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신학대학원 학생들이 네덜란드 캄펀신학교와의 양해각서에 의해 지난 2016년 2월에 네덜란드 캄펀신학교에 방문한 것을 기행문 형식으로 적은 글입니다.
네덜란드 캄펀신학교 방문기
임모세 (고려신학대학원 제70회 졸업생)
2014년 6월에 고려신학대학원과 네덜란드 캄펀신학교(Theologische Universiteit Kampen)는 상호 협력을 약속하며 양해각서(MOU)를 채결하였다. 양해각서에는 학생 교류 추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2015년에 4월에 9명의 캄펀신학교 학생들이 고려신학대학원을 방문하였다. 이후 캄펀신학교도 고려신학대학원 학생들을 초대하였고 필자를 포함한 9명의 신학생들이 2016년 2월 1일에 네덜란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현지 시간으로 2월 1일 새벽 4시에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마중 나온 캄펀 신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두 대의 작은 버스로 이동했다. 고속도로는 우리나라와 비슷하여 왠지 친근했다.
▲ 공항에 도착한 학생들
캄펀까지는 약 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캄펀신학교가 제공해 준 게스트하우스 앞에 내렸다.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에는 아주 좁은 도로가 나 있었고 네덜란드의 특징 중에 하나인 노란 불빛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생각보다 넓었다. 3층으로 되어 있었고 각 층마다 방이 있었다. 우리는 넓은 장소를 우리끼리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날이 밝고 밖으로 나왔다. 도로에 차는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대단히 많은 수의 자전거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태어날 때 자전거를 잡고 태어난다는 농담이 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캄펀신학생들은 도로 맞은 편에 있는 건물이 캄펀신학교라고 알려주었다. 신학교 건물은 미국의 대학들의 캠퍼스와 달랐다. 누군가 신학교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것만 같았다(여담이지만 현재 캄펀에서 박사과정 중인 이충만 목사는 처음 캄펀에 왔을 때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신학교를 눈 앞에 두고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동네에 신학교가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그러나 이후에 도시 박물관을 방문하고 캄펀은 오랜 역사를 지난 도시이며 시민들은 오래된 건물들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캄펀신학교 건물도 그러한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었다.
▲ 캄펀신학교
건물 내부 구조는 외부와 다르게 현재적이었다. 학교 문을 열면 눈 앞에 카페가 들어온다. 넓지 않은 공간에 색색의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다. 작은 커피자판기 두 대가 구비되어 있다. 누구나 커피자판기로 공짜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학생들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카페에는 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학생들인 것처럼 교수들이 커피를 들고 돌아다니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듣자 하니 교수들 간의 커피 타임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한 공간에서 쉽게 어울리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건물의 구조도 학교 문화 형성에 중요한 요인인 것 같았다.
우리는 이번 방문에 대한 캄펀 측의 담당자인 요스 콜라인(Jos Colijn)에게서 캄펀 신학교 소개를 받고 학장인 룰 카이퍼(Roel Kuyper)교수의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 도서관을 탐방하였다. 1600년대 건축된 건물로 현재는 캄펀이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도서관은 대략 15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점은 캄펀은 오래된 문서들을 아주 좋은 상태로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루터, 츠빙글리 등의 개혁자들의 책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 캄펀 신학교 도서관
저녁에는 학생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캄펀 학생들은 저녁에 그룹별로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고 했다. 식사는 소문대로 조촐했다. 우리의 식사문화와는 많이 달랐다. 한 가지 메뉴만을 만들어 각자 접시에 담는 것이 전부였다. 식사 후에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마칠 때가 되면 성경을 읽고 잠시 묵상하였다. 식사 후에 성경을 읽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문화가 부러웠다.
둘째 날에는 캄펀도시를 탐방하였다. 도시는 생각보다 작았다. 인구는 대략 4만 명이다. 박물관을 방문하였는데 도시 규모에 비해 역사가 깊었다. 암스테르담이 발달하기 전까지 무역으로 부유했던 도시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현재는 그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마치 시골처럼 조용하고 작은 도시가 되었다. 단, 공부에는 적합한 도시다.
셋째 날에는 오전에 기독교 초등학교를 방문하였다. 해방파가 세운 학교였다. 우리는 학교를 돌아보고 이후에는 교장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비록 나라가 다르지만 네덜란드 교회들도 우리와 같이 기독교인들이 줄어드는 실정, 기독교적 교육의 어려움을 나름대로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에는 윗교회(Boven Kerk)를 방문했다. 고딕양식의 건물로 내부의 천정은 엄청나게 높았다. 우리를 안내해준 오르간 연주자는 직접 거대한 오르간을 연주해 주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밴드 음악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음악만으로 영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 들었다. 어쩌면 현대 교회들보다 건물과 음악을 예배의 요소로 더욱 잘 활용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넷째 날에는 개혁주의 신학의 간문화적 연구 과정(Master of Intercultural Reformed Theology)수업을 참여하였다. 수업에는 다른 국적을 지닌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담당 교수는 캄프하위스(B. Kamphuis)교수였다. 우리는 수업 이틀 전에 수업에 관련된 문서를 받았기 때문에 수업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수업 내용은 교의에 대한 해석학이었다. 특징적인 것은 수업문화였다. 캄프하위스 교수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강의에 대해 서슴없이 비판하라고 격려하였다. 학생들은 교수의 강의에 대해 지적하고 자신의 논리로 교수를 설득하려 노력하였다. 교수도 학생들의 논지를 부드러운 표정으로 따라가 주었다. 필기만 하거나 교수의 강의에 반대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학생들과 대조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오후에는 경건회에 참여하였다. 캄펀신학교가 경건회에 집중하는 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지적인 신학은 발전하였지만 경건 훈련에는 우리나라에 비해 무심하던 캄펀이 경건회를 정기적으로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마도 네덜란드와 우리나라의 신학이 잘 융합된다면 신학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밤에는 신학생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소스”(Soos)라는 모임장소가 있었다. 소스는 네덜란드어로 동호회를 뜻한다. 학생들은 매주 목요일 밤에 정기적으로 모인다. 가끔 교수들도 함께 한다고 했다. 학생들은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어울려 음료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학생들은 서로 신학적 지식, 학교 생활의 지혜 등을 나누었다. 특징적인 것은 비록 서양인데도 우리와 비슷한 대학문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대화를 나누던 중 음료를 다 마시면 병을 바닥에 던졌다. 의아해서 물어보니 신입생들이 다 치워야 한다고 했다. 부당하기보다는 신입생들이 선배들을 섬기게 하는 재미있는 발상 같았다. 왜냐하면 그 외에는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캄펀 신학교 경건회
다섯 째 날에 쇼클랜드(Schokland)를 방문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이 해수면이 낮은 육지를 바다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지켜냈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섯 째 날인 토요일에는 독일의 엠든(Emden)을 방문했다. 캄펀의 역사신학교수인 더 부어(de Boer)교수가 우리를 안내했다. 엠든에서 우리는 요하네스 아 라스코 도서관(Johannes a Lasco Bibliothek)을 찾았다. 고문서들이 연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루터가 출판한 몇몇 책들의 초판본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놀라웠다.
주일에는 유도키아 교회(Eudokia Kerk)에서 예배를 드렸다. 네덜란드 교회는 설교단이 높은 것이 특징인데 이 교회의 설교단도 높았다. 해방파는 목사들이 교회를 서로 돌아가며 설교를 한다. 이날에는 판 하울링은(van Houwelingen/캄펀 신약학 교수)목사가 설교를 했다. 설교 후 유아세례가 있었다. 유아세례가 시작되자 어린이들이 설교단 앞으로 뛰어나왔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사뭇 놀라웠다. 아이들은 목사 앞에 앉았다. 목사는 아이들에게 유아세례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그의 말은 친근했고 아이들은 그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오후에는 신트얀스쿨 로스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목사님의 가정에 초대를 받았다. 네덜란드 목회자의 가정의 문화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 유도키아 교회
둘째 주 화요일에는 도르트레흐트(Dordrecht)를 방문했다. 교회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라 기대가 컸다. 첫 방문지로 더 홉(de Hoop)이라는 기독교사회복지센터를 갔다. 마약이나 술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재활을 돕는 기관이었다. 그런 기관치고는 모든 것이 자유로워 보였다. 그 어떤 철창도 보이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그 곳에서 재활로 새 삶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과거를 의심하게 할 만큼 밝고 매너가 좋았다. 이후 우리는 도르트레흐트에 있는 큰 교회(Grote Kerk)를 방문했다. 건물 내부에는 두 개의 커다란 오르간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유명한 헨델(Hendel)이 직접 연주했다고 한다. 발 밑에는 거대한 비석들 같은 것들이 누워있었다. 바닥장식 같았으나 실제로 교인들이 교회 밑에 묻힌 증거라 했다. 진짜 비석인 샘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각 방은 각 계층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특히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었던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과거 교회에서도 빈부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에는 아펠도른을 방문했다. 아쉽게 아펠도른 신학교를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네덜란드 왕가의 별장인 로 궁전(Paleis het Loo)을 방문할 수 있었다. 거기서 현 고려신학대학원 원장인 변종길 교수의 지도교수인 판 브루헌(van Bruggen)교수를 만났다. 그는 친히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들리는 말에는 그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 성격이지만 우리를 위해 선뜻 가이드를 해준 것이라 했다. 고마웠다. 궁전은 사치스럽다고 할 만큼 화려했다.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밤에는 신학생들이 우리를 위해 소스모임을 하루 앞당겨 열어주었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선물을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고 우리는 언어가 다르지만 한 형제라는 느낌을 받았다.
2주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매일 다른 경험을 하다 보니 금새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저 이상적으로만 그리던 캄펀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과 캄펀과 우리 고려신학대학원 학생들이 함께 형제애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 행복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요스(Jos)와 캄펀 방문을 평가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고신과 네덜란드 해방파의 교류가 신학생들만의 교류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록 학교 간의 교류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교회들 간의 교류로 확장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귀로만 듣던 그들의 삶과 신학교 그리고 예배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들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자매 교단이라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교류가 없다면 자매교단이라는 사실이 문서에만 남을지도 모른다. 오는 미래에는 교회들 간에 같은 고백과 신학 안에서 더 깊은 형제애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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