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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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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나의 아버지!

 

벌써 15년 전에 고인이 되신 저의 선친은 목회자였습니다. 선친은 서울에서 10여년 개척교회를 섬기셨습니다. 워낙 선비 같으신 분이셔서 가정에서 늘 책을 붙잡고 계셨고 다소 엄격하고 말수가 없으셨기 때문에 아들인 저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예배를 드릴 때 종종 나이 많은 누나들을 제쳐놓고 저에게 예배 인도와 설교문(국민일보에서 매일 연재되던 가정예배를 위한 설교문)을 읽는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게다가 교회 청소나 주보 만드는 일 역시 저에게 좀 더 많이 부탁(혹은 명령)하셨습니다. 아마도 고등학생이었던 누나들이나, 초등학생이었던 여동생보다는 제가 적임자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릅니다. 저는 ‘누나들도 있는데’라며 투덜거리면서도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평소 근엄하신 모습이었지만, 주일 저녁마다 ‘오늘 설교에 대해서 말해보라’며 다정히 말을 걸어 주시고, 혹여나 설교의 핵심을 기억하고 대답하면 박수를 치며 칭찬해주고 환하게 웃어 주셨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이렇게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아버지 설교를 듣고 자랐지요. 이제 목회 현장에 나서는 필자에게 아버지는 너무 그리운 존재입니다. 오죽하면 가끔씩 꿈에 아버지를 만나서 어떻게 교회를 섬겨야 할 지 대화를 나눌 정도입니다.

 

아버지같은 멘토 없나요?

 

필자는 작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교회 개척을 지도할 멘토를 찾아 나섰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마음 속에 붙은 교회 개척을 향한 불을 끌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의 부족함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저의 미숙함과 부족함을 채워줄 멘토 목사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에 가서 누구에게 배워야 할까. 고민도 깊었고 소망도 컷고 기대감도 생겼습니다.

 

우선 범교단적으로 저를 지도해 주실 목사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교단 내로 범위를 좁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 기준도 없이 무작정 교회를 전전할 수는 없었기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개척한지 오래되지 않은 교회를 섬기는 분입니다. 개척한지 이미 오래된 교회를 섬기는 분은 최근의 교회 개척 상황에 대해 감각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규모가 너무 크지 않은 교회여야 했습니다. 교회 규모가 커지면 실질적으로 가까이에서 세심한 멘토링을 해주실 수 없을 가능성이 크고,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준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닐 것입니다. 큰 교회 목회자라도 반드시 배워야 할 목회의 기본 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세운 기준은 당장 배워야 할 대상의 범위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개척했으나, 자립할 수준이 되었고, 동시에 규모가 크지 않은 교회!”

 

둘째는 신학적 안목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있는 분입니다. 필자는 선친께서 돌아가신 이후에 여러 교회 전통을 경험했습니다. 감리교, 오순절에서부터 보수적 장로교회, 에큐메니컬 장로교회도 경험했고, 직장인 선교단체와 해외 전문인 선교단체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한국 개신교 내에 존재하는 성경 해석상의 차이들과 다양한 예배의 모습들을 경험했지만, 신학을 공부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다양한 전통들의 차이들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내가 배운 신학전통만이 참되고 다른 신학전통은 거짓이라는 식의 날카로운 이분법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논쟁적 문제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을 통해 생각을 정돈할 수 있었습니다.

 

옛 전통 속에서 드리는 역동적 예배의 맛,

장로교 정치 원리가 보여주는 높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전해주는 부요함,

진리를 통해 누리는 자유함!

 

우리가 배우는 선배들의 가르침 속에는 이러한 보물들이 많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회자분들은 “신학은 신학교에서 배우고 목회는 현장에 있는 목사에게 배워라!”라고 합니다. 목회가 현장과 동떨어진다면 큰 일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단 신학교를 무시하는 일선 목회자들의 태도 역시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참된 신학의 자리는 설교단입니다. 신학은 목회 활동을 반성하게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의 모습 속에서 신학적 반성작업이 부재함을 느낍니다.

 

제가 젊기 때문일까요?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는 성도들이라고 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예배당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면서 실천적으로는 목회자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세운 교회’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지.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스스로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필자가 아직 젊어서 비판적인 사고가 더 크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젊은 사역자들이 좋은 멘토 만나기를 고대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그것을 기다릴 뿐 아니라, 성경이 그러한 자들을 기다립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물론 순진하게 박사학위를 가진 목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과 바른 신학적 안목, 그리고 경륜을 가진 참된 멘토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과 바른 신학을 가진 목사님! 나를 지도해 주실 목사님!”

 

세 번째로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에 협력하는 분입니다. 연합에 솔선수범하는 분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고 해도 완벽한 목사, 완벽한 모델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모델은 오직 한 분, 성령안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우리의 유일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멘토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나를 지도해 줄 사람을 여전히 찾되 그를 통해 여러 목회자들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름답게 동료 목회자들과 협력하는 분이라면 어떨까요? 동료 목회자들과의 협력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면, 적어도 아름답게 당회를 운영하시는 분이라면 어떨까요? 그런 멘토를 구하는 것은 장로교 정치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인격’이라는 덫에 빠져 목회자를 맹신적으로 따릅니다. ‘인품’이 훌륭하니 신학적으로 관대하자는 말도 참 아쉬운 말입니다. ‘인품’도 중요하고, ‘목회적 안목’과 ‘신학적 분별력’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인품이 좋으실 뿐 아니라 내가 볼 수 없는 넓은 식견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과 ‘신학’, ‘경륜’도 필요하지만 나 홀로 가시는 분이 아니어야 합니다. “동료들과 협력하시는 목사님”

 

멘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말은 안해도 많은 부교역자들은 마음 속으로 지금 사역하는 교회를 떠나고 싶어합니다. 멘토가 필요하지 않고, 요즘 시대 젊은이들이 시건방져서가 아닙니다. 말은 안해도 다들 마음 속으로 배움을 갈급해 합니다. 각자 기준을 가지고 진정한 멘토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지요.

 

누가 이 시대의 멘토가 되어야 할까요? 누구를 찾아가 배워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좋은 멘토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과연 개척 목회자는 자신의 멘토를 선택할 권리가 없는 걸까요? 과연 성도들은 좋은 목회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는 걸까요? 은근 슬쩍 떠나가는 부교역자들, 성도들 누구를 탓해야 할까요?

 

다양한 기준들이 제시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허락하시고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주위에 있는 목회자의 일면만을 바라보고 소망을 버리기엔 아직 너무 이릅니다. 직분자가 교회에 주신 ‘선물’(엡 4:7-12)인 것과 같이, 멘토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음 세대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젊은 사역자들을 자라게 하시려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래동안 기다리더라도 그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오래 기다릴 수록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필자는 감사하게도 개척 사역을 지도해 주시는 멘토를 만났습니다. 개혁신앙을 지켜 나가는 회중들과 함께하는 아름답고 전통적인 예배와 교제를 통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예배 공동체에서 쉼을 누렸습니다. 개척을 배우기 이전에 먼저 좋은 성도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 길을 성도님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걸어가야 할 구체적인 지도를 익히며 그 '동행의 길'에 익숙해졌습니다. 목회자로서 해야 할 본질적 사명에 집중하면서, 다른 비본질적인 것들은 보고 배운대로 따라가면 될 일입니다. 교회 개척, 생각보다 신경써야 할 것이 많은데 혼자 맨땅에 헤딩하지 않았습니다. 궁금한 것은 묻고 배울것은 그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멘토 목사님도 물론 한국적 상황에 맞추어 본인이 배운 것을 적용하고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그 수고의 열매를 따야 합니다. 물론 따라가는 것 역시 오랜 인고의 길임은 분명합니다. 단숨에 이루려고 하면 반드시 걸림돌에 걸려 넘어질 길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물으면서, 한 돌 한 돌 탄탄히 쌓아 올려야 합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성숙하려면 얼마나 많은 분들의 수고와 노력, 끊임없는 기도와 가르침이 필요할까요? 필자는 매달 한번씩은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모여 다양한 곳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분들을 찾아가 강의도 듣고 교제도 나누며 새로운 분들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분들 멘토 목사님들께 돌려 드릴 것은 '사례비'도 없고 그저 ‘존경’과 ‘감사’ 뿐입니다. 그래도 사랑은 뭐니 뭐니 해도 ‘내리사랑’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각 사람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사랑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내 교회 안 섬기면 이만 끝, bye bye!’가 아니라 ‘어디를 가던지 내가 예수를 따름같이 따르도록’ 가르쳐 파송하는, 그러면서도 나의 영향력을 과시하지 않는 분들이 이곳 저곳에 많이 있더군요. 그러나 그 수가 여전히 부족합니다(고전 4:15). 그래서 우리는 그런 멘토가 많아지기를 기다립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보편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젊은 사역자들을 가르치고 독려할 이 시대를 이끌어갈 아버지들, 하나님의 선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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