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은수저, 교회 안에는 없는가?
손재익 목사
(객원기자 / 한길교회)
2010년 8월 31일 외교통상부의 5급 사무관 특별채용에 1명이 최종합격했다. 그런데 그 1명이 다름 아닌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인 유명환 씨의 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이요, 양심상 해서는 안 될 일로 온 세상이 시끄러웠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요즘, 청년들 사이에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부모의 재력과 학력이 자녀의 앞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뒷받침이 없다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라는 말이 유행이고, 계층 사다리가 무너진다고 말한다. 사실 부모의 재산이 30억인 사람과 부모의 재산이 1억인 사람은 그 출발부터가 다르다. 후자가 전자를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터넷상에 누군가가 남긴 댓글에 보니 평범한 사람의 월급으로 강남에 아파트를 사려면 신라시대 때부터 모아야 된다는 웃지 못할 내용이 있었다. 소위 SKY 대학의 학생 상당수와 사법연수원생의 상당수가 강남 거주자라는 점은 광복 70년을 겨우 넘은 우리 시대의 불평등 수준을 잘 보여준다.
세상이야 그렇다쳐도 교회는 그러해서는 안된다. 교회 안에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모의 직분이 자녀의 직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서리집사의 가정에서 자란 자녀, 심지어 불신가정에서 온갖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자녀 가운데 직분자가 되어서 부모의 위치가 ‘굴레’(?)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금수저, 은수저와 비슷한 표현이 신학생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있었다. 금동아줄, 은동아줄, 썩은 동아줄. 아버지가 목사도 장로도 아닌 신학생이 교단 내 유명한 목사나 장로의 딸과 결혼하면 금동아줄, 은동아줄, 그냥 평범한 여자와 결혼하면 썩은 동아줄이라는 말이 있었다.
유명환 장관 사태로 시끄러웠던 그 해에 우리 교단과 관련된 어느 곳에 갔다가 놀란 적이 있었다. 얼마 전에 공석이 된 자리에 우리 교단의 유명한 목사의 자녀가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놀란 이유는 그 분의 아버지가 유명한 목사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 분이 일하고 있는 부서의 장(長)과 그분의 아버지와는 누가 보더라도 관계가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약 6년 전 어느 노회가 모집한 개척교회 목사 모집에 필자가 아는 어떤 목사가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그 자리에는 교단의 유명한 어떤 목사의 아들이 선택되었다. 그 일을 경험한 그 목사는 필자에게 하소연을 했다. “너는 앞으로 절대로 그런 모집이 있을 때에 지원하지 말라”고. 물론 필자는 그 분들이 채용되는 과정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오얏나무 밑에서 갓 끈도 고쳐쓰지 말라는 속담을 떠올릴 뿐이다.
금수저, 흙수저 라는 말이 회자되는 이 시대에 혹 교계에는 부모의 직분이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신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금동아줄, 은동아줄, 썩은 동아줄이라는 말이 아버지나 장인의 직분에 따라 자신의 섬기는 교회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여전히 교단의 중진교회에 담임목사로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최소한 목사나 장로는 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름 있는 교회에 전도사나 강도사, 부목사로 가는데 있어서 아버지나 장인의 직분이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경우가 많이 있다. 심지어 해당 교회 담임목사나 장로의 자녀나 친지를 부교역자로 쓰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직분은 세상의 직업과 달리 ‘경쟁’에 의한 ‘채용’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교역자를 ‘모집’ 혹은 ‘공고’하는 관행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알음알음이라는 방식을 통한 청빙에 있어서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도 안된다. 물론 자신의 아버지가 교단의 중요한 목사나 장로라 해서 불이익을 받아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아주 중요한 장점이 되어서도 안된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자리에 가기를 원하는 어느 누군가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가 갈 수 있는 자리를 무임승차한다는 점에서 공정치 못하며, 이것이 심지어 하나의 ‘문화’가 되어 버릴 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심리적 박탈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필자는 불신가정 출신으로 교단 내 제법 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필자와 동갑내기 친구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장로, (안수)집사, 어머니는 권사였다. 필자는 불신 가정에서 자라면서 그것이 가지는 소외감(?)을 많이 느꼈다. 교단의 목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돈에 팔촌에 교단 목사, 장로는 커녕 서리집사인 부모님 외에는 고신교인도 한 명 없는 목사로서 직간접적으로 듣는 여러 소식을 들을 때마다 친한 동기와 자주 이런 말을 나눈다. “누구누구는 진골이다. 그래서 걱정 없겠다. 그런데 우리는 6두품도 안된다.” 웃으면서 나누는 이야기지만 너무나 웃픈(?) 이야기이다.
서울의 한 유명한 대형교회가 담임목사의 은퇴를 앞두고 후임을 누구로 선택할지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떤 언론에 이미 보도된 바에 의하면 그의 아들이 후임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그 아들은 그 교회의 부목사로도 봉사한 일이 있다. 인천의 한 교회도 담임목사의 아들을 후임으로 선정했다는 보도가 있다. 그 아들도 그 교회의 부목사로 봉사 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 앞에 세상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아니 타락한 세상 앞에 교회는 뭐라고 부르짖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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