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교회를 믿사오며
이충만 목사
(네덜란드 캄펀신학교 유학중)
지난 6월 19일 크레타 섬에서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제7차 보편공의회) 이후 최초로 개최되는 동방정교회의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과 필자가 유학하고
있는 네덜란드는 개신교 특히 개혁주의 신학의 강한 영향 아래 있기에 이 공의회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이 역사적 순간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할 수 있다. 동방정교회는
이제는 유행처럼 이름이 거론되는 갑파도키아 교부들의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는 교회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의들의 형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공의회들 대부분은 헬라어권 교회들에서 개최되었고, 헬라 교부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비록 그들의 신학과 신앙이 서방세계의 그것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의 신학과 신앙은 기독교 전체가 빚지고 있는 바로 그 전통 위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언어적 연속성과 근접성 때문에 그 전통 그 자체를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였던 교회가 1054년에 분열하기 전까지의 교회전통을 서방교회가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그 만큼, 아니 오히려 더욱 동방정교회는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 서방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 다음으로 칭송 받는 어거스틴이지만,
동방교회는 그러한 어거스틴 없이도 아름다운 신학적 교회사적 유산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만약
동방정교회의 전통과 이들의 공의회로의 회합을 경시한다면 이는 지극히 서방적인 시각일 것이다.
필자는 네덜란드 해방파 교회의 신학교인 캄펜신학교에서 유학 중이다. 2012년에 유학을 시작한
필자의 유학생활은 이제 만 4년이 채워진다. 그 동안 필자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배우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신학을 생산했고 지금도 그 신학이 펼쳐지는 개혁교회를 배우고자 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필자가 유학을 떠나기 전 동경했던 바로 그 교회였기 때문이다. 현재 필자는 이곳에서의 유학생활과 교회생활을 만족하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추천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필자가 해방파 교회로부터 배우는 바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교회의 보편성이다. 필자의 짧은 유학생활과 해방파 교회의 경험은 해방파 교회를 익히 잘 배웠다고 하기에 턱 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공부와 생활은 필자로 하여금 신학교 시절 선생님들로부터 배웠던 이론에 대한 실존적인 확신을
준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보편성이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통한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 이
보편성을 필자는 이곳에서 경험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회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문화적 역사적 인종적 차이를 초월하여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는 신비라는 것이다.
필자가 경험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말 그래도 ‘네덜란드’ 교회이다. 개혁교회의 전통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빠질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
답다’는 평가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말 그대로 ‘네덜란드’라는 나라와 문화 안에서 태어난 ‘네덜란드’ 개혁교회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 스며든 네덜란드라는 나라의 문화와 역사는 유학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그 짙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한국에는 당연히 ‘네덜란드’식의 개혁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존재할 필요성을 필자는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무시할 수 없고 폄하할 수 없는 ‘한국’의 교회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다. 당연히 그 교회 안에는 ‘한국’의 문화와 정서가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그 문화와 정서는 당연히 네덜란드의 것과 다르다. 이는 한국인이
네덜란드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적 교회는 한국적어야 한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적이어야 하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그
독특성의 차이가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교회를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에 창조하실
수 있는 창의적인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의 결과물인 교회는 그 형태가 결코 획일적이지 않다. 네덜란드 안에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네덜란드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교회를 세우실 수 있다. 반면 동일한 성령께서 한국에서는 한국적 문화와 정서의 냄새가 물씬 나는 그런 교회를 세우실 수도 있다. 성령 하나님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을 라틴어 문화권에서는 그 문화에 적합한 서방교회의 형태로 세우실 수 있었고, 동시에 헬라어 문화권에서는 그들의 문화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서도 성경의 진리가 설파될 수 있는 동방교회를
세우실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사도신경을 매 주일 고백한다면, 성령
하나님의 이와 같은 창의적인 사역을 무엇보다 먼저 감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창의적인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감탄한다면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의 저들의 회합에 대해 좀더 친근하고 따뜻한 눈길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회합은 최소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것 만큼 가치있다.
해방파 교회는 공예배시에 신앙을 고백하는 방편으로 사도신경과 함께 니케아신경도 고백한다. 필자는
니케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교회의 보편성에 경탄한다. 니케아신경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동방에서 뿐만 아니라 서방에서도 받아드려졌다. 이후 적어도
1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믿음의 선조들이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세워진 교회에서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다양한 시대적, 지리적, 인종적,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교회들이 동일한 신앙고백을 진심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이
특정한 한 철학사조의 보편성 때문인가? 혹은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된 어떤 특질 때문인가? 혹은 특정 사상가나 신학자의 위대한 업적 때문인가? 단 하나의 대답은
창조자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창조자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어느 곳, 어느 때에라도 창조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성령께서 지금도 온
세계의 모든 교회들을 주의 말씀으로 붙드시고 늘 새로이 창조하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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