정론 Views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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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토인비, 창조성 그리고 코로나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5.08 By개혁정론 Views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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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당회의 역할과 권위를 생각하다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5.02 By개혁정론 Views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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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전염병은 차별과 혐오를 낳지만...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8 By개혁정론 Views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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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교회는 가현설(假現說)을 경계해야 한다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3 By개혁정론 Views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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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기획-코로나, 와중에서] 코로나와 두려움: 개방성과 투명성

    이번 기획기사는 다시 코로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고,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우리의 모든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라는 사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작금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예배 자체에 대한 논쟁이...
    Date2020.04.20 By개혁정론 Views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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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기획-총선]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래 글은 월간고신 생명나무 5월호에 실린 글로서, 이번 주제인 '총선'과 맞아 저자와 잡지사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 편집장 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권수경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국회의원 선거의 의미 제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
    Date2020.04.14 By개혁정론 Views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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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기획-총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상상과 정치 참여

    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Date2020.04.14 By개혁정론 Views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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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기획-총선] 그리스도인은 어떤 후보에게 투표해야 하는가?

    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Date2020.04.09 By개혁정론 Views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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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기획-총선] 4.15총선, 그리스도인이 투표 전에 생각해야 할 것들

    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Date2020.04.07 By개혁정론 Views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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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기획-총선] 하나님 나라, 체제 그리고 415 총선

    코로나 19사태에 파묻혀 있지만 4월 15일은 지역의 국회의원과 정당투표를 하는 총선일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결정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Date2020.04.03 By개혁정론 Views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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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사태와 이에 따른 목회환...
코로나 사태, 교회의 체질을 근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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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자매교회 총회를 참석하고
노회는 장로회교회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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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정치원리 하에서의 각종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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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장로교 정치원리 (서울포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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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제도의 반성과 개혁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유산과 한국...
장로회정치원리에 비추어 본 노회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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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교회설립에 대한 새로운 비전
KPM선교의 내일을 향한 준비 (김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