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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과제 III


캄펜신학교 프랑크 판 더르 폴 (Frank van der Pol) 교수 (교회사) 은퇴강연


집으로 가는 메뚜기: 초기 근대의 노인학 개념 중 시의적절한 사례 하나[1]


저자 : 프랑크 판 더르 폴 (Frank van der Pol) 교수

번역: 구본승[2]


 


1. 탐구영역[probleemveld]에서 보내오는 신호들


이제 은퇴할 나이에 이르렀기에 나는 오늘 이렇게 캄펀신학교 고별강연을 하게 되었다. 2년이 되지 않은 시간에 네 명이 넘는 동료들이 하게 된 고별강연 중 이제 내가 마지막이다. 매우 짧은 시간에 우리 학교에서 이렇게 많은 동료들이 노년이라는 미답(未踏)의 영역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초기 근대의 노인학 개념 중 한 사례를 논해볼 만한 좋은 기회가 된다. 이 강연의 목적은 그저 지나간 시대의 노년학 중 하나를 상술(詳述)하는 데 있지 않다. 이 강연에서 나는 우리 학교의 교회사 분과에 시의적절한 사례를,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와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적확(的確)하게 제시하는 데에 긍정적 기여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현금(現今) 교회 안 상황을 볼 때, 노년과[3] 늙음에 대해 다룰 만한 탐구영역이 존재한다는 단서들이 확인된다.


De Reformatie지가 2010년 여름 특별판에서 노인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사회에서는 노년에 대해 좀 더 전향적인 관점에서 정책(특별히 3의 연령[4] 관해)이 정해지는데, 현재의 교회 조직은 노인들을 배제하고 주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고는 흐로닝언 노회 안에서 Gereformeerde Hogeschool의 사회문제센터(Centrum voor Samenlevingsvraagstukken)를 통해 수행된 연구를 참고한 것이었다. 이 연구보고서에서 연구자들은 연장자들이 가진 능력이 교회생활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교회 내 연장자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그들은 일반적으로 상호간 사랑과 개방성에서 결핍을 경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교회 전체가 자신들의 존재를 좀 더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 보고서는 현재 교회 내 관심이 젊은 세대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어 위험하다고 지적하였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특별한 관심이 요청되는 지점으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Wegwijs(개혁교회 성경연구회 기관지)교회와 노인들이라는 글에서, 연령에 따른 차별이 교회 내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 글의 필자는 교회에서 노인들은 평가절하되며 다양한 활동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교회에 주어진 선물들(=노인들)이 이렇게 거의 쓰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노인들이 여전히 교회내 여러 모임들에 힘을 보태고 있는가? 젊은 세대에 신앙의 지식과 경험이 의식적으로 전달되고 있는가?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멘토가 되고 있는가?’ 이러한 지적은, 연장자들의 잠재력 중 사회 및 교회 건설에 유용하게 쓰여야할 부분이 분명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2. 영화(榮華)의 면류관[5]


이러한 탐구영역에 대하여 교회가 적확(的確)한 자아상을 교회사에서 형성하도록 고무하기 위해 나는 교회사에서 발굴한, ‘좋은 노년에 대해 논한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의 제목은 영화의 면류관, 그리고 백발과 좋은 노년의 화관[Cierlijke Kroon en Krans des grijsen en goeden Ouderdoms]”이다. 이 책은 네덜란드어로는 최초로 노년과 노년생활 분야에 대해 논한 초기 근대 문헌이다.[6]


이 강연에서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노년 / 나이듦에 대해 영화의 면류관에서는 어떤 관점이 전개되었으며, 이 관점은 도입부에서 서술한 탐구영역을 염두에 둘 때 어떠한 시의적절성이 있는가?


영화의 면류관 1707년 저자인 시몬 오미우스(Simon Oomius)가 사망한 직후 출판되었다. 이 유작은 오미우스의 미망인에 의해 캄펀시 행정위원들에게 헌정되었다. 캄펀은 오미우스가 1678 1 20일 저녁, 바로 여기 브루더교회(Broederkerk) 이 강대상에서 취임식을 가졌던 곳이다.[7] 그는 캄펀에서 약 28년을 목사로 섬겼다. 같은 지역에서 섬기던 오미우스의 동료 한 명이 영화의 면류관서문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오미우스가 젊은이들과 연장자들을 위해서 좋은 노년에 대해 쓴 종합서를 마지막 작품으로 교회에 남겼다고 쓰고 있다. “영화의 면류관에서 오미우스는 노년에 의미를 부여함이 무엇인지, , 기독교적인 노년이 얼마나 가치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책의 전체 내용은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귀결된다.


자전적(自傳的) 14장에서 오미우스는 자기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여기서 그는 77년 숙성된 통찰을 던지며 개인적인 연령사(年齡史)를 서술하고 있다. 이 서술은 일종의 실습모형으로 기능을 한다. 오미우스의 개인적인 경험은 그가 늙음에 긍정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데에 지침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기조(基調)는 오미우스가 나이듦에 따라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미우스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시기는 그에게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중병에 걸려 갑작스레 죽을 뻔한 위기가 있었다. 이때 이후 그의 시력이 약해져서 저녁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잘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미우스는 스스로 늙어감을 경험하는 것이 신체의 능력을 잃는 것에, 신체의 한계나 병에 걸리는 것에 우선적으로 달려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는 늙어감을 특별히, 영적인 과정으로 간주했지, 신체적 힘듦으로 규정되는 어떤 상태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을, 좋은 노년이 선물임을 알아 이것을 영화의 면류관과 화관으로 삼는 사람으로 보았다.


오미우스는 노인학이 학문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노년과 늙어가는 것에 대한 대응과 마음가짐을 주제로 삼아 그 뿌리에 이르기까지 논할 수 있었다.


그는 고전 고대(古典古代)의 비기독교 작가들과[8] 기독교 교부들이[9] 노년 / 늙어감에 대해 논한 것을 자세하게 서술한다. 고전 고대 작가들 중 특별히 키케로를 많이 인용한다. 계속해서 그는 다음의 내용을 덧붙인다 ― 비기독교인들의 철학적 지혜는 노인들의 지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만, 나이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삶을 거쳐 오며 확신하고 위로 받은 지혜, 이를 위해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더욱 많은 것을 말한다.


제목에 나오는 영화의 면류관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옷을 입은 격언이다. 이 표현은 잠언 16:31에 등장한다 ―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나아가서 오미우스는 매우 많은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으로 장을 완전히 할애하기도 한다. 이들은 성경에 등장하거나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미우스가 17세기에 인기있던 모범 전통[10] 대표자 하나임을 있다.


성경과 전통에서 가져온 많은 자료들은 논의 목표 설정을 뚜렷하게 강화해준다. 제시된 자료들은, 책의 부제처럼, ‘단정한 삶을 사는 데에 매우 강력하게 적용되어쓸모가 있다.[11]단정한 삶에 대한 오미우스의 태도를 규정한다. 그가 자신의  삶에서 단정함 추구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단정한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생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늙어 나이가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이루어낸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늙은 사람은 살되 참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 늙어도 오직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산다면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다.  영화의 면류관에서 인용한 다음의 내용을 보라.


그는 낭비에 떠내려가며 자신의 쾌락을 따랐기에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상태다. 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die natuerlyke menschen)은 그저 살기 위해, 마시기 위해, 잠자기 위해, 스스로의 육욕을 끊임없이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 같아 보인다. (…) 그러나 저러한 삶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오미우스에 따르면 노년의 삶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노년의 삶은 우리 모두가 우리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널리 알리고 또 영화롭게 하는 데에 알맞은 시기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입으로, 행위로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 이러한 경건은 영광스런 화관의 가장 좋은 장식이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위에서 언급한 부제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적용이다. 오미우스는 앞에 나온 내용들을 포괄하면서 다시 한 번 논하기를, 단정한 삶은 감사하는 삶, 경건의 열매가 열리는 삶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삶은 늙은 사람들이 여호와께 서원을 갚는 데에[12] 알맞다. 우리는 마음으로, 입으로 그리고 우리의 단정한 행위로이를 행한다.



3. 늙음은 과정을 밟아가는 특징이 있음


오미우스가 확신하기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수명을 측량해 놓으셨다. 동시에 오미우스는, 성경과 고전 고대 저술가들을 따라, 인생에 있어서 일반적인 단계들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사람의 노년은 낮은 단계, 좀 더 높은 단계 그리고 가장 높은 단계(혹은 처음, 중간, 마지막 노년)로 삼분된다. 그런 뒤, 두 단계로도 구분을 하는데, 젊은 노년과 힘든 노년으로, 혹은, 파릇파릇한(“활력 넘치는”, “활기찬”, “물기가 오르는”) 노년과 수고로운 노년으로 나눈다. 힘들긴 하지만 아직은 견딜 만한 노년은 60세에서 65세까지의 시기이다. 이때 이후 백발 노인은 가장 높은 단계로 진입한다. 오미우스가 시도한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심리학에서, 의학에서 연구자들이 여전히 이러한 구분을 염두에 두고 협력하고 있다. 노인학자들은 제 3의 연령, 4의 연령을 이야기하고 있다. 3의 연령은 노년이라도 여전히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연령대를 말하며, 4의 연령은 건강이 쉽게 침해를 받을 수 있고 의존적으로 되어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짧은 기간을 말한다.


늙음이 과정을 밟아가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오미우스는 적절한 비유를 통해 설명을 한다. 삶은 무덤을 향해 가는 여행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략 45세 이후부터 무덤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 시작된다.” 인생은 또한, 사계절로도 비유될 수 있다. 그러면 노년은 가을과 겨울에 해당한다. 오미우스에 따르면 겨울은 매우 일기가 좋지 않은 날들로 채워져 있다. 슬픔, 불편함, , 곤고함과 심지어는 노망한 날들로 가득차 있다. 이렇게 인생의 마지막 부분이 종종 가장 나쁜 부분이긴 해도 오미우스는 고전 고대 작가들, 예를 들면 루크레티우스, 플라우투스, 비온 같은 작가들과는 생각이 다르다. 이들은 노년을 병으로 보았다. 혹은, 테렌티우스가 더 강하게 표현했듯이 노년은 병 그 자체다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늙어갈수록 더 쉽게, 더 많이, 더 자주 병에 걸린다는 것은 사실이다. 노인의 신체는 부서진 배 사방에서 물이 차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약하고 무력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의사들은 더 이상 물 새는 구멍들을 막을 수 없고 늙음은 이제 질병이 쌓여있는 것(“질병 덩어리, 질병 더미”)으로 경험된다. “영화의 면류관에서 오미우스는 늙음의 과정이 종종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 진행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마치 태양이 앞으로 거의 안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어느새 놀랍도록 빨리 지고 밤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시계가 작동할 때의 시계 바늘들과 같다. 시계 바늘들은 안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지속적으로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다. 아니면 바다 위에 떠있는 조각배가 그냥 둥둥 떠있는 것 같은데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육지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과 같다. 배를 타고 누워서 좀 자다 일어나 보면 어느새 해안과 항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과 같다. 이렇게 세월의 흐름은 줄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사람은 계속 자신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간다. “영화의 면류관에서 오미우스는 의식하면서 세월을 보내라고 요청한다. 오미우스는, 자신의 생애가 조금밖에 지나가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태양이 이미 완전히 마지막에 이르러 일몰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 어느 때에 고통스럽게 깨닫게 되리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늙음 때문에 자기에게 생긴 변화들에 대처하는 것이 힘들어졌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4. 늙어서 생기는 변화들


오미우스는 생물학적-의학적, 인지적, 감정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차원에서 생기는 많은 변화들에 논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생애사(生涯史)와 개인적인 연령사(年齡史)가 있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더 더 빨리 늙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늙음의 일반적인 지표들이 있다고 말한다. 오미우스는 가장 두드러진 지표인 백발(白髮)에 종교적 차원의 해설을 가한다 ―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동반된 백발은 머리에 쓴 영화의 면류관과 같다. 생물학적-의학적 변화에 대해서 오미우스는 시력 및 청력 감퇴 등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노인들에게 소리를 높여 말해야 하고 노인들이 교회나 연회장 혹은 노래 모임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거기서 아무 유익을 못 얻고 또, 배움과 노래, 놀이하는 즐거움에 이르지 못한다. 타악기, 관악기 및 여러 소리 나는 악기들과 높은 음들이 그들에게는 마치 낮은 소리로 들리거나 그저 먼 데서 나는 소리 같이 들린다.”


이러한 묘사는 오미우스가 음악과 노래를 즐기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미각과 후각의 감퇴 때문에 와인 맛이나 꽃 향기를 즐기는 기회가 예전보다 더 적여졌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오미우스는 신체적 퇴보가 곧바로 정신적인 능력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는 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학문을 연구하는 일이나 역사책을 읽는 일에는 여전히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언급한다. 오미우스에 따르면 정신적 기능을 자극하는 것은, 키케로가 지적하듯이, 매우 중요하다.


몸에만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성, 더 나아가서는 마음에 훨씬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램프처럼 기름을 넣지 않는다면 늙음 때문에 꺼져버리기 때문이다. 몸은 곤할 때까지 단련을 계속하면 더 무거워지지만, 마음은 계속 단련하면 더 가벼워진다.”


세네카를 인용하며 오미우스는 공부하는 일로 채울 수 있는 활동적인 노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가장 고령의 노인들에게는 정신적인 능력이 심각하게 감퇴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때때로 창조주께서 사람에게 선사하신 내적인 빛이 거의 어두워지기도 한다. 이성은 감소하고 판단력은 약해지며 기억력은 무디어지며 그의 모든 지식이 사라진다.” 오미우스는 여기서 잘 알려진 고대의 격언을 떠올린다. “노인들은 두 번째 아이다.” 노인들은 다시 한 번 아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미우스는 이와 같이 지능이 점차적으로 약화되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감지할 수 있다고 쓴다. 그가 비록 이렇게 정신력이 흐려지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한물간 정치학영혼에 대하여에 기대어 설명하긴 해도 인지적 변화에 대한 과정별 경과 묘사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일들이 점차적으로,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빛은 처음에는 태양빛으로 있다가 그 다음에는 달빛으로 머물다 얼마후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별빛도 마찬가지로 결국 마지막에는 어두워진다.”



5. 메뚜기


영화의 면류관에서 오미우스가 묘사하는 노인상(老人像)에는 노인이 가지고 있는 상당한 양의 기능적 장애가 포함되어 있다. 오미우스는 어떻게 사람이, 활기찬 상태에서 활기가 계속 감소하는 상태로 변해 가는지를 묘사한다. 그는 이를 메뚜기를 상징으로 삼아 수행한다.

메뚜기는 움직임이 많은 곤충이다. 메뚜기는 기기도 하고 날기도 하지만 앞으로 움직일 때 보면 뛰어오르기가 메뚜기를 가장 메뚜기답게 만드는 특징이다. 메뚜기의 뒷다리에는 용수철의 작동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넓적다리 근육과 무릎관절이 있다. 뒷다리가 수축했다가 다시 펴지면 메뚜기는 튀어오른다. 오미우스는, 전도서 12장에서 비롯한 이 메뚜기 비유에 대해서는 코케이우스의 전도서 주석(1636)을 참조하라고 한다. 인간은 일생 동안 메뚜기처럼 팔팔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늙음이 압도해오기 전까지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한다. 늙기 시작하면 이제 다양한 질병들이 그를 덮쳐 그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움직이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노인들이 경험하는 장애들은 노인들이 사회적 소통에 참여하는 것을 소원하도록 하며 불확실하도록 만든다. 심지어 좋아하는 지인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방문하는 시간을 줄이려고최대한 짧은 시간에 하는 여행조차 고령자들에게는 종종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미우스는, 자기들을 위협하는 수많은 위험들 때문에 노인들은 점점 더 오래 집에 머물게 되고 결국 자기 집에서 나오는 때가 갈수록 뜸해진다고 쓰고 있다. 한 때는 활기찼던 메뚜기의 움직임이 질질 끌려다니는 것 같아졌다. 오미우스는 전도서 12장에 나오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풀어쓰고 있다.


사람들은 강건했던 남자들이 꼬부랑 늙은이가 되는 것을 본다. (…) 그들의 정신은 늙음에 패배하고 지체(肢體)와 관절은 뻣뻣해진다. , 힘줄은 말라가고 오그라든다. 이렇게 앞에서 언급한 지체들, 그리고 목에서부터 등, 허리까지 이어지는 척추 역시도 불가피하게 고부라지고 휜다. 이렇게 늙은이들은 땅바닥을 쳐다보고 다니는 사람[13] 되는데, 이는 그들이 머리를 아래로, 다니는 길 쪽으로 향하게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오미우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 왕년에는 팔다리의 날램이 메뚜기 같았던 사람이 늙어감에 따라 몸은 비쩍 마르고 구부러지고 피부는 쭈글쭈글해진 와중에 앙상한 뼈들만 삐죽 튀어나와 있다, 메뚜기의 정강이가 툭 튀어나와 있듯이.


끌려다니듯이 다니던 메뚜기의 움직임은 결국 멈춰질 때가 오고 사람의 도모 역시 그친다. 사람은 자기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삶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전도서는 이를 매우 상징적인 언어(오미우스는 이를 표상[sinnebeelden]’이라 부른다)로 기술하고 있다. 램프의 불은 꺼지고 우물에서는 더 이상 물이 솟아오르지 않고 항아리는 깨어진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영원한 자기 집을 향한 여정에 있다. 오미우스는 이 모든 것의 요체(要諦)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저 영원한 집으로 가는 여정이 바로 이 삶(dit leven=이생)이다.”



6. 인생의 행로를 숙고함


말씀 봉사자로서 오미우스는 성경이 이생의 제약(制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생은 임시로 사는 집일 뿐이다. 사람은 길을, 영원한 자기 집으로 향한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성경이 삶을, 실패해서 무덤으로 가는 것으로 본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삶(생명)은 하나님 안에 영원히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젊든지 늙었든지 이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노인심리학자들은 죽음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자기 인생 행로를 숙고해 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 보라고 말한다. 이미 오미우스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일에 대한 큰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숙고해 보는 것이다. 오미우스는 이에 더해서 말하기를 성경은 사람의 생애에 마지막이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죄로 돌린다고 한다.


바로 죄가 우리의 삶을 한 날도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 아니, 한 점보다도 더 짧다. ‘우리가 사는 것은 일각이요, 이제 일각도 되지 않는다.’ (…) 죄로 인해 인생은 다름 아닌 죽음, 죽음 그 자체를 향해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 되었다. ‘우리 인생은 말하자면 죽음이다.’”


인생을 회고함에 있어서 문제는 기독교적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지나온 인생의 행로를 회상하여 이를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연결 짓는 게 관건이다. 신학을 하나님을 위하여 / 하나님에게로 살기라 묘사한 개혁파 경건주의자 에임스를 인용하며 오미우스는 자기 탐색과 죄 인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자기 인생과, 거기서 저질러진 죄들을 반복해서 숙고하고 반추하는 일이다. 오미우스에 따르면 이러한 숙고는 긍정적인 목적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죄를 탄식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은혜에 호소하지 않는다면 이는 아무 의미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충만하고 참된 삶은 긍휼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덕분에 지나간 삶은 다시금 새롭게 해석될 수 있고 좋은 노년은 자기 삶 전체를 받아들이는 데서 꼴을 갖추게 된다.

오미우스에게 인생 회고[life review]’[14] 하나님 안에서 지속되는 기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오미우스의 이러한 집중은 그가 늙음에 대한 개념을 다룰 때 종교적 면이 중심 요소가 되게 한다. 오미우스가 늙음에 대해 서술한 각각의 관점은 모두 바로 이 중심 요소에 내재해 있다. 오미우스는, 늙어서 겪는 불편함을 모두 고려한다 하더라도, 좋은 노년이 확실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미우스는 쓰기를, 가끔 어떤 부류의 노인들을 보면 기분이 유쾌해진다고 한다. 그들은 잠이 금방 오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도 금방 힘들어 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활달하고 즐겁우며 기분이 좋다. 이런 상태가 되기 위해 단 하나 전제되는 조건은 바로 건강한 영혼이다. 오미우스는 저러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이라 묘사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러한 움직임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인간 존재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내면의 평안을 특징으로 삼는다.


오미우스가 보기에, 푸치우스는 늙음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경험한 본보기가 된다. 오미우스의, 무척 나이 많은 이 스승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매우 우울하게 지낼 거라 여기던 사람들이 우리가 오히려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걸 안다면 아마 무척이나 놀라게 되겠지.” 오미우스는 이러한 평안의 비밀이 선한 양심에 있다고 말한다. 신앙인은 위로자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기에 탄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인들은, 비록 신체적으로는 생활에 매우 많은 변화가 있고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 영역을 포기해야 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 감춰져서 평안 중에 산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끝내고 평안 중에 돌아가는 것을 일러 오미우스는 “eu-thanasia”, 잘 죽는 것이라 한다. 계속해서 제약이 생기는 생활의 질고를 기독교적 소망과 인내를 좇아 격려하기 위해 오미우스는 주님 안에서 죽은 많은 신앙인들을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잘 죽기 본보기들은 평온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7. 삶의 지혜


고전 고대의 죽음의 기술이 곧 삶의 기술이라는 숙어를 오미우스는 다음과 같이 다듬었다 ― 죽음의 기술은 기독교적 삶의 기술이며, 이 삶의 기술은 삶의 지혜를 낳는다. 그는 계속해서 세네카를 읽은 내용으로 이렇게 말한다― 삶의 지혜가 있는 노인들의 정신은 꽃이 피고 즐거워서 뛰어오르기까지 한다. 그들의 정신은 자신을 늙었다고 느끼지 않으며 이미 큰 부담이 덜어져서 기뻐한다. 오미우스는 세네카의 이러한 말이 늙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고상하고 더 거룩한 방식으로그렇게 된다고 한다. 고전 고대의 노년에 대한 지혜가 이제 특별히 기독교적으로 보충된다. 여기에 가장 요체가 되는 것으로서 경건함이 동반된다.


이러한 삶의 지혜는 전수될 수 있다. 오미우스가 묘사하는 노인들은 어떤 특출난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가치를 자연스레 전달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늙음은 그저 수많이 나이를 먹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적으로 삶을 경험하는 것과 의롭게 삶을 사는 것에 결부된 문제다. 이러한 확신을 계속 살아내기 위해서 노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아직까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없다. 자기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자기 삶으로 뒤집어서는 안 된다. 오미우스는 이런 어리석은 노인들을 나무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노인들이 삶의 황혼기를 뜻깊게 보내지 못하고 자기들 영화의 면류관에 오점만 남긴다. 노인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달할 뿐더러 그 진리를 살아낼 때라야 그들의 백발이 면류관이 될 수 있다.


오미우스가 선택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배울 만하다. 노인들이 가치를 전수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그들이 참으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그는 세대 간 서로가 개방적으로 되라고 격려하고 또 이를 위해 필요한 곳에서는 나무라기도 한다. , 세대 상호간 관심이 존재하는 곳에는 서로를 묶는 기독교적 공동체가 서게 된다고 논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동거한다. 오미우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공동체는, 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높이 치고, 주변 환경에 대한 의무 가운데 노인들에게 필요한 배려를 제공하는 것이 포함되어있는 공동체다.



8. 오늘날과의 연계성


이미 삼 세기 전에 시몬 오미우스는 좋은 노년에 대해 논한 책인 영화의 면류관을 썼다. 그의 목표는 노년을 기쁨 중에 감당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삶의 여정을 감사하며 숙고하는 것이다. 오미우스가 첫 번째, 젊은, 활기찬노년이라 구분했던 시기는 우리 시대에는 완결되고 새로운 인생의 단계가 되었다. 이를 3의 연령이라고 부른다. 건강에 대한 복지가 잘 갖추어져 있는 덕분에 힘이 넘치고 역동적인 세월을 길게 생산적으로 보내는 젊은 연장자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수의 광고가 이러한 연장자들의 모습을 긍정한다.

네덜란드는 노령화되고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늙음을 거부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육체적 결손과 죽음을 의식하고 지내는 것은 이 문화에 맞지 않다. 연장자들은 여행을 다니고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전 세계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에 진입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또 노인학적으로 그들에게 다양한 새로운 발전들이 일어났으며 노인들이 속한 사회적 관계 및 구조는 급격하게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노인학 문헌의 경향은, 노령화 문제에 여전히 신체적, 사회적, 심리학적 측면에서 관심이 요구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헌들이 오미우스의 책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노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분야에서 영성과 종교는 훨씬 더 적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오미우스가 좋은 노년을 통해 목표하는 것은 경건한 삶이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함께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 사이의 관계 맺음을 통해 가시화된다. 오미우스는 논의를, 노령화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 및 의무 쪽으로 강하게 몰아간다. 이것은 제 3의 연령 개념에 대한 보충을 위한 방향성을 설정해 준다 ― 제 3의 연령이라는 기간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기에 도착한 일종의 낙원이 아니다. 무사태평한 자유에 자신을 맡기고, 신경 쓸 일 없이 잘 먹고 좋은 데 놀러다니는 생활에 자신을 던지는 그런 곳이 아니다. 3의 연령은 삶의 지혜, 믿음의 지혜가 전달되는 기간이다. ‘젊은연장자들은 계속 여전히 수 년을 활발하게 활동하며 지낼 수 있기에 그들은 나름대로 자원봉사 등의 기여를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기여는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행해져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De Reformatie 특별호가 배경으로 하는 연구그룹들에서는 연장자들의 능력이 교회를 위해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논하기를, 많은 연장자들이 수년에 걸친 삶의 경험들을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함으로 돌아보고, 동시에, 이생과 미래의 삶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사할 모든 것을 내다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연장자들의 능력이며, 기독교적 삶의 지혜를 통해 수여되는 선물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회고할 때 얻을 수 있고 현실을 사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의식을 호흡하며 생활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시몬 오미우스는 고령이 되어서도 교회와 사회와 관계를 맺고 지냈으며 강대상과 공부방에서 바쁜 시간을 보냈기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장자의 본보기로서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존경받을 만한 노년의 삶은 삶을 지탱시키시는 하나님과 함께함이 기초가 되는 삶이다. 이것을 아는 노인들은 무언가 말해 줄 내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인생 이야기는 더 위대한 이야기에 엮여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안으로 받아들여져 있다. “영화의 면류관에서 오미우스는 이러한 노인들을 높이 평가하고, 그러하기에 그들은 자기들 주변에 큰 의미를 가지는 존재들이라 주장한다.


오미우스의 노인학적 관점이 시의적절하다는 것은 더 논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노년의 부모들과 노인들에게 돌봄이 필요하다는 오미우스의 관점은 사회적으로 봤을 때 여전히 의미를 잃지 않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노인 돌봄은 오미우스가 살던 사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했고 제도화된 노인 돌봄에 대해서 대단히 복잡한 논의들이 왔다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미우스가 제시하는 개념들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서로를 돌아보는 방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도록 한다. 오미우스가 노인 돌보는 일을 가족 등의 사람들에게 할당하자는 주장은 노인 돌봄이 직업적 돌봄에서 사적인 영역, 예를 들면, 자녀, 이웃, 혹은 다른 자원봉사자들 쪽으로 전환되고 있는 경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돌봄이 필요한 주변의 노인들에게 책임감을 느끼자는 오미우스의 이 호소는,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주변에서 돌봄의 책임을 인식하고 또 이를 즉시 받아들이도록 사회적 실천을 요청한다. 기초 및 지방자치단체들은 균형 예산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복지단체나 방문도움이 등에 할당된 예산을 상당한 정도로 축소하는 것으로 돌봄이 필요한 거주민들에 대한 책임에 응답하려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족은 자기 부모를 할 수 있는 한 봉양하려 하지만 대개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이웃과의 접촉은 어떤 상황에서는 드물 때도 있다. 이런 때에 예를 들면, 기독교적, 교회적 섬김의 돌봄은 어떤 의미를 지니겠으며 섬김의 교회가 되는 것은 또 어떤 의미를 지니겠는가?


여기에 더 많은 도전들이 교회를 향해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노인들의 긍정적인 역할과 개입에 대해 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그들의 지혜와 인생 경험에서 열매를 얻기를 기대한다면 중요한 전제가 요구된다 ― 세대 간 긍정적인 상호 소통이 존재하고 상호 존중, 사랑, 이해의 분위기가 충만할 것. 이런 작업들에 오미우스는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른 세대들의 신앙 체험과 경험에 개방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세대 간 간극이 메워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사안들이 당회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정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양한 위원회의 활동과  모임을 통해 이런 사안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세대와 함께하는 교회기 때문이다.[15] 시몬 오미우스에 따르면 우리는 수평적으로 서로에게 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대 간 간극을 넘어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을 전수하는 것은 공동체적인 작업이다. 이 일을 위해 연장자들은 젊은이들과 전향적으로 접촉하려 해야 하며, 반대로 젊은이들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 교회에서 세대 간 접촉을 신앙 전수[traditio, geloofsoverdracht]의 요체로 보지 않고 젊은 세대 대() 나이든 세대의 대립 가운데서 생긴 문제들 중 하나로 보게 되면, 교회되기[gemeente-zijn]의 요체가 무엇인지가 이제 논의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간세대적(間世代的, intergeneratief) 교회되기 모델은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간 접촉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사안으로 삼는다. 이러한 모델에서 노인들은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고 자기가 받은 것을 주고 다음 세대에게 말과 행위로써 신앙과 기독교적 가치들을 전달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미우스가 관심을 요청하는 것의 요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가 삶의 지혜와 신앙의 지혜를 서로 소통하는 것. 이러한 소통은 하나님께서 일생동안의 여정 가운데 활동적이고 격동의 시기에도, 또한, 계속 활기를 잃어가는 그 시기에도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경험에서 출발한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제 4의 연령에 진입하여 메뚜기의 움직임이 적어지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지속적으로 포기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소통할 수 있다. 여기서, 깨어짐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력 구원(自力救援)이나 자율(自律) 그리고 자기방어로 성립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노인들은 인생의 제약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표징들이다. 상하기 쉽고 항상 도움이 필요한 상황 가운데서 그들이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에 그치지 않는다. 서서히 부서지는 와중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 떠나보내는 와중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죽음을 의식하는 와중에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며 집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노년의 생활을 가능한한 자율적인 것으로 채우려 하는 동시에 죽음을 결정적인 종말로 간주하는 문화의 무게를 상쇄하는 작용을 한다. 영원한 희락의 근원을 아는 자는, 심지어 말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는 대단한 영감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막다른 길)[16]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을 향하여 이어진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집, 새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영광이 어린양에게로만 향한다. 어린양을 보는 자는 모든 것, , 본 모습대로의 그리스도,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본 자다. 77세의 오미우스는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갈망한다. “다음이 내가 온 관심을 가지고 노래하려 용을 쓰는 노래다 ― , 주여, 그날이 오면, 그때에도 제가 주 곁에 여전히 있게 하소서! 주의 얼굴이 찬양받는 것을 보게 하소서!’”






[1] 번역문에서는 강연 원고 팜플랫에 등장하는 각주는 편의상, 그리고 분량상 생략한다. 강연자가 육성으로 직접 말한 내용을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모든 각주는 역자주이다. 따옴표는 책의 제목, 강연문 안의 직접 인용(주로 시몬 오미우스) 표시한다.

[2] 구본승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네덜란드 캄펜신학교(해방파)에서 프랑크 더르 교수의 지도 아래 어거스틴의 신학이 오미우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 주제로 박사논문을 작성 중이다. 또한 암스테르담에 한인 교회 (암스테르담 장로교회) 개척하여 목회 중이다.

[3] 노년은 네덜란드어 ouderdom 번역한 것이다. 글에서 ouderdom 번역은 쉽지 않다. 일단, 단어는 형용사 ouder( 늙은) 접미사 dom 붙어 조어(造語) 명사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늙어가는 정도로 번역할 있는 말이다. 그래서 사전적 용례로는  영어의 age 상응한다. Age 역시 노령 / 노년이라는 뜻이 있으나, ouderdom 영어의 age에서와는 달리 늙음’(ouder-)이라는 뜻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글에서는 많은 경우 노년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다. 그러나 늙음’,  나이듦혹은 연령으로 번역해야 뜻이 자연스러운 경우는 그렇게 번역을 했다.

[4] 3 연령이란 강연에서 강연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시기적으로는 중년 이후 본격적인 노년으로 진입하기 전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할 있는 시기를 말한다. 기간은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나라는 55 전후쯤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일반적이다.

[5] 네덜란드 의회역 성경[Statenvertaling] 잠언 16:31(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등장하는 표현이다(아래 본문에서도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곳 말고도 표현 자체는 잠언 4:9, 이사야 28:5, 62:3, 에스 23:42 등장한다.

[6] 이하 줄의 본문과 각주는 문헌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특별히, 철학과 의학사(醫學史) 분야의 전문가인 쾰른의 Daniël Schäfer 교수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연구주제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7] Van der Pol 교수의 강연이 같은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8] 각주에 따르면, 특별히 키케로와 세네카를 많이 인용한다. 그밖에 아리스토텔레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플리누스, 플루타르코스, 에픽테투스, 에피쿠로스, 플라톤, 소포클레스, 플라우투스, 솔론, 아레투스, 비온, 이소크라테스, 세베루스, 테렌티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을 인용한다.

[9] 각주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크리소스토모스, 에우세비우스, 키프리아누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바실리우스, 키릴루스, 디디무스, 프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등을 인용한다.

[10] 모범 전통[exempeltraditie] 초기 근대에 만연했던, 성인과 위인들을 모범으로 제시하여 서술하고 상징화하던 전통을 의미한다. 특별히 천주교에서는 트리덴틴공의회 이후 성인 숭배 전통이 활발했다. 그러나 개신교, 개혁교회 안에서도 모범[exempel / voorbeeld]’ 찾아 서술하고 상징화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개신교쪽은 천주교의 성인 숭배와는 구별되게 순수하게 모범으로서의 역할만 부여했다. 그래서 전형적인 성인전(聖人傳) 거의 없고 주로 성경의 인물들, 그리고 개혁자들, 개혁교회에서 인정하는 교부들이 모범의 대상이 되었다. 오미우스도 자기 저술에서 모범이 되는 인물들의 사상과 행적을 논거(論據)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

[11]단정한이라 번역한 ‘deftig’ 의회역성경을 보면 군데 등장하지만, 오미우스는 2:7 염두에 것이 아닌가 추측할 있다.  구절에서 선한 일에 본을 보이는 것이 단정함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역성경에서 단정한으로 번역을 했기에 여기서도 번역을 택하긴 했지만, 성경 원어도, 네덜란드어도 존엄한’, ‘존귀한’, ‘기품 있는등의 뜻에 가까운 말이다.

[12] 시편 66:13~14 보라.

[13] 본문에는 네덜란드어 steenkijker 라틴어 silicernia 등장한다. ‘(바닥의) 돌을 쳐다보고 다니는 사람이라 직역할 있다.

[14]인생 회고 임사 체험의 하나로서 죽기 직전에 자기가 걸어온 인생이 매우 빠른 속도로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강연자는 말을 전형적인 임사 체험의 맥락에서 쓴다기 보다는,  죽음에 가까워져서 지나간 인생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노년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이렇게 지나간 인생을 돌아볼 , 죽는 말고는 소망이 없는 상태라면 서글퍼지고 낙담이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회고하고 죽음을 기다리며 오히려 영생의 소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긴다.

[15] 이하 줄의 내용은 네덜란드개혁교회(해방측) 내에서 사안들을 논하기 위해 열린 여러 모임들을 소개하고 있으므로 생략한다.

[16] Doodlopend 번역한 것이다. 단어는 막다른이라는 뜻이 있다. 하지만, 문자적으로는 죽음을 향하여 걷는이라고도 있다. 강연자는 말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말놀이를 하고 있다. , ‘죽음으로 끝나는 영원한 집까지 끝이 나지 않고 이어지는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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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해외칼럼] 선명하게 빛나는 신비

    선명하게 빛나는 신비 저자: 타드 빌링스 (J. Todd Billings, 웨스턴 신학대학원 교수) 번역: 박재은 목사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시편 102편의 기도는 곧 나의 기도였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
    Date2015.12.11 By개혁정론 Views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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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해외칼럼] 살아있는 교회: 조직과 공동체 사이에서

    살아있는 교회: 조직과 공동체 사이에서 작성자: 마리너스 더 용[1] 번역: 이충만 지난 10월 9일, 네덜란드 캄펜신학교에서는 “살아있는 교회: 조직과 공동체 사이에서”라는 제목의 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 아펄도른신학교와 캄펜신학교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
    Date2015.11.26 By개혁정론 Views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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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해외칼럼] 교회 갱신을 위한 설교

    교회 갱신을 위한 설교 저자: 케이스 돈보스 (Keith Doornbos, 갱신 연구소 프로그램 디렉터) 번역: 박재은 목사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 과정 중) 21년 전 문제에 직면한 한 교회로부터 설교 요청을 받았다. 교회 내의 평신도 지도자 그룹과 더불어...
    Date2015.11.20 By개혁정론 Views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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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공적 금식과 공적 기도를 선포하자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